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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다의 추억거리가 부족했던가.
나는 타고난 홈리스(homeless)?
나의 숙면에는 침대보다 맨 바닥이 좋다.
집 안의 맨 바닥보다 집 밖의 맨 땅이 더 좋다.
맨 땅 중에서도 텐트 안보다 통비닐 안에서 더 완전한 숙면을 한다.
그래서, 통비닐 침실의 개발로 내 배낭이 더 가벼워졌고 산과 길의 여정이 한결 편해졌음에도 텐트를
선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거의 전천후인 텐트와 달리 통비닐은 우중의 야외에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단잠에 취하게 된 아게다의 밤.
뽀르뚜 길에서 오랜만의 꿀잠이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 것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니까.
이 곳 관광안내소 여직원의 '비 없다'는 날씨 안내에 걸맞게 별들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안심했으므로
비에 대비하지 않았음은 물론 빗물이 잠자리까지 스며들고 있었는데도 모를 정도였던 것.
허겁지겁, 처마 밑으로 텐트를 끌어갔다.
그러나, 이럴 수가.
어떤 물체가 발길에 걸렸는데, 깊이 잠든 사람의 몸이었다.
늦은 밤에 와서 자고 새벽같이 나가기 때문에, 그 사실을 건물(광광안내소) 관계자도 모르는, 그곳이
그의 숙소인 토박이 홈리스의 몸.
심야의 침입자에 놀란 그 보다 침입자인 내가 더 당황스러웠으며, 텃세(?) 부리지 않고 선선히 받아
주어 고마웠다.
돌연한 비 때문임을 밝히고 제스꿀삐(desculpe/미안)를 연발했지만 거부하면 대안이 없지 않은가.
어제 구입한 먹거리가 충분하므로 아침식사를 함께 함으로서 고마운 마음을 표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북새를 떨다가 새벽 잠에 빠진 새에, 날이 밝기 전에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잠간의 소나기였는지 비는 진즉 그쳤으나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를 수 없게 된 아침이었다.
텐트와 대부분의 세간이 비에 젖었기 때문이다.
젖은 것들을 말려야 하기 때문에 그 새에 평소에는 거르던 아침 요기를 했다.
홈리스씨가 이미 나갔기 때문에 나홀로가 됨으로서 심야의 비가 만들어 줄 뻔한 극동의 늙은나그네와
서단의 그를 엮는 새 인연은 무산되었고, 다른 유혹이 압박해 왔다.
어제 석양에는 관광안내녀가 적극적으로 권한 2가지 일을 단호히 묵살했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 가고
노느니 염불한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고 나온 것.
매년 여름(7월~9월), 아게다(Agueda)의 주요 거리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우산들로 덮히게 된단다.
우산의 도시(Umbrella City)답게 거리의 걷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우산 캐노피(canopies)
가 생기며 이름하여 '아지따게다'(AgitÁgueda)라는 예술축제라고 관광안내녀는 홍보했다.
다체로운 우산 3.000여개로 구성된 만화경 같은 캐노피는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경관이었다.
장식된 가로등기둥, 벽화 기타 예술 설치물이 있는 아름답고 고풍스런 예술 축제장으로로 변모하는데
아직 6월이라 아쉽다는 말까지 덧붙인 관광녀.
아게다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행사는 2011년에 시작한 '엄브렐라 스카이 프로젝트'(Umbrella
Sky Project)인데 막바지 작업 현장을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즐길 거리일 뿐 아니라 아게다의 랜드마크라는 이 경관은 간밤에 눈요기를 했다)
레스토랑 비달(Restaurante Vidal)의 '레이땅 아 바이하다(Leitão à Bairrada/애저)도 홍보했다.
스페인에서도 레촌(lechon/애저) 요리 간판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내 주변에도 애저집을 찾아다니는 식도락가들이 있으나 갖난 새끼 돼지를 통째로 굽거나
찜해서 먹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았는데 이베리아 반도까지 가서 먹고 싶겠는가.
