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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느낌표 김재희
“수고하십니다.” J 선생님의 이 한마디 말만 듣고는 망설임도 없이 그냥 문을 열어 준다. 옆에 앉은 K 선생님이 잘 아는 사이냐고 묻자 아니란다. 그럼 어떻게 해서 검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느냐는 말에 ‘말의 느낌’ 때문이란다. 네 사람이 탄 승용차가 국립공원을 들어갈 때의 상황이다. 차 안에는 모두 65세 이상의 면제 대상이니 그냥 들어가도 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매표소에서 그것에 관해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그 단계를 생략한 것이다. J 선생님의 말씀은 뭔가 속이려고 한다면 말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서 떨림이 있거나 더듬었을 텐데 전혀 동요가 없는 편안한 말이었음을 느꼈을 터이니 의심이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면 그때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톤이나 흐름이 다르다. 상대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 느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소리만으로도 재깍 그 상황을 눈치를 챌 수 있지 않던가. 어느 수필을 읽었을 때의 일이다. 작가는 그 고장의 사투리로만 글을 썼는데 글로 읽을 때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표준어와 맞춤법이 잘 된 문장만 읽다가 그런 글을 대하고 보니 어리둥절한 것이다. 글 중 한두 문장만 그런 글은 그런대로 이해가 갔지만 수필 한 편 전체를 그리 사투리로 써 놓으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눈이 어지러워 다른 사람에게 좀 읽어달라고 하고 나는 듣기만 했다. 그랬더니 그 글이 이해되는 것이다.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읽어주는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가 이해되었다. 눈으로 보는 글과 소리로 듣는 글이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다. 글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소리에서 느끼는 감정의 폭이 훨씬 더 다양하고 확실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어떤 뜻을 전할 때도 글로 읽으면 자칫 오해할 수 있다. 마음은 농담하는 뜻으로 쓴 글인데 그것이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고 정색한 뜻으로 인식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글 끝에 웃는 모습이나 이모콘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말은 그때 상황에 따라 적절히 표현되니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 반면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감정이 격해지는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기보다 더한 흉기로 변할 수 있다. 말로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크던가. 말은 사람의 인품이기도 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품위가 달라져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고귀한 인품으로 보이게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평소 가볍게 하는 말일지라도 자신의 분신이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곁의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는 못하더라도 밀쳐내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나는 과연 어느 쪽인가 생각해 봐야 할 듯싶다.
“남은 것 내가 가져가도 될까?” 이런 대화는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서 나오는 대화가 아니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이리라. 40여 년 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그러나 어제 만났던 이웃집 아저씨 같은 말투의 대화는 그동안의 거리감을 하루거리로 압축해 버렸다. 서로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승용차 번호로 확인하자고 해서 만날 정도인 긴 시간의 공간을 훌쩍 넘겨버린 말의 느낌! 말에는 각가지 느낌표가 달린 것 같다. 사람마다 각기 가지고 있는 말에 어떤 느낌표가 몇 개 붙을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특색 있는 색깔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쓰는 말에는 어떤 느낌표들이 붙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맛있는 점심과 여유로운 차로 몸 따습게 해주고 절간 처마와 내장산 서래봉의 선을 가리키며 촉촉한 정서를 채워주신 은사님과의 하루가 잘 익은 수수 알처럼 찰지다. 내 고장의 역사를 강의하는 역사 선생님과 말의 느낌표를 새겨본 본 문학도 제자가 함께하는 날, 하늘이 유난히 맑아서 더욱 빛난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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