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설명 아래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의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에 관련된 연설문 내용들중에서 기가 막힌 명언들을 임의로 뽑아보았습니다...이 연설문들을 한번 읽으면서 음미해보니, 현재 우리가 가진 "자주국방"과 "국가안보"의 정신이나 정책 등이 30여년전보다 못하고, 또한 아직까지도 30여년전, 박대통령의 연설문 내용조차 지키지 못하고, 또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지난 30여년(1980~2010) 동안, 도대체 우리 대한민국 군대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라는 공격적인 질문과 비판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게다가 엄청난 국방비를 투입하면서도 말입니다...실전에 약한 행정적인 모든 운영방식은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치명타입니다... ===============================================================
① "군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장에서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자는 데 있다. 적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비단 병력의 수, 장비의 우열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승의 요체는 군의 정신 전력에 있다. 즉, 엄정한 군기, 왕성한 사기, 그리고 필승의 신념에 있다" ---「1974년 3월 29일, 제30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② "땅굴은 북괴가 남침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므로 이를 하나의 관광대상(=아마 김대중이 땅굴을 천연동굴로 치부한 것을 가리키는 듯함)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후방에서 구경오는 사람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반공교육의 실습장이 되도록 세심히 신경을 쓰라" ---1975년 5월 23일, 전방 시찰에 나선 박 대통령이 각급 지휘관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③ "우리가 지금 말하는 "자주국방"의 개념이라는 것은……외부의 지원없이 북한 공산 집단이 단독으로 공격해올 경우, 우리도 우방의 지원없이 우리 단독의 힘으로 1대1로 능히 이를 격퇴하고 막아낼 수 있는 정도의 국방력을 빨리 갖추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앞으로 우리가 4~5년 내에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주국방"에 관한 개념이다.……다른 일이 다 잘 되더라도, 안보면에서 조금이라도 소홀한 점이 있거나 또는 어떠한 차질이 생길 때에는 우리가 해놓은 백가지 시책이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갈 염려가 많다. 따라서 모든 시책에 앞서서, 우리는 "국가안보"를 보다 튼튼히 하는 데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겠다." ---「1976년 1월 15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④ "정신 전력 면에 있어서, 우리는 북한 공산주의 군대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저들은 개인 우상숭배에 얽매여 입만 벌리면 혁명이니, 해방이니 하고 원시종교의 주문을 외듯이 교조적이고도 획일적인 교육으로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국군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높은 긍지와 우리의 민족문화와 전통을 수호 발전시켜야 할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1976년 3월 27일, 제24기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⑤ "전력이란 군장비, 성능, 훈련도, 사기, 군수지원능력, 국민과 군의 유대, 국방에 대한 국민의 관심, 그 나라가 처한 국제 환경, 우방과의 유대 및 경제적 저력 등을 포괄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그들(=북한 공산 집단)을 앞지르는 단계에 왔다. 우리는 벌써부터 "자주국방" 태세 확립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여 노력해 왔는데, 앞으로 이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하루빨리 완결지어야 한다." ---「1977년 1월 28일, 국방부 연두 순시」에서
⑥ "우리의 국방을 남에게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 땅과 우리의 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1977년 3월 29일, 제33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⑦ 멸사보국(滅私報國)의 희생정신으로 나라를 지키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은 곧 우리 해군의 전통이 되고 있다. 일찌기 임진왜란의 전화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장군은 "나는 나라와 더불어 죽을 각오로 이 땅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의로써 용전분투하여 기울어 가던 국운을 바로 잡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죽음을 각오하고 위기에 대처하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린다"는 충무공의 위대한 군인정신이자, 필승의 신념인 것이다. ---「1977년 4월 12일, 제31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중에서 작성일 : 11-04-12 02:29
㉿━②포토 박정희 시대 1961년(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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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文獻道 |
근대화 혁명의 첫 외침
‘재건국민운동’ ④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취임
1961.7.1~7.4
남자 버스 차장들. 1961-07-01. (조선닷컴 포토DB견본)
서울 시내버스에 탑승해 승객들의 요금을 받고 차량의 출발과 정지를 돕는 차장들이다. 제복을 입고 완장을 두른 모습이 활기차고 밝다. 이때만도 버스 차장은 여성들의 몫이 아니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을 환송하는 박정희 소장. 1961-07-01. (KTV-국가기록영상관)
5.16혁명으로 지휘권을 손상당한 매그루더 대장의 미8군사령관직이 부사령관이던 멜 로이로 교체되었다. 매그루더 대장의 미8군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 이임식이 미8군 영내에서 거행되었고, 서울운동장에서는 환송식이 있었다. 이어 7월1일 김포공항에서 매그루더 대장은 그가 진압하려던 혁명군의 리더 박정희 소장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한국의 새로운 변화에 밀려나는 모습이다.
