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567. 正祖 16年(1792) 壬子式年試榜 59人
(武科 韓亨祚 等 374人) 이번 시험은 정조가 즉위한 후 여섯 번째로 개설한 식년시였다. 初試는 지난해, 즉 정조 15년(1791) 9월 중순 경에 마쳤으며, 覆試는 式年인 올해 3월 8일(丁丑)부터 치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殿試는 3월 13일(壬午)에 치렀다. 전시의 試所는 창덕궁 仁政殿에 마련되었으며, 문제는 銘이 출제되었다. 銘題는 ‘三角山幷引’이었다. 命官은 右議政 朴宗岳이었다.
최종 급제 인원은 59인이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식년시의 정원 33인을 제외한 26인은 直赴殿試者였다. 이들 직부전시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정조 14년(1790) 9월에 실시한 儒生應製試 수석자 任火+獻과 閔致載, 그해 12월 黃柑製 수석자 李廷顯, 정조 15년(1791) 2월 春到記儒生試 수석자 沈鎜과 韓永建, 그해 6월 儒生 應製試 수석자 金熙華와 權倚, 위 유생 응제시와 같은 날 치렀던 水原儒生 應製試 수석자 權熀, 그해 8월 秋到記儒生試 수석자 韓耆裕와 尹愭, 그해 10월 日次儒生試 수석자 林漢浩, 그해 11월 황감제 수석자 鄭東簡, 그해 12월 日次儒生 殿講試 수석자 林景鎭과 儒生應製試 수석자였던 申龜朝와 申光河와 蔡弘遠, 올해 즉 정조 16년(1792) 1월에 있었던 春到記儒生試 수석자 李弘達과 鄭宗顯, 올해 1월에 치른 人日製 수석자 南公轍, 역시 같은 달에 실시한 水原儒生試 수석자 任厚常, 올해 2월에 있었던 殿講 수석자 李肇源, 올해 三日製 수석자 李明孚, 洪大協, 그리고 정조 13년(1789) 己酉式年試 복시에 합격한 후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여태껏 급제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宋濟康, 영조 48년(1772)의 後庭試 합격자 韓光烈, 그리고 어떤 시험에서 직부전시 자격을 취득했는지가 확인되지 않는 李亨宇 등이 이번 식년시에서 급제를 받은 직부전시자들이었다.
위에서 소개한 시험들 가운데 정조 15년 6월에 있었던 水原儒生應製試에서는 원래 權熀과 沈徽鎭 등 두 사람이 선발되었다. 그리고 심휘진도 원래는 권엽과 함께 이번 식년시에서 급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그 어떤 PM에도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추측컨대 전시를 치르기 전에 사망하지 않았나 한다. 그런가 하면 정조 15년(1791) 1월의 水原儒生試에서 수석을 차지했던 任希存도 이번 식년시 전시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정조 18년에 가서야 급제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이번 식년시 전시 전에 喪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명부와 홍대협이 선발되었던 올해, 즉 정조 16년(1792)의 삼일제는 이번 식년시의 전시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실시한 시험이었다. 삼일제는 원래 3월 3일에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 삼일제는 이번 식년시의 복시 일정과 맞물려 그렇지 못하고 식년시 전시를 끝낸 후에 진행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삼일제에서 직부전시 자격을 취득한 이명부와 홍대협은 당연히 이번 식년시가 아니라 다음번에 개설되는 문과에서 급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들 두 사람의 이름이 이번 식년시의 급제자 명단에 오르게 되는데,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조금 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번 식년시의 복시에서 32인만을 선발하게 된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식년시의 정원은 33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2차 시험인 복시에서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시에서는 단지 이들의 석차만 결정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식년시의 복시에서는 試官들이 착오로 그만 33인이 아니라 32인만 선발하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전시를 마치고 일주일이나 지난 3월 10일(甲申)의 일이었다. 하지만 복시에서 32인만을 선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반드시 33인을 채워야 했다. 그것이 金石과도 같은 법의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복시의 최종 합격자로 결정되었지만 복시에서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발각되어 합격이 취소되는 사람이 있을 때, 33인을 채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따라서 반드시 복시의 정원 33인을 채워야 했던 것이다. 이에 정조는 문제를 일으킨 시관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때마침 치르기로 되어 있는 삼일제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토록 한다.
그 방법은 이러하였다. 삼일제에서 직부전시자는 으레 한 두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번에는 세 사람을 뽑도록 하였다. 그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자를 복시 합격자로 간주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가 바로 尹益烈이었다. 그리고 윤익렬과 함께 직부전시 자격을 받았던 이병부와 홍대협은 이번 식년시 전시에 참여토록 하였다. 이번 일은 식년시에서의 정원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를 말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CWS 정조 16년 3월 10일(己卯) 및 SJW 정조 16년 3월 11일(庚辰)의 기사에 나오고 있다.
