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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LS, 1969)에서 벩송의 지위.
- 플라톤주의의 전복 2.
*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
선분의 비유가 지식(에피스테메, 인식)과 지식이 아닌 것(독사, 견해)의 구분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지식이 되는 것은 도형들을 잘 다루면서 도형의 원형(이데아)을 알 수 있다하며, 마치 그림자들을 잘 조합하면 사물의 형태를 알 수 있다고 하듯이 말이다. 다른 한편 결과적으로 이데아를 알면 사물들에서 도형들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고, 게다가 실물들도 현실에서 그럴듯하게 그리거나 형체(형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재료들(사물들)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 또 게다가 재료의 내재적 성질들인 질료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아는 것은 폴리테이아편이 아니라 티마이오스편이다. 그래서 폴리테이아편과 티마이오스편을 함께 엮어서 읽어보면, 이데아들의 완결체들과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의 무작위성, 이 두 가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 무작위성에서 그래도 다룰 수 있는 약간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인간(데미우르고스)이라는 것이다. 결국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우화를 하나로 엮어 보건데, 인간의 인식과 대상들 사이의 어떤 연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인간은 매개적으로 완전한 대상(이데아)도 알고 있으며, 잘 모르는 무매개적인 아페이론(질료,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도 다루려고 노력하는 어떤 자이다.
이 어떤 자는 현재에 있는 현존자이며, 이것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은 과거 소크라테스이지만, 소크라테스가 현존자에서 내재적으로 있을 법한 영혼을 물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자인 플라톤은 현존자가 상식(오관)을 갖고 있고, 일정한 교육을 통해서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일반화하는 역량을 알고, 이를 넘어서 추상화를 거치는 역량도 있다고 여기고, 그 영혼이 항상 유지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인정하였다.
문제는 인간이 어떤 인식 역량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리고 잘 형성할 수 없는 질료 같은 재료들이 있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에서 사람들은 이 재료(자료)들을 가지고 완전한 형상들(이데아들)을 완성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당연히 물건을 만들 듯이 형상들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만들어진 물건들은 수학적 도형들의 원형과 같은 이데아(형상)가 아니라는 것은, 플라톤 자신이 선분의 비유에서 이미 말했다. 그 형상(이데아)들이 현실적 물체들에게는 있지 않다면, 어디에 어떻게 있는 것일까? 물론 플라톤은 이데아는 직관을 통해서 인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도 있지 않는 그것을 원본으로 삼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그게 있기는 있어야지, 원본이든 상징이든, 대상을 삼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있다는 것을 오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의 대상임을 암시하였는데, 그게 있기는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분의 유비(une analogie), 다음으로 동굴의 우화(une allégorie, 알레고리)를 이야기했다.
유비는 서로 마주하거나 같은 평면에 놓아서 비교해 보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레고리는 서로 마주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사건의 일어남과 다른 사건의 일어남은 시간과 장소(공간)가 다르더라도 상상과 공상을 보태면, 비슷하게 느껴지는 또는 그럴듯한 이야기(해석, 헤르메노이틱)로 수긍이 갈 수 있고, 마치 이해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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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우화는 선분의 비유와 다르다(차히). 그 우화를 잘 들어보면, 이 또한 상식에 머문 우화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동굴의 우화에서 플라톤은 이렇게 설명한다. 동굴 안에는 죄수처럼 묶여 있는 이들이 있고, 이들은 앞의 벽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 바깥에는 태양과 같은 밝은 세상이 있고, 거기에서 진실한 사물들(이데아)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물들이 죄수들의 뒤편의 높은 길을 따라 지나가면, 동굴 속에는 비치는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이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보고, 죄수들은 사물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죄수가 보는 것은 그림자(허상)이고, 동굴 밖에는 진실한 사물들(이데아들)이 있다고 한다.
