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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208 (월)
- 신라의 불교와 선덕여왕 ② : 진흥왕 - 역사이야기 (4-2)
지난번 “법흥왕”까지 살펴보았고 오늘은 ”진흥왕“ ~ ”진평왕“입니다.
사. 제24대 진흥왕(眞興王 : 재위 540~576 = 37년) 시대
(1) 진흥왕의 등극과 영토 확장
“진흥왕”은 “법흥왕”의 친동생인 “입종(立宗)”과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
(只召夫人) 김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그래서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조카가
된다는 것입니다.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며 나중에 결혼하여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진흥왕은 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 김씨“가 12년간 섭정하게 됩니다.
진흥왕 5년(544년) 갑자년 2월에는 법흥왕 21년(534년)부터 짓기 시작하였던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를 완공하고 신라인들이 출가하여 비구와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여 명실 공히 불교가 공인이 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신라 승 “각덕(覺德)”을 당시 불교가 융성하였던 양나라에 최초로 유학을
보내는데 양나라 무제는 진흥왕 10년(549년)에 사신과 함께 각덕에게 불사리를
모시고 함께 돌아가게 합니다. 이에 진흥왕은 백관과 함께 흥륜사 앞에까지 나가서
각덕과 사신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진흥왕 11년(550년) 3월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서로 뺏고 빼앗기며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유명한 장군인
“이찬 이사부(伊湌 異斯夫)”로 하여금 1만군사로 백제를 거드는 체하다가 두 성을
모두 빼앗아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 “도살성”과 “금현성”은 현재의 충북 “청주”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 충북 증평군 일대와
충남 연기군 일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이 17세 정도에 통치수완을 발휘하니 왕태후는 다음해인 진흥왕 12년
(551년) 섭정을 거두고 친정을 허락하는데 이때부터 진흥왕의 뛰어난 실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즉, 동 12년 3월에는 “낭자성(娘子城 - 현 충주)”에서
대가야사람인 ”악성 우륵(樂聖 于勒)“을 만나 맞아들이고 동 9월에는
”거칠부(居柒夫)”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습니다.
또한 동 14년(553년) 2월에는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 궁을 크게 짓기
시작하는데 그 땅에서 황룡(黃龍)이 보이므로 여기는 왕궁 터가 아님을 깨닫고
“황룡사(黃龍寺)“라는 이름으로 절을 짓도록 합니다.
여기서부터 진흥왕은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기 시작합니다.
즉, 현재의 남한강상류 충주일대를 장악하고 김유신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으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면서 금관가야사람들을 이주하게
하며 또한 앞에서 말씀드렸던 “관산성싸움“에서 백제 “성왕”이하 백제군을
전멸시키고 한강유역의 북한산과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며 국경을 정하고
“순수비(巡狩碑)”를 세웁니다.
* 이때 진흥왕이 김무력장군과 금관가야 사람들을 충주일대로 이주하게 한 것은 아직도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금관가야 사람들에 대한 경계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 : 다음의 4기가 있습니다.
(1) 창녕순수비 : 진흥왕 22년(561년) 5가야의 중심지인 “비사벌(比斯伐 또는 比自火
-비자화 = 우리말로 ‘브셔블’ 즉, ‘서울’)”에 처음 세웠는데 지금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 있으며 국보 제33호인데 이 비에는 다른 비에 씌어있는 “순수관경
(巡狩管境)”이란 말이 없어 통상 “척경비(拓境碑)”라고 부릅니다.
(2) 북한산순수비 :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에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국보 제3호로서 “창녕비” 다음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3) 마운령순수비 : 함남 이원군 마운령(摩雲嶺 )에 있었는데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으며 북한 국보입니다.
(4) 황초령순수비 : 함남 장진군 황초령(黃草嶺)에 있었는데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으며 역시 북한 국보입니다.