7월1일 재건국민운동본부요원의 1차 합격자 발표 현장. 모집정원 374명에 응시자는 5천8백명으로 15대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1961-07-01. (조선닷컴 포토DB견본)
재건국민운동 경기인천촉진대회가 7월1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인천시내 남녀 중고등학생과 공무원 및 각 기관단체 인원, 일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61-07-01. (조선닷컴 포토DB견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7월3일 장도영 의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박정희 부의장을 의장으로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1961-07-03. (정부기록사진집5)
후일 장도영은 5.16혁명 이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군부 내에서는 쿠데타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50대 50이었다. 더욱이 30마일 밖에 북한군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전방부대를 이동시켜 유혈진압을 할 수 없었다. 아군끼리 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계엄사령관직을 수락했다.”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1년간의 군정 후 조기 민정이양을 주장했다. 그런데 박장군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행동한 것은 이 나라를 바로잡고 청신한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인데 1년에 무슨 혁명을 합니까’라고 했다. 그러면 한 2년 정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5년이고 10년이고 일을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지, 도중에 중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결국 장도영은 1961년 10월 반혁명 음모혐의로 재판에 회부,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5월 출감 후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선출로 5.16혁명 세력의 권력이 실체화되었다. 1961-07-03. (KTV-국가기록영상관)
송요찬 내각수반 임명. 1961-07-04. (정부기록사진집5)
7월4일 박정희 의장은 송요찬 내각수반을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부패를 일소함과 아울러 민족 정기를 바로잡고 국토통일에 앞장서며 국가경제 부흥에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선서했고, 박정희 의장은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되었으므로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이 나라 국가재건 사업에 앞장서 달라”고 훈시했다.
송요찬 내각수반과 함께 청와대에 인사차 예방. 1961-07-04. (정부기록사진집5)
▒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
그의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②
미 국무성, “윤보선 대통령 하야 반대”
1961.8.25~8.26
30사단 시찰. 1961-08-25.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국방과 경제가 두 축이었다. 북한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대통령은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붙여 나라를 지키려 했다. 국방을 통해 지키려 한 목적, 그리고 국방을 위해 갖춰야 할 목표는 가난이 없는 조국, 잘사는 조국이었다. 대통령은 본인이 병역을 기피했거나 아들을 기피시킨 사람은 요직에 중용하지 않았고 국회의원 공천을 주지도 않았다. 특별보좌관단을 만들기 위해 대학교수를 수소문할 때도 이 원칙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
박정희 의장과 최고위원들의 윤대통령 64회 생신 축하 예방. 1961-08-26. (정부기록사진집5)
생신 축하 예방이지만, 민정이양 계획과 대통령 하야문제로 불편한 만남이었다. 1961-08-26. (KTV-국가기록영상관)
“1961년 8월12일, 박의장은 ‘앞으로 2년 더 군정을 실시하고 1963년 여름에 민정이양을 실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격노했다. 박정희 의장에게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대통령은 8.15 기념일을 기해 하야를 강행하되 최고회의나 언론기관에 연락하지 말고 대변인 성명으로 끝내자고 했다. 하야성명의 골자는 ‘2년 군사정권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지정해주기까지 했다. 하야 결정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나 세 사람만 알고 있던 일인데 비밀이 그날로 외부에 새나가고 말았다. 하야가 결정된 다음날인 13일 아침 새로 부임한 새뮤얼 버거 미 대사가 급히 청와대를 방문하고 대통령의 하야에 대한 진위를 물어왔다. 대통령이 버거 대사에게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버거 대사는 웃기만 하면서 답변을 피했다. 버거 대사는 강력하게 대통령의 하야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개인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미 국무성의 공식 견해라고까지 강조했다. 대통령의 하야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 김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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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③
