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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정씨 판결사공파 공주목사 정무선영의 마을 풍경안내
◎ 마을경관과 자연환경
○ 자연경관 및 마을연혁
마을 명은 국사당(國士堂) 또는 국동(菊洞)으로 칭하여 왔는데 국동이란 국화국(菊) 자를 닮은 지형이라 마을명도 당시 나라의 선비 정무공이 왔다고 하여 마을명을 국사동(菊士洞, 國士洞), 큰산을 국사봉(國士峰)이라고 부르다가 현재는 국동(菊洞)이라고 부른다.
국동리(菊洞里)는 공주시 탄천면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탄천면 소재지에서 송학리 방면의 매봉재 길을 따라 3.2km를 달리면 마을 초입에 도착한다. 백제대로를 타고 가면 공주시내에서 20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마을이다. 이인면과 경계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북쪽에 운곡리, 동쪽은 이인면 달산리, 남쪽은 송학리, 서쪽에 금강줄기와 견동리에 접해 있다.
국동리는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동부와 북부에는 각각 해발 고도 200m와 100여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북서부에는 칠봉산(七峰山: 227.7m)과 서부에는 보리고개가 있다. 서부와 남부에는 운곡천(雲谷川)과 그 지류가 동서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주변에는 해발 고도 40여m의 충적 평야가 펄쳐져 있다. 이 평야지대에는 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구릉지대에서는 밭농사를 짓고 있다. 자연마을로 성머리, 오룡골, 새밭(신전)이 있다. 골짜기 이름 으로는 지승골, 매골, 저나무골, 치봉골, 대적골 등이 있다. 국도와 지방도는 지나지 않으나 곳곳에 소규모 도로와 농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마을 구조는 반은 4개반으로 구성[원국동1반~2반/ 28세대, 새말(신전)3반/12세대, 오룡골 성머리 4반 16세대]되어 있다.
백제시대에는 소부리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다. 고려때는 공주목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반탄면에 속했다. 큰산과 되민달 등 높은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성두리(城頭里), 송곡(松谷), 견산리(見山) 일부를 병합하여 국동리라하고 탄천면에 속하게 되었다.
○ 주요지명유래
[마을]
◾새밭: 국동사람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밭에다 새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으로 신전(新田)이라고 도 한다.
◾신락정터: 새밭입구, 이곳의 느티나무를 정주나무라고 해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괴목제를 지냈다.
◾오룡골:오룡이 여의주를 물고 올라가는 형국이라 명당처를 찾는 풍수가들이 왔다는 곳이다. 오룡골의 앞들은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으며 국동리의 주경작지이다.
◾ 성머리: 성두라고도 하는데 오룡골 서쪽 국동리의 끝자락으로 평안산 성의 머리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머리라 부른다. 인근에는 성두리(城頭里), 성두(城頭)라고도 한다. 인근에는 이차적으로 형성된 성머리 고개란 지명도 있다. 이곳에 옛 봉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평안산성(平安山城)의 머리 쪽이 되는 마을로서 옛날 난리가 있을시 이곳으로 피난온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하여 피난처로 알려진 곳이다.
◾ 국동(원마을): 신전의 동쪽으로 최초 마을을 이룬 국동마을을 정무목사의 묘가 있는 지역을 말한다.
[산]
◾ 큰산: 일명 국사봉(國士峰/菊士峰)이라 말한다. 국동마을을 보호하여 주는 산[큰산, 국사봉(國士峰)]이다. 주민들을 보호하여주는 산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산신인 호랑이를 달래고, 마을의 안위를 위하여 술, 고기 ,떡을 산으로 올려 한곳에 저장하여 제사를 올린다. 이때, 산신인 호랑이는 불을 싫어하므로 밤새 불을 피우고 멀리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마을회관에는 황토 흙도 동글하게 놓고 제사음식을 만들고 제사 종사자는 육신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목욕하고 제복도 단정히 입고 제사를 실행한다.
◾ 되민달: 되민달이란 높은 산이 달 아래에 있으며 산이 높기 때문에 산 높이로 달을 가리는 산이라 하여 되민달이라 칭한 것 같다. 그곳은 달빛 아래에 있는 산 이름이다. 큰산의 국사봉 우측으로 택자와 앞산이 나지막하게 이어오다가 다라티 고개를 이어 동올산의 입구에 되민달이 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고개 산너머에는 이인면 달산리의 달밭이 있다. 우측에는 진달래꽃이 많이 피는 꽃밭님아가 있다.
◾새닥골: 국동에 있는 릉이다 동네를 가려주고 있어 붙은 이름인 것 같다.
◾ 당산(堂山): 큰산 줄기로 큰산에서 왼쪽으로 끝자락이다. 신전과 국동을 갈라서는 구릉 같은 산을 당산이라 한다.
