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솔본님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가 무궁화이고 무궁화의 역사적인 연원이 깊기 때문에 한화(桓花)가 무궁화라고 생각을 하는데 한단고기의 어디에도 한화(桓花)가 무궁화라고 되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
한단고기를 주해한 사람들이 무궁화를 한화(桓花)로 여기는 것 뿐입니다.
한단고기 한국본기(桓國本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중략 萬方之民不期而來會者數萬衆自相環舞仍以推桓仁坐於桓花之下 積石之上羅拜之山呼聲溢歸者如市爲人間最初之頭祖也...... 후략
윗 부분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기약을 하지 않았어도 수 만의 무리들이 모여들어 스스로 서로 둥글게 춤(環舞)을 추며 한인(桓仁)을 추대하였다. 한인께서는 한화(桓花)아래 적석(積石)위에 앉아서 산처럼 늘어선 백성들의 절을 받으셨다. 이에 환호하는 소리가 흘러 넘쳐 저자거리와 같았다. (한인께서는)인간 최초의 두조(頭祖)가 되셨다.
위의 구절 말고도 한화(桓花)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오지만 그 어디에도 한화가 무궁화라는 말은 없습니다. 한화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것은 좀 더 많은 고찰과 확인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다음은 무궁화의 유래와 국화(國花)논쟁이라는 펌글입니다. 참조 바랍니다.
무궁화의 유래(由來)와 국화(國花)논쟁
○ 명 칭
·학명 : Hibiscus syriacus Linn. ·한명(중국) : 木槿, 舜花, 舜英, 薰華草, 朝開暮落花 等 ·영명 : Rose of Sharon, Shrub Althea, Rose Mallow, Syrian Hibiscus ·독어 : Syrischer Rosen-Eibisch ·불어 : Ketmie des jardins, Mauve de Syrie ·일어 : ムクゲ(일명 モクゲ), キハチス
○ 무궁화의 명칭에 얽힌 유래
무궁화의 학명은 Hibiscus syriacus L. 이다. 여기서 Hibiscus라는 속(屬)명의 어원은 Hibis(고대 이집트의 아름다운신) + isco(유사하다)라는 뜻으로 즉 아름다운 신을 닮았다는 뜻으로 풀이되며 종(種)명인 syriacus는 원산지가 중동의 "시리아"라는 뜻인데 시리아에는 무궁화가 없기 때문에 명명자가 잘못 붙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통설이다. 또한 영명의 Rose of Sharon에서 "샤론"이란 성경에 나오는 성스러운 땅을 일컫는 말로 "신에게 바치고 싶은 꽃" 또는 "성스러운 땅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뜻으로 대단히 아름다움을 뜻하며, Shrub Althea는 Althea가 그리스말로 '치료하다'라는 뜻이므로 약용으로 쓰이는 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명(漢名)의舜花, 舜英도 미모의 여인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로 대단히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매우 아름다운 꽃으로 표기되고 그 종류도 대단히 많기 때문에 학명의 변천도 다양했을 뿐아니라 분포지역 및 꽃색깔과 모양에 따라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대별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Hibiscus syriacus L. 1753년도 Althaea furtex Hort. 1768년도 Ketmia syriaca Scopoli FL 1772년도 Hibiscus rhombifolius Cavan 1787년도 Hibiscus floridus Salisb 1796년도 Hibiscus acerifolius Salisb 1806년도 Hibiscus syriacus var. Chinensis Lindl 1853년도 Hibiscus chinensis Auct 1886년도 Hibiscus syriacus Linn. 1924년도
