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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春城大師
돌장승이 애기 낳는 도리를 알라
선은 항상 삶의 중심 사실을 파악하고자 한다. 바로 존재의 핵심에 도달하여 자기 실존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선의 논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지성의 해부대로 운반 될 수도 없고 다만 삶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하여 선은 어찌할 수 없이 부정의 측면에 서게 된다. 그러나 단순한 부정이 선이 갖고 있는 정신은 아니다. 그래서 옛날 선사들은 긍정하지도 않고 다만 행위와 담화 그 자체가 진리의 발로라고 하였다.
평상심이도(平常心而道)란 바로 삶의 실체를 부정과 긍정을 통하지 않고 발견한 평범한 진리이다 그래서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는 지혜의 힘이 있다. 진실로 선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라는 것은 항상 우리를 일깨우고 각성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선을 교수하지 않고 지적한다고 하였다.
다시 이야기하여 선사의 행위와 몸짓은 말씀이라기 보다는 자명종의 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아 있는 자에게만이 가능한 일이다. 고통의 속박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눈 앞에 삶의 평범한 진리가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고통의 함정에 빠져 허덕이고 만다.
선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수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과 중생의 거리를 두지 않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삶의 참기 어려운 고통이 있는 곳에 바로 자기의 정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삼독(三毒)을 깨달으면 삼학(三學)이 된다고 하였고 참기 어려운 번뇌속에 부처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인간의 내부에는 개발되지 않은 부한한 지혜가 저장되어 있다.
인간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질 자체에는 불도 중생도 존재치 않는다. 바로 이것을 쉽게 가르치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황벽스님이 임제스님을 찾아갔을 때 일이다. 그는 땅을 파고 있다가 황벽이 다가서고 있음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손을 멈추고 괭이에 기대어 섰다. 황벽은 제자를 다시 시험할 양으로 말하였다.
[자네 지친 것이 틀림없군.]
[괭이도 든 적이 없는데 무엇이 피곤할 게 있습니까?]
임제가 이와 같이 대답하자 황벽은 지팡이를 들어 그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임제는 지팡이의 다른 끝을 잡고서 어찌나 세게 밀쳐댔던지 황벽은 그만 땀에 쓰러지고 말았다. 황벽은 상좌를 불러서 자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를 부축하면서 상좌는 말하였다.
[방장스님, 이 미친놈의 무례를 어떻게 참으실 수 있습니까?]
황벽은 다시 일어서며 상좌를 때렸다. 그때에 임제는 괭이지를 계속하면서 말하였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화장당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산 채로 매장당하고 있구나.]
우리가 선을 알고자 하고 실천에 옮기려면 이 발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비록 해학적 발언이지만 이 속에는 삶의 정체에 도달하고 있는 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선에 있어서 참으로 엄청난 발언으로서 이른 바 젊은 사자의 최초의 우렁찬 포호라고 할수 있을 정도이다. 또 이것은 과거 세속적인 자아가 이제 죽어서 묻히고 , 다만 진아(眞我)만이 살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죽음은 육체적인 질병에 훨씬 앞서서 일어날 수 있으며 그리고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이러한 죽음이 일어날 때 인간은 불생불명의 진아에 돌아간다는 선언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깨달을 때 선의 진면목을 알게 될 것이다.