◾ 앞산: 큰산에서 택자를 지나서 있는 릉산이 앞산이다. 정무공의 묘에서 보면 앞산이다.
◾ 평안산: 평안산은 토정 이지함 선생이 올라가 편하게 자리를 잡아 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에 성이 있어 나라에 난리가 나면 피난처로 매우 안전한 곳이라 하여 평안산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산골이라는 의미이며 실제 산성 유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개]
◾ 다리티고개: 국동에서 달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공주5일장을 보러 당나귀타고 가던 고개 길이다. 느티나무가 매우 큰 것이 있었는데 고목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가 1960년대 사방공사 시절 고목 나무를 없애고 포풀러나무를 심었다. 이곳에 바위가 넓게 있는데, 정무공에 뵙기 위해 남몰래 의상을 갈아입고 간다고 하여 개복암(改服巖)이라고 불었다. 그 옆에는 호준암(虎蹲巖) 이 있다. 호랑이 웅크리고 있다는 표현을 호준암 으로 작명하고 정하언 대사간은 1766년(영조 42년)부친(정무)의 선영에 시묘살이하며 그곳에 세장지 (영일정씨 세장지)라는 암각서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정술원(두산) 조선말기 화가의 묘가 있다.
◾ 삼각고개: 탄천가는 직선도로 길이다. 서낭당이 삼각고개에 있었는데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시절 없애고 지금은 고개를 낯추어 승용차량이 다닐수 있게 하였다. 버스통행을 추진하였으나 삼각2리 이씨들 반대로 승용차길로만 통행하여 탄천소재지로 통행하고 있다.
◾홍성골고개: 국동의 북쪽에서 홍성골고개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그곳은 칡이 번성하여 있다.
◾ 붉은재: 새밭 동북쪽의 지승골에 위치한 고개, 붉은 황토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국동에 산신제를 지낼 때 이곳의 황토를 가져다 쓰고있다.
◾꽃밭님아: 되민달에서 우측으로 있는 산이 꽃받님아다. 진달래꽃이 많아 능산을 꽃받님아로 칭한 것으로 본다.
[골짜기]
◾배나골: 홍성골 고개에 아래에 있는 산자락을 배나무골이라 한다. 배나무가 몇주있어 그곳을 배나골이라 한 것 같다.
◾택자: 국사봉(큰산)의 우측에 택(澤)자가 있다. 이곳에 공주목사 정무옆에 묘를 쓰도록 승인한 곳이라 하여 지은 것 같다.
◾북당골: 되민달과 꽃밭님아 계곡이름을 북당골이라 한다.
◾석갓: 산골모퉁이에서 증골을 가는 산을 석갓이라 한다.
◾대적골: 지승골 내의 공판 뒤편의 모과나무골 맞은편에 있다. 예전부터 이곳에 도둑이 많아 혼자서 넘어가지 못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산세가 깊어 6.25 전쟁 때에 마을사람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 매골: 새밭에서 서남쪽에 위치하며 골짜기가 조용하고 깊어서 매가 많이 서식했다고 한다.
◾저나무골: 새밭의 서쪽에 위치한다.
◾절터골: 모과나무골 아래에 위치한다. 절에 빈대가 많아서 중들이 모두 떠나 절이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절터 밑에 골짜기를 절터골 이라고 한다.
◾ 지승골: 절터골과 모과골, 오룡골을 합쳐서 지승골 혹은 지성골이라 한다.
◾증골(즘골): 신전 남동쪽, 국동에서 산골모퉁이로 나와서 석갓을 넘어가면 위치한 곳이다 옛날 사기그릇을 만들던 곳인 것 같다.
◾ 치봉골: 신전에서 서쪽에 위치하며 옛날 사람이 죽으면 묻지 않고 작은 골자기에 치봉했다가 수개월 뒤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들]
◾ 공판: 신전 서쪽의 지승골 중턱에 떼밭이 있는데 이를 마을에서 공판이라 한다. 마을 청년들이 이곳에 모여 공치기를 하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나무꾼들의 놀이터에서 유래한다.
◾ 오룡골 앞들: 오룡골 앞의 넓은 들을 말한다.
[연못, 및 천]
◾못물: 국동 초엽에 연못을 말한다. 정무목사 묘을 만들기 위해 논에 있는 흙을 묘단장으로 쓰다보니 연못터가 1766년경 생겼다. 국화꽃을 많이 심어 마을이름도 국동(菊洞)으로 명명하였다.
◾ 성두천: 국동리의 되민달과 국사봉, 당산, 신전의 평안산 등지에서 발원 하여 물들이 내려가며, 송학리의 장군봉 합류하여천을 이루는데 신전과 성머리 마을을 지난다는 데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