위와 같이 변천과정을 거처 1924년에야 통일이 되었다. 또한 유럽에서는 한때 무궁화의 학명이 분포지역 꽃색깔 및 모양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부르기도 하였다. 아네모네와 같은 꽃이라하여 Hibiscus anemoneflorus, 두가지 색깔을 뜻하는 Hibiscus bicolor, 순결을 뜻하는 Hibiscus coelestis, 우아함을 뜻하는 Hibiscus elegantissimus, 대형의 꽃을 뜻하는 Hibiscus grandiflorus, 순결하게희다는 뜻의 Hibiscus leopoldii, 함박꽃과 같다는 뜻의Hibiscus paeoniflorus, 빨강꽃이라는 뜻의 Hibiscus palustris, 분홍꽃이라는 뜻의 Hibiscus purpurens, 라넌큐라스꽃 처럼핀다는 뜻의 Hibiscus ranuncuriflorus, 순결함을 뜻하는 Hibiscus speciosus, 크고 흰꽃이라는 뜻의 Hibiscus totusalbus, 흰꽃이라는 뜻의 Hibiscus albus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었으나 모든 것들이 Hibiscus syriacus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품종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한문명으로의 표기에 있어서도 고래로부터 다양하게 불리워저 내려왔다. 무궁화에 관한 명칭은 無窮花와 木槿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문헌상에 나타난 별칭을 모아보면 無窮華 無官花, 舞官花, 無宮花, 無宿花, 薰華草, 槿花草, 菫華草, 舜花, 舜英, 木槿, 槿, 朝槿, 朝花, 朝華, 朝蕣, 朝生, 朝菌, 朝椿, ?, ?, 王薰, 朝生暮落, 蕣, 舜, 木菫, 暮落, 蕣華, 瞬, 蕣英, 蕣榮, 日華, 日及, 日蕣, 日槿, 猶槿, 朝榮暮落, 薰, 熏華, 朝生夕死, ?, 木槿花, 紅槿, 赤槿, 朱槿, 瞑槿, 暮槿, 朱舜, 朝開暮落花, 朝生暮落花, 藩籬草, 花奴, 花奴玉蒸, 朝開暮斂, 扶桑, 佛桑, 赤槿, 日給, 木樺, 木錦, 玉蒸, 易生, 似柰, 荊條, 麗木, 秋華, 神樹, 進饌花, 御賜花, ?子花, 一日花, 洽容, 愛老, 時客, 皇漢, 白槿, 權黃華 등과 같이 대단히 많다.
몇가지표현의 내용을 살펴보면 끝없이 피고진다는 뜻의 無窮花, 아름다움을 뜻하는 蕣華, 蕣英, 蕣榮, 개화기간이 짧다는 의미의 日華, 日及, 日蕣, 日槿, 朝開暮落花, 朝生暮落花, 朝榮暮落, 朝槿, 朝花, 朝華, 朝蕣, 朝生, 朝菌 등, 뽕나무잎과 같다는 의미의 扶桑, 佛桑, 進饌(궁중잔치)에 활용되었다해서 進饌花, 御賜花, 울타리에 활용한다해서 藩籬草 등 대단히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다. 이것은 무궁화의 꽃이 얼마나 다양하고 탐스러운 가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국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무궁화와 한민족
무궁화는 태고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인 신시시대(神市時代) 환나라(桓國)의 나라꽃인 '환화(桓花)'로 나타나 오늘날 까지 오천여년 동안을 배달겨래와 동고동락을하며 자연스럽게 겨레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먼저 무궁화와 한민족과의 관계에 앞서 우리나라에 대한한자명칭을 국내외의 옛 문헌을 통하여 수집한 권상로(權相老 1879~1965)의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부록7, "국명의 이칭(異稱)"에 의하면 그 수가 무려 194가지나 된다고한다. 이들을 크게 구분해보면 근방(槿邦), 근역(槿域), 근화향(槿花鄕), 근원(槿原) 등의 명칭은 무궁화를 뜻하는 근(槿)자가 들어있어 "무궁화의 나라"를 의미하고 단국(檀國), 단기지방(檀箕之邦), 신단(神檀), 진단(震檀), 단방(檀邦) 등은 단군과 관계되는 명칭이며 대동(大東), 동구(東區), 동방(東邦), 일역(日域), 일방(日邦) 日出墟(일출허) 등의 명칭은 "동방의 해뜨는 나라"의 의미로 가장 종류가 많았고 군자국(君子國), 예의지방(禮義之邦), 선인국(仙人國) 등의 명칭은 예의 있는 나라임을 뜻하고 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문헌상의 기록 또는 관련된 사건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시시대에는 무궁화를 환화(환화)라하여 환국(환국)의 꽃으로 불려졌으나 단군조선시대에는 환화(환화), 근수(근수), 훈화(훈화), 천지화(천지화)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내고 있었는데 "단기고사"에 "16년(제5대 단군 丘乙 16년은 기원전 2090년 즉 지금으로부터 4088년)에 임금께서 고력산(古歷山)에 행차하여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주변에 무궁화를 많이 심었다(十六年帝行幸古歷山築祭天壇多樹周邊以槿樹)"라고 적고 있으며 또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16년 정축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었다(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 라고 제5대 단군 구을(丘乙)에 대한 사실(史實)을 적고있었다.