-- 창녕 진흥왕척경비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원래 자리에 모사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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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흥왕의 불교정책
이렇게 하여 한반도 동남쪽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신라는 진흥왕 23년(562년)
“대가야”의 항복을 받아 경상도일원을 장악한 다음 차츰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싸움에 끼어들어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유역과 강원도, 함경남도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자 진흥왕은 천하를 통일하고 왕권을 절대화하려는 야망을
가지게 됩니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비록 초기에는 모후의 보호아래 성장하기는 했지만
시운(時運)을 잘 만나서 나라의 땅을 엄청나게 넓혀 놓았으니 야망을 가질 만도
한데 마침 수용한 불교의 “인과(因果)와 윤회(輪廻)”라는 충격적인 논리가 기존
사고의 틀을 파괴하기에 이르렀고 또 유교문화를 접하지 않은 당시 사회에서는
종전의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전통과 맞물려 순수혈통의 왕은 “신족(神族)”이라는
관념과 불교에서는 배척하였던 “인도의 사성제(四姓制)”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계급제도를 절대화 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진흥왕은 스스로를 “찰제리종(刹帝利種 = Ksatriya = 왕족-王族)”의
“참된 뼈대(= 진골-眞骨 = 진종-眞種)”을 타고난 절대군주로 자부하고
이 “참된 뼈대”를 처음 일으킨 왕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진흥왕(眞興王)”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종(種)”은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혈족(血族)”
또는 “혈통(血統)“을 말합니다.
즉,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석가족(釋迦族)”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불교 법명을 가져서 선대인 “법흥왕”이
“법공(法空)”이라는 법명을 가진 것을 따랐습니다.
* 여러 가지 측면으로 신라는 스스로를 “신국(神國)”이라고 불렀던 모양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그렇게 부르지요.
그리고 진흥왕은 자신의 아들 대에 가서는 천하를 통일하는 “왕중왕(王中王)”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왕비인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의 이름을 “동륜(銅輪)”, 작은아들의 이름을
“금륜(金輪)”이라고 짓게 됩니다.
* 전륜성왕(轉輪聖王) : “산스크리트어”에서 “Vartin(轉) + Cokra(輪)”의 합성어로서
“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천하를 통일한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BC 3세기 인도의 “마우리아(Maurya-한자로는 공작-孔雀이라고 표현) 왕조”의
“아쇼카(Asoka)왕 - 한자로는 아육왕-阿育王 : 재위 BC 269~BC 232)”를 속세의
“전륜성왕”이라고 처음으로 불렀습니다.
아쇼카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전파시켰는데 이 왕의 업적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내용은 종전 여덟 개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두 꺼내어
84,000 등분하여 천하에 그 숫자에 해당하는 탑을 세운 것입니다.
-- 사리(舍利 - Sariya)는 “유골”이라는 뜻입니다.
-- 여기서 84,000 이라는 숫자는 실제수라기 보다는 당시 “8”을 기본단위로 쓰던
인도인들에게는 “대량” 또는 “매우 많음”을 뜻한다고 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님이 타고 나셨다고 하여 표현하는 말인 “삼십이상
(三十二相)“을 타고난 사람은 ”재가(在家)“하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出家)“하면
“불타(佛陀)”가 된다고 합니다.
“전륜성왕”에는 금(金,) 은(銀), 동(銅), 철(鐵)의 네 종류가 있는데 “금륜성왕”이 나오면
“금륜보(金輪寶)”가 따라 나오고 “은륜성왕”이 나오면 “은륜보(銀輪寶)”가 따라 나오는 등
각기 그 이름에 따른 “윤보”가 따라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나
“금륜성왕”은 4주(洲)를 다스리고 "은륜성왕“은 3주, ”동륜성왕“은 2주, ”철륜성왕“은
1주를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과 행동을 묘사하는 말에는 통상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말하지만 넓게 말할 때에는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너무 길어서 언젠가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아쇼카왕이 만든 석주(石柱)와 스투파(Stupa =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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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흥왕의 불국토화 염원
진흥왕은 또 일찍 돌아가기는 했지만 “동륜태자”의 아들들 즉, 자신의 손자들
이름을 석가모니부처님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 이름으로 지었는데 즉, 큰손자는
“백정반(白淨飯)”, 또는 “백정(白淨)” 둘째는 “백반(伯飯)” 그리고 그 밑은“국반
(國飯)”으로 지었는데 나중에 “진평왕(眞平王)”이 되는 “백정반(白淨飯)”의 부인을
석가모니부처님의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진평왕”과 “마야부인”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부모와 이름이 같으므로
당연히 그 사이에서는 석가모니불이 나와야하는데 석가불은 당시를 기준으로 이미
천여 년 전에 인도 가비라성에서 태어났던 과거불이니 당대의 신라에서는
“당래불(當來佛 = 미래에 마땅히 와야 할 부처님)”인 ”미륵불(彌勒佛)“이
태어나야만 하게 됩니다.