- 내가 겪은 이야기인데, 동굴의 우화의 장면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이 최소 세 종류나 된다. 프랑스 대학식당에서 이 장면을 복사해서 프랑스인들에게 읽히고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는데,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철학에 깊은 관심이 없어서 인지, 서로 같은 그림을 그린 는 이는 없었다. 철학과 학생들 이미 배운 것이 있어서 배운 대로 그린다(교육이 상식이 될 때 습관이 되고, 고정된 습관이 지식이라 여기면, 그 습관을 깨기란 매우 어렵다, 동굴의 우화를 깨는 일은 2천300여년이나 걸렸을 모른다) -
문헌학자들은 언제나 원문을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문헌학자들도 원문을 보고서라도 서로가 같은 방식으로 예시의 그림을 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그들도 그 문장을 잘못 읽어서 잘못 그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서술이 사실이라기보다 알레고리 즉 우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학자들은 죄수가 동굴 의 벽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서 사물이라고 한다는 것은 공통의 견해이다.
나는 바깥의 빛에 의해 어떻게 비추어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빛이 일방향이고 직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일상에서 그냥 촛불을 켜고 손으로 방안의 벽면에 그림자를 만드는 놀이를 생각해 보라, 손의 모양을 변형함에 따라 벽에는 여우도, 개도, 염소도 만들 수 있는데, 이 그림자를 보고 사물의 원형을 상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원형은 두 손의 마주침이라고? 그림자로부터 누가 말하겠는가?
그래도 플라톤에 충실하기 위해 그림자를 보고 사물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상식(오관)으로 생각하자. 그보다 탈레스가 피라밑의 그림자를 보고 그 높이를 계산했다는 (이것도 오관을 통해서인데) 실화를 생각하자.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는 그래도 우화(상상, 공상)일 것 같다.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구체적으로 마케도니아 광산의 노예 생활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도 플라톤은 동굴 속에 작업하는 노예를 직접 보러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공상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플라톤이 말하지 않았지만, 벽에 그려진 그림자를 통해 아는 것은 인간의 오관(상식)을 통해서 아는 것인데, 이보다 더 고급으로 아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주는 것이리라. 상식(오관)의 통합으로 아는 것은 기껏해야 여기 지금 현존하는 사물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여기 지금, 죄수에게 묶여있는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영혼을 개입시키는 것은 우화(알레고리)이기에 가능하다. 이야기는 이야기니까. 그 신체에 매이지 않은 영혼이 동굴밖에 나가면, 그림자의 원형인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공상할 수 있다. 플라톤이 이 우화를 이야기한 것은 앞의 선분의 비유에서 말하듯이, 이데아는 오관을 통하지 않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이데아를 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어쩌면, 플라톤을 왜곡하고 있는 해석(헤르메노이틱)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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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기능은 매우 크다. 여섯 나이 꼬마애는 다리밑에서 주워왔다고 믿고, 신자들은 걸어서 바다 위를 건너고, 문둥병을 낫게 하였고 하는 이야기도 믿는다(doxa이다) 그럼에도 설화 속에서 거북이 등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는 갸우뚱하다가, 가랑잎을 타고 강을 건너고 솔방울로 적들을 물리쳤다(doxa이다)고 하면 우화라고도 하지 않고 거짓말이라 한다. - 그러나 그 입말의 표명(표출)작용와 기호화작용은 지시작용과 달리 의미가 있다. 표명작용에는 말하는 이의 내재성의 표출이 있기에, 지시작용의 대상과 연관 없이 의미있다. 종교에서든, 설화에서든, 영웅담에서든 그 일을 수행했다는 의미이다. 지시작용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은 무의미(non-sens)라고 하지만, 신앙자의 의미만큼이나 동굴의 우화도 의미있다. -