더구나 짝이 있다 해도 내키지 않을 텐데 혼자?
소나기 후는 쾌청한 것이 날씨의 상식인데도 음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침.
이 아침에 내게 필요한 것은 쨍쨍한 햇볕과 시원스럽게 불어주는 바람인데 미풍이 있을 뿐 금시 비가
쏟아질 것 같아서 건조 난망이었다.
물 먹은 솜을 짊어지고 가는 나귀(Aesop 禹話)처럼 잔꾀를 부리지 않았으며 그럴 염(念)을 가진 적도
없건만 무슨 벌인가.
우산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길 떠나라는 가는 비인가.
오락가락하는데도 엄청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일어서야 했다.
애저는 단호히 거부했으나 '엄브렐라 스카이 프로젝트'의 유혹은 여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치한 텐트와는 지호지간이다.
간밤에 대충 살펴 보았는데도, 그랬기 때문에 더 아쉬움이 남는 것 아닐까.
철부지가 무심코 던진 돌맹이에 다치는 연못 속의 물고기?
아게다 강(Rio Agueda)을 건넜다.
A1 고속도로의 건설 이전, 리스보아 ~ 뽀르뚜 간의 길이 N1 국도뿐이었던 때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
놓았다는 옛 다리(Ponte Velha de Águeda)를 건널 때 시각이 아침 10시.
내 시계는 스페인 시간이니까 이곳(Portugal)은 9시지만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간이다.
평소라면 해를 가려주는 날씨가 오히혀 다행이었을 것이나 불가피한 경우라 하겠지만 겸연쩍은 데다
까미노에서는 원치 않는 지각 출발의 신기록이라 적잖은 실망도 안아야 했다.
게다가, 매우 아름다운 강안과 다리의 야경이 준 간밤의 감흥과 달리 저조한 느낌이었으니까.
늘 하던 대로 새벽같이 길을 떠났더라면 이같이 실망스런 민낯을 보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또, 길지 않은 다리를 건너는 짧은 시간을 놔두지 않고 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걸은 뻬레그리노스는 이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배가 운행되어야 할 만큼 강폭이 넓지 않고 징검다리 흔적도, 우회 길도 없으니.
까미노(뽀르뚜길)의 개설이 국도 신설 이후라면 문제될 일이 아니므로 갈길 바쁜 중에도 다리의 건설
시기를 확인하려고 다리 양쪽 끝을 오갔지만 실패했다.
까미노는 다리를 건넌 직후 N1 국도를 떠나서 좌측 길(R. Dr. Manuel Pinto)을 따라 남하하는데도
국도를 따라 직진하고 있을 정도로 그 생각에 골몰해 있었건만.
국도를 따라가도 잠시 후에 까미노에 진입할 수 있음을 그 때는 몰랐기 때문에 다리로 돌아가서(잘못
간 길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상책이니까) 확인한 것은 좌측의 전주에 그려진 파란 화살표.
까미노 파띠마(리스보아)로 가려면 직선 도로(N1국도)를 떠나라는 명령어다.
국도를 떠난 까미노는 N230(N333) 도로를 아치형 지층으로 횡단한 후 M606 도로와의 X자십자로를
건너기 까지 꽤 너른 공지(Parque da Cidade?)를 통과하는 길(R. Dr. Manuel Pinto)을 따른다.
띄엄띄엄 있는 우람한 나무들과 노폭이 넓지는 않으나 이베리아반도(특히 뽀르뚜갈) 전통의 돌 포장
인 것으로 미루어 꽤 오래된 길인 듯.
뽀르뚜갈의 국토 면적은 우리(대한민국의 남반부)와 비슷하나 인구가 우리의 5분의 1에 불과하므로
수치로는 우리의 5배나 넓기 때문에 오래도록 공지로 놀려도 아깝지 않다는 건가.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데도 자기의 한계를 넘은 배낭을 이유로 공지에서 잠시 쉬자는 체력.
