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학
90년대 이후 우리 시단은 줄곧 격열성을 가라앉혀 왔는데,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현상은 보편화되어 이제 오늘의 한국시는 사색과 명상과 환상과 침잠의 자세로 삶을 응시하는 관조의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그래서 한국시단의 흐름을 정리할 때 흔히 동원했던 분류법인 전통적인 서정시,모더니즘적 경향의 서정시,사회비판의 시,실험주의적 시 등등의 도식적인 접근법으로는 오늘의 우리시를 이해할 수 없도록 변해 버렸다. 어느새 이 모든 주제와 수법들이 우리 시대 대다수 시인의 과제로 등장하여 누구나 전통적 서정성과 모더니즘은 물론이고 내면에 대한 응시와 사회비판 의식을 조금씩 지닌 작품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해해 낼 수 있게 되었다.예를 들면 내면 응시의 시학의 한 흐름을 이뤄온 김종길의 <병실>같은 시는 "삶이란 결국 사랑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닌가./그리고 사랑이란 결국 책임이라는 멍에를 지는 것이 아닌가"란 구절에 이르면 원로 시인답게 인간의 삶이 자아와 타자와는 물론이고 사랑과 증오,짐단과 사회의 연계로 존재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김종길시인만이 아니다. 그 비슷한 세대의 시인들이 지나온 이력서는 대개 닮은꼴이다. 미학적 탐사작업을 위해 서양과 동양의 시세계로 잠입했다가 이순을 지나는 연륜과 함께 득도의 경지에 이른 오늘과 같은 시적 천상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구상.황금찬.김춘수.조병화.김광림.문덕수.고은.신경림.김규동.김남조.홍윤숙.함동선을 비롯한 50년대 이후 한국 시단의 흐름에 일정한 자기몫을 담당했던 원로 시인들의 시세계는 이제 80년대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그을 수 있었던 미학적인 경계선을 허물고 삶 곧 사랑이란 인간존재의 원초적인 궁극점에 이르게 되었다. 김종길이 "조금은 슬프고 아름다운 세상"(<야경>)이라고 노래하는 현실관은 아마 이 세대 시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현실의식의 집약으로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불행의식을 지닌 우리 시대의 삶의 한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뒤를 잇는 세대로 오늘이 한국시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위치에 있는 황동규.정현종.정진규.마종기.김명인.김광규.문충성.조태일.김동호.이탄.박이도.강우식.박현태.김후란.허영자.김선영.임성숙 등과 박재천.조정권.강은교.이성복.김혜순.장석주.최승자.최승호.김준태.이성선.김정환 등으로 이어지는 시의 흐름에는 이제 일정한 타협점이 이뤄져 있음을 감지케 된다.
그런 뜻에서 90년대 후반기는 차라리 젊음이 사라져 버린 시대이기도 하다. 세기말을 예감하는 이 시기의 젊은 시인들은 웬지 겉늙어버려 삶의 허망을 일찌감치 경험해 버리고는 그 표현상의 차이는 있을망정 현대의 삶을 노인이나 느낄법한 무기력과 허무주의적인 냉소로 응대하는데,물론 이것은 좋게 말하면 달관이요 능숙함이지만 비판적으로 보자면 산업사회의 시인들이 누릴법한 삶의 한 양식인 변두리로 밀려나는 인생의 은둔적인 삶의 양태가 빚어낸 허무주의적이고 몰가치적인 세계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80년대에 가장 격열했던 백무산의 시가 어떻게 농익었는가를 보라.<꽃><묘목 시장에서>,마음을 살해하다> 등에 나타나있는 이 시인의 바탕에는 화해를 지향하는 사랑의 정서가 짙게 스며있는데 이 점은 바로 위에서 본 김종길의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왜일까. 김종길 세대가 각고의 미학적 탐색과 시 창작의 끈질긴 수도 과정을 통하여 얻어낸 사랑의 실체를 백무산과 같은 유형의 시인들은 비록 그 삶의 물리적인 시간은 짧지만 역사의 풍랑 속에 던졌던 몸통 전체로서의 고뇌가 주는 화학적인 변모가 중요한 변모 모티브로 작용했음을 간파할 수 있다.백무산은 그의 시집 <<인간의 시간>>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성숙을 보여주고 있는데,이것은 오늘의 한국시가 겪고있는 변모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크다.
좀 다르지만 오세영의 <브루클린 가는 길>이나 민영의 시집 <<유사(流沙)를 바라보며>>를 통해서도 지난 연대에는 서로 달랐던 시세계가 점점 근사치로 다가서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미국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을 관조의 자세로 형상화시킨 오세영의 시세계나, 미국 여행과 그곳의 원주민을 다룬 민영의 시에는 소재로서의 공통점에 못지않게 동양적인 관조와 달관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두 시인의 눈동자를 느낄 수 있다.