묶여있는 즉 구속받는 인간이 뭣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한정된 것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에서 예닐곱 나이 꼬마애는 불장난을 하다가 꿈을 꾸면, 마당의 짚단 무더기나 헛간(뒷간)을 태우는 꿈을 꾸지만, 서른이 넘은 어른의 꿈은 고층 건물이 또는 산등성이가 불탄다. 둘 다 생리적으로 잠을 깨우는 방식인데, 기의로서 의미화작업은 전혀 다르다. - 요즘 애들은, 짚단도 헛간도 없는데서 자라난 애들은 어떨까 몰라. 방안의 장난감을 태울까? - 이는 경험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잠자는 이에게 겁주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는 이의 잠을 깨워야 하는데, 어른에게 집단 무더기는 잠을 깨우기 약하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나라 방송에 나오는 여성심리학자들의 이야기는 꼭 여섯 나이를 다루는 것 같아서, 피시험자에게 사탕발림을 해주면, 이 여성이 어떤 그림자들을 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상담하는 것이다. 서로 미리 각본을 짜는 것이 아니라하더라도, 사탕이면 달다는 것은 오관(상식)의 상정이기 때문이리라. 내가 보기에 박원순에 얽힌 여성을 대변하는 여검사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원본은 없고,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고서 지시작용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x를 감추고 긴 이야기를 하는 에드가 알란 포의 “도둑맞은 편지”의 해석과 같다.
우화에서 그림자는 원형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듯이, 그 분석가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그렇다고 믿는다. 동굴 바깥에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상호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것들이 있는 세상의 터전이다. 상호관계만이 아니라, 무작위적 연결접속들이 무한정하게 펼쳐져 있다. 논리와 해석에서 상호관계의 연접과 이접이 의미있는 것과 달리, 터전에는 무한히 열려진 연결관계들이 있다. 이 관계들의 과정은 자연, 지구, 터전 속에서 과정들이다. 이들의 연관과 혼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는 긴과정이 필요하다. 벩송이 말한다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분석가든 여검사든 대담하고 챙겨 준 어떤 여인의 삶이 여섯 나이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굴바깥에는 그림자의 거울 같은 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여자의 주변과 터전의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우화는 거두절미한 규정된 대상의 것이고, 그 규정은 자기들만의 논리와 영역에서 쓸모있고, 유용하고 편리하다. 탐만치의 자료이기 때문이리라.
우화의 기능에는 대리자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플라톤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우화에서 죄수가 동굴 벽을 쳐다보게 묶여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플라톤의 의도이다. 너희들은 묶여 있지, 그러나 나는 묶여있지 않거든. 대리하는 자를 표상하는 자와 용어가 같다(le représentant). 표상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즉 현상을 재현하는 자는 사실 또는 실재성을 실행하고 이야기하지 않기에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우화 중에서,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시지프스의 우화가 있다. 시지프스는 신의 형벌이라 무거운 돌을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한다. 소비에트에서 나온 어느 이야기에서, 시지프스가 돌을 밀어 올리며 힘들여 살아야 한다면, 그 힘든 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어떠할까? 징과 망치를 들고 평생 돌을 깨면서 밤낮없이 일하여 바위과 바위산 전체를 어떤 조각상을 만들고자 한다고 해보자. 산꼭대기로 올리는 노동이, 돌이 굴러 떨어지면 또 다시 해야 하는 동일반복의 형벌인데, 이런 형벌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매일 동일하게 행동하며 돌을 쪼개지만, 내일이면 조금씩 변하는 이질반복의 형벌을 받고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매일 돌을 조각하다보면 모양이야 어째든 평생을 노동하다가 죽지만 뭔가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아라한이 되던 보살이 되던. 이런 생각은, 장바닥을 돌아다니면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뭣꼬”를 화두로 삼은 소크라테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을 믿는 신앙자가 말한다. 