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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혼사 문제는 급하게 처리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내게 말미를 주고 돌아가시면 심사숙고한 후 답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얼마 정도 시일이 흐르면, 해모수 공자의 뜻이 확실하게 정해질 것 같소?”
“최소한 한 달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한 달이 지나면 반드시 가부간에 연락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해모수는 연 왕자 남매와 헤어진 후 저녁에 어머니를 대면하고 앉았다.
“왜 연 왕이 예 공주와 저의 맺어짐에 이토록 집요한 관심을 보일까요? 제가 지난번에 거절했는데도요.”
묘고미향이 한 동안 침묵에 잠겼다.
“최소한 두어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구나.”
“······?”
“첫째는, 예 공주가 너를 몹시 좋아해서 너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가 어느 면이 좋다고 그녀가 저를 그토록 좋아할까요?”
“여인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거란다. 어떤 여인은 누군가를 놓고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데도, 다른 여인은 그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느냐?”
해모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때, 전자는 후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도대체 저 남자가 뭐 좋다고 저렇게 목을 매는가?’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냐?”
“그럼, 연 공주도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의 바탕을 가지고 있어서, 저를 막무가내로 좋아한다는 말씀인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내가 보기에도 넌 아주 매력적이고 멋진 대장부야. 왕녀와 천세미녀들까지도 네 앞에서 기가 죽고 너를 흠모할 만해.”
“하하하! 그거야, 어머닌 내가 친아들이니까, 그렇게 좋아 보이는 게 아닌가요?”
“아니다. 교만은 금물이지만, 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거라. 건전한 자긍심을 가져야 해.”
“그 다음, 또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들이 청혼할까요?”
“이건 내 추측인데, 적을 안심시켜 불시에 적의 허점을 찌르는 무서운 계책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웃음 속에 칼을 감추는 거지.”
“딸을 저에게 보내 놓고, 번조선이 마음을 놓고 있는 틈을 타서, 요서遼西(난하 서쪽)와 상하운장上下雲鄣(난하 최하류 북안부터 갈석산까지의 일대)까지도 침탈하려 한다는 뜻인가요?”
묘고미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순전히 선의로 혼사를 추진한다고 믿고 싶구나.”
“저도 그들의 호의를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참된 지혜는 사람의 선의를 믿으면서도 언제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 일로 이곳 군사들의 정신무장이 어느 정도 해제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거절해야 하는 건가요?”
“하지만, 네가 하늘의 음성을 들은 게 확실하다면, 상제님의 섭리가 있을 거다. 천제님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신다. 우리 생각에는 어떤 선택이 옳은 것 같아도, 나중에서야 틀린 것으로 판명 날 때가 종종 있지.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틀리지 않으셔. 하나님은 먼 미래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 천제님을 신뢰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오열고을에도, 상하운장의 드넓은 들에도 요수에도 봄빛이 무르익었을 때, 해모수는 연왕에게 답신을 보내기 위해 문방사보를 앞에 놓았다.
그 때였다. 백선의가 헛기침을 하고 들어오며 서신을 한 장 내밀었다.
“나리. 사신私信이 왔습니다.”
“누구의 편지지?”
편지를 받아들며 중얼거리다 말고, 해모수의 손이 떨렸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환화궁의 설이매 공주였기 때문이다. 그가 편지를 개봉하려 하자 백선의가 곁에 서서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모수가 웃으며 백선의를 돌아보니, 백선의가 입이 뾰루퉁해져 나갔다.
해모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설이매의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 서두에는 인사말 대신 노랫말이 실려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알 앓이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해모수는 처음 몇 자를 읽자마자 가슴이 뜨끔했다.
편지는 짤막했다.
당신을 두고 홀로 무겁고 외로운 발걸음을 옮겨, 겨우 장당경에 도착한 지가 어언 십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당신이 계신 머나먼 서남 하늘로 눈길을 옮기니, 하늘구름이 목전에 내려온 듯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바마마와 어머님께는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 당신이 이리 오실 수 없다면 내가 그리 가서 뵙겠습니다.
신유년 사월 여드레
봄기운도, 임의 기운도 일척 가슴에 가득한 날
천첩 설이매 배상
해모수는 대경실색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전에 설이매가 단 한 차례도 토하지 않은 언어다. 해모수는 한참동안이나, 글을 읽고 또 읽다가, 허공을 쳐다보다가 다시 읽어보다가 하기를 몇 차례 한 후, 편지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숫제 해모수가 자신의 남편이 다 된 듯한 어투였기 때문이다.