육영수 여사, 의장 공관의 손님맞이 1961.8.26~8.29
8월26일 활동적인 생활을 위한 신생활복 전시회가 열렸다. 여자 외출복 모습. 1961-08-26. (KTV-국가기록영상관)
“아버지가 5.16 일어나기 며칠 전에 백화점에 양말하고 내의를 사러 가셨더니 전부 일제, 미제, 홍콩제만 내놓더래요. 그래서 국산은 없느냐고 하니까 저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는 것을 상점 주인이 꺼내오면서 ‘국산이 있긴 하지만 이걸 어떻게 쓰겠느냐’고 차라리 외제를 쓰라고 하더란 얘길하신 걸 기억하는데 경제가 그런 지경이었죠.” (박근혜)
신생활복 전시회에 선보인 목면천의 남자 양복. 1961-08-26. (KTV-국가기록영상관)
농촌 여성을 위한 작업복. 가격은 한벌에 1,800환. 1961-08-26. (KTV-국가기록영상관)
“재건운동본부에서는 의복 간소화의 신생활 재건운동을 전개하여 실용성있고 활동과 손질이 간편하며 검소한 의생활로서 새시대를 열고자 재건복을 입도록 하였다. 재건운동본부에서는 하이웨이스트의 주름이 잡힌 원피스에 저고리를 변형시킨 듯한 볼레로와 브로치, 작은 꽃무늬, 줄무늬, 물방울무늬의 스포츠 칼라 투피스, 원피스 등 간편한 의상의 보급에 주력함으로써 중노년층과 농촌 여성에게까지 양장을 착용케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남자들의 재건복에 있어서는 군복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단순화, 기능화의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외에도 군사정부는 외국산 의류의 수입을 금하였다.” (서울 6백년사)
육영수 여사, 의장 공관에서 주한 외교사절 부인들과의 만남. 1961-08-29.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의장 가족은 1961년 8월16일 신당동 사저를 떠나 장충동 의장 공관(장충체육관 건너편 언덕받이에 위치)으로 이사했다. 육여사는 ‘혁명가의 아내’로서 자기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났으며, 외국인 손님 대접을 위해 요리책을 보고 의전 관계도 익혔다. 의장 공관은 크고 넓었으나, 응접실의 찻잔도 신당동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는 등 검소, 절제의 예전 생활양식은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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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①
1961년 8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출범
1961. 8.15~8.16
박정희 의장은 5.16후 첫 광복절을 맞아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책자를 펴냈다. 1961-08-15.
국가재건을 위한 국민운동은 그의 다이내믹한 카리스마에 의한 국가주도형의 톱다운 방식으로부터 국민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다운업의 패러다임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범국민적인 국가재건 운동에 몰두하는 그의 소박한 정열과 진정성이 담긴 것으로, 실사구시에 의한 혁명과업 수행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의장은 민정이양에 대한 압박으로 혁명정부 종식의 일정을 밝혀야 했다. 그가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함으로써 한미관계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있었지만, 민정이양은 혁명을 시작하자 마자 끝내 버리겠다는 모순의 약속이었다. 그는 경제개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모순 논리를 저돌적으로 돌파해 버린다.
1961-08-16. 전국경제인연합회 창립. (전경련 홈피)
“혁명직후 중앙정보부에서 불러서 갔더니 여러 경제 얘기를 하면서 의견을 묻다가 ‘경제단체 같은 것을 만들어서 경제인들이 국가재건에 기여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고 경제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경제인협회가 출범했다.” (이병철, 전경련 창립 20주년 특별좌담에서)
혁명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기업인들은 혁명정부의 요청을 수용해 이병철(삼성), 이정림(대한양회), 박흥식(화신), 설경동(대한산업), 정재호(삼호), 남궁연(극동해운), 홍재선(금성방직), 이양구(동양시멘트), 최태섭(한국유리), 김지태(조선견직), 함창희(동립산업), 조성철(중앙산업) 등 13인으로 경제재건촉진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이정림 회장의 대한양회 회의실에서 회의를 갖고 ‘경제재건촉진회’의 발기준비 모임을 가졌다. 1달여가 지나 8월16일 경제재건촉진회는 한국경제인협회로 간판을 바꿔달고 초대회장에 고 이병철 회장을 선출했다.
