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남강 4호 원고
고장 난 혈압계
이진표
기계라면 무조건 믿는 경향이 있다. 기계이니 틀림없을 것으로 과신하는 것이다. 기계도 낡았거나 고장으로 오작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번 믿으면 그 사람은 틀림없다면서 믿어버린다. 이 역시 사람도 세월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을 외면한 결과다. 어찌 낡은 기계만 오작동 하겠느냐?
내가 다니는 목욕탕 휴게실에는 오래된 혈압계가 하나 있다. 목욕을 마친 사람들이 혈압을 재어 보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혈압을 잰다. 나도 언제부턴가 습관적으로 혈압을 재고 만족해 왔다. 잴 때마다 최고혈압 128, 최저혈압 72, 언저리에 머무는 혈압이라 무척 만족했다. 최고혈압이 128이면 청년 수준이다. 그래서 목욕탕에서 나올 때는 항상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혈압을 재니 최고혈압 140이 나왔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고 혈압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혈압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라고는 하나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치 혈압이라 불안했다. 믿어지지 않아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보건소에서 다시 혈압을 쟀더니 더 높게 최고 142가 나왔다.
그때야 지난날 알고 있었던 ‘128, 72’ 가 정확한 혈압이 아니고, 목욕탕의 혈압계가 엉터리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이 틀린 자기 혈압을 알고 있었다. 그 뒤에는 목욕탕에 가도 혈압을 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혈압계를 볼 때마다 요즘의 나 자신이 들어다 보였다.
교사라는 신분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온 지난날이 있다. 지금은 많은 경험을 쌓은 늙은이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그것으로 자식들에게나 젊은이들 앞에서 내로라는 행동을 가끔 한다. 누군가 말한 대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래밭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하고 한 숟갈의 바닷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두고 어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루에도 수많은 새로운 지식이 쏟아지고 어제의 지식이 오늘엔 쓸모없는 죽은 지식으로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나는 주로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다. 그러니 디지털 시대인 지금 내가 보이는 반응은 모순을 넘어 엉터리가 많을 것이다.
뿐인가. 경험 역시 몇 가지 경험을 했다고 하나 얼마나 정확하며 또 사실과 다르게 체험했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때때로 기억마저 깜빡깜빡하는데 책 몇 권 읽고 좀 오래 살았다는 것으로 주장을 내세우며 고집을 부린다, 가끔 실수도 한다. 이렇다면 나 역시 고장 난 혈압계가 아닌가.
고장 난 목욕탕 혈압계는 새 것으로 바꾸면 간단하다. 그렇지만 세월의 무게에서 오는 흔들림은 간단하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기 전에 나 자신을 챙겨볼 일이다. 이렇게 얕고 부정확한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말이면 그 말이 얼마나 옳고 바르겠는가.
고장 난 혈압계로 비칠까 항상 두렵다.
첫댓글 매우 교훈적인 내용입니다 /구자운
자동차도 한 20년 타면 고장나는데. 70년 넘게 탄 이내 육신은 어찌 고장이 없겠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며...선배님! 이 담에 만나면 막걸리나 마싯게 마십시다.
8월20일경 풍류에서 임시 총회가 있고 10월말경 소요산에 단풍이 들면 우리 문우들 ( 희망자 )
소요산의 그 유명한 단풍잎 바라보며 술한잔 마십시다 황진이도 소요산의 단풍잎에 취해
그리움을 읊조리지 않았습니까 해강님의 글에는 항상 교훈적인게 가득 담겨있지요 딱딱하지않은
말랑말랑한 훈시가 들어있지요 안병남
해강님! '고장난 혈압계' 잘 읽었습니다. 자신을 지켜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되뇌어볼 수 있는 자성적 수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넘치지 않는 균형감이 있고 언제나 낮추는 겸손이 있어 글감의 품격이 한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단문으로 흐트러짐 없이 또박또뱍 걸어가는듯한 글, 문장력 돋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진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