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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소시집 리뷰
감당할 수 없이 열리는 세계의 실체
-이어진과 김려의 시 읽기
배옥주(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은 자신의 고독을 나눌 존재를 찾아 홀로 끊임없이 떠나야하는 존재다(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언어에 실려 시인이 떠나가는 그 곳. 감당할 수 없이 열리는 몽상의 시세계는 시공을 초월하거나 온갖 계절이 공존하거나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수한 표상들이 표류하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의 몽상은 이성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의 실체를 짐작하게 한다. 온몸을 열어젖힌 역동적 상상력으로 영감의 언어를 변용한 미적 창조물을 만들어낸다.
또한 시인은 고독한 존재자의 희열이나 고통과 상응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고통에 직면하여 애착 대상을 상실한 시인은 상처의 언어로 채워진 심리적 공간에서 시적 주체를 정립해간다. 이때 표출되는 시인의 내면세계는 폭력을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신의 빈 곳을 채워가는 자기의식의 반영이다.
1. 고독한 언어의 몽상
이어진 시인의 시편들을 통해 광활한 꿈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시인은 무의식의 들판을 종횡무진 건너다닌다. 그녀가 구현하는 몽상의 세계에서는 불가능성을 초월하는 언어의 향연이 펼쳐진다. 시인은 현실 너머에서 표류하는 다양한 실체들을 붙들고 그들이 토해내는 언어에 귀 기울인다. 수십 행의 문장들을 연결하는 언어의 작은 몸짓까지 놓치지 않고 자유자재로 배치하고 있다. 그녀가 능동적으로 발굴해내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시적 주체인 ‘나’와 ‘너’를 오가며 자신이 귀담아 들은 시세계를 확장해간다. 시인이 전하고 싶은 ‘나’와 ‘너’, ‘우리’는 현실과 몽상을 오가며 어떤 춤을 추고 있는 걸까?
더위가 왔는데 벼들이 춤춘다 태양이 익어 가는데 벼들이 춤춘다 지구의 더운 생각 속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벼들이 공중 위를 떠돌아 다닌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벼이삭의 달콤한 쌀알이 아니야
타들어가는 쭉정이가 말했고
나는 가끔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지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곳
우리가 함께 들판을 쏘다니던 곳
너는 풍성한 벼이삭을 한아름 안고 추수를 하는 농부의 밀짚모자를 사랑했지
농부의 사랑은 벼를 수확하며 들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
나는 몰려다니는 안개처럼 형체가 없었고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빗물처럼 꿈이 없었고
꿈이 없어서 그래
나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너를 불러보았고
너는 먼데서 아름답게 먼 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고
더위가 왔는가 빗방울처럼
무더위 속에서 우리의 벼들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유리 그릇 안에 담겨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흰구름처럼
나는 두 눈에서 춤추는 벼의 무리를 상상하고 있었지
들판에 갔는데 네가 벼들 속에 숨죽여 있었어 춤추는 벼의 무리 속에 너의 눈알들이 빼곡하게 담겨서
내가 너를 바라보는데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는 춤추고 있었고
더위가 왔는데
너는 내 곁에 없었고
나는 빗방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서 걷고 있었고
사랑하는 들판이라서 그래
들판으로 여행 떠난 소년과 소녀처럼
푸른 하늘은 신비롭기만 한데
치렁치렁하게 두 눈을 가린 커튼
식탁 위에는 너에 관한 책
너에 관한 들판
너에 관한 식물도감
너에 관한 전설들이
여기 저기 피어서 저녁의 알전구 속으로 여행간다
노을 속이라면 벼들이 한마음으로 빛을 발할 수도 있을 텐데
쌀알들의 눈빛들이 조그만 그릇 안에 담겨 말했고
나는 이 쌀알들을 다 삼킬 수가 없다
더위가 창문 밖에 서 있는데, 빗방울들이 함께 와있었다 검은 벼들이 몰려다니는 들판에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그들은 처음에 무엇이었는지
조그만 볍씨였는지
공기의 해맑은 눈빛이었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선술집 탁자 위에 둘러앉아서
들판 위에서라면 작은 들꽃처럼 웃어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그만 슬퍼져서 빗방울처럼 유리창에 떨어졌다
무더위가 왔는데 벼들이 춤춘다
슬픔이 익어 가는데 벼들이 춤춘다
밤새 벼들의 속삭임이 검은 하늘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만 행복해져서 들판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싶었고
- 「무더위 속에서 벼들이 춤춘다」 전문