걷는 것 이상의 당면 문제가 배낭 무게의 원상복귀라는 뜻이다.
적시에 말리지 않으면 변질되어 악취를 비롯해 사용에 지장이 많을 문제도 무게를 가중하고.
쾌청한 날씨라면 이 널따란 공간 아무데나 펼쳐 놓으면 쉬이 마르련만 기대 난망이니 알베르게를 만
나면 주행거리에 구애받지 말고 묵으면서 배낭과 세간의 건조작업을 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때마침, 다가오고 있는 중년남.
순방향 뻬레그리노로 보이는 그에게 알베르게의 위치를 물었다.
멀대처럼 장신에 싱거운 이미지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아무데나, 도중에 알베르게가 있으면 걷기
를 중단하려고 물은 것인데 거두절미한 단답이 왔다.
"낀세(quince/스페인어 15) km"
내 영어 물음에 국적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도 그는 "나는 영어 모르는 에스빠뇰(español스페인남)
입니다" 에 다름 아닌 말이 내포된 답을 한 것이다.
까미노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자국어 외에는 영어가 일반적이다.
자국인 간에는 당연히 자국어를 사용하지만 타국인과의 대화 수단은 대개 영어다.
프랑스와 뽀르뚜갈 땅이 포함된 까미노(Camino Frances, Camino Portugues)에서는 프랑스인들
의 자국어 고집과 달리 뽀르뚜갈인들은 타국인과의 대화를 영어로 하며 영어 구사력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스페인에는 도농 간에 영어 문맹자가 태반이며 그들에게는 대체어(스페인어 외의)가 없는데
이 사람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또, 그가 계속 종주자라면 15km 전방의 알베르게(그가말한)에서 1박했을 것이며 꼭두새벽에 출발한
준족이라 해도 아직 도착할 수 없는 시간이고 거리다.
그러므로 육상교통이 편리한 어느 지점에서 끊었다가 되돌아와 이 아침에 걷기를 재개했으리라.
그는, 아마도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홀로, 구간 종주 중인 스페인 남일 것.
그의 언어는 스페인어 뿐이고 내 스페인어는 유아 수준이기 때문에 이같은 추측으로 끝내고 일어서
려는 내게 불쑥 말을 걸어온 그.
"하뽀네스?"(Japones/일본사람)
"뭐?"
어찌나 큰, 벼란간의 고함이었는지 그는 물론 소리지른 내가 경악할 정도였다.
무심코 돌을 던진 철부지 애와 그 돌맹이에 상처를 입은 연못의 물고기에 비할까.
까미노에서 내가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유일한 경우가 치노(chino/중국인) 또는 하뽀네스(japones/
일본인)로 비칠 때임은 누누이 말해 왔다.
우매한 선조들로 인하여 중국의 속국이었거나 일본의 식민지였던 불행한 역사가 치명적 자격지심이
되고 유일한 아킬레스건(achilles腱)이 되어 있을 줄이야.0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했다.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에스빠뇰.
멀대 같은 그에게 보다 나에게 쏟아붓는 부아가 더 컸다.
순례자(Peregrino/Pilgrim)를 자처하며 지구의 극동에서 온 늙은이.
유럽의 서단, 이베리아반도를 걷고 있으면서 이 정도의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
물 없는 음수대와 지도에만 있는 교회의 운명은 ?
까미노는 M606 도로를 X자 형태로 건넌다.
직전의 산만한 길과 달리 길 양편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안온한 마을길(R. Dr. Manuel Pinto에서 R.
Dr. Antonio Breda로 바뀐 길)이다.
남행을 계속하며 소규모 교회(예배당) 사르당(Capela do Sardão)을 지나 아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헤어졌던 N1 국도를 횡단한다.(N1국도를 따랐다면 여기에서 까미노에 진입)
이후, 완만하게 오르는 길, 라제이라 아딸류(Ladeira Atalho)라는 이름의 길이 시작된다.
