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 문지방 위의 신앙 1
문지방 위에 선 신앙인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분주한 도시 생활과 바쁜 일정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일과 과제들. “대한민국은 공사 중”이란 표어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민족에 속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하고, 신속하게 배달해주며, 쉴 틈이 없는 일정들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빠듯한 출퇴근 전쟁을 치루는 직장인부터 가사를 돌보며 다양한 문화생활을 꿈꾸는 주부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청소년들,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자기 능력을 개발하느라 밤을 잊은 청년들, 그런가하면 갈 곳 없고, 소외된 노숙자들과 노인들, 실직자들은 살 자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목자들의 처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다. 사제가 된 후 지난 해 15년 만에 처음으로 본당의 주임신부가 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사목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늘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규칙적인 생활과 나만의 시간이 보장된 삶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야 하는 본당사제로서의 삶이 내게는 큰 도전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주일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졌다. 그전에는 주일이면 미사 한 번으로 족한 사제의 삶이었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매주가 대목이다. 보좌도 없이 토요일부터 시작되는 미사는 사제가 된 이유를 되새기게 해주는 행복한(?) 비명의 시간이지만, 분주하게 돌아가는 본당 일에 몰두하다보면 내가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인지, 시간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고해성사와 미사, 강론, 신자들과의 인사, 사목위원들과 단체장들과의 회의와 논의, 수시로 밀려오는 신자들의 부탁, 그 가운데 축복식, 병자방문, 장례식, 게다가 연일 이어지는 회식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일정이다.
그래도 첫 본당이라고 열정을 쏟으며 살다보니 일복도 많은가보다. 교육관 공사에 바자회, 새사목회를 구성하고 새해 본당 운영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들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신학교 강의나 청탁 원고에 대한 부담감도 있지만, 내가 하느님께 받은 은사를 보속하는 맘으로 신자들에게 쏟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다. 그런 나를 보며 동기신부들은 “첫 본당이니까. 처음엔 다 그런거야.”하고 쓴웃음을 짓지만, 그래도 이런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본당 신부로서 살아온 신부들의 애환과 그들이 신자들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제들의 고충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우리 사회는 많은 갈림길에 서 있다. 초고속 성장 속에서 경제적 풍요로움을 맛보고 있는 한국의 국가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잃어가는 수많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있다. 삶은 풍요로워졌지만, 그렇다고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윤리적 삶의 잣대가 서로 다르고, 인생의 깊이를 느끼는 방식도 달라졌다. 무엇이 인생에서 소중한 지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가족의 중요성과 서로의 정을 나누는 문화, 누구나 가슴에 안고 사는 한(恨)을 풀어가는 방식도 달라졌다. 함께 앉아 밥을 먹기도 힘든 가족들, 경쟁 속에서 서로에게지지 않으려는 직장인들, 위로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고 위로받기만을 원하는 부부들과 연인들. 자식을 위해서 인생을 걸었지만, 결국 외면당하고 소외되는 노부모들의 슬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 고민스럽고,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신앙인에게도 이런 삶의 고뇌는 마찬가지다. 한 가지 위로가 있다면 그래도 힘들 때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 끊임없이 실망시키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희망하며 살게 해주는 신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지니고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신앙인들이 곁에 있기에 그들의 지혜를 배우고, 위로받으며,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교회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교회 밖의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이 다르고,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도 많다. 내가 잘 모르는 탓도 있지만,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 즉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다양한 표징들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깨닫고, 살아가는 고유한 신앙인들의 영적 감수성을 교회가 잘 받아주지 않는 탓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가톨릭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산다. 울타리를 넘나들어야 하는 삶의 현장이 평신도들에게나 사목자들에게 녹녹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신앙과 교리에 담긴 괴리감, 사목 현장에서 느끼는 자괴감, 나와 같은 신앙을 가졌지만, 신앙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특히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문제점 중에 하나인 개신교인들과의 대화는 가능한지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히 그들은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같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님’이 다른 것처럼, 기독교와 천주교, 예수교와 마리아교라는 편견과 오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물론 일부 개신교가 가진 편협하고 배타적인 신앙관이 문제임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세계 교회가 지향하는 교회 일치 운동의 노력과 결실에 대한 논의조차 모르는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가톨릭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현실은 다른 종교적 신념을 살고 있는 이들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다종교 사회의 전통을 간직하고 살기에 종교 간의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종교인들끼리 연대하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심성인 무교(巫敎)와 불교(불교), 유교(유교)의 바탕 위에 성장한 그리스도 신앙을 토착화하고, 그들의 신앙과 종교적 수행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솔직히 천주교 신자들은 잘 모른다. 그저 단순히 가톨릭 신앙 안에 성실하게 머물면 된다는 식의 “문단속 신앙”이 정체성 혼란을 느끼는 천주교인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교회의 경계선에서 회의와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는 답답함을 안겨줄 뿐이다.
천주교 신자의 냉담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물음을 던지는 신자들에게 납득할 만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답을 찾는 노력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지만, 평신도만큼이나 사목자들 스스로 교회의 경계선에 서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문지방’은 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일컫는다. 문 안쪽에서는 나를 보호해주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때로 문 밖의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 공간이다. 문 바깥쪽은 내가 끊임없이 드나들어야 하는 세상이다. 익숙한 신앙의 자리가 교회 안이라고 언제나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교회 밖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교회 안의 사람들의 말보다 공감 있게 들리기도 한다. “문지방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둘의 경계에서 신앙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문의 안과 밖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신앙.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사목헌장 4항)해야 하는 소명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문지방 위의 신앙’은 이런 우리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될 것이다.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교회 안팎의 현실들. 친교와 통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와 소통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교회의 가르침과 소통할지, 교회 밖의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서 대화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런 일들은 우리 자신이 문지방 위에 서 있음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실을 올바로 보는 일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을 찾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참된 신앙인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작은 여정이 독자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길 바란다.
송용민 신부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