‘뭘 허락받았다는 건가? 결혼을? 이리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그럼 혼사가 저절로 이루어지는가? 아, 나와 예 공주 사이는 어떻게 되는가?’
잡다한 생각이 해모수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해모수는 호흡을 고르며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을 불렀다. 시간이 좀 지나자 가슴 깊이 황홀함과 평안이 가득 차 흘렀다.
‘그렇다. 정로로 가는 거다. 편법은 안 된다. 정로로 가되 지혜롭게 처리하자.’
해모수는 즉석에서 편지 두 통을 썼다. 하나는 연나라 왕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설이매 공주에게 주는 답신이었다.
연 왕에게는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공주 예와 혼인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혼사에 관한 확실한 결정은 일 년 후에 가능하다. 오할五割 이상은 혼인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으니 그 때까지 기다려 달라. 하지만, 혼인하지 않을 가능성도 삼사 할은 있다.
그러므로 이에 관한 일을 일체 비밀로 해 달라. 만일 이런 사실이 번조선이나 진조선에 알려질 경우에는, 우리의 혼담은 거기서 끝난다.
설이매 공주에게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장했다.
대부여大夫餘 청진淸眞공주 마마께.
제게는 맘에 둔 여인이 따로 있습니다.
신유년 사월 열여드레, 해모수 배상
당시의 진조선은 선대 구물임금이 서기전 425년에 새로 정한 “대부여”라는 국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나라 이름의 속칭은 “(진)조선”이었다. 번조선이나 막조선도 역시 여전히 “조선”이었다.
해모수는 두 개의 편지를 밀봉한 후, 백선의를 불렀다.
“선의야, 연나라로 보내는 이 편지는 역참驛站에 맡기고, 설이매 공주님에게는 이 편지를 너와 청아련이 직접 전달해 드리는 게 좋겠구나. 둘이 장당경에 다녀오겠느냐?”
“네. 나리.”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전달해야 한다. 명심해라.”
“네, 주의하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말을 태워 백선의와 청아련을 보내면서 해모수가 말했다.
“천천히 다녀오너라. 장당경에서 며칠 놀다 와도 괜찮다.”
두 여인은 장당경에 간 지 불과 한 달하고 수일 만에 되돌아왔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장당경에 도착한 즉시 편지만 받아 길을 재촉한 것 같았다. 손에는 설이매 공주의 편지가 들려있었다. 개봉해 보니, 다짜고짜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여인이 누구인가요? 기진인가요, 연은소인가요, 아니면 제 삼의 다른 여인인가요? 당신 맘대로요? 기다리세요.”
어투를 보니, 직접 오열고을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아, 이런 어쩌나?’
설이매의 눈처럼 차갑고 천첩홍매화처럼 고혹적인 얼굴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신분은 임금의 딸이고 얼굴은 천하절색인데, 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나 같은 사람에게 열정을 불태우나? 내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성격은 불같고 양보할 줄 모르며, 뭐든지 자기 뜻대로 하려 하는데, 만에 하나 우리가 결혼한다면, 결혼생활이 순탄하겠는가?’
해모수는 어느 새 이런 것을 저울질할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설이매가 그동안 해모수 자신을 매우 차갑게 대하면서, 그녀를 넘보지 말라고 수차례나 경고한 저의가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측정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였는가?’
어머니 묘고미향의 말씀이 떠올랐다.
“결혼생활이란 것은, 단순히 어여쁜 자태에 매혹당하고 끌렸다고 하여, 혹은 대장부다운 멋진 기개에 반했다고 하여, 저절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결혼의 행복은 삼진三眞(영혼)의 성숙에 달려 있단다.”
“삼진의 성숙이라면?”
해모수가 물었었다.
“성통공완을 얼마나 이루어, 삼신일체 상제를 얼마나 닮았느냐는 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어요?”
“너에게 물어보자. 네 살 된 어린아이와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길 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 누구의 잘못이냐?”
“물론 어른의 잘못이겠죠.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 거니까요.”
“그럼, 네 살 된 어린아이와 다른 네 살짜리 꼬마가 서로 싸우고 있다. 누구의 잘못이냐?”
“글쎄요. 둘 다 잘못한 게 아닐까요?”
“삼진이 성숙하지 못한 부부는 마치 네 살짜리 어린아이들과 같다. 두 사람은 만날 다투고 싸우지.”
해모수의 이해는 빨랐다.