춘성은 현대선사 중에서 가장 자유롭게 살다가 진아에 돌아간 선사이다. 그는 불교가 지니고 있는 자유스런 무애공간을 발견하여 그 공간에다 춘성의 삶을 실천한 선사이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늘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몸뚱이 속에 하나의 자위스런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나니 항상 그대들의 면전에서 출입을 한다.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것을 체험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런 춘성의 외침에 수행납자 한 사람이 그의 면전에 나타나, [스님, 무위진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돌장승이 애기를 낳고 있나니라.]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함정을 만든 선사가 춘성선사이다. 그리고 그는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제자이다. 그가 백담사로 만해를 찾아갔을 때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춘성은 만해를 한번 불러놓고는 이렇게 좋은 날에 방안에 쳐박혀 있다니 힐난을 퍼붓고는 옷을 몽땅 벗어버리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때 만해는 참으로 쓸 만한 대기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기행에 속하였다. 처음 그를 찾아가 대면한 사람은 힘찬 욕설 세례를 받고 발길을 돌려 버린다. 그의 입에서는 차마 수행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음담패설이 흐르는 물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러나 그것을 귀담아 들으면 그것은 욕이 아니고 삶의 정곡을 지르는 바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이야기하여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조작을 싫어했다. 태어날 때 원초적인 모습대로 삶을 실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불교학자 한 사람이 인도에 유학을 가서 그곳 풍습에 아연실색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않고 남녀가 같이 지내는 것을 보고 그는 왜 옷을 입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당신은 뱃속에서 태어날 때 옷을 입고 나왔느냐고 반문하더란 것이다. 춘성의 삶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시성을 실현하면서 또 생활을 통해 전혀 조작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였고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였다. 소승적 자아에 속박되어 자기를 미화시킨 것이 아니라 대승적 자유를 통해 자기를 재구성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 오신날 법문을 할 때 교조 불타의 어머니 태가 찢어진 날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허상과 굳어진 삶의 측면에서 볼때 그의 말은 이해되기가 어렵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고 지나친 원색적 발언에 흥분까지 하겠지만 춘성에 있어서 원색적인 음담패설은 오히려 우리의 위선을 일깨우는 묘력이 있다. 그래서 춘성은 현대 불교사에 있어서 기승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여 다른 선사들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기존적 수행의 삶을 역행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핵심에 도달한것이다. 춘성은 그러나 단독자의 고독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원색적 삶이 기존적 수행의 삶에 동화되지 못함을 인식하면서부터 그는 인간이 지니고있는 뼈아픈 외로움을 앓아야 했고 자기 내부에 박혀있는 번뇌의 불순물을 주사바늘을 쑤셔박아 모조리 뽑아버리는 고행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이런 피나는 고행을 거치고는 평상심도란 평범한 삶의 진리로 복귀하여 위선으로 인해 상처난 우리들의 삶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였다.
춘성의 원시적 무애의 자유
춘성의 무애적 자유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유를 뜻한다. 삶의 어둠에 갇혀있는 자유가 아니라 나고 죽는 벽을 부숴버리고 얻은 자유를 춘성은 갖고 있다. 그래서 춘성의 입에서는 적나라한 원시 모습이 흘러나오게 되고, 또 그것을 서슴없이 행동한 것이다. 다만 그가 남들처럼 옷을 입고 삶을 영위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에게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남루한 누더기 한 벌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사실 인간은 주육 그대로인 알몸으로 태어나서 서서히 옷을 걸치게 되었고 생활의 위선과 위장을 배운 것이다. 춘성은 출가를 하고부터 이런 위선과 위장을 탄핵한 것이다.
그는 1891년 3월 30일 강원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속명은 이 창림(李昌林)이고 법호가 춘성이다. 평소에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春天月夜一聲蛙(춘천월야일성와
撞破乾坤共一家(당파건곤공일가)
봄날 달밤에 한 개구리 울음이
온 누리를 꿰뚫어 한 집안을 만든다.
春來草自靑[춘래초자청] 봄의 생리를 그대로 알고 춘성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삶속에는 우울이 없었고 불안이 없었고 원색의 싱싱한 풀잎같은 화기만이 가득하였다. 이제 그가 평소에 남긴 육성에 접근해 보자.
<오늘은 싣달태자가 명성[明星]을 보고 도를 깨쳤으나 깨친 허물이 있고 중생은 미한 허물이 있으니 이날은 바로 중생의 미한 허물과 부처의 깨친 허물이 모두 없어지는 날이다>
본래 만물은 공적하여 한 물건도 없어서 그 자체는 볼래야 볼 수 없고 만질래야 만질 수도 없다. 또한 마음은 형단이 없어서 물에 던져 죽일래야 죽일 수 없고 불에 태워 죽일래야 죽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을 여실히 알고 바로 쓰는 이가 부처요, 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미한 이가 중생이다. 조사들의 부탁 말씀이 있는 법도 없게 할지언정 없는 법을 있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본래 법이란 없는 것이며 본래 나란 물건도 없던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중생이다. 중생이란 뭇 생명이 있는 것 같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허물은 잊어버리고 남의 허물만 보고 욕하기를 즐겨한다.
옛날 원효스님은 우리들 삶의 아픈 곳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지적한 일이 있었다. 사람이 화장실에 가서 변소 밑의 똥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를 보고 저놈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가리지 못한다고 침까지 뱉지만 성인들이 중생을 바라보면 똥속에서 꿈틀거리는 벌레같이 중생들이 정직[淨稷]를 가리지 못한다고 욕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래 자성 자리에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존재치 않는다. 이 도리를 아는 자가 진실한 자를 알게 될 것이다.