경사진(ladeiira) 골목길(Atalho)이라는, 길의 상태를 말하는 뽀르뚜갈어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도로
명)로 사용되고 있는 길.
내력을 알 길 없으나 1km 미만의 짧은 소로지만 흔하지 않은 도로명일 것이다.
도로, 교량, 기타 지역 공공시설의 작명은 사유물과 달리 즉흥적일 수 없다.
주 이용자인 주민간의 서로 다른 욕구가 충돌하지 않도록 의견의 청취와 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최선 보다 공동의 차선을 택할 수 밖에 없기도 한데 이 도로명이 그 경우가 아닌지.
소로지만 절개한 길이다.
경사도를 낮추기 위해서 동산(야산자락)을 절개한 것으로 보이는데, 최고부의 절개 높이는 3 ~ 4m쯤
으로 어림되며 지붕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게 하는 길.
길 이름처럼 노폭이 좁은 골목길의 개설에 이처럼 많이 투자한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걸어온 까미노에서 드문 길이다.
전진 100여m의 좌측 노변에 음수대(fonte do Atalho)가 있다.
실비가 멎었으나 우중충한 날씨였기 망정이지 볕이 쨍쨍했다면 행인의 낙담이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연륜이 꽤 돌았을 듯 싶으나 아무 안내도 없이 먹통이니까.
나는 좀처럼 갈증에 시달리지 않는 건성 체잘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 나무(마태오복음21:18~22)를 떠올리게 한 음수대다.
길 이름이 바뀌는(R. Chão da Moita로) 복(複) 삼거리 사이에 자리한 까페(Cafe rasteiro).
하스떼이루는 오늘 일과를 시작하여 만난 첫 까페다.
도중에 카페가 없다는 단언이 아니다.
아예 없거나 있는데도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으니까.
2km남짓 걸었을 뿐인데도 어깨를 누르는 백팩무게가 앞길이 걱정되도록 심하게 압박해 왔기 때문에
쉬어갈 요량으로 야외 의자에 앉았다.
에스빠뇰로 인해 다운된 기분의 전환 없이는 극복이 어렵겠다고 예상되었다.
어떤 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고전이 불가피한 하루가 될 것으로.
걸으면서 기도하고, 걷는 것이 곧 기도인 내 까미노 생활에서 교회문을 열고 싶은 때가 더러 있다.
이따금이지만 무릎 꿇고, 여느 때보다 간절히 기구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 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까페 건너편에 까뻴라(Capela das Alminhas/예배당)가 있음을 구글 지도에서 확인했는
데도(간밤에) 실망스럽게도 현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
아무리 소규모라 해도, 교회는 쉬이 눈에 띄는 외형이건만 그 자리에 있는 건물은 분명코 여염집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지겠는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물 없는 음수대, 실체 없는 교회 모두 같은 운명 아닐까.
뽀르뚜갈 땅, 아게다의 이사벨
한번 마음이 동하면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정머리에는 꿩이 없으면 닭이라도 있어야 한다.
백팩에서 오카리나를 꺼낸 이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도다. <중약>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꺼낸 오카리나로 부른 시편 23편 곡이다.
서양음악이 대세일 때 선토착화 후현대화를 주창한 한국의 민족주의 음악가(musical nationalism).
우리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보다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심혈을 바친
나운영(1922~1993)이 작곡한 기독교 성가다.
6. 25 민족동란으로 부산에서 피난생활 중이던 1953년에 작곡하였다는 곡.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인지 젊은(30대초반) 작곡가 답지 않게 간절한 호소가 짙게 담겨있고
전통음악의 가락이 물씬하여 생경한 느낌이라는 것이 당시의 평이었다.
총성은 멎었으나 폐허로 변한 서울에서 부활절을 맞아 칸타타(Easter Cantata) 발표회가 있었다.
참가한 경연 합창단들 중 한 팀이 이 곡을 불렀는데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온통 부족한 것 뿐인데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송가 같으나 부족함이 없게 해달라는 기구다.