전경련 제1차 임시총회. 1961-08-16. (전경련 홈피)
“5.16 혁명이 일어나고 호암은 부정축재자로 연행되어 박정희 소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현행 조세법에 대한 근본적인 부당성을 설명하며 오히려 박 소장을 설득하였다. 호암의 역설에 공감한 박 소장은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기업에게 벌과금을 추징하는 것으로 수사를 종결했고 이 사건은 당초보다 가볍게 마무리되었다. 그 뒤 호암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나 그 벌과금을 기업이 발전을 위한 투자금으로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도록 설득하였다. 곧이어 박의장은 호암의 뜻을 헤아려 벌과금에 대한 투자명령 조치를 단행했다. 박정희 의장은 호암의 권유를 들어주는 대신 앞장서서 기업들이 투자명령에 따르도록 경제인들을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되어 기업인들은 경제재건촉진회의를 해체하고 한국경제인협회 창설을 시도하면서 호암을 초대회장으로 옹립하였다. 1961년, 호암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았다. 한국경제인협회 초대회장. 그것은 호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맡은 공직이었다.” (호암재단 홈피에서)
1960년대 일본을 왕래하던 이병철. (호암재단)
5.16 직후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된 상황에서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은 기업인들을 풀어주고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는 대신 기업인들이 국가 기간산업을 하나씩 맡아 일으키겠다는 것으로 이른바 ‘빅딜’을 한 셈이다. 오늘날 전경련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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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혁명의 첫외침 ‘재건국민운동’ ⑩
“박의장, 간도 크다. 그러니 혁명을 했지”
1961.8.12~8.14
박정희 혁명정부의 정권이양 계획 발표. 1961-08-12. (조선닷컴 포토DB견본)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라는 미국과 구정치인들의 요구는 혁명과업 수행의 걸림돌이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정권을 내놓으라고?” 박정희 의장은 때로 고심하고 때로 동요하는 듯하면서도 이 걸림돌을 넘어 뚝심있게 앞으로 갔다.
황지선 기공식. 1961-08-12. (정부기록사진집5)
강원도 삼척지구에서 산업철도인 황지선을 착공, 태백산 일대의 지하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군 지프가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보여준다.
박정희 의장 프로필. 44세. 사진 촬영일자가 중장 진급 후인 8월14일로 되어 있으나 소장 계급장을 달고 있어 그 이전에 촬영한 듯. 1961-08-14. (정부기록사진집5)
부산 영주터널
개통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는
박의장.
1961-08-14. (KTV-국가기록영상관)
개통된 터널로 모여드는
부산 시민들.
부산 영주동과 대신동을
연결하는
보도와 차도를 겸한 6백40미터 길이의 터널이다.
1961-08-14. (정부기록사진집5)
“박의장은 군복차림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행사장에는 그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윽고 테이프를 절단하려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하나, 둘, 셋! 하는 순간 쨍그랑! 하고 무엇인가 땅바닥에 박살이 났다.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난 쪽으로 쳐다보는데 박의장은 아무 소리도 못들은 것처럼 테이프를 자르고는 그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축용 비둘기와 오색종이를 가득 담은 대바구니를 매어단 대나무 막대기를 길 양옆에 세워서 테이프를 걸어두고, 귀빈들이 테이프를 끊는 순간 줄을 잡아 당겨서 그 대바구니를 터뜨리면 비둘기가 날고 오색 색종이가 흩날리며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멍청한 친구가 대바구니 속의 비둘기가 배 고파서 날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던지 대바구니 안에 비둘기 모이를 담은 큰 쟁반을 넣어 두었는데 대바구니가 터지면서 그 쟁반이 땅바닥에 그대로 박살이 난 것이란다. 어쨌든 그 조그마한 사건은 한순간의 웃음거리고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때 박의장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면서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와, 간도 크다’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기야 그런 정도였으니까 생명을 건 혁명도 일으켰을 것이고…나는 지금도 어쩌다 영주동 터널을 지날때면 30여년 전 그때 우리 국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으면 이 작은 터널 하나 개통하는데 국가원수가 참석했을까 싶기도 하고, 터널 개통식 때 쟁반이 박살난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인간 박정희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1999년 8월7일자 국제신문, 성병두의 부산시 野史)
금석지감이 현저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도로공사. 1961-08-14. (정부기록사진집5)
“이 사진은 1960년대 재건국민운동 용인군 촉진회 사진으로 비록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미 군용트럭 위 청장년들의 일터로 향하는 모습은 밝고 환환 모습으로 희망에 차있다.” (인터넷 동부신문)
“재건체조를 비롯해 ‘재건청년가’(유달영 작사, 형석기 작곡)와 ‘재건의 깃발아래서’, ‘태극기의 노래’, ‘새나라의 노래’(박두진 작사, 김성태 작곡) 등이 각급 학교와 재건대 교육장에서 울려퍼졌다. 혁명정부의 대과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경제개발의 첫 계획을 실천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우리 국민의 오랜 의식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음악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고 생활문화면에서도 서서히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가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땀 흘려 일해야만 했다.” (인터넷 동부신문)
“1961년 6월12일 공포된 '국가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국민단합운동, 학생봉사, 계몽활동, 허례의식일소를 위한 표준의례준칙제정, 국민저축, 의생활개선, 상도덕앙양, 기일내 납세, 시간관념 고취, 가족계획, 식생활개선운동, 문고보급, 자매부락결연, 사랑의 금고설치, 재해 및 기아추방, 국제친선 및 펜팔, 기념비 건설사업 등 국민총동원운동을 전개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모법(母法)인 1964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의 폐지로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로 바뀌었다가 1980년 공포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흡수됐다.” (인터넷 이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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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혁명의 첫 외침 ‘재건국민운동’ ⑨
영화<마부> “가난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1961.8.1~8.11
1961년 구정 때 개봉된 영화 <마부>.