이어진 시인의 신작 소시집에 실린 다섯 편의 시편는 모두 십수 행이 넘는 장시長詩들이다. 그녀의 언어가 빚는 각각의 문장들은 생기발랄한 이미지를 구축하며 맹활약하고 있다. 무궁무진한 몽상의 세계가 빚어내는 탄력적인 이미지의 문장들이 활달하고도 다채롭다. 그녀의 이번 시편들은 ‘너’와 ‘나’ 또는 ‘우리’에 대한 언어의 세계가 환몽적 상상력을 전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위 시 「무더위 속에서 벼들이 춤춘다」에서는 대지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시적 주체는 “타들어가는 쭉정이”이다. 태양이 익어가는 더운 날, 더위를 피하지 못한 벼들이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벼이삭의 달콤한 쌀알이 아니”다. ‘나’는 알곡이 여물지 않은 채 무더위에 타들어가는 ‘쭉정이’다. 하지만 쭉정이인 나와는 달리 ‘너’는 풍성한 벼이삭이 넘실대는 들판에서 춤추고 있다. 알곡으로 여물고 있는 ‘너’는 생의 활력을 불어넣는 가이아 여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잘 여문 ‘너’에 관한 ‘책’과 ‘들판’과 ‘식물도감’과 ‘전설’을 따라 시적 주체는 여행을 떠난다. 들판에서 자라난 조그마한 볍씨는 공기의 해맑은 눈빛과 태양과 빗방울을 만나 잘 여문 알곡이 되었겠지만, 쭉정이가 되어버린 ‘나’는 몰려온 더위와 함께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처지다. 자신이 왜 빈 쭉정이가 되었는지 도무지 그 어떤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화자는 “빗방울처럼 유리창에 떨어”져 슬픈 눈으로 춤추는 벼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밤새 익어가는 벼들의 속삭임이 아름답게 빛날수록 ‘나’도 그들처럼 행복한 알곡이 되어 들판 위로 “후두둑 떨어지고 싶”은 것이다.
내 안의 가득한 물들이 흘러내리고 있어요 계단 끝으로 보이는 세계는 청보리밭의 들판에서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네요 그 너머의 세계를 신뢰하는 물빛이라서 나는 여태 물의 언어를 내 눈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네요 내 안의 세계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꿈의 운전석이 코너를 돌 때마다 더 파래지던 잎사귀의 눈동자라서 나는 발끝의 힘을 다해 계단을 오르고 있어요 귓속의 당신은 비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나는 기억의 숲 속을 걷고 있어요 호수 위에 떠 있는 흰 구름의 발가락이 빗방울을 후드득 떨어뜨리고 있네요 사랑의 의미를 담은 빗방울인가 봐요 끝이 없는 계단이에요 계단을 내려가면 아름다운 볕들이 모여 산다는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 「아름다운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부분
시장을 갔는데 바구니 안에 네가 담겨 있다 점심에 당근을 썰어 넣고 국수를 먹을 레시피를 꿈꾸었는데 네가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손가락이 주홍빛으로 물든 당근이라니
도마 위에서 너는 유니크한 손가락으로 창밖을 연주하고 있고
창문 밖에는 바람이 나무 위를 뛰어다니고 있고
하늘 한편에선 흰구름이 유리 그릇 안에 담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름속이라면 당근은 어떤 스타일의 생각을 풀어 하늘을 물들일까
구름 속을 흘러다니는 소녀는 당근을 위한 실루엣처럼 근심이 없고
나는 작은 소녀이고 싶은데 너는 내가 늙은 칼이라고 말한다 나는 칼의 두려운 입술을 빌려오고 싶지 않아 점점 당근을 좋아하게 되고 얇고 아름답게 구름을 채 썰어 당근 안에 넣고 날아가는 꿈을 꾸네
너는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이었는데
지금 너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저녁의 그림자를 닮아있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노을의 가르마에는 네가 사랑하는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고
그 안을 떼 지어 몰려가는 붉은 머리들의 웃음소리라니
꿈속에서는 네 생각으로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나의 두 눈 속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나의 검은 눈동자는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한 것은 너의 붉은 신발이었는데
- 「당근을 위한 왈츠」 부분
위 시 「아름다운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는 화자의 몽환적인 내면의식이 유려하게 흘러 다닌다. ‘나’는 자신의 내면 가득 흘러내리는 물의 기운을 온 정신으로 느끼고 있다. 그 물빛은 ‘계단’과 ‘계단 너머의 청보리밭’과 ‘청보리밭 너머의 세계’를 신뢰하는 물빛이다. 그래서 ‘나’는 ‘물의 언어’를 지우지 못하고 눈에 담고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더 선명한 ‘내’ 안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기억의 숲 속을 걷”는다. 화자는 흰 구름의 발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당신의 사랑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화자의 귓속에 들어와 있는 ‘당신’이 귀 기울이는 “비의 말”이기 때문이다. 계단을 채우는 “불안한 호흡들”은 이미 “우리의 지난날이”며 “내리는 빗방울을 당신과 나의 간격이 받아 안아”준다. 