허무에 이르는 과정과 그 벗어나기
오늘의 한국시가 지닌 삶의 내면적 탐색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미학적 파토스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 시는 지난 긴 세월 동안 시인과 사회,혹은 시인들 끼리 숱한 고뇌와 논쟁,그리고 시인 각자의 번민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유능한 시인들이 시를 아예 버리기도 했고,잠시 휴식기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허무에 이르러 멈칫거릴 것으로 기대했던 한국시는 도리어 그 허무로부터의 멋진 비상으로 삶의 조화와 타결점에 이르고 있다.
잠시의 침묵 뒤에 시를 다시 찾은 이성부의 경우 시집 <<야간산행>>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내 젊은 방황들 추스려 시를 만들던/때와는 달리 /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숨은 벽>)에서 보듯이 70년대에 그가 보여주었던 격열성을 거름삼아 지천명의 연륜을 감지케 한다. 산행을 주요 소재로 다룬 이 시집은 그 이전에 사회의 부조리와 맞섰던 이성부가 원숙에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읽게 해주는데,이런 현상은 위에서 본 최근 한국시의 변모와 같은 맥락에 위치하는 것으로 비단 그 혼자만의 변화가 아니라 세기말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시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문정희는 시집 <<남자를 위하여>>에서 "나의 언어는 포르노와 음흉한 악녀를 꿈꾸며 낯설고 버르장머리없는 무법자가 되어 언제나 불새처럼 날고싶다"고 했는데,연륜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간직하는 정서로 충만함을 전해 주는 기교가 번득이는 한 예에 속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젊은이들이 얼른 인생의 무의미성을 깨달아 버렸듯이 연륜을 쌓은 세대들은 거꾸로 젊음을 그대로 향유할 수 있는 체력과 정서를 견지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특징이란 말이다. 냉혹하게 말하면 엄청난 간극의 세대차이가 엄존하는 것이 한국문학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노라면 이처럼 그 주제나 소재들이 닮아가고 있는데 다만 기교면에서 감각적인 차이가 돋보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숙하면서도 젊음의 감각과 정서를 간직하는 시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 쉽사리 연령층으로 시의 흐름을 구분하던 방법론이 퇴색할 지경이다. 이시영은 지난 시집 <<무늬>>(94)이후의 작품을 모아 <<사이>>를 냈는데,"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적막하다"(<사이>)고 노래한다. 여기서 '사이'는 가로수.비.지우산.비.길 등의 대상(자연)과 노인과 이를 관찰하는 화자인 시인의 모든 관계(공간적 존재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옛날과 오늘까지 포함)를 상정할 수 있다. 시인은 '적막'을 느끼는데,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깨뜨리기 보다는 순응하는 자세를 시사하며 이것은 화해와 평화로움에의 길로 인간의 존재와 자연의 공존의식을 표출한다. 많은 시인들이 이렇게 시정신의 향방을 설정하고 있다.
최하림의 <밤에는 고요히 어둠을 본다>와 같은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어둠이 이불처럼 감싸고 잠들 준비를 하게 한다"는 끝구절은 지난 시기에 어둠을 깨치거나 뚫으려 했던 이미지와는 달리 어둠 그 자체가 주는 안온함에 정착해 가는 중년을 넘어선 시인의 삶의 자세를 엿보게 하는데,이것은 바로 90년대 후반기를 살아가는 한국 중견 시인들의 공통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기철의 <사람들은 모두 같고 같지않다>는 시 역시 이런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시인이 만났던 많은 유형의 인간들을 노래하면서 그 종족이나 언어는 다르지만 "그들 가슴의 끓는 피,꿈꾸는 내일은 모두 같다"는 대목에 이르면 지구촌만이 아니라 어제까지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았던 숱한 가치관들이 후기 산업사회의 갈등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나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김스테파노"의 죽음을 "조객이 필요없는 평화로운'곳"이라고 노래한 노향림의 <창>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어느새 아시아적인 무욕의 세계에로 이르는 극기적인 삶의 자세인데,현대 시인들은 너나 없이 저마다 약간씩은 동양 고천철학의 후예로서의 마음가짐을 내비치곤 한다. 그렇다고 허무의식은 아니고 다만 인생행로에서 끝없이 전개되고 있는 온갖 암투와 시기와 음모가 과연 그만한 가치와 보람이 있느냐는 반문으로 시인들은 하두를 잡아 나가고 있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음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예지와 사랑할 수 있는 영혼과 육체,여기에다 그 사랑을 지속시킬만한 가치관을 부여하는 끊임없는 노력일진데 현대시가 이처럼 평화나 행복이나 자유를 물질적인 헐벗음에 가까운 남루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가고 싶다"고 노래한 정희성(<소나기>)이나,"대도시 빌딩에서 내 의식(儀式)은 / 창을 열고 빌딩 밖으로 얼굴을 한껏 내민 채 / 구름을 불러 마음이 그 위에 타는 것"이라고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의 이하석,"나도 몸 가뿐하게/버릴 것 버리고 나면/해탈이 찾아와줄까?"고 자문하는 감태준의 <해탈> 등등 이런 시의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곽문환은 시집 <<아름다운 흔적>>에서 향수도 추억도 매말라버린 우리 시대의 시인들의 평균치적인 정서를 읊조리면서 그런 배경 위에서 살아온 보통사람들의 삶 또한 고통의 연속이었음을 노래한다. 그러나 시인에게 삶을 일깨워 준 것은 역사나 사회가 아니라 "처마에 자란 돌꽃 하나 /살아가는 철학을 개우고 있다"고 고백하는데,이런 태초적인 시정신은 그로 하여금 "오염되지 않은 흙냄새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고향"을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데서 연유한다.