고시공부를 하는 아들, 벙어리 딸 등과 더불어 살아가는 홀아비 마부 일가의 애환을 짙은 리얼리즘으로 담아냈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서민의 억척스런 삶과 함께, 마차가 지나다니는 서울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서정적인 영상 연출도 감명을 준다.
청계천의 판자촌도 그늘진 시대상의 한 부분이었다. 1961-08-01. (정부기록사진집5)
언커크(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대표 접견. 언커크는 1950년 국제연합총회의 결의에 의해, 한국의 경제재건과 평화회복을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1961-08-01. (정부기록사진집5)
국산 담배들. 1961-08-04. (정부기록사진집5)
“5.16 전에는 나도 양담배를 피웠지요. 혁명 후에는 딱 끊었소. (이렇게 말하고는 피우다 남은 아리랑 담배 꽁초에 불을 붙이면서 씩 웃는다) 담배는 하루에 이 놈을 두 갑 피웁니다.” (박정희 의장)
“내가 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점심을 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돈 10원짜리 냄비우동 한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그날 식단의 전부였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백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동서고금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이렇게 험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 KIST 이사장 김병희)
농어촌고리채 정리를 위한 간담회. 1961-08-05. (정부기록사진집5)
가난한 농어민의 고리채를 혁명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취지에서 실시된 이 정책은 군사정부 초기의 시책들 가운데 비교적 높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 광경. 1961-08-07.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 광경.
“박정희 의장은 ‘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라고 자문하고 ‘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자답하고 있다. 5.16혁명 당시의 한국이 반(半)독립국가, 반식민지국가와 다를 바없는 상태였다는 것은 61년의 한국의 자립도가 재정적으로는 39.2%, 국방비에 이르러서도 겨우 4.9%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도 명백한 것이다.”
(일본 東海大 교수 하야시 다테이코)
재건국민운동 시군촉진회 부회장회의. 1961-08-10. (조선닷컴 포토DB견본)
“이 시절 ‘재건’과 함께 유행하던 말이 ‘새나라’였다.장날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잡화상의 이름들이 ‘새나라 상회’, ‘새나라 쌀집’, ‘새나라 이발’ 등이 등장했고 장날 거나하게 취한 취객들이 ‘새나라 상회’ 앞에서 객기를 부리는가 하면 편리하고 간편한 재건복이 유행해 일터로 향하는 많은 남성들이 애용하는 등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오늘날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인터넷 동부신문)
박정희 의장의 중장 진급 후 기념사진. 1961-08-11.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한 것은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지 한달여 뒤인 8월10일이다.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중장 계급장을 단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 군 선임자들로부터 경례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한미군 지휘부 장성들과의 관계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10일 혁명 유공자 50여명이 특진할 때 박소장도 중장이 되었다. |
▒ 60년대 진로를 결정한 ‘월남파병 카드’ ▒
‘네이션빌딩’을 향한 발빠른 움직임 ⑤
60년대 진로를 결정한 ‘월남파병 카드’
1961.11.12~11.27
11월13일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희 의장. 1961-11-13. (국가기록영상관) 앞서 박의장은 시카고에 들러 유학생과 교민들이 주최한 환영조찬회에 참석한 후 13일 오후 4시 워싱턴 내셔널 에어포트 군용 터미널에 도착, 존슨 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박정희 의장의 도착성명.
존슨 부통령의 환영사에 이어 박의장은 도착성명에서 “미국과 한국 상호간 여러가지 문제들을 토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4일 백악관 방문. 1961-11-14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의장은 13일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저에 여장을 푼 뒤 이튿날 백악관을 방문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현관에서 박의장을 영접하고 있다.
아이들의 한복을 받아들고 있는 재클린.
케네디는 박의장에게 부인 재클린 여사를 소개했다. 박의장은 준비해 온 족자와 한복을 케네디 부부에게 선물했다.
박정희와 케네디는 패기만만한 40대 중반의 동갑나기(1917년생)였다 .