그러므로 화자 앞에 놓인 계단은 끝이 없지만 그 계단을 한층 한층 내려가면 “아름다운 별들이 모여 산다는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당근을 위한 왈츠」 는 다섯 편의 시편 중 가장 긴 시로 「아름다운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와 함께 역동적 상상력이 펼쳐진다. 바구니 안에 담겨 있는 ‘너’는 ‘당근’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너’는 바구니에 담겼다가, 물속에서 헤엄치다가, 도마 위에서 유니크한 손가락으로 창밖을 연주하다가, 파랗게 새싹으로 돋아나다가, 물속에서 즐거운 연주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나’ 또한 당근을 씻고 있다가, 꿈속에서 오체투지 하다가, 책가방을 들고 언덕 아래를 지나가는 등의 변주를 이어간 다. ‘나’와 ‘너’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리드미컬한 운율로 다양하게 변용되는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이 ‘상상력은 위대한 정신의 자유’라고 했듯, 시에서 나열되는 몽상적 행위들은 현실과 꿈을 오가는 새로운 정신의 세계를 생성해낸다. 「당근을 위한 왈츠」는 화자의 창조적 체험이 낯선 행위와 조화롭게 이어져 경이감을 발현한다. 이런 양상은 「성냥팔이 소녀」와 「멜랑콜리아 소녀」의 두 소녀를 통해 반복된다.
불이 훅 하고 꺼지는 순간, 나는 마음을 모으고 내가 마치 성냥이었던 것처럼, 얼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고 있는 것처럼 참회하고 있다
의자들이 무너져 내린다 한 번도 내 의식의 방에 들어와 본 적 없는 저 행복한 구름들은 언제 얼음의 문장을 이해하려는 걸까 추운 거리의 문법에서 나는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고 성냥사세요 성냥사세요 얼어붙은 거리에서 나는 해진 옷을 걸치고 누더기누더기 걸어간다 저기 도로의 한 편에 쓰러져 있는 성냥을 팔던 어린 소녀가 있다
- 「성냥팔이 소녀」 부분
나는 나무 그늘 밑을 지나가고 있었지 이 음악 소리에서는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철로의 표정이 느껴진다 이 음표에서는 네가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는 체인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잠시 음악 너머의 세계를 상상해 보았지 네가 깔깔거리며 이파리처럼 웃고 있다는 생각
너의 수런거림이 수많은 이파리들을 헤치며 내게 걸어오고 있었고 비틀거리는 웃음소리였고 사랑스러웠지 이파리들의 신발이 비뚤비뚤 걸어다니고 있었고 나는, 검은 태양을 따라 걷고 있었어 한참을 울고 나서 다시 걷고, 다시 걷고 네가 오지 않는 시간 검은 용광로 속에 들어가 검게 타오르고 있었지
- 「멜랑콜리아 소녀」 부분
위 두 시의 화자는 음울한 상상의 세계에 갇혀 허둥대고 있다. ‘나’는 해진 옷을 걸치고 걸어가다가 쓰러진 성냥팔이 소녀다. 또한 ‘나’는 검은 태양을 따라 걷다가 울다가 다시 걷다가 검은 용광로 속에 들어가 검게 타오르고 있는 멜랑콜리아 소녀다. 두 소녀는 우울하고 슬프고 불행한 감정 안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다. 비정형의 통로를 통해 내면 공간으로 들어가는 몽상의 세계에서 낯선 실제계의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상징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신선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환상의 세계는 실현 불가능한 세계로 자아의 불안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다. 몽상이나 환상이나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시편들의 내면 사유는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슬픔과 우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위 시편들은 자아의 은밀한 내면 공간을 연결하여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세계를 무념무상의 자동기술법처럼 들려주는 화자의 고백이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이미지 형상화는 정형화된 의식의 해방을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2. 숨겨진 상처의 안부
지금, 모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김려 시인. 그녀는 스스로를 ‘심각한 길치’라고 단언한다. 타인이 향하는 길의 향방을 궁금해 하는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김려 시인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타자에게 상처 받는 존재이며 스스로를 위무하며 다독이는 존재다. 그녀의 시편 속엔 깊은 상처들이 내재되어 있고, 그 상처는 흉터를 숨기고 있다. 시인은 “상처가 싹처럼 부풀어 올라도 웃을 줄” 안다. 그녀의 상처 입은 길은 어떤 흔적으로 타자의 볼모가 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김려 시인의 시세계는 내적 필연성이 충만하다. 인간 내면의 정신적 법칙이 반영되는 내적 필연성內的 必然性(칸딘스키:Kandinsky Wassily)은 시인이 훌륭한 예술세계를 열어가는 데 일조하는 것처럼, 그녀의 시세계는 예술적 세계로 승화되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시편 곳곳에서 묵묵히 뱉어내는 시인의 언어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심리적 위안을 건네준다.
