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관계맺기 】
4대악 근절이 선포됨과 동시에 국민으로서 마음의 위안이 따라왔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구나’보다 ‘이젠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말이다. 한 대학교의 사회복지학과 정교수가 수업 중에 가정폭력 가해자를 가정폭력 상담소에서 만들어내는 것 아니냐 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리고 중앙공무원이 성폭력 통계 수치를 보고 상담소 실적이 너무 저조한 거 아니냐고 지방공무원에게 말을 할 정도로 가정폭력‧성폭력에 대한 관점이 너무나 다양했기에, 같은 영역에서도 이 정도로 의식차이가 있는데 더 넓게 타 영역에서는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가정폭력‧성폭력 전문가와 교류하는 집단에서 이런 다양한 관점을 보여 왔는데 4대악 근절과 관련해서 우리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어디로 향해야 하고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라고 요즈음 드는 생각이다.
예방교육전문가로 수년간 지내오면서 의뢰기관이 요청한 내용과 함께 이 시대가 전문 강사에게 요구하는 사항까지도 민감하게 고려하여 교육 내용을 구성하다 보니 일정한 흐름이 보였다. 성교육은 뻔하다는 인식이 대부분인데, 그래서 지루할까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염려하는데 이만큼 시간이 흐르고 보니, 주요 내용은 같더라도 시대적인 바램이 달랐기에 순차적으로 의식변화를 해 온 것 같다. 처음 아이들이 성폭력을 몰랐으면 좋겠다에서 대항할 수 있으면 좋겠다로 그리고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어른들의 생각이 변해온 것 같다. 또 하나, 마침내 세상도 가정폭력‧성폭력 근절을 선포하면서 개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폭력은 세상이 나를 위해 노력을 해주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최대한으로 노력한다고 하여 맞설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개인과 사회가 함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야 하는 부분이 맞는 것이다. 개개인의 의식변화와 사회구조적인 변화가 지금 이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성폭력이 없는 세상, 청소년이 살기 좋은 세상, 아동학대예방캠페인주간, 여성폭력예방주간 등 사회에서 의식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고, 교육을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한 개개인에게 교육까지 제공해 주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세상에 살게 하고 싶은지 또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물어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다.
어른들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성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교육이라는 입장이 있었고, 아이들은 성폭력예방교육만 하지 말고 이성교제와 관련된 성교육을 받고 싶다고도 하는데, 과연 성폭력과 관련된 교육은 누구를 위해 제공되어져야 할까? 보호자가 하지 못하는 내용을 담은 것을 전문 강사가 지식전달 수준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관계 맺기에 있어 친밀감과 수치심의 경계에 대해 예방교육을 진행해야 할까? 일 년에 한 번 주어지는 예방교육 시간에 전문 강사는 어떤 내용을 준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동‧청소년은 무조건 보호받아야 되는 대상이지만 성인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성원, 즉 사회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같은 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차이일 뿐이지 교육 내용에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피해자, 성인은 가해자일 뿐 이라는 강의 내용은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라고 규정짓는 것이라고 하여도 어른이 보호자이며 도움을 주는 대상자라는 기본적인 의식에 혼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4대악 근절도 성폭력으로 가려는 단계를, 가정폭력이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더 올바른 개념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라는 로버트 풀검의 이야기처럼, 첫 단추를 잘 꿰면 그 다음은 알아서 척척 쌓여갈 것으로 생각된다. 성폭력이 가정폭력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는 상처주지 않고 관계 맺는 것을 잘 배우는 것으로 이미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첫걸음을 딛었다고 본다. 쓴 것을 자주 먹다보면 쓴 맛에 대해 혀 감각이 둔해져 쓴 맛을 느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쓴 것을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혀가 쓴 맛에 둔해 진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때론 우리의 아이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른들이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차 조심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이 ‘낯선 사람 조심’, ‘모르는 사람 조심하기’ 라고 한다. ‘낯선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주의를 주었고, 아이들은 ‘아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세상이 아주 무서운 소리를 했다. ‘아는 사람’도 조심하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아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는 것에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물어온다. 아는 사이니까 참아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아이들이 찾은 이 대안을 우리는 정답이라고 지지해 주어야 할까?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어야 할까? 아니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주어야 할까? 왜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 좋아하는 사이를 아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좋아하는 사이라서 성행위를 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는 사이에서의 성과 관련된 행위에 대해 아이들이 어떻게 대응할까?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문 강사로서 여러 대상을 상대로 강의를 하며 하나 깨달은 것이 문제 집단에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해답을 찾아내더라. 이젠 세상이 그렇게 찾아진 해답을 하나하나 모으는 역할을 수행하면 될 것 같다. <행가래로 1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