선한 목자인 당신의 양이라는 고백과 다짐을 전제로 한 갈구.
기독교를 역설(逆說/paradox)의 종교라고 말한다.
8복을 비롯하여 예수의 산상 설교와 행적이 그러하며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 패러독스의 절정이며
주기도문에서 명료하게 가르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는 이미 시행한, 완료형이 아니다.
언제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를 전제로 한 우리 잘못의 용서를 의미하니까.
아침 나절이기 때문인지 맘놓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내가 유일한 고객인 까페 하스떼이루.
커피 한잔을 탁자에 놓고 기독교 성가를 연주하고 있는 늙은 뻬레그리노에게 관심이 일었는가.
지긋한 나이의 여인(주인녀?)이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다.
영어를 썩 잘 하나 의외로 국적이나 나이에는 관심이 없는지 대뜸 크리스천이냐고 물어온 그녀.
유럽 서단인 이베리아반도의 이 여인이, 성가에 여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득하게 먼 극동에
자리한 한국 작곡가의 곡까지 알기를 바라겠는가.
디만, 성가라는 느낌이 드는 곡을 부른다면 아마도 크리스쳔이리라고 짐작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맘에 드는 곡을 들었다며 커피 값을 받지 않겠단다.
1차 뽀르뚜길 때(2011년5월), 뽄떼베드라의 이사벨(메뉴'까미노이야기' 60번글 참조)과 닮은 꼴이다.
그래서, 기억 속에 담지 못한 그녀를 나는 '뽀르뚜갈 땅, 아게다의 이사벨'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한 이베리아 반도의 같은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자리하고 있다.
전자가 스페인 땅, 뽄떼베드라(Pontevedra)의 키오스꼬(quiosco/야외매점)를 무대로 하고 있다면
후자는 뽀르뚜갈 땅, 아게다의 까페 하스떼이루(Cafe rasteiro)에서 벌어진 것이 다를 뿐.
그럼에도, 그 때처럼 카메라에 모습을 담았고 주소(e-메일) 성명을 받았는데도 이사벨과 하고 있듯이
교신하기는 커녕 사진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디카에 담은 USB를 비롯해 모든 것이 들어있는 백팩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노르떼길, 뽀르뚜길과 쁠라따길 일부의 것이지만 2차 까미노 걷기 반년여에 연을 맺은 지구촌
모든 이의 주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어떤 약속도 영영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내 일생을 돌이켜 보면 이 도둑까지 81년 세월(2015년당시기준)에 그들과의 악연이 유난히도 많았다.
강 절도를 비롯하여 갖가지 도둑에게 당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고 세태에 대한 탄식이 여간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잊혀져 갔고 원망도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지중해변 알메리아(Almeria)의 백팩
도둑에 대한 한(恨)과 원망은 세월이 갈 수록 더 커가고 깊어가는 것 같다.
까미노의 전체 루트 6천여km를 반추할 때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실 없는 늙은이가 되게 한 도둑이
더욱 원망스러워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내게는 천금에 다름아닐 만큼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으나 도둑에게는 선물 받은
기념 의류와 소품들 외에는 모두가 무용지물이라 통째로 버려졌을 내 백팩.
"내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백팩이나 캐리어, 가방 기타 소지품들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이다.
주의를 환기하는 충언 같으나, 소위 선진사회라는 유럽의 도둑이 오죽이나 극성스러우면 수치스럽기
짝이 없고 치욕에 다름 아닌 말이 나돌고 있을까.
안주 다 구아르다(Anjo da Guarda/수호천사) 넬슨(Nelson)
이사벨과의 만남 이후 하루가 순조로웠던 것 처럼 이 시간 이후도 그리 되기 바라며 일어섰다.
아게다 다운타운의 관광안내소를 떠나 첫 마을 사르당(lugar de Sardão)을 지날 때는 터벅거렸으나
조금 가벼워진 듯 한 걸음.