여기서 불교가 중국문화권으로 들어오며 여체(女體)로 인식하기 시작한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출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여 집니다.
* "진평왕“의 딸이 ”선덕여왕“, 진평왕의 둘째아우인 ”국반(國飯)”의 딸이
“진덕여왕”이지요.
이 이야기는 “선덕여왕” 편에서 다시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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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화(源花)와 화랑(花郞) 제도의 창설
- “원화”는 한자로 “原花”라고 쓰기도 하고 “源花”라고 쓰기도 하는데
“源花”를 더 많이 쓰니 앞으로 그렇게 쓰겠습니다.
이렇게 진흥왕은 민심을 결집하여 승승장구로 국토를 확장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이를 지키기 위하여 불교를 더욱 널리 보급하고자 절을 짓고
사람들을 출가시켜 승려를 만드는 한편으로는 왕 자신의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고
신선(神仙)을 숭상하는 기질이 있어서 “원화”와 “화랑”을 만들게 됩니다.
“원화”는 “용화수(龍華樹)"를 근원으로 삼는다는 의미로서 즉,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세 차례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원화”를 “소년”으로 하지 않고 “미소녀”로 삼은 것은 이미 중국에서
미륵보살이 여성화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져 왔기 때문으로 봅니다.
* 용화수 : “龍華樹” 또는 “龍花樹”라고 쓰는데 미륵보살이 이 나무 아래에서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데 꽃가지는 용의 머리와 같고
나뭇가지는 보룡(寶龍)과 같다고 합니다.
* “원화(源花)”는 나중에 “선화(仙花)”로 바뀝니다.
* “미륵보살”에 대하여는 다음 “선덕여왕”에서 다시 설명 드립니다.
처음에 “남모(南毛)”와 “교정(姣貞 - ‘삼국사기’에서는 ‘준정(俊貞)’으로 나옴)”의
두 낭자를 “원화”로 뽑아 각각 3~4백 명씩의 소년낭도를 거느리게 했는데 이들이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교정(준정)”이 “남모”를 죽이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데
그래서 다음에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남자를 데려다가 꾸며서 “화랑(花郞)”
이라 하고 그를 받들도록 하니 서로 도의(道義)를 알며 서로 즐기고 또 그르고
바른 것을 가려서 알게 되어 조정에 추천하여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 내용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진흥왕의 증손녀 대에 가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출현하는 것을 보면
이 원화제도는 그대로 존속하여 진평왕 대에 가서는 왕녀나 왕손녀 등 진흥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진골귀족의 딸들 중에서 뽑혀 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진흥왕이 진평왕과 왕비의 이름을 석가여래의 부모들
이름과 같이 지어서 그 사이에서 출생한 공주들 중에서 원화가 선출되어
“미륵보살”의 화신 역할을 하다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원화”로 뽑힌 왕녀나 왕손녀들은 평생 결혼할 수 없는 어떤 규정이
있었던듯한데 왜냐하면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가정을 꾸린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나중의 제51대 “진성여왕(재위 : 887~897)”도 정식으로 결혼한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화”로 뽑히지 않은 다른 공주들은 예외로 보이는 것이 “선덕여왕”의
여동생들인 “천명(天明)공주”와 “선화(善花)공주-의미가 조금 다르지만도”의
두 공주는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 지난번 드라마에서는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큰딸로 나오고 최근 익산 “미륵사”의
발굴기록에서 “선화공주”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선덕여왕(= 덕만-德曼)”을 진평왕의 큰딸로 보고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 참고로 재미있는 것은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이며 “진성여왕”의 이름은 “만(曼)”으로 신라 여왕 세분이 모두 “만(曼)”