신은 형벌을 주면서, 그가 무엇을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을 시킨 것인데, 그자가 형벌을 받는 주제에 자기 마음대로(자유롭게), 일들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더 큰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삶이 그런 형벌이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하여, 더 큰 형벌의 방식으로 이질 반복을 하면서, 그 형벌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숙명 또는 자연의 섭리이라면, 그렇게 살아가야지 뭐 어쩔 수 있겠는가? 죽기 아니면 까물치기인데, 어떠한 다른 형벌이라 해도, 또 망치와 징을 들고 작업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던가, 그 나라 국기가 망치와 낫이라던가? 삶에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생명체로서 노력이 필요하고, 어느 누구도 그 노력이 섭리보다 밑지면 세상을 뜨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인간은 없었고 그도 죽는다. 그 노동에 대한 댓가를 스스로 자치와 자주로서 찾는 것인데, 그게 동일반복이 아니라 이질 반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같은 일을 시켜도, 또는 동굴 안에서 인간은 같은 곳을 쳐다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달리 살기를 말하는 점에서 전복이 아니라, 새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주의 전복은 그 달리 사는 것의 타당성에서 인식의 전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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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화에 대해, 전복까지 아닐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첫 고민을 한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벩송의 물질과 기억을 강의를 들었을 때는 헷갈렸었는데, 원문으로만 세세하게 세 번이나 읽고 나서 쯤 일 것이다. 벩송은 이 저술을 다른 의미로 썼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으로 이를 벩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연결할 수 있을 때이고, 이러한 것들을 이번 들뢰즈의 의미논리를 또 다시 읽고서 연결할 수 있을 때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설명하기 매우 어렵고 불편했다. 어느 정도 불편하냐 하면, 토지를 떠나지 않은 시골 농부에게 태양이 하루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설명을 할 수 없듯이, 여섯 나이 꼬마애가 나 어디에서 나왔어요?라고 물을 때 그 설명을 잘 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게다가 텔레비젼에 나오는 심리학자들이 시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하면서, 그 방법을 이야기하는 데, 그들이 이들에게 가르치는 그 방법이 시지프스처럼 돌을 굴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마치 꼬마 애들에게서처럼, 돌을 잡고 망치든 징이든 들고 깨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그 화면에 돈을 받고 나온다는 것으로 돌을 굴려 올리면서 개돼지처럼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이 정답일지 모른다. 우화의 전복이란, 돈 받지 않고 또한 십일조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런 소리 안한다는 것이고, 즉 스스로가 파라노이아로(편집증으로)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푸꼬는 근대 철학사의 흐름이, 즉 표상과 재현에서 진리를 말하는 흐름이, 광기(mania)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냥 놀랐다. 푸꼬는 그 광기를 알면서 왜 광기 속에, 마치 즐기듯이(?), 살고 있었을까? - 나는 들뢰즈를 읽으면서, 푸꼬가 동성애자로서 소외받기 싫었던 것이라 여긴다. 즉 사회의 틀(동굴 속)에서 그들과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지, 그가 살았던 시기에 동굴에서 쫓겨나기 싫었던 것 같다. 즉 동굴에서 소외 받는 자가 페르베르(도착자)인데, 자신이 뻬르베르이면서도 파라노이아들에게 밀려나기 싫었던 것이다. 신앙자들이 말하는 천국 같은, 즉 태양이 있는 바깥은 심심할 것 같아서. 그러나 그에게도 경계 밖에서 살 수 있고 흥미있는 작업의 길도 많을 텐데 말이다. 이번 프랑스 올림픽은 베르베르 같은 자들이 공공연히 나와서, 우리는 동성애자이거든 이라 한다. 태양이 도는 것도 아니고, 신이 시킨 것이 아니라,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무의미(농상스)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농상스가 상스라고, 의미 있게 살고 있다고. 자연과 더불어.