막막한 하루가 예상되었으나 잠시나마 휴식과 정감있는 대화가 만들어 낸 힘일까.
과연 공짜와 대화의 효과?
백팩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고 이 느낌이 불러온 공짜(커피또는맥주)에 얽힌 사연들을 반추하는(별첨)
새에 아게다의 남쪽 산단 언저리 길에 들어섰다.
각종 공사로 어수선하지만 곧게 정비된 길.
이스트라다 헤알 길(Rua Estrada Real)이며, 뽀르뚜 길(Camino Portugues)이 얹혀 있는 도로다.
노폭이 좁기는 하지만 '헤알'(Royal)이라는 길 이름으로 보아 오래된 중요(Original)도로였을 것이며
까미노로 선정된 것이 당연한 길.
지나온(어제) 아게다 북쪽처럼 남쪽도 바야흐로 변화의 바람이 거세어 가고 있는가.
아득한 야고보 시대는 물론, 까미노(뽀르뚜길)를 획정할 때 설마 예감하고도 이 길을 고집했겠는가.
뻬레그리노스가 오래지 않아서 공해지역을 걷게 하려고?
이름 바뀌기만 거듭할 뿐 지지부진했으나 바야흐로 속도감이 붙는 듯 한 길.
날씨도 가라고 가랑비 내리던 아침나절과 달리 땡볕으로 바뀌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끈적끈적하는 것 보다는 구슬땀을 쏟아내는 땡볕이 걷기 덜 나쁜 날씨다.
권태를 쉬이 느끼기 십상인 곧은 길이지만 후자의 날씨로 바뀌면서 걸음이 가벼워졌는가.
지루하게 느껴졌던 아게다를 지나 바후(Barrô/2013년에 Aguada de Baixo와 합병)에 들어섰다.
지자체 아게다와 동명 프레게지아의 남쪽 마을로 본격적인 산단지대(Zona Industrial de Barrô)다.
사르당(Lugar de Sardão)에서 3.4km지점.
빠듯하게 짜여진 일정에서는 단 1번의 차질일지라도 남은 모든 일정에 손을 대야 한다.
도미노처럼 연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명적이 아니라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도중하차가 없어야 한다.
당초의 일정표(Mealhada까지) 대로 25km 이상을 강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행히도 이를 시도할 정도로 몸이 호전된 상태였다.
바야흐로 박차를 가하려는데 소형차 1대가 서행으로 다가와서 나를 세웠다.
시코쿠헨로의 여인처럼(메뉴 '시코쿠헨로 참조)
봉지 1개를 들고 차에서 나온 초로남(初老男)이 몇 마디 말과 함께 그 봉지를 내게 주었다.
내가 알아들은 것은 올라(Ola)와 봉 까미뉴(Bom Caminho/스페인어Hola, Buen Camino) 뿐이었
지만 까미노 장도를 축원하며 격려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봉지 안에 있는 얼음 냉수 1병(350ml)과 사과 2개가 이 추측의 입증이다.
불같은 햇볕이 작열하는 한더위에 걷고있는 뻬레그리노에게 이보다 더 귀한 축원과 격려가 있겠는가.
고마운 그를 디카에 담고 사진 보내줄 것을 약속하며 주소(e-mail)도 받았으나 실없는 늙은이로 만든
도둑을 원망할 뿐이다.
다른 경우와 달리 이름만은 기억되는 그.
넬슨(Nelson)
18c의 영국 제독 넬슨과 같은 이름이라 뽀르뚜갈의 제독이며 천사라고 농담을 나눠서 일까.
차 안에 여러 개의 봉지가 있는 듯 했는데 그는 나를 추월해 앞서 가는 여인 옆을 그냥 통과했다.
아마도, 뻬레그리나(Peregrina/여성순례자)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형 백팩을 메기는 했으나 나 보기에도 긴가민가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다시 추월했으며, 그녀 보다 한참 일찍 알베르게에 당도하였을 정도로 내게는 이 천사의
격려가 주마가편이 되었는데.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