한편 동양의 역사. 지리. 민속. 종교 등을 총망라하여 기록한 대표적인 기서(奇書)인 산해경(山海經)은 요순(堯舜)의 禹임금(BC 2183~2175 : 우리나라 단군조선시대))때 백익(伯益)이 저작하였는데 이책의 제9권 "海外東經"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그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차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큰 호랑이를 부린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으며 그 땅에는 훈화초(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劒 食獸 使二大虎在旁其人好 讓不爭 有薰(或作菫)華草 朝生夕死)"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시대에는 "최문창후문집(崔文昌候文集)권1표 가운데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것이있는데 이것은 신라의 효공왕 원년(897년)에 최치원이 임금의 명을 받아 당나라의 광종에게 쓴 국서가운데 " 무궁화 나라(신라를 일컬음)는 염양한데 점점 쇠약해 가지만 고시국(발해)은 강포한데도 더욱 강성해 가고있다(槿花鄕廉讓自沈?矢國毒痛愈盛)"라고 스스로 근화향(무궁화 나라)이라 하였으며 또 고려시대에는 고종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 14의 고율시(古律詩) 가운데 장노 문공과 동고자(東皐子) 박환고가 각기 근화(槿花)의 이름을 두고 논하는데 한사람은 "무궁화는 곧 무궁(無窮)의 뜻이니 꽃이 끝없이 피고짐을 뜻함"이라 하였고 또 한 사람은 "무궁은 곧 무궁(無宮)이니 옛날 어떤 임금이 이 꽃을 사랑하여 온 궁중(六宮)이 무색해졌다는 것을 뜻함"이라 하였다.
이처럼 각자가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므로 끝내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백낙천(白樂天)의 시운을 취하여 각기 한편씩을 짓고 또 나(이규보)에게도 화답하기를 권하였다 (長老文公東皐子朴還古各論槿花名或云無窮無窮之意謂此花開落無窮或云無宮無宮之意謂 昔君王愛此花而六宮無色各執不決因探樂天詩取其韻各賦一篇亦勸予和之)라는 기록은 중국문헌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는 "무궁화(無窮花)"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타났다.
이조시대에는 세종 25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무궁화"라는 한글명칭이 쓰이게 되었으며 실학자들의 실학서적에 무궁화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종때의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무궁화 애호가였던 안사형(安士亨)이 항의한 글을 보면 "목근(木槿)은 본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화목인데 형은 그것을 화보에도 수록하지 않았고 또 화평(花評)에서도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는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단군께서 나라를 여실 때에 이미 목근화가 나왔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은 동방을 반드시 근역(槿域)이라고 말하였으니 근화는 예로부터 ---"라고하였으며, 최세진은 사성통해(四聲通解)상권에서 "근은 츤이다. 목근화를 무궁화라고 부른다(槿, ?也 , 今俗呼木槿花, 무궁화")하였고 기타 최세진의 "훈몽자회" 허준의 "동의보감",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익의 "성호새설", "만물보", "譯語類解" 등 여러 문헌상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사화(御賜花), 진찬화(進饌花) 등 궁중행사에도 사용해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일합방 전야(前夜)에 함녕전(咸寧殿)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모리오노리(森大來), 마스야아라스케(曾彌荒助), 이완용 등 합방의 주역들이 연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합작시를 지었다.