왜 우화의 전복일까? 푸꼬가 마지막 근대화 시대의 천재로서 살아갔다고 하는데, 이미 그의 생애 후반에 규소와 DNA시대가 열렸으나 모른 채 한 것 같다. 그는 자기 시대의 마지막을 즐기면서도 뻬르베르로서 공공연하게 살지도 못했다. 빨강이가 빨강이임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파랭이가 설치는 터전(동굴)에서 빨갱이로 몰리면 못 산다는 것을 그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가 외롭고 소외될까봐 걱정했을 때, 그래도 그는 자기를 방어하고 이해해주는 공산당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스스로 권력이 되었는데, 이런 생각이었으리라: ‘내가 속으로 뻬르베르든, 동성애든, 빨갱이든 간에 파랭이들 속에서 권력을 누리면서 살면 되지, 그 권력을 누리는 찰나에는 나를 건드리지 못하거든, 그들도 다 광기 속에 사는 파랭이들이니깐.’ - 그런데 프랑스 빨갱이를 뻬르베르라고 까발리던, 푸꼬는 이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또한 들뢰즈가 뻬르베르가 아니라 스키조라는 것을 몰랐던, 패거리 하수인 소칼은 지금쯤 뭘 할까? - 이렇게 파랭이 속에 산다는 것은 동굴 속에 죄수처럼 사는 것과 마찬가지 일진데, 푸꼬 자신은 동성애를 즐기면서 살았기에 그 자신은 죄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고, 글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광기(파라노이아) 속에 살고 있다고 그렇게 썼다. 그런데, 파랭이 중생들이 그의 글을 이해 못했겠지.
아니 푸꼬는 파랭이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지, 왜냐하면 상식의 세상에서, 태양이 돌고 있는데, 지구가 돈다고 그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지 또는 믿지도 않지. 그는 다른 상식으로, 즉 양식(파랭)이 아니라 농상스로(다른 양식으로)로 살면서, 양식이라고 믿고 사는 동굴에 갇힌 죄수들을 가지고 놀았지. 그럼에도 양식(파랭)에게 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에게 열어줄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들뢰즈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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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둥굴의 우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어쭙잖게도 죄수가 왜 벽만을 바라보냐, 그러지 말고 그 동굴의 벽을 파보자, 또는 땅을 더 깊이 파보자. 지질학과 유전학인 것 같은데, 왜 벩송인가? 벩송은, 사람들은 인식 역량의 원인에 대해 그리고 그 역량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새로운 한 탐구를 제안 하면서, 플라톤 이래로 바깥에서 찾았는데, 이제는 안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래 밖으로 나갈 것 없이 나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동굴의 벽면 속으로, 그림자들 뒷면 깊이로. .
이 말은 말하기 쉬운 것 같지만, 상식과 양식(파랭)에게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파고 드는데... 그래 지층을 파듯이 파보라. 그러면 그들은 땅을 파면 돈이 나와 쌀이 나와! 이게 첫째 답변이다. 지층을 판다는 것은 고대에서도, 수학과 천문학이 설명되는 르네상스 시절 이후에도 불가능하였다. 파보면 뭐가 나오는데. 수학을 파면 뭐가 나오는데, 하늘을 파면 뭐가 나오는데?