자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평왕이 돌아간 후 왕을 이어받은 진지왕이 비록 불명예스럽게
폐위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진지왕의 큰아들인 “용수(龍樹)”와 둘째아들인
“용춘(龍春)”이 있었고 또한 “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의 “김춘추(金春秋)”가
있었는데도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고 더욱이 “선덕여왕” 사후에 “진덕여왕”이
다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은 “미륵”의 화신인 “원화”가 왕위를 계승토록 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 진지왕을 폐위시킬 정도이면 그 아들들이나 손자가 멀쩡하게 살아서 벼슬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 그 배경에 많은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진덕여왕” 사후에 “김춘추”가 왕위에 나가는 것은 아마도 당시 상황에서
더 이상 미륵보살의 출현이 필요 없게 되었고 당나라와의 잦은 교류로 가부장적인
유교윤리가 차츰 힘을 얻어가는 사유라고 보여 집니다.
(5) 진흥왕의 죽음
승승장구하던 진흥왕은 동 29년(568년)을 고비로 차츰 힘을 잃어 가는데
그 내용은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 재위 554~598)이 한강일대를 차지하고
고구려가 다시 힘을 길러서 임진강일대를 차지하여 중국과의 교류도 어려워졌는데
설상가상으로 진흥왕 33년(572년, 백제 위덕왕 19년)에는 태자인 “동륜(銅輪)”이
불과 20여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니 진흥왕의 영화가 차츰 빛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흥왕 37년(576년, 백제 위덕왕 23년) 8월에 불과 43세의 한창나이로
돌아가고 불과 20여세의 둘째아들 “금륜(金輪)”이 이어받아 “진지왕”이 됩니다.
그런데 역사서에 의하면 진흥왕은 병이 들어서 정사를 보지 못하는 중에도 부인인
“사도부인(思道夫人)” 그리고 “미실(美室)”. “보명(寶明)”, “옥리”, “월화” 등의
궁주(宮主)들과 더불어 즐거움에만 탐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것들이 건강을 급속히 악화시켜 일찍 돌아가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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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실(美室)의 등장 ***
(ㄱ) 미실은 누구인가
여기서 “미실(美室)”이 등장하는데 “미실”을 다루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다음에
틈틈이 제가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면 그때그때 언급하겠는데 어쨌든 진흥왕부터
섬겨서 그의 아들들과 손자인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까지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가까운 남자들이 많았기에 “미실”은 그냥 왕실을 가지고 놀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조금만 덧붙이자면 “미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뇌쇄(惱殺)-여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남자들이 매료되어 넋을 잃음”이라는 단어만큼 아주 적합한 말이 없다고들 말하는데
이는 “미실”은 “아름다운 집”이라는 이름 그대로 매우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남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기술이 뛰어나서 “미실” 주위의 모든 남성들이 모두
그에게 바치는 노력과 정열이 이 “뇌쇄적 매력”이라는 단어이외에는 따로 표현할 말이
없다나 뭐라나......
그런데 “미실”은 미모뿐만 아니라 문장을 잘 짓는 등 학문에도 뛰어나서 진흥왕이
업무를 볼 때도 옆에서 도움을 주었다는데 어쨌든 진흥왕은 “미실”을
“천하를 뒤집을 만큼 사랑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ㄴ) 대원신통(大元神統)과 진골정통(眞骨正統)
신라에는 왕실에 왕비 등의 여자를 공급하는 “인통(姻統 )”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특이(特二)한 혈통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원신통(大元神統)”과 “진골정통(眞骨正統)”
이라고 합니다. 이 두 혈통은 철저하게 모계(母系)로 이어지는데 즉, 어머니에게서 딸로,
딸에게서 손녀로 이어지는 이 혈통은 왕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우는
경쟁관계였다고 합니다.