"단비가 처음내려 만사람을 적셔주니(甘雨初來霑萬人-伊藤)
부상(일본)과 근역(우리나라)을 어찌다르다 논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 - 曾彌)
함녕전위에 이슬빛이 새로워지니 (咸寧殿上露革新 -森)
두땅이 한집되어 천하가 봄이로다(兩地一家天下春 - 이완용)
또한 그간에 있었던 박해사건들을 살펴보면
동아일보는 1923년부터 10년에 걸쳐 '비 개인 아침에 새로단장한 무궁화' "무궁화는 잘도핀다.' '무궁화는 제철만나' '날마다 새 꽃 피우는 무궁화' ' 철지난 무궁화' 등 무궁화에 관련된 사진과 설명을 개재하여 무언의 은밀한 저항을 표시하고, 1930년 1월1일에는 "동아일보" 제호의 바탕을 한반도지도와 무궁화로 매운 도안을 사용하여 오다가 1938년에 무궁화의 도안이 검열에 걸려 1938년 2월9일 부터는 삭제되었다가 1945년 광복후 환원되었으며 1937년에는 조선소년군 항건(項巾)에 새겨진 무궁화 화환이 문제가 되어 압수당하였고, 중앙학교의 교가에 "흰 뫼와 한 가람은 무궁화 복판" 이라는 구절이 있고 모표(帽標)도 무궁화 화환이 "中"자를 받치고 있던 것이 단속에 걸려 1938년 교가는 금지되고 모표(帽標)는 압수당하였다.
민족사상의 보급에 앞장서온 한서 남궁 억은 1931년에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무궁화를 보급하여 오던중 1933년 11월 2일 시조사원(時兆社員)을 가칭한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에게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설명과 함께 사쿠라(벚나무)는 활짝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연(綿延)히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의 역사가 면연할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 화근이 되어 70,000주에 이르는 무궁화가 불에 태워졌고 선생은 붙잡혀가 옥고(獄苦)를 치루게된 남궁 억의 "무궁화 동산"사건(십자가당 사건)이 있었다. 그외 근화여학교의 교복사건, 오산학교의 무궁화동산, 대구사범의 무궁화 동산사건 등 많은 시련을 격어왔다. 이러한 시련속에서 우리겨래와 연을 맺어왔지만 나라꽃으로 자리를 잡게된 배경에 대하여는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배재 80년사"에 나타난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정초식에서 불렀던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시원(始原)으로 하여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애국가가 국가(國歌)로 채택되면서 자연스럽게 무궁화가 국화(國花)로 자리잡게 되고 따라서 국기봉, 나라문장(國章), 대통령 표장(標章) 등 국가상징물과 국가기관의 기(旗), 훈장, 상장, 각종 뺏지 등에 활용하게 되므로서 모든 국민이 인정하는 명실공히 나라꽃으로 정해진 것이다.
