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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석 교수의 글을 우연히 접하게 되어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칼빈의 의인론과 성화론, 그리고 루터의 의인론에 대해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도 여기에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명쾌한 통찰의 부분은 이것입니다.
[..수동적인 의라고는 하지만, 믿음의 삶 자체가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비(무)윤리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날이 거룩해지며 죽을 때까지 거룩해져 가는 노력을 더하는 삶이야말로 바른 믿음을 증명하는 표지였다. 이렇듯 성화와 의인의 불가분의 관계를 입증한 것이 또한 루터와 칼빈의 커다란 업적이라 생각된다. 비록 하나님 앞에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간이며,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구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거룩함을 향한 그 자신의 노력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공로가 되지 않고, 구원의 믿음에 대한 한 증거로서 여겨진다는 통찰은 정말 인류사의 빛나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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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석, <신앙과 이해> pp.90-164.
1. 들어가며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의 이론이나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슬로건 등은 모두 ‘믿음’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의 개신교 신자들인 우리들은 그러한 믿음에 대한 강조가 그리 낯설지 않다.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는 권유는 노방에서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전도자의 목소리이다. 오직 믿으면 된다고 하는, 그 믿음에 대한 ‘올인’의 집중은 옳다. 믿음이야말로 구원의 시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믿고 구원받으라고 권유하는 전도자는 자신이 무엇을 권유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나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개신교의 탄생을 촉발한 이신칭의론이 루터에게서 등장하게 된 속배경을 보면 그러한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을 제법 시원하게 풀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 이신칭의의 의인론(義認論)과 더불어 개신교회 주요교의 중의 하나인 칼빈의 성화론(聖化論)까지 살피다 보면, 개신교 개혁신학의 기본교리들을 되짚으며 우리들의 믿음(신앙)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2. 루터의 의인론
가. 하나님의 의: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수동적인 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간 젊은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의 충실한 이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재판관’ 하나님의 의인(義認)을 얻기에 충분한 봉사와 헌신을 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는 인간본성 자체가 타락하였으므로 도무지 자신의 선행으로써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받아야 할 것은 특수한 잘못이나 죄목들이 아니라, 인간 전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특수한 과오들을 참회함으로써 사죄 및 의인에 이른다고 하는 스콜라 신학을 부정하게 되었다(“칭의에 관한 토론”). 참회를 할수록 지고한 무한자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공포로 전율할 뿐이었으며('Blitzkrieg': 번개 같은 기습전쟁), 심각한 영적 시련을 겪게 될 뿐이었다('Anfechtung'). 심지어는 신성모독적일 만큼 하나님을 미워하게까지 된 루터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그 시련을 겪으며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투쟁하였는지를 거꾸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 그 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공포와 자기애로써 시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신비주의자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인간의 모든 선행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한 의’라는 개념을 가졌던 신비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는 그가 선사하는 의라고 하였다.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루터는 죄인을 심판하는 공포스러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루터는 비로소 ‘은혜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하나님의 의란 그가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나타내어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를 무죄한 자로 여겨주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믿음에 의한 의인’의 교리를 얻게 된 루터는 중생을 경험하고 자유로운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루터의 ‘탑의 경험’, 종교개혁의 출산기간). 이렇듯 복음에 나타난 의는, 죄인을 단죄하고 처벌하는 율법의 의와 달리, 인간이 이루는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사하시는 수동적인 의였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으로 선사받는 것 외에 다른 아무 할일이 없었다. 루터 의인론의 기초를 이룬 이러한 깨달음은 그리스도의 처절한 십자가 사건에서 새롭게 얻어진 것이다.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는 수동적인 의, 낯선 의로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선물일 따름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의롭거나 율법의 요구조건들을 채웠기 때문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이 드러나며, 인간의 모든 업적이 부정되고,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문제가 된다.
나. 믿음에 의한 의인의 성격: 믿음을 통한 ‘즐거운 교환’
따라서 의인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판결이며, 그 결과 인간을 새롭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스도의 순결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무죄판결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밖에서 온 낯선 의이다(“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성취하지 않은, 밖에서 온 낯선 의를 통하여 들어가게 된다. 아담이 외적인 죄로 저주를 초래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외적인 의로 우리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는 것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의 죄, 죽음, 고뇌, 수치, 저주를 떠맡고 그에게 속한 순전함, 의, 생명, 축복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른바 ‘즐거운 교환’(마치 성주간의 성금요일이 ‘좋은 금요일 Good Friday’인 것처럼)인 것이다. 이 교환에서 무죄한 예수는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해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때 일어나는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인은 완성된 영원한 의가 아니다. 원죄가 독약처럼 우리 속에 아직 남아서 언제든 다시 병을 몰아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치료를 받아야 할 입장이다. 사죄는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구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구원의 주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