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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유산 스크랩 상화의 `경주 아리랑`, 어디로 갔나
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추천 0 조회 48 15.09.23 02: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상화의 '경주 아리랑', 어디로 갔나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상화시인

 

상화 시인의 애제자였고, 상화처럼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작가 이문기의 영애를 만나기 위해 3일 오후 합천에 다녀왔다.

이문기는 상화 시인이 타계한 뒤, 스승인 상화 문집을 만들려고 원고 뭉치들을 넘겨받았지만 미처 문집을 만들지 못하고 가족들과 헤어졌던 북으로 갔던 터였다.

아버지(이문기)와 헤어질 당시 8세였던 딸 이석희씨는 벌써 이순이었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상화 시인의 원고등을 넘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상화 시인이 남긴 육필 한두점이나 빛바랜 사진 한장, 상화시인이 남겼다는 아리랑 곡조라도 만날 수 있을까했지만 이런 기대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상화가 지었다는 경주 아리랑은 어떻게 된 것일까.

"상화는 대부분 시가를 지었고, 산문은 별로 쓰지 않았다. 가요로는 교남학교 교가와 경주 아리랑을 남겼다". 목우 백기만은 분명히 그렇게 썼다. 이 가운데 교남학교 교가는 아직도 대륜고등 교가로 불리면서 학생들이 삼천리 골골에 빛나는 샛별이 되기를 기원했던 상화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데, 경주 아리랑은 행방이 묘연하다. 행방이 묘연하다보니 이제는 상화가 경주 아리랑을 남겼다는 기록조차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상화와 절친했던 목우가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긴 '경주 아리랑'의 실체는 어떤 것이며, 과연 상화가 아리랑을남겼을 개연성은 있는 것일까.

  우선 상화가 아리랑 곡조에 담았던 망향가를 보자. 상화시인의 아내였던 서순애여사가 살아생전에 불렀던 '망향가'는 간도나 만주로 이민간 우리 민족들이 간절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만지벌 묵밭에 무엇보고 우리 옥토를 떠났거나/

  언제나 언제나 돌아가리 내나라 내고향 언제가리/(후략)

  상화는 나라를 잃고 떠도는 민족의 향수를 기존에 있던 아리랑 곡조에 담아서 직접 '망향가'를 지었다.

상화가 망향가를 짓던 1920년대말 이후 우리나라 가요사는 창가에서 유행가로 바뀌던 시기인데, 이때 민중들은 유행가에 '봄'이나 '님'으로 소극적인 저항과 독립에 대한 소망을 반영하는 일이 잦아졌다. ('한국 가요사' 박찬호 지음, 안동림 옮김, 현암사 펴냄, 182쪽~183쪽)

 

  이 책에는 봄이나 님은 각기 '독립', '광복', '민족', '중생'을 상징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는데, 봄이나 님이 유행가에 이처럼 사용되게 된데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형향이 컸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상화는 고향잃은 민족의 한을 직접 아리랑 곡조를 담아서 '망향가'를 지었고 , 민중들이 상화시인으로부터 독립의 상징인 '봄'을 따와서 유행가로 불렀다. 그러면 상화가 경주 아리랑을 지었을 가능성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

 

  사실 상화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상당히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혈청년이던 18세때 아무 행장도 갖추지 않고 석달 열흘간 우리 산하, 우리 국토를 주유할 때 금강산과 경주를 다녔다는 기록이 있고, 상화가 남긴사진 자료에서도 경주에서 찍은 사진들이 여러장 보인다. 그만큼 경주에 대한 애정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아리랑은 무엇인가.  경북대 김기현교수는 "나중에 학자들이 밀양아리랑, 광복군 아리랑 식으로 명칭을 구분하게 됐지만 막상 그 노래를 부르던 당시에는 지역명칭까지 붙여지지 않았다. 결국 경주 아리랑이란 경주를 노래한 것을 일컫는 것일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 구태여 상화시인이 남긴 경주 아리랑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경주라는 지명이 담겼거나 경주를 예찬한 아리랑은 어떤게 남아있을까.

경주에서 민요를 채록하는 김성혜씨는 "자장가, 불매노래 등에 간단하게 경주 남산 구정동아 등의 식으로 몇대목이 경주 유적과 관련되는 것이 남아있다"면서 본격적인 경주 예찬노래 혹은 경주 아리랑이라고 까지는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씨는 안강문화원 농악단장이면서 안강의 대표적인 소리꾼이던 최이범 할아버지로부터 안강 노동요를 듣기는 했지만 경주 아리랑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동국대 한상일(국립국악관현악단장)  윤소희(고 윤경렬씨의 영애), 이임수교수등도 경주아리랑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밝혔으며, 경주문화원장 김태중(전 신라고 교장)씨나 진병길(신라문화원장)씨 등도 경주 아리랑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국내 민요연구자 이소라(문화재청 전문위원)씨는 "특별히 아리랑 가사를 만들지 않아도 있는 시나 동요 구전노래 등에 아리랑 곡조를 붙여서 갖가지 아리랑이 많이 불렸다"면서 상화가 남긴 시 가운데 '농촌의 집'이 아리랑 곡조에 딱 들어맞는 틀을 가졌다면서 직접 아리랑 곡조를 붙여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아버지는 지게지고 논밭으로 가고요/어머니는 광지이고 시냇가로 갔어요/(아리랑 후렴)/후략

  

상화가 남긴 경주 아리랑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상화의 갑작스런 죽음과 남북으로 갈려진 해방공간의 상황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하던 1943년 3월21일(음력) 오전 8시, 상화 시인이 역시 대구가 고향인 소설가 빙허(현진건)와 한날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모든 정력과 정열을 교육, 문화사업에 쏟던 상화가 갑자기 타계한후 일부 원고를 애제자 이문기가 갖고 있었고, 이문기는 상화 문집 출판을 임화에게 맡겼다. 남로당계로 박헌영과 같은 노선이었던 임화(인민항쟁가 지음)는 남로당 총 체포령이 내려지자 급하게 북행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갔다.

  

"약전골목 누군가에게 상화의 원고를 맡겼다고 그러는데, 누군지 통 밝혀지지 않아요. 임화가 원고를 맡겼다면 사상이 붉다고 고초를 겪을게 뻔한데 내가 상화원고를 맡고 있소 하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죽순문학회 윤장근회장의 얘기는 상화의 경주아리랑 역시 통일 이후에나 행방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 또다시 기자를 빠뜨리고말았다.

 

 

  ***************************************<매일신문/최미화 기자  20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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