“미실"은 ”대원신통“의 계통으로 그 외할머니는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玉珍宮主)“
이고 어머니 역시 법흥왕의 후궁인 “묘도궁주(妙道宮主)”인데 “미실”의 모습에 대하여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 : 제21대 소지왕의
후궁)‘을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 : 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가지 꽃의 영검함이
뭉쳐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가졌는데 “옥진”은 “미실에게 전문적인 ”방사(房事)“ 기술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미실”은 548년(진흥왕 9년) 출생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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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륜태자(銅輪太子)의 요절(夭折) ***
“미실”은 원래 비교적 주위환경에 잘 적응하는 수동적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화랑으로서 제5세 풍월주인 “사다함(斯多含)”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하였지만 “사다함”이
모종의 사건으로 일찍 죽자 마음을 바꿔 다시는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권력을 쥐기 위하여
노력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 걸려든 것이 진흥왕의 큰아들인 “동륜태자”인데 “동륜”은 “미실”의
마력에 단숨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동륜”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좋아했던 모양으로 “미실”을 가까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후궁인 "보명궁주(寶明宮主)“를 좋아하게 되는데
”보명“은 처음에는 “동륜”을 거부하다가 진흥왕이 “미실”에게 빠지는 것을 보고
”동륜태자“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진흥왕 33년(572) 3월 “동륜”은 혼자 몰래 “보명”을 만나려고 “보명궁”의 담을
넘어 들어가려다가 큰 개에 물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동륜“은 부인인 ”만호부인(萬呼夫人) = 진흥왕의 여동생“과의 사이에서 후에
”진평왕“이 되는 “백정(白淨)”과 “백반(伯飯)” 그리고 “국반(國飯)”을 두게 되는데
이들의 이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 이름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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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라왕의 호칭(呼稱)과 시호(諡號)
진흥왕은 “참된 뼈대”라는 뜻의 “진(眞)”을 스스로 왕호에 붙이고 이는 다음의
왕들인 “진지왕(眞智王)”, “진평왕(眞平王)” 그리고 “진덕여왕(眞德女王)” 까지
이어지는데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불교경전에 나오는 동방세계의 부처의 이름인
“선덕여래(善德如來)“에서 유래한 것이며 또한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인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은 불경의『승만경』의 주인공으로서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약속받은 “승만부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있는 것은 진흥왕 스스로 “진(眞)”이라는 말을 붙였다는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칭호는 통상 “시호(諡號)”로서 “왕이 죽은 다음에
후세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참작하여 올리는 미칭(美稱)“이라는 점입니다.
*** 추사 김정희의 시호에 대한 연구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는 여러 학자들이 의문을 갖고 있는데 바로 이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라는 진흥왕 순수비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확실해 지며 또한 이해가 됩니다.
- 신라왕의 시호는 삼국통일 이전의 중엽부터 생긴 것이고 초기에는 모두 고유한 말로써
일컬었으니 그것들은 “거서간(居西干 : 1분)-차차웅(次次雄 : 1분)-이사금(尼師今
: 16분)-마립간(麻立干 : 4분)“이 바로 그것이다.
[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에 왕이 돌아가니 “지증”
이라 했다라고 말하며 신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듯 말하며
또 이로부터 왕이 돌아간 후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쓰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記 )“에서도 역시 ”왕이 돌아가시매, 시호를 ’진흥‘이라 했다.“라고
쓰여 있다. ]
그런데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이거늘 그 제목에 엄연히 “진흥대왕”
이라고 일컫고 있으며 또한 북한산순수비에도 역시 “진흥”이란 두 글자가 있다.