케네디는 “1951년에 잠시 한국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사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케네디의 자세를 응시하는 박정희. 1961-11-14. (정부기록사진집5)
박의장을 대하는 케네디의 자세가 강자의 여유와 우월감이 지나쳐 오만무례해 보였던 장면이 있었다. . 어쨌든 두 정상은 두차례의 회담 뒤에 공동성명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양 지도자는 양국간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굳은 우호적 유대 및 자유와 정의에 입각한 세계평화의 확립을 위한 공동노력을 강화할 결의를 재인식하였다”는 것과, 케네디 미 대통령이 “한국 신정부가 달성한 많은 발전상에 만족하며 한국의 장기경제개발의 촉진을 위하여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박의장에게 확약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양국 관계를 획기적으로 새롭게 진전시키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박의장의 ‘월남파병 카드’였다. 필요하다면 월남에 파병할 용의가 있다는 것. “박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월남파병 용의의 의사를 밝힌 것은 누구의 부탁을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카드로 던진 것이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월남파병에 대한 반대급부의 하나였다.” (김종필) 이후 ‘월남파병’은 정치, 외교, 경제가 얽히고 설킨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60년대의 가장 파워풀한 진운을 동반하게 된다.
16일 내셔널 프레스 클럽 방명록에 서명하는 박의장. 1961-11-16. (정부기록사진집5)
박의장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연설에 이어 기자회견을 한 뒤, 이튿날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 교포들의 환영 물결. 1961-11-17. (정부기록사진집5)
뉴욕에서 박의장은 한 호텔에 숙소를 정해 놓고 있던 맥아더 원수를 예방했다. 팔순의 건강한 맥아더 원수는 진지한 기쁨의 표정으로 박의장 일행을 맞아 기념촬영을 하고 1시간 동안 환담을 나누었다.
또, 마침 그곳에는 전경련의 외자도입 교섭단이 와 있어 그들이 접촉한 미국 실업인들과 함께 박의장의 면담을 고대하고 있었다. 박의장은 한국 기업인들의 외자유치 활동을 독려하고, 확고한 경제개발의 의지로 미국 실업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기내에서. 1961-11-20. (정부기록사진집5)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의장은 미 제6군사령관 존 L 라이언 중장 자택의 만찬회에 참석했다. 이 만찬에는 윌리엄 F 딘 퇴역 소장(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람)과 한국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도 참석해 한국전쟁 당시 한미 양측 전우들이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후 박의장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21일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하와이에서는 그곳에 망명해 와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의전비사관을 보내 위문토록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로에 오른 것이 11월24일―
11월25일 아침 김포공항에 도착한 박의장의 귀국 인사. 1961-11-25. (정부기록사진집5)
그는 귀국 인사말을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 정부와 국민들은 우리 혁명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지난 6개월 동안에 수행한 모든 개혁과 성과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하고 강력한 반공태세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의 계속적인 유지와 한국경제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혁명정부가 시도하는 장기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원조와 협조를 계속 제공할 것을 확약한 바 있습니다.”
27일 청와대로 윤대통령을 예방하고 귀국 인사를 했다. 1961-11-27. (정부기록사진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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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빌딩’을 향한 발빠른 움직임 ⑥
차관도입에 의한 경제개발시대 예고
1961.12.7~12.31
청계천 복개로 제2개통식. 1961-12-07. (정부기록사진집5)
1955년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두번째로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2킬로미터 구간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였다. 1958년 5월에 착공하여 4년간 총17억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인원 24만명이 동원된 방대한 공사였다.
외국방문 후 처음 기자회견하는 박의장. 공산 위협에 대처해 군사력 강화와, 빈곤 타파를 위한 경제재건을 강조했다. 1961-12-07. (국가기록영상관)
박정희 의장의 미국방문 결과를 미국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박의장은 그와 만난 미국 고관들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헌신적이고 총명하며 자신감이 있고 정부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으면서 한국이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미국이 자유세계의 지도자이며 지원자란 사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도 미국의 계속적인 지원 약속에 만족했을 것으로 믿는다.” (1961년 12월4일 러스크 미 국무장관이 주한 버거 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외교적인 성공과 아울러 박정희 의장의 지도력과 혁명정부의 헌신적인 자세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점점 높아지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난 5월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아무도 이 장교단이 누구이고 무엇을 할지 몰랐는데 이제 그들은 진정한 개혁을 추진하고 정직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능력있고, 열성적이며 헌신적인 집단임을 증명해보였다.” (1961년 12월15일 버거 대사가 러스크 장관에게 보낸 평가보고서에서)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경연대회. 농가부업 장려책의 일환으로 경기도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1961-12-09. (정부기록사진집5)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 의장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업발전과 공업발전을 놓고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지를 많은 사람들과 꽤 오랫동안 논의하고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업발전이라는 빠른 길을 먼저 선택하고 10년 후에야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에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다.