"사회라는 괴물,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아실현이라는미명하에 욕망의 체인을 돌리고 그 속에 재물과 명예라는 바퀴를 돌리고 있는 괴물,그의 고리로부터 벗어나고자 나는 시를 쓴다"는 김삼주는 시집 <<별이 내리는 둥지>>에서 인간의 욕망 탈색작업을 시도한다.김지향의 시집 <<위험한 꿈놀이>>나, 홍신선 시집 <<허 사바람 속에서>>,임영조 시집 <<흔들리는 보리밭>>,박철시집 <<너무 멀리 걸어왔다>>, 김용하의 시집 <<산의 끝 물의 끝>>,홍사안 시집 <<침묵은 사유하는 깃발>> 등에서도 감지되는 것은 관조자로서의 삶의 넉넉함이다. 젊은 시절에 비교적으로 궁핍하게 보냈던 세대인 지금의 50대 이상이나 일부 40대 시인들은 물질적인 빈곤 속에서 정신적인 풍요를 동경해 왔기에 오늘과 같은 한국적 사회의 정신적 분위기에 만족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세대들이 희구했던 풍요로운 사회란 인간성이 말살 당하지 않은 가난했던 시절의 풍속도에다 물질만의 발전을 보태주는 식이었는데, 그 바램과는 달리 오늘은 물질적 풍요와 정비례하여 비인간화로 치닫고 있다.
비인간화의 풍요 속에서 자라난 세대와는 달리 적어도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의 다수 시인들은 쾌락이나 감각으로 당대적인 미학의 무정부 상태에 대처하기 보다는 동양적인 관조의 미학을 선택하게 되며, 그 결실이 바로 차옥혜나 정호승,정진규,강은교,김명수,하종오, 등등의 시학으로 나타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안주지를 향한 현대인의 존재의식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곽재구의 시집 <<참 맑은 물살>>이나,야박한 산업사회의 팍팍함을 도리어 동화적인 천진함으로 인간성의 훈훈함을 재생시킨 나해철의 시집 <<긴 사랑>> 등은 나름대로 90년대 후반기의 우리 시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 진지함을 담아내고 있다.
새로움과 낡음의 차이
대체 새로운 시가 가능할까. 우리 시에 접근하는 한 방법론으로 90년대 이후의 조금은 천박해진 경향의 시들과 그 이전의 시들을 대비시키는 것이 없진 않지만 그리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시는 없고 다만 새로운 독자가 성장하여 새롭게 받아들일 뿐이라는 명제의 정당성 때문이다.
남진우는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서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파고 드는데,이처럼 죽음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 또한 90년대 후반기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있다.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죽음과는 달리 인간의 순수한 죽음의 의미를 파고드는 이런 현상은 아마 우리 문학이 그만큼 성숙되었음을 알려주는 측정도이기도 하다.