침을 세게 뱉습니다 흙이 파입니다 흙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괴롭히지 마세요 나는 뱉을 땐 뱉는 사람이요 그는 나마저 복종시키려는 듯 주먹을 지르면서 고함칩니다 내 몸은 끄떡없습니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머리를 쓸어 넘깁니다 나를 흘겨봅니다 내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습니다 노려볼 때마다 ‘잘못했습니다’ 하다 보니 정말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나를 좀 가만 놔두세요 내가 뭘 알겠습니까 나는 흘길 땐 흘기는 성미요 그가 침울하게 말합니다 구름을 먹고 사는 머저리들에게 진저리가 쳐져 도대체 언제 겨울이 오겠소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축축했는지 비가 내릴 뻔합니다 그는 나를 밟아 납작하게 만들어 누군가 뱉어둔 가래침 옆에 두고 가버립니다 겨울은 다시 올 것이므로 기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철 지난 꽃들은 웃음이 고픕니다
- 「떠나는 동백에게 웃어주기」 전문
철이 지난 꽃들은 이 생에서는 자신이 향유할 계절이 이미 사라진 상태다. 다시 올 계절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들의 존재 의미다. 위의 시 「떠나는 동백에게 웃어주기」에서 그는 ‘나’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흘겨보거나 밟아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그가 노려볼 때마다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억울하게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눈물 흘리는 타자이며 주변인이며 비체이다. ‘나’를 들쑤시는 힘센 존재들은 침을 뱉고 눈을 흘기며 연약한 존재인 ‘나’를 가만두지 않고 노려보거나 짓밟으며 괴롭힌다. 철지난 동백은 밟으면 밟히고 침을 뱉으면 고스란히 침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한철 피어 있다가 목이 꺾이면 납작해진 몸으로 바닥을 뒹굴며 다음 겨울을 기약해야 한다. 동백은 밟히는 고통을 참아내며 흙으로 돌아가야 내년 겨울을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계절은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동백은 자신에게 주어진 열악한 상황을 견뎌내며 처연하게 기다리면 다시 꽃필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이처럼 연약한 존재들은 기다림을 통해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받고자 한다. 그래서 “철 지난 꽃들은 웃음이 고”플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을 꿋꿋하게 버티며 다음 계절을 기약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감히’를 입에 달고 살던 기분이 상하면 방문 잠그고 3개월을 들어앉던 그가 평소답지 않게 다나까체를 쓰며 그에게 다정하게 굴기 시작했다
각방 쓴 지 10년이 된 그가 매일 베개를 안고 그의 방에 들어가 새로운 체위를 개발하기도 했다 일이 끝나면 여태 만난 사람 중 당신이 최고라고, 아내가 알아서는 절대 안 되니 무덤까지 비밀을 지켜달라고 귀에 홍어 냄새나는 입김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갱년기도 참 독특하게 겪는다 하지만, 그를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 그는 잠깐 지켜보기로 했다
-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부분
위 시의 제목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는 칸트의 첫 번째 정언定言명령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의무로서의 명령을 말하며, 누구든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위 시에서는 ‘그’와 ‘그’가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각방 쓴 지 십년 된 부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남편은 평소 ‘어디서 감히’를 입에 달고 다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선봉이던 사람이었으며, 기분이 상하면 3개월이나 방문을 걸어 잠그던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다나까체” 존칭어를 쓰며 친한 척 다정하게 군다. 남편은 매일 베개를 안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와 새로운 잠자리 체위를 개발하는가 하면 꽃다발이나 귀고리 등을 선물하고 오페라 관람을 권유하고 드라이브까지 제안한다. 확연히 달라진 남편의 태도는 아내에게는 심란할 정도다. 하지만 아내는 다짐한다. “새로운 연애를 하”기로.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며 그에 합당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맛이 완전히 간 것 같”다고 느낄 만큼 갱년기 남편의 변화된 태도는 아내를 당황스럽게 만들지만, 아내는 남편을 목적 그 자체로 지켜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어떻든 ‘그’는 ‘그’의 남편이니까.