이로 보면 ”법흥(法興)“이니 ”진흥(眞興)“이니 하는 것은 장사지낸 뒤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칭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중국 측 “정사(正史)“인 <북제서(北齊書)>에서는 ”무제성(武帝聖) 하청
(河淸) 4년에 조서를 내려서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에게 ‘사지절동이교위(使持節東夷
校尉)‘로 삼았다”고 했고 <수서(隋書)>에서는 “개황(開皇) 14년에 ’신라왕 김진평(金眞平)‘
이 사신을 보내어 축하했다”고 했으며 또한 <당서(唐書)>에서는 “정관(貞觀) 6년에
‘진평왕’이 돌아가자 그 딸 ‘선덕(善德)’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들에 의거하여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것들은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후에 비로소 ”시법(諡法)“이 있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당서(唐書)>의 기록에 “김무열(金武烈)”이라 하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고
했다. 이로써 가히 알만한 일이다. 그러니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한 것은 역시
살아있을 때의 칭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위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 이 문제에 대하여 더욱 명확한 자료는 중국 측 역사서에 나오는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에
대한 호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신라왕에게는 “김진흥”, “김진평” 등으로 불렀지만
고구려왕은 “고구려왕 고(高) 아무개”, 백제왕에 대해선 “백제왕 부여(扶餘) 아무개” 또는
“백제왕 여(餘) 아무개”라고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왕에게는 그 이름을 쓰면서 신라왕에게만 유독 “시호”를 썼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 백제왕의 성씨는 초기에는 “부여(扶餘 또는 夫餘)”, “해(解)”, “우(優)” 씨 등이 섞여서
쓰였으나 중기 이후에는 “부여” 또는 줄여서 “여(餘)”라고만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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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25대 진지왕(眞智王 : 재위 576~579 = 4년)
진흥왕이 돌아가자 바로위의 형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흥왕을 이어받은 이는 진흥왕이 ”금륜성왕(金輪聖王)“이 되라고 ”금륜(金輪)“
이라고 이름 지은 둘째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부인은 “지도부인(知道 또는
知刀夫人)”입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금륜”은 “사륜(舍輪)”, 또는 “철륜(鐵輪)”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즉위 초부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당시에는 이미 “왕위의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던 때이어서 사실 정식으로 하면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하나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후에 진평왕”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는데 “금륜”은 이미 관계를 가진 “미실”과 ”이찬 거칠부
(伊湌 居柒夫)” 장군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를 이어 받습니다.
그리고는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정을 돌보려하지만 신라의 왕권이
흔들리는 것을 본 백제 위덕왕의 연이은 침공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또 당초의
”미실“과의 약속을 어기고 황음(荒淫)에 빠져서 ”미실“과 당시 “영흥사(永興寺)”에
주석하고 있었던 진흥왕의 부인이며 왕대비인 ”사도부인“이 합세하여 당시
상대등의 자리에 있던 ”사도부인“의 친오빠인 ”노리부(弩里夫)“를 앞세워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진지왕을 재위 4년 만에 폐위시키는데 아직
“연호(年號)”도 제정하지 못한 채였습니다.
*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진지왕” 다음의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잇는
“태종무열왕“인 ”김춘추“가 왕이 되면서 ”진지왕“의 계열이 삼국을 통일하고 당분간
신라의 왕이 되면서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시대 비참하게 죽는 “사도세자 = 장조”의 계열이 마지막 왕인 “순종”까지
이어지는 것과 비교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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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왕 폐위에서의 미실의 역할 ]
* 이 때 미실은 “노리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인 제6세 풍월주 “세종전군(世宗殿君)”과
애인인 제7세 풍월주 “설원랑(薛原郞)” 그리고 가야계 화랑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제8세 풍월주 “문노(文弩)” 등을 포섭하여 함께 거사토록 합니다.
* 기록에 의하면 진지왕은 폐위 뒤에 바로 죽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그 후에도 3년 정도를 비록 유폐(幽閉) 상태이었기는 하나 더 살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진지왕 폐위 뒤에도 그의 아들들인 “용수(龍樹)“, ”용춘(龍春)“
또한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가 벼슬자리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 진지왕은 폐위 후에 “도화녀(桃花女)”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비형랑(鼻荊郞)” 이라고
하는 아들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귀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을
많이 만들어내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미실”과의 사이에서 “비담(毗曇)”을 낳았다는
내용은 위와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이는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上大等)”의 벼슬에 올라서 반란을 일으키는 “비담”을 드라마 상으로 그런 역할로 만들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니까 “비담”은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드라마에서의 “비담”의
역할은 꾸며진 것으로 봅니다.