天地與我同根(천지여아동근)
萬物與我一體(만물여아일체)
천지는 나와 함께 그 뿌리에 있어서 같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한 몸이다.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겠느냐? 다시들어보라.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을 것이다.
춘성은 위와 같은 말을 해놓고 조사의 게송 하나를 인용하였다.
我有明球一顆(아유명구일과)
久被塵勞關銷(구피진로관삭)
今朝塵塵光生(금조진진광생)
照破山河萬境(조파산하만경)
내게 반짝이는 구슬이 한 개 있나니
오랜 동안 먼지에 쌓여 있었네
오늘 먼지를 닦아 제 빛을 발하게 하니
온갖 산하를 두루 비치게 한다
위에 인용한 춘성의 법어를 통해서 볼 때 그가 무애의 자유스런 공간에 서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고통스런 삶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통스런 삶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그림자가 마음에 스며들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만물과 더불어 공적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부처를 구하는 자체가 허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생의 원체 그대로를 불이라고 파악할 뿐, 아무런 조작이나 의구심을 갖지 않고 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의 주변을 볼 때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를 위장하고 온갖 위선을 다 동원한다. 그러나 춘성은 그것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물이 자기와 더불어 일체를 이루고 있고 천지 또한 그 근원에 있어서 둘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삶의 허상에 대한 욕망을 부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선사들과 같이 문집을 남기지 않았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만물이 공적한 상태로 돌아가면 그 뿐이지만 말과 글을 남길 의사를 갖지 않았다. 그리고 언어가 갖고 있는 허물을 그는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평소 법어를 해놓고도 이것도 허물이라고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춘성의 자화상
얼마 전 전광응대선사를 뵈었을 때 현대불교사 혼란을 막으려면 종정제도를 동산, 효봉이 죽으면 없애라고 경산스님에게 부탁하였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사실 종정이란 개안자[開眼者]를 의미한다. 자기 실존의 정체를 파악하여 스스로 체험한 오도적 삶을 고뇌하는 중생의 가슴에서 실험할 줄 아는 사람이 종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금에 와서는 이런 오도자를 투표로 결정하고 있으니 혼란이 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춘성은 이런 화려한 이력을 평소에 싫어했고 무관심했다. 그리고 종정에 뜻을 두고 있는 수행자들에게는 아직도 마른 똥막대기 도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돌장승이 애기를 낳는 도리를 모르고 있는 놈들이라고 쏘아댔다. 그가 서울 선학원에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설봉스님께서 다음과같이 질문을 하였다.
[어느 학인이 해제를 하고 봉암사의 상철스님을 배알하니 즉시 몽둥이로 후려쳤다. 학인은 스님이 때리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떠나려고 인사를 하자 또 몽둥이로 후려쳤다. 학인은 그냥 매만 맞고 나와서 상주 갑장사에 계시는 금봉스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그후 성철스님이 남방으로 가시다가 갑장사에 들럿다. 금봉스님이 그 학인의 일을 들어서 만약 내가 그 매를 맞고 아야! 아야! 했더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성철스님은 아무대답도 없이 떠나버렸다. 춘성 자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무어라고 하겠나?]
[나는 씨브랄놈이라고 하겠다.]
위와 같은 발언을 보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음담패설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진연회귀의 진실한 육성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스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춘성 자신이 오랫동안 주석했던 망월사가 퇴락되어 있음을 보고 그는 곧 중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허가도 없이 벌목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의정부 경찰서에서 그를 체포하여 신문을 하였다.
수사관은 늙은 고승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일상 그대로 본적을 물었다.
[우리 아버지의 현두[賢頭]요.]
[고향이 어디요.]
스님은 서슴없이,
[우리 어머니 뱃속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평범한 일상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원색적 삶을 살던 그도 이제 그림자까지 거두어가고 없다. 오늘에 있어서 그의 서슴없는 원색적 육성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불교사는 진실을 위해 서슴없이 말하는 선사가 없어 적막한 것 같다. 생사가 없다고 가르치면서 생사에 집착되어 진실을 잃고 있으니 한심스럽고, 그래서 춘성스님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
선사열전 1983. 01. 10 고불출판사(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