○ 무궁화의 국화논쟁
전술한 바와 같이 한반도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우리나라 국민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나라꽃으로 인식되어온 무궁화이건만 1956년경에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서울"의 이름을 자기의 호인 우남(雩南)의 이름을 따서 "운남시"로 고치기를 바라는 뜻을 밝혔으나 각의(閣議)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무산되었으며 그후 국기와 국화에 대하여도 바꾸자는 논란이 야기되었는데 특히 국화(國花)에 대하여는 해방직후부터 가끔 화제가 되어왔다. 무궁화를 국화로 반대하는 이유를 화훼연구가인 조동화(趙東華)씨는 2월 3일자 한국일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무궁화가 국화로 여겨지게 된 것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구미의 신문화가 이 땅에 밀려오면서 오얏꽃(梨花)의 이조(李朝)왕조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으며 ---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무궁화 재배를 공공연히 방해하고 "눈에 피꽃"이라는 터무니없는 모함까지 하는 바람에 무궁화는 오히려 "국화라는 명예로운 위치"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하였으며
국화가 될 수없는 이유를 첫째, 황해도 이북에는 심을수 없는 지역적 한정성이 있고, 둘째,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닌 인도라는 것이며, 셋째, 진딧물이 많아 청결하지 못하고 단명함, 넷째, 휴면기가 길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식물학자 이민재(李敏載)씨가 동의하고 국민적 합의절차나 법률규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국화(國花)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반면 무궁화 예찬론자인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과 영문학자인 이양하(李敭河)씨 등은 역사성과 무궁화의 특성을 여러 가지면에서 칭찬하였다. 이와 같은 국화시비론에 대하여 1956년 2월 28일 주요한(朱耀翰)씨는 "무궁화는 과연 '국화'인가? 그렇기도하고 그렇지 않기도하다. ---
"하여간 무궁화는 국화라고 법령화된 것은 아니지만 대소사전(大小字典)과 교과서 등을 들춰보면 우리나라 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으므로 '나라 꽃'이라고 말해 무방할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동아일보사 김충식 기자는 <명대결>이라는 제하로 1982년 7월 30일부터 8월 10일까지 9회에 걸처 논한바있다.
○ 맺는말
무궁화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명칭(학명, 한명)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우리겨레와 함께 수난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그만치 인간의 관심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세상에 모든 것은 음(陰)과 양(陽)의 양면성이 있으며 옥(玉)에도 티가 있다고 하였다. 어떤 꽃, 어떤 나무인들 흠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꼭 그렇게 흠이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요 또한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설령 무궁화가 신시시대(神市時代)부터 한민족과 연(緣)을 맺어왔다는 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한국이 원산지이건 아니건 또 국화(國花)를 법령으로 정했던 안정했던 꼭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궁화가 어떠한 연유에서던 현실적으로 온국민이 나라꽃으로 알고 또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더욱이 국내외 문헌의 기록상으로도 인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궁화의 특성은 우리민족성과 많은 부분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는 그 단점만을 탓하여왔을 뿐 장점을 살리지 못한 점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 통감하여야 한다. 물론 단점도 인정은 하지만 그 단점을 탓만하기에 앞서 연구하고 개량하여 나간다면 내한성, 내충성, 화색, 선모(腺毛) 등 상당 부분은 개량이 가능할것으로 생각된다. 무궁화는 변이가 많은 수종이기 때문에 품종의 선정도 중요하고 또 무엇 보다도 가꾸기가 중요하다. 무궁화를 일반 나무로 생각하고 취급 한다면 일반 책자에 나와있는 설명으로 충분하지만 "국화"로서 취급한다면 절대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한다.
무궁화는 군자국의 군자(君子)나무 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울타리용 또는 버려진땅의 버려진나무로 가꿀것인지 아니면 "국화"로 가꿀것인지 그 목적을 분명히하여야 하며 "국화"로 가꿀 경우는 최소한도 다음 사항은 지켜져야한다. 첫째, 비옥한 땅에 심고 충분한 양료를 공급하고, 둘째, 햇빛을 잘 받도록 충분한 공간에 단목으로 식재, 셋째, 반드시 새잎이 나오기 전에 전정실시 등. 이와같이 군자(君子)의 나무로 가꿀 때 진정한 "나라꽃 무궁화"의 진면모를 볼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국화(國花) 가꾸기는 량보다는 질을 택하고 어떠한 틀과 형식에 뜻을 두어 나무는 온데간데 없는데 거창하고 화려한 간판만이 외롭게 남은 쓸쓸한 홍보 보다는 진정하고 정성어린 화려한 나라꽃을 실물로 보여주는 것이 나라꽃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 꽃"에 대한 개념을 어느 분은 무궁화를 모두 나라 꽃으로 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우리 국민 대다수의 정서상으로 또 정부의 각종 표상으로 볼 때 나라 꽃은 "홍단심계나 백단심계의 홑 꽃"으로 하고 반겹 꽃이나 겹꽃은 일반 화훼용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