장석남.황인숙.이문재.이진명.이기철.김기택.나희덕.고진하.박세현.송재학.최영미.유용주.이상희.채호기.김윤배.양문규.함민복.신현림 등 젊은 세대들은 이제 2천년대의 한국시를 향한 진로모색의 자세를 멈추지 않고있는데,그 성과들이 이들 개개인은 물론이고 우리 시문학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시세계에 천착하면서도 "너 뼈대 어디다 뒀냐"(함민복 <90년대>)고 21세기를 향한 오늘의 삶의 몰가치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 의미를 재정립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 새로움의 가능성 끝가지에 우리는 몇몇 시집들을 본다. "도시생활에서 느낀 염증,좌절,회의,고통,자조,패배 등"으로부터 새로운결의를 다지는 이재무의 시집 <<몸에 피는 꽃>>,"지금도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팔십년대의 벗들에게 바치는"시집 <<저물무렵>>의 신동호,이 연배에서는 드물게 보는 시대적인 아픔이 스며있는 최영숙의 시집 <<골목 하나를 사이로>>,그리고 이용한의 <<정신은 아프다>> 등등에서 우리는 한국시의 내일을 본다.이런 가능성의 조망에는 박운식.정해종.문경화.김명원.정유정.이대흠.이갑수.서동욱.김태동 등등 기라성처럼 연이어 나타나 독자를 현란케 만들 것이다.
후기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궁핍 속에서 시는 여전히 유효한 인생의 지침서인가. 이미 일부 독자들은 시로부터의 삶의 향기를 외면하고서도 다른 예술적 결과물로 얼마든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으며,오늘의 언론매체들은 시의 압살에 직간접적으로 합세하고 있다. 이런 운문의 위기의 시대에 한국시는 행복하게도 여전히 독자를 배가시킬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시대의 시인의 외로운 투쟁에서 얻어진 결실에 다름 아니다. 어떤 시대적인 변모에도 ㄴ히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그 유효성을 입증해 줄 것이다.
시조문학에 대한 대응책과 시조시인의 활약상
시조문학은 그 전통의 깊이에 걸맞을만큼 독자들이 주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반복되고 있다. 현대화의 적합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후 시조는 이제 미학적인 뿌리를 탄탄히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간 반복되어온 쟁점이었던 지조형식의 파괴와 정형의 고수를 둘러싼 창작방법론 시비가 이우종에 의하여 또 제기되었다. 장순하에 의하여 정형에 억매이지 말고 현대적인 시정신에 맞게 자유시형의 시조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이우종의 주장은 너무 지나친 자유형식이 현대시와의 경계선을 흐린다는 우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건 오늘의 한국시조는 이미 자유시조형태가 창작되고 있다.
주제면에서도 자연과 이에 대한 인간존재의 조화를 다루던 것에서 역사에서 소재를 찾아 거기에 의탁하여 현실을 풍자하는 경향의 작품도 나타나는 등 다양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연적으로 고전적인 창으로서의 시조와 오늘의 문학적인 시조는 구별되고 있으며,시조에서 창을 부활하자는 논의는 본격화되지 않고 있다.
질량적으로 폭등하고 있는 시조문학인과는 대조적으로 시조전문 잡지나 이를 전문으로 다루는 매체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해마다 나오고 있으나 여전히 감질맛나는 목마름으로 시조시인들을 애태우고 있다.
시조시단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일정한 문단적 질서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이태극.최승범.김상옥.장순하.정완영 등 원로세대들에 의한 작품 창작활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바로 그 후속세대인 이상범.이근배.김제현.이기반 등의 활약 또한 눈부시다. 노익장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장르가 아마 시조일 것이다.
서벌.윤금초 등에 이르러 한국 시조는 창조적인 시문학적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들 하는데,이후 박시교.유재영.이우걸.김남환.백이운 등에 이르면 형태는 시조지만 이미 시문학과 다를 바 없는 형식에서의 변혁을 보여준다.
이후 세대에 속하는 박기섭.민병도.김연동.이지엽.이정환.정해송.임종찬 등과 신진층을 이루고 있는 홍성란.정수자.김수엽.권갑하.서우승.박권숙.나순옥.고정국 등의 활약상은 한국 시조시단의 내일을 담보하는 최전위가 된다. 시조문학의 노벨상격인 중앙시조대상 수상자는 박시교시인이었고,기억할만한 시조시집으로는 이우걸의 고정적인 유미주의적 작품의 한계성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집 <<사전을 뒤적이며>>와,박권숙의 <<객토(客土)>>를 들 수 있다.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 때문에 시조문학계에서는 이미 사설시조가 성행하고 있는데 이에 못지않게 윤금초가 제기했던 옴니버스시조 형식도 시선을 끌고 있을만큼 형식에서의 해방이 두드러진다. 옴니버스시조란 한 편 속에다 평시조.엇시조.사설시조를 다 활용하는 자유형식의 시조로 사회의 다양화에 걸맞게 제기된 문제인듯하다.
시조문학은 시문학의 흐름과 별도로 나름대로의 독립적인 주제와 소재와 독자층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는데서 그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