이번 식년시에 참여한 직부전시자 중 한광렬의 선정 과정은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 그는 원래 영조 48년(1772)에 실시한 後庭試를 통하여 직부전시 자격을 취득했었다. 이 후정시는 그 해, 즉 영조 48년에 치러진 壬辰庭試를 끝낸 후에 개설된 것이었다. 그 임진정시의 급제자 중 外方出身이 단 한 사람도 포함되지 못하자 영조가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특별히 후정시를 마련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이 후정시에서 선발된 사람은 한광렬과 맹의대 등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이 받았던 직부전시 자격은 곧바로 취소당하고 만다. 그것은 그들이 서울 거주자로서 진정한 의미의 외방출신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위 두 사람 중 맹의대는 영조 49년(1773)에 이르러 직부전시 자격이 다시 주어진다. 그가 서울 거주자가 아니라는 오해가 풀리고 실제 충청도 德山에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맹의대가 급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러나 맹의대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급제를 받기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과에 대한 맹의대의 끔은 그의 아들을 통해 실현된다. 맹의대가 사망한 지 16년이 흐른 정조 14년 9월, 맹의대의 아들 孟來遠이 상소를 통하여 정조에게 아버지가 겪었던 저간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버지에게 급제를 내려달라고 호소하였고, 정조도 이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의대의 이름이 이번 식년시의 급제자 명단에 오르게 된 것이다. 맹의대로서는 죽어서 문과 급제의 한을 푼 셈이었다.
한편 맹의대에 관한 위 일은, 맹의대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한광렬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한광렬도 자신도 직부전시 자격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광렬은 아직 생존 중이었는데, 한광렬의 일은 한광렬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 韓性烈이 적극적으로 났다. 맹의대의 아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上言을 통하여, 한광렬이 겪었던 억울한 일을 이야기하고 한광열에게도 맹의대처럼 급제를 받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정조 15년 1월의 일이었다. 이에 정조도 한성렬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하여 한광렬이 이번 식년시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任火+獻과 閔致載을 선발한 정조 14년(1790) 9월의 응제는 응제는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실시한 것이었다. 응제를 통해 직부전시 자격을 준 예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숙종 대 이후로는 이번이 처음인 듯한데, 시험이 끝난 후 정조는 우수한 성적을 취득한 유생들을 延生門 밖으로 불러들인 후 “임금이 친히 식당에 나와서 응제를 보이고 考評한 것은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숙종 때 館學의 유생들에게 수시로 응제를 보이고 급제를 내린 실례가 있다. 더구나 여느 때와 다른 오늘에 있어서랴. 또 임금이 직접 考評한 것은 그 사체가 자별하다. 의당 표와 부에서 장원한 사람은 곧바로 殿試에 응시하게 하고 三下 이상은 곧바로 會試에 응시하게 하며 次上 이상은 종이를 下賜할 것이니, 각기 이렇게 알고 있으라.”고 회유하였다. 한편 정조가 이번 응제에 대해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이번 응제를 치르기 석달 전에 원자 탄생이라는 경사를 맞았기 때문이다. 원자란 훗날 純祖로 즉위하게 되는 玜을 가리킨다. 玜이 태어난 것은 정조 14년 6월 18일(丁卯)이었다.
權熀과 金熙華를 선발했던 응제는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이번 응제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었다.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떡을 내려주고 또 試題까지 친히 지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詩經≫을 보면 ‘훌륭한 선비들이 많은 덕에 문왕께서 편안하다.’라는 말이 있다. 태학은 곧 어진 선비들이 모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元氣가 서린 곳이다. 이번에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런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또 열성조 때를 보면 길거리의 백성들에게도 음식을 내려 그 은혜가 부녀자들에게까지 미친 적도 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했는데, 하물며 성균관 유생에게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귤을 나누어 준 것도 비록 한때의 특별한 은전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規例가 되었다. 나중에는 柚子를 준 일도 있고, 黃大口를 준 일도 있다. 그러면서 柑製의 前例에 따라 시취한 예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도 어찌 떡만 나눠 주고 말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과거 숙종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장원을 차지한 권황과 김희화의 試紙에 직접 等級을 적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정조는 또 수원부의 유생에게도 성균관 유생들처럼 똑 같이 떡을 나누어 주고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權熀을 선발하여 그에게 직부전시 자격을 주었는데, 정도의 이러한 행동은 수원부를 漢城에 속한 部의 하나로 간주하려는 정조의 의지 때문이었다. 한편 이번에 정조가 성균관과 수원부의 유생에게 떡을 내리게 된 이유는 이 날, 즉 정조 15년 6월 18일이 慈殿의 誕辰日이며 또 元子가 돌이 맞이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의 자전이란 물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그리고 원자란 훗날의 순조를 가리킨다.
그런데 수원부에서 치르는 시험에 수원부에 거주하지 않는 자가 응시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수원부에서의 시험은 외방별과였기 때문에 당연히 수원부에 거주하고 있는 유생만이 응시할 수가 있었다. 다만 다른 외방별과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9년이라는 거주 기간을 요구하지 않은 듯한데, 그래도 시험을 치를 당시 수원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입증해야 했다. 그러자 시험 때만 잠시 수원부에 머물다가 시험이 끝나 다시 원 거주지로 옮긴 자가 있었으며, 거기에 권엽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것도 시험이 끝나고 다섯 달이나 지났을 무렵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경기 감사와 수원부로 하여금 시험 당시 허위로 移住했던 者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권엽에게 아무런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아 그의 직부전시 자격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