설거지 솜씨에 홀딱 반하고, 시시는 아프지도 않을 거라 믿는 나르, 시시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지 시시에겐 나르만 있으면 된다는 나르 생각
갑자기 죽더라도 대접받고 싶어 나르가 에르메스 팬티만 입는 이유 에르메스 팬티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혹시 누가 팬티만 벗겨 가면 어쩌려고 하는 시시 걱정
<중략>
꿈속까지 따라와 아무 데도 못 가게 하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대문 앞에 모르는 나르시스가 서 있는데 그걸 보고도 질투하데 화장실까지 따라와 어디든 함께 가자 하고 힘들어서 죽을 뻔 미치는 줄,징징거리는 나르 나르는 알고 있다 우리는 금세 늙어버릴 거라고 죽은 뒤에도 꼭 붙어 있을 거라고
- 「보자기 속 나비 두 마리」 부분
프로이트가 말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시적 주체가 드러내는 외부세계에 대한 부정과 시적 주체에 대한 긍정이다. 이때 시적 주체의 리비도는 외부를 지향하지만 다시 내부로 흡수된다. 보자기 속에 들어있는 나비 두 마리는 ‘시시’와 ‘나르’다. 나르시시즘에서 분리된 시시와 나르는 서로가 “죽은 뒤에도 꼭 붙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르는 시시에게 “홀딱 반”했다. 그래서 ‘시시’에겐 ‘나르’ 자신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다. 나르는 엄마와 시시가 물에 빠지면 엄마를 구하고 장미와 시시가 물에 빠지면 장미를 구하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본심은 시시에게 온 마음이 꽂혀 있다.
‘나르’는 시시가 키운 꽃대를 잘라버리는 등 ‘시시’의 일을 방해하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대문 앞에 서 있는 모르는 나르시스를 질투까지 한다. 어디든 함께 가자고 화장실까지 시시를 따라붙는 나르는 알고 있다. “우리는 금세 늙어버릴 거라”고. “죽은 뒤에도 꼭 붙어 있을 거라”고. ‘시시’와 ‘나르’는 외부세계에 대한 부정과 시적 주체에 대한 긍정으로 시의 전체 이미지를 이끌어간다. 문득, 보자기 속의 나비 두 마리인 ‘시시’와 ‘나르’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의 ‘그’와 ‘그’에 자꾸 겹쳐지는 것은 우연인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가.
주름 잡히고 백발성성해 보는 게 소원인데 늙기도 어려워 꿈이라고 믿고 싶은 현실 내 몸아 오늘도 산다고 고생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없어야 할 것이 있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미안하다 말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 「안부」 부분
시인이 묻는 안부가 애잔하다. “밥이 자꾸 미끄러”지고 “오른팔도 아파서 왼손으로 글”을 쓴다. 화자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심경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타인의 죽음에 관대하고 객관적인 의사 선생님은 직설적으로 환자의 상태에 대해 말해주지만, 화자는 솔직한 사실보다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 심정이다. 주름 잡히고 백발성성해 보는 게 소원이니 지금 화자의 몸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화자는 없어야 할 것이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내 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의 심정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자신의 건강을 상실한 자아가 고통스런 현실과 직면하여 진심 어린 사과를 자신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절절함이 와 닿는다.
이어진과 김려의 시를 읽으며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몽상의 언어와 고통의 세계를 뛰어넘는 상처의 언어를 만났다. 이들의 시편은 모두 시인 내면의 의식을 해방하기 위한 다채로운 시적 변용 과정과 이미지 형상화를 보여준다. 두 시인의 시편들은 정서, 지성, 감각이 충만한 자율적 언어로 가득하다. 초현실적 세계를 통해 몽상의 에너지를 비축하거나,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현실 밖으로 탈출하는 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어진 시인의 시를 통해 욕망은 몽상을 움직이는 힘이며, 상상력의 원천인 몽상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의식과 무의식의 정신 활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려 시인의 시는 상처 입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죽음이나 삶, 현실과 비현실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신적 법칙이 반영되는 예술의 내적 필연성을 보여준다. 예술은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는 승화의 산물이다. 두 시인의 시 세계가 만화방창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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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시 당선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여러 곳의 시평을 쓰다 2022년 《애지》 평론 신인상으로 정식으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오후의 지퍼들』 , 『The 빨강』이 있으며 평론집 『언어의 가면』과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공간』이 있다. 김민부 문학상, 두레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요산창작 지원금을 수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