조국의 경제재건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교포 실업인들. 1961-12-22. (조선닷컴 포토DB견본)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행을 앞두고 외자유치에 의한 산업시설 투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지난 11월 서독에 갔던 정래혁 상공장관 일행은 약 3천7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마르크화 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키로 하는 차관협정을 체결했다. 1961년 12월13일의 일로, 이것이 5.16후 유치한 정부 차원의 최초 차관이었다.
한편 미국에 갔던 민간외자 도입교섭단은 밴플리트 장군의 열성적인 도움을 받아 미국 기업인들을 만나고 합작투자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해 돌아왔다. 이들은 12월16일 보고회를 열어 외자를 받아들일 국내 여건의 조성을 건의했다. 이들의 성과는 이듬해초 울산공업센터 건설로 가시화된다. 그리고 서독에 갔던 민간외자 교섭단은 세계적 기업들을 상대로 유치활동을 벌여 6개월이 지나지 않아 결실을 보게 된다.
바야흐로 적극적인 차관도입에 의한 공업개발의 시동이 걸리게 된 것이다.
소설가 최정희 여사와의 만남. 1961-12-23.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의장은 6.25전쟁 이후 시인 구상, 소설가 이병주 등과 교우 관계가 있었다. 최정희 여사는 1930년대부터 여성소설의 꽃을 피워낸 개척자의 한 사람. ‘국경의 밤’, ‘남촌’ 등으로 유명한 시인 김동환이 최여사의 남편으로 전쟁 때 납북당했다. 5.16 이후에는 육영수 여사가 남편에게 각계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서울국제방송국 개국식에 참석, 연설하는 박의장. 1961-12-31. (정부기록사진집5)
1961년 12월31일은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TV)을 개국함으로써 본격 흑백TV시대가 개막된 날이기도 하다. TV방송이 첫선을 보인 것은 국영방송 KBS가 탄생하기 5년 전의 일. 56년 5월 민간 상업방송 HLKZ-TV가 발족하였으나 경영악화와 화재사건으로 문을 닫고 KBS-TV의 등장으로 수상기의 보급과 방송이 대중 속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후 70년대에 국내 컬러TV가 생산되고 방송사의 컬러방송이 가능해졌음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값비싼 컬러TV가 일부 부유층에게만 소비되어 대다수 농민과 도시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준다는 이유로 컬러방송을 불허, 끝내 흑백TV시대의 대통령으로 남았다. 컬러TV방송은 10.26후 바로 이루어졌다.
위 사진의 박의장 옆에 놓인 석유난로와 전기히터가 당시의 경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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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빌딩’을 향한 발빠른 움직임 ④
화끈하게 치른 한일정상회담
1961.11.11~11.12
“다녀오겠습니다.” 김포공항 송영대에서 출국인사를 하는 박정희 의장. 1961-11-11. (정부기록사진집5)
5.16후 국가 최고지도자로 처음 외국 방문길에 오르는 박정희 의장. 회색 코트에 검은 양복, 짙은 색의 넥타이 차림으로 출국인사를 하면서 미국 방문에 대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 국민 여러분의 절실한 요망이 무엇이며 한국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의장은 15명의 수행원, 그리고 10여명의 기자들과 함께 대한항공(KNA)의 컨스틀레이션 4발기에 탑승, 일본을 거쳐 미국을 다녀오는 여정에 올랐다.
11월11일 오후 4시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 도착,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영접을 받았다.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하네다 공항 2층 옥상에서는 약 5천명의 재일교포가 태극기의 물결로 열렬히 환영했다. 박의장은 손을 들어 답례했다.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도착성명을 읽는 박의장.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박의장은 성명서에서 자유진영의 우호와 단결을 강조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6차 한일회담이 빨리 타결되도록 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왔다”고 밝혔다.