--- 일부 기록에 의하면 “비담”은 “석(昔)”씨 계열로 추정하고 있어서 주목됩니다.
진지왕의 아들이라면 “김씨”이어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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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제26대 진평왕(眞平王 : 재위 579~632 = 54년)
이렇게 하여 “진지왕”이 폐위되고 왕세손(王世孫)이었던 “동륜”의 큰아들인
“백정(白淨 = 백정반-白淨飯이라고도 부름)”이 왕위에 올라 “진평왕”이 되는데
왕비는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들의 이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진평왕”은 어머니가 진흥왕의 여동생인 “만호부인(萬呼夫人) 김씨”이며 부인 역시
“지증왕” 계열의 김씨로서 순수한 진골중의 진골이라고 하겠는데 아직 13세(?)
아니면 15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다음에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德曼 : 580?~647)”과 나중에
“김춘추”를 낳는 “천명공주(天明公主 : 582?~?)”와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
580?~641, 재위 600~641)의 왕비가 되는 “선화공주(善花公主 : 584?~?)” 등
세 명의 따님이 태어납니다. 이들 중에서 처음에는 “선화공주”를 이전의
“원화(源花)”인 “선화(仙花)”로 만드는 것으로 보이나 “선화공주”가 백제
“마동(후에 무왕)”을 따라가게 되자 다음에는 맏딸인 “덕만”을 “선화(仙花)”로
만들게 됩니다.
이 당시는 제해권(制海權)이 다시 백제로 넘어갔을 때라서 중국과의 교류가 매우
어려웠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진평왕 5년(583년) 1월에 “선부서(船府署)”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해양력(海洋力)을 키우게 되는데 이의 덕분으로 진평왕7년(585년)
7월에는 지명(知明)대사를 남조의 진(陳)나라로 유학 보내고, 진평왕 9년(587년)
7월에는 김대세(金大世)와 구칠(仇柒)을 해양세력 강화를 위하여 파견하나 실패하며
그리고 진평왕 10년(588년) 3월에는 유명한 “원광(圓光)법사”를 당시 신흥국가인
”수(隋)“나라로 유학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진평왕 16년(594년)에 가서야 겨우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어서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후에는 어느 정도 자주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진흥과 국력배양에 힘을
쏟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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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실의 권세 ***
미실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어린 나이의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진평왕을 가까이
하여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진평왕은 어린데도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치는
체질이었다고 하는데 그를 곧바로 휘어잡아서 나라의 옥새(玉璽)를 관장하는 “새주(璽主)”
가 됩니다. 그런데 진평왕이 왕위에 오를 때 “미실”의 나이가 32세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변에는 전(前) 풍월주였던 남편인 “세종전군(世宗殿君)-6세 풍월주”와 애인인
“설원랑(薛原郞)-7세 풍월주” 뿐만 아니라 동생인 10세 풍월주 ”미생(美生)“, 세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11세 풍월주 “하종(夏宗)” 그리고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16세 풍월주 막내아들 “보종(寶宗)” 등이 있어 그 세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 미실은 설원랑과의 관계가 가장 진실 된 것이었다고 하며 막내아들인 "보종“을 가장
아꼈다고 하는데 그 이외에도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수종(壽宗)”, 세종전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옥종(玉宗)“ 등의 아들들이 있으며 공주도 여럿이 있습니다.
* 풍월주(風月主) :
위에서 풍월주가 여럿 등장하는데 이는 “화랑(花郞)의 우두머리”를 말하며
“여러 곳을 다니며 수련하는 바람과 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7세 풍월주인 설원랑 또는 제8세 풍월주인 문노에게는 “국선(國仙)”이라는
호칭을 주어서 이후 “풍월주파”와 “국선파”가 대립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풍월주제도는
진흥왕1년(540년) 시작되어 문무왕21년(681년) 총 32세로 끝나는 것으로 되며
이후는 “화랑”을 통상 “국선”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 이외에도 제13세 풍월주 용춘, 제15세 풍월주 김유신, 제18세 풍월주 김춘추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 전군(殿君) :
왕의 후궁에서 태어난 아들을 통칭하는데 (태자-왕자-전군) 등으로 구분합니다.