“아, 부부 한쪽의 삼진이 어른으로 성숙해있으면, 그 싸움이 잘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어린아이는 떼를 쓰면 다 들어주니 때로 행복하겠지만, 어른은 아이의 땡깡 부림을 받아주려니 괴롭겠지?”
“그러면······.”
“둘 다 어른이 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말로써 상처를 주지 않고, 또 자기 의견을 서로 날카롭게 세우거나 다투지도 않고 원만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결혼한 부부는 대부분 자신의 영혼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스스로 어른이라고만 생각하지. 그러니 자기주장을 늘어놓기 일쑤고, 잔소리와 바가지 긁는 게 일상이고,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고 판단하기 쉽고, 상대를 제압하려 하고,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하지.”
“네. 다물 임금의 <행심록>에서도 ‘행심幸心,’ 즉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죠?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해야 한다고요.”
“바로 그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입이 죽어야 진짜로 죽은 거다. 부부간에도 입이 죽으면, 즉 내 주장,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견이 죽으면 행복해진다.”
“그러고 보니, 모든 다툼은 말에서 시작되는 거로군요.”
“그래서 말이 그토록 중요하다. 삼진이 성숙해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삼진에 힘이 있으므로 능히 자신을 조절하고 제어해서 자기 입을 죽일 수 있단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격을 닮지 못한 사람은, 머리로 알고 있어도 자신을 통제할 힘이 없어.”
“그러니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럼. 버럭 화내는 것이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하지만 화를 다스리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바로, 대다수 사람들이 그걸 다스릴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란다.”
“삼진이 성숙해진다는 건, 결국 자기 삼진을 통제할 능력이 생긴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 능력은 천제님으로부터 내려온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의 인격수양만으로는 그런 능력을 얻을 수 없어. 인격을 수양해서 고매하게 보이는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 즉 자신의 정곡이 찔리는 순간에는 무너지고 말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속에 잠겨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군요.”
“그러니 넌 배우자를 고를 때, 그녀의 삼진이 얼마나 성숙해있는가를 잘 관찰해야 해.”
“설이매 공주나 기진 공주는 어떤 것 같아요?”
“글쎄다.”
어머니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삼진이 성숙한 여인을 찾지 못하면 혼인하지 말아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다. 내가 혼자 살아보니까 편하고 좋긴 하지만.”
“네가 혼인하고 싶은 여인이 있으면, 그녀의 삼진이 성숙해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뭘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되지. 그냥 돕는 거야.”
“쉬운 일은 아니겠군요.”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면, 어린아이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
“삼진이 성숙한 배우자끼리 만난다는 것은 큰 복이군요.”
“너도 하나님께 그런 배우자를 달라고 기도해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설이매 공주는 그 삼진이 아직 어린아이였다.
‘내가 그녀의 응석을 받아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는가?’
난관에 봉착할 때면, 해모수는 즉시 무릎을 꿇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고르며 하나님을 부른다. 그 때마다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가슴에 가득해진다. 해모수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순리에 따라 나아가기로 작심했다.
해모수가 호흡기도를 하며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백선의였다.
“들어오너라.”
백선의가 뒷짐을 진 채 들어온다.
“나리, 실은······.”
“주저하지 말고 말해라.”
그녀가 매우 힘든 표정을 지으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실은, 실은, 저, 이번에 장당경에 올라갔을 때······.”
해모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환화궁에서 해로운 대인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그런데 대인께서······.”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라.”
“대인께서 나리께 전해 달라고 주신 게 있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죄송합니다.”
그녀는 뒤에 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자그마한 백단목합을 내놓았다. 일견하기에 매우 값지게 보이는 작은 함이었다. 함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열쇠가 꽂혀 있었다.
함을 열어보고 해모수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여러 점의 이름 모를 보석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보석과 함께 비단조각에 쓴 편지도 들어있었다. 개봉해보니 해로운이 해모 수 자신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아우야, 오열고을 성주를 통해, 너의 선행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듣고 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 필요한 곳에 사용해라. 너를 아끼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예전에 너의 유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금화와 은화 상자를 보내준 게 나다. 이것은 그보다 천만 배 값진 보물이니, 큰 도움이 될 줄 믿는다.”
대충 이런 문장이었다. 해모수는 상자를 붙들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백선의에게 말했다.
“이걸 산적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어떻게 여기까지 가져왔느냐?”
“공자님은 우리를 바보로 아시나요?”
백선의의 표정이 샐쭉해진다.
“실은, 실은, 해로운 대인의 가신들이 우리 둘을 여기서 가까운 곳까지 호위해주었어요.”
“그랬구나. 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와 다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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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2. 10. 5.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