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남해 미조항에 가보라. 지금 남해 미조항에는 봄이 어부들의 고깃배를 타고 통통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수평선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섬과 섬 사이에도, 낚시꾼을 기다리며 밀려오는 파도에 세수를 하고 있는 갯바위에도 봄은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들러붙고 있다.
지난 겨우내 어부의 아낙네가 깁다 만 찢어진 그물...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인 허연 조개 껍데기... 방파제 곳곳에 오밀조밀 붙은 홍합과 굴... 허리춤에서 발목까지 다랑이논과 밭을 물고 야트막하게 엎드린 산에도 "회 한접시 하고 가이소"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배시시 웃는 횟집 아낙네의 비릿한 눈빛에도 어김없이 봄이 매달려 있다.
지금 남해 미조항에는 기다리는 봄만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니다. 연분홍빛 속내를 은근슬쩍 드러내는 싱싱하고도 고소한 봄 멸치회도 나와 있다. 은빛 구슬을 지느러미에 촤르르 촤르르 떨구는 갈치도 윤슬을 굴리고 있다. 이에 뒤질새라 우럭과 돔, 볼락, 도다리들도 온몸에 은빛 햇살을 한껏 파닥이고 있다.
▲ 사랑하는 사람의 품속 같은 미조항에도 봄빛이 물씬 묻어난다
▲ '미조'(彌助)는 '미륵이 도왔다'는 뜻이다
은근슬쩍,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지던 지난 2월 5일(토) 오후, 좀 느지막한 시간에 바라본 남해 미조항. 양귀비 뺨치게 예쁜 미조항에는 짭쪼롬한 갯내음과 함께 잔칫집 같은 술렁거림이 있었다. 그 술렁거림 속에 구릿빛 어부들의 굵은 주름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문 갈매기가 봄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봄아, 반가워. 어서 와!'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봄은 내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그러다가 봄은 그만 발을 헛디뎌 부둣가 바닷물에 퐁당 빠져 버렸다. '저런 저런!' 혀를 찰 새도 없이 봄은 잽싸게 은빛 비늘을 파닥거리며 저만치 떠내려가는 섬을 향해 마구 내빼기 시작했다.
허연 이를 드러낸 어부들의 환한 웃음소리. 봄은 촘촘한 그물을 희롱하며 마구 내뺐지만 날랜 어부들의 재빠른 손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구슬 같은 물방울을 투두둑 떨구며 푸르른 바닷물 위로 올라오는 봄. 그래. 세 계절을 기다린 끝에 겨우 찾아온 고향을 내버려 두고 내빼기는 어디로 내뺀단 말인가.
▲ 봄은 고깃배를 타고 출렁인다
▲ 출어를 마친 고깃배들이 내일 새벽 출항을 위해 몸을 뒤채고 있다
봄빛에 젖어드는 남해. 우리 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 남해는 '한 점 신선의 섬'이란 뜻으로 '일점선도'(一点仙島)라고도 불리우는 참으로 아름답고도 신비스런 섬이다. 그날 내가 찾은 남해 동남쪽 끝에 있는 미조항은 야트막한 산들에 둘러싸여 마치 어머니의 포근한 품 속처럼 아늑한 느낌이 드는, 세월아 가라 하고 오래 머물고 싶은 그런 항구였다.
'미륵이 도왔다'하여 '미조(彌助)'라고 불리는 남해 미조항은 남해의 어업전진기지 역할도 하고 있다. 게다가 미조항 앞바다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조도(鳥島), 호도(虎島)를 비롯, 바둑알처럼 박힌 16개의 섬들이 수평선에 보석처럼 촘촘촘 박혀 '남해안의 베니스'라고 불리울 정도로 멋드러진 항구다.
하지만 이렇게 고운 항구에도 가슴 저리도록 아픈 역사가 새록새록 숨쉬고 있다. 안내 자료에 따르면 미조항은 "예전에는 군항(軍港)으로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는데, 마을회관 앞바다에 있는 돌무더기는 임진왜란 때 쌓은 방파제로서 우리 나라 수군(水軍)이 왜구와 싸울 때 방호물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 이게 무슨 고기줄 아능교?
▲ 고깃배의 귀에 꽂은 긴 대나무는 아마도 풍어와 안녕을 비는 어부들의 염원 같은 것일 게다
하긴, 한반도 어딘들 아픈 역사의 상채기가 숨겨져 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던가. 특히 남해안에는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얼마나 잦았던가. 오죽했으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수차례에 걸쳐 정벌까지 했겠는가. 차라리 그때 대마도를 아예 우리의 땅으로 삼아 다스렸더라면 지금쯤 일본인들은 무슨 주장을 할까.
미조항은 남항(南港)과 북항(北港)으로 나뉘어져 있다. 남항과 북항 주변에는 마악 바닷가에서 돌아온 고깃배들과 마악 바다로 떠나는 고깃배들이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들락거린다. 항구를 따라 횟집도 줄지어 서 있다. 이곳 횟집에서 파는 싱싱한 갈치회와 멸치회는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감칠맛이 우리 나라 으뜸이어서 쉬이 지나치기 어렵다.
남항에는 북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댄다. 활어 위판장과 건어물 위판장이 있는데다, 방파제까지 길게 드러누워 있어 짜릿한 손맛을 즐기려는 전국의 이름 난 낚시꾼들이 자주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낚이는 고기는 참돔과 혹돔, 돌돔, 노래미, 우럭, 볼락, 도다리 등 고기 종류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 방파제 끝자락에 우뚝 선 하얀 등대가 봄을 부르는 것만 같다
▲ 미조항 앞바다에는 섬들이 바다의 보석처럼 박혀 있다
미조항 들머리 야트막한 언덕에는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빼곡하게 심어 놓은 짙푸른 방풍림이 눈에 띈다. 이 방풍림이 천연기념물 제29호 '미조리 상록수림'이다. 서로 뿌리와 어깨를 맞댄 채 항구 쪽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이 상록수림에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등 15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비릿한 갯내음과 어부들의 짭쪼롬한 땀내음이 물씬 풍기는 잔잔한 미조항 앞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선 조도와 호도, 노도... 금세 파도에 씻겨갈 것처럼 자맥질을 계속하고 있는 자잘한 바위섬... 마지막 남은 겨울빛을 한껏 쥐어짜며 봄을 뿌리고 있는 등대... 오늘도 만선을 꿈꾸며 긴 대나무를 귀에 꽂은 채 수평선을 힘차게 흔들고 있는 고깃배...
그래. 행여 이번 주말 남해 미조항에 가거들랑 혼자서는 가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소주 벗할 동무와 함께 가자. 혹여 동무조차도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그냥 혼자서 가도 좋다. 전형적인 어촌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미조항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운 동무가 없어도 좋다. 갓 잡아올린 싱싱한 봄갈치회와 봄멸치회가 그대 곁을 지키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