* 궁주(宮主) :
통상 왕의 후궁을 뜻하는데 왕의 딸(왕녀-王女)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후궁이나 왕녀에게 궁(집)을 하나씩 주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 고려시대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원래 ”헌애왕후(獻哀王后)“인데
태후가 되면서 ”천추궁(千秋宮)“에서 살아서 그렇게 불렀지요.
*** 미실의 죽음 ***
미실은 말년에 세종, 설원랑 등과 함께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진평왕 28년(606년) “이상한 병(奇疾)“에 걸리는데 설원랑이 밤낮으로 간호하며 자신이
대신 병을 앓게 해달라고 밤마다 빌어서 결국 병에 걸려 죽습니다.
그러자 미실은 자신의 속옷을 관에 넣어 함께 장사지내며 “나도 머지않아 그대를 따라갈
것이다”라고 하며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59세였다고 합니다.
즉, 548년(진흥왕 9년) 출생하여 606년(진평왕 28년) 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여러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았지만 여러 남성들
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이 유일하다고 하는데 그것도 뭇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랐다고 하니 굉장하다고 하겠습니다.
* 그런데 이때는 “덕만”이 아직 왕위에 나가지 않았을 때이고 진평왕이 등극할 때가 미실이
32세였다고 했으니 “덕만”은 그 후에 태어났을 것이 분명하므로 둘의 나이차가 아무리
적어도 30살이나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또한 “선덕여왕”이 죽을 때의 나이가 약 68세 정도였으며 이와 비슷한 나이로
추정되는 “비담”과의 사랑이야기도 가능할 수는 있으나 말년까지 이어지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 그럼 여기서 선덕여왕이 왕위에 등극하는 전해인 진평왕 53년(631년)에 일어났던
“칠숙과 석품의 난”을 기준으로 하여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나이를 대강
짚어봅니다.
- “이찬 칠숙(伊湌 柒宿)”과 “아찬 석품(阿湌 石品)”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구족(九族)이 멸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 이때를 기준으로 한 드라마 등장인물들의 추정나이
미실 : 이미 25년 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음 (살아있었다면 84세)
덕만 : 약 52세
비담 : 덕만과 같거나 약간 위로 보임 (52~54세)
김춘추 : 진평왕 24년(602년) ~ 태종무열왕 8년(661년) 이니까 --- 30세
김유신 : 진평왕 17년(595년) ~ 문무왕 13년(673년) 이니까 --- 37세
➜ 그러니까 선덕여왕과 김유신장군의 나이차가 약 15년으로 추정되니
둘 사이의 애틋함에 대해서도 고개가 금방 끄덕여지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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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로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드디어 “선덕여왕”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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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첫댓글 하이고.. 읽기에 숨이 다찹니다 이런 얘기들을 모두 어디서 찾아서 보시고, 정리하시는지요? 삼국사기나 유사에 있긴 하겠지만, 좀 다른 것도 같은데 말이죠.. 어째튼 샘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감사합니다.
예~~~ 저는 원래 드라마 "선덕여왕"을 처음에는 보지 않았었는데 주위에서 "미실"에 대하여 자꾸 물어 보길래 "내가 아는 바와는 조금 다른데..." 하다가 나중 몇편을 보게 되면서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구나를 알게 되었고... 그 이전에 이글을 쓰려고 준비했었는데 처음에는 "미실"에 대하여 쓸 계획이 없었다가 추가하게 되었지요. 이글은 책 몇권에서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게된 것 입니다. 좀 많이 힘들었는데 책마다 연대가 조금씩 다른 것도 있었고 표현이 애매한 것도 있어서 제 나름대로 통일했습니다. 우리나라역사(근대사 포함)은 아직도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역사는 해석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