천문학에서 그리고 자연학에서,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깨어졌을 것 같은데, 지금도 미국의 32개주가 창조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지구의 지층 속에는 드물지만 층층이 인간 이전에 있었던 생명체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고 해봐라, 여섯 나이 꼬마애가 어디서 태어났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황새가 물어왔다”는 것이 정답이듯이, 또는 다리 밑에 주워왔다는 것도 정답이 되듯이, 인간과 동물이전에 지구상에 아메바와 같은 흐물거리는 생명체들이 살았다고 하는 것이,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땅의 깊이처럼, 동굴의 바닥 벽을 깊이 팔 것 있나? 인간 자신의 과거 기억을 파보라고. 그랬더니 그것 파봐야 아버지, 할배, 온할배이지 온하나님이란다. 그 이상을 알 수 있느냐고 하면서 끝이다. 고대의 상식(공통감각, 오관)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불교의 무량대수 10의 68승만큼 긴 인연연기도 하다. 10 대신 1의 68승은 그 자리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완전히 통일된 세계는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답은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10의 68승으로 과거 인연으로 돌아가도 도깨비(malin genie) 장난 같은 수는 마찬가지이라 했다. 그 무한겁의 무한 승수를 다 따른다는 것은 250억광년의 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신의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스 논법을 깨어 부수었지만, 신은 여전하다. 19세기의 근대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과거를 파고드는 이야기를 했지만, 신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여 종교는 국가와 논리(언어)와 더불어 카르텔을 형성하여 제국주의를 만들었다. 이 세 패거리가 만든 것, 그것은 자신들의 광기에 덤벼드는 자를 도착자 또는 분열증자로, 즉 빨갱이 만드는 일이었다. 그 광기.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만치에 빠진 자들이다. 현재도 윤석열과 부일파들은(밀정을 포함하여) 이 제국 패거리(카르텔)의 주구에게 똘만이로 자처하면서 인민을 착취하려 한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고 하고 있다.
플라톤의 우화의 전복은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 파악하라는 것이다. 지층 속으로 파악하는 것은 유적과 기록들, 화석과 고생물을 통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변형을 거쳤는지를 탐구해 보라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실행되었는지, 그 기나긴 과정에서 노력과 강도를 높이는 내공을 어떻게 쌓았는지를 탐구하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까지 한 생명체는 기나긴 노력(포노스, πόνος)과 내공(토노스 τόνος)의 결실이며, 이런 과정에서 생명의 형성체도 바뀌고 세상도 바뀐다.
벩송은 전복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사유의 전도(앞뒤 바뀜)이라 한다. 인간의 사유, 즉 생각하는 방식(영혼)이, 고대에서는 상식(sens commun)을 통해 구성하는 시기에는 하늘을 기본으로 땅을 해석하려 했다. 그리고 르네상스에서 양식(bon sens)을 통해 하늘과 땅, 하나의 통일체로서 일정한 방향으로 사유가 전개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지구의 과거와 생명체의 과거, 즉 지층과 기억이 없이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진행과정은 과거의 층위에서는 없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 속도조차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지구가 위험하고 그 속에 생명체인 인간도 위험하다. 세상과 지구를 걱정하지 않는 이가 있다. 탐만치에 빠진자들이다. 이 광기 또는 편집증이 어디서 오겠는가? 플라톤을 잘못 읽고 있는 플라톤주의자와 크리스트교 신앙자들의 무오류와 논리분석의 지시작용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세 패거리(카르텔). .
그래, 진솔한 인식과 지혜는 탐만치를 벗어나야 한다. 파랭이가 각성하지 않기에 그 광기로 전쟁을 걸고, 착취와 수탈을 일삼는다. 역사가 그래왔다. 그런 생각과 달리 생각하는 교육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자들을 최종심급인 인민이 엄벌해야 할 것이다. 엄벌은 간단하다. 착취한 사유재산을 모두 공공재로 환원하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같은 이들만이 제국 패거리의 주구인가 했더니, 박근혜와 최순실에서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윤석열과 그 주변은 제국의 하수인인 일본의 밀정들로 채워지는 것 같다. 그 제국 패거리란 식민지 인민을 부리고 억압하며, 입말과 사유를 박탈하려 든다. 그래도 패거리의 하수인인 극우들의 붕괴 또는 파멸은, 인간의 자의식이 제대로 혼성하는 시기에서, 플라톤주의 전복처럼 이루어 지고 있다. 하수인들이 제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말씨 또는 입말이, 말씀 또는 말투가 아니라, 세상에서 온누리소통(SNS)으로 이어가고 있다. 입말이 자유로운 것은 겨우 79년이지만, 내공은 강도를 더하고 있으며,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깨닫고 있다. 아직 설탕물이 골고루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4:26, 57RMG) (6:13, 57SLB) (7:04, 57S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