이케다 총리 주최 만찬. 1961-11-11. (정부기록사진집5)
11일 저녁 박의장은 이케다 총리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박의장은 만찬 답사에서 “날씨가 좋으면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가깝다”면서 "한일회담은 사소한 문제로 논란을 되풀이하지 말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의장과 이케다 총리(우측). 가운데는 정일영 통역관. 1961-11-11. (국가기록영상관)
11월12일은 일요일이었다. 오전 10시 이케다 수상 집무실에서는 양측 실무 대표자회담과 함께 박정희 의장과 이케다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1시간20분간 진행된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일제 청산과 경제협력 등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현안을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박대통령은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한일국교 정상화를 우리 국민이 원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식자들은 일본의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등 과격한 용어까지 사용했다. 이 같은 무섭고도 공격적인 태도에 이케다 총리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듣기만 했다. 권투경기에 비유하자면 박대통령이 이케다 총리의 전신을 두들겨 KO시킨 기분이었다.” (통역관 정일영) 대일청구권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분명한 어조로 전달해 화끈하게 치른 한판 승부와 같았다는 것이다. 박의장의 한일국교 정상화 의지는 과거사에 얽매인 명분론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실용주의로 민족 자존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영친왕 이은 공(公)의 부인 이방자 여사 접견. 1961-11-12. (정부기록사진집5)
12일 오후 4시40분 박의장은 숙소인 영빈관에서 이방자 여사를 접견했다. 이은 공은 뇌혈전증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이 졸도한 소식을 듣고 박의장이 주일공사를 통해 즉시 입원시켜 드린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본국에 돌아가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의장은 영친왕의 귀국을 환영하며 치료비와 생계비 등을 정부에서 책임질 것을 약속했다.
박의장 주최 만찬. 1961-11-12. (국가기록영상관)
12일 오후 6시30분부터는 영빈관에서 박의장 주최의 만찬에 이케다 총리와 고사카 외상 등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초대되었다. 만찬이 끝난 뒤 박의장은 재일동포 대표 50여명을 만났다. 이 자리에는 차관도입 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가는 정래혁 상공장관 일행이 합류,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날 밤, 박정희 의장은 일본 체류 30시간의 바쁜 일정을 끝내고 휴식할 틈도 없이 하네다 공항에서 노스웨스트 여객기에 탑승했다. 서울에서 타고 온 국내 항공기는 대양을 건널 수 없는 구형이어서 미국 여객기의 한구석을 빌어 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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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빌딩’을 향한 발빠른 움직임 ③
정부와 기업인들이 해외로 뛰기 시작했다
1961.11.1~11.11
조선호텔 개관식에 참석한 박정희 의장(중앙). 1961-11-01. (정부기록사진집5)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사업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민간기업인들이 노력으로 외화획득 산업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61년 8월22일 관광진흥법의 제정과 다음해 제정된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관광호텔들에게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설을 기준으로 우수한 호텔을 선정, 관광호텔로 분류하여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네이버 지식iN, ‘한국 호텔의 역사’ )
11월2일 전경련 민간외자 도입 교섭단 미국 향발. 1961-11-02. (전경련 홈피)
1961년 11월은 박정희 의장의 미국, 일본 방문 일정이 잡혀 있었다. 혁명정부의 분주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기업인들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11월2일 전경련 회장 이병철을 단장으로 하는 민간외자 도입교섭단이 미국으로 떠나고, 8일에는 이정림 대한양회 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제2 교섭단이 유럽으로 떠났다. 이때 정부는 미국, 일본 외에도 경제개발의 돌파구로 전후의 경제부흥에 성공한 서독에 기대를 걸고, 정래혁 상공장관과 백영훈 특별보좌관을 축으로 하는 차관교섭 사절단을 서독으로 보냈다. 정부와 기업인들이 차관도입을 위해 해외로 발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대장으로 진급한 박정희 의장에게 윤대통령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1961-11-04. (정부기록사진집5)
박정희 의장의 외국 방문을 앞두고, 정부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로서 위상을 고려해 대장 진급 절차를 밟은 것이다.
11월5일 박의장은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을 접견했다. 1961-11-05. (KTV-국가기록영상관)
미 국무장관 딘 러스크가 일본에서 무역경제회담을 마치고 4일 한국에 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 사람들이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미국은 한일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양국간에 해결할 문제이며 미국은 조정자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튿날 의장 공관에서 딘 러스크 장관의 예방을 받은 박정희 의장은 그에게 5.16혁명 기념패를 전달하고 육영수 여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외국방문 인사차 윤대통령 예방. 1961-11-11. (정부기록사진집5)
11월11일, 박의장은 미국, 일본 방문을 위해 의장 공관을 나서 먼저 청와대로 윤대통령을 예방했다.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다.
효창운동장의 문화예술인 체육대회. 1961-11-11. (KTV-국가기록영상관)
이어 박의장은 효창운동장에서 열리는 공보부 주최의 문화예술인 체육대회에 육영수 여사와 참석해 관계자들을 격려한 뒤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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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국과 민족을위해 목숨까지 받치신 박정희 대통령! 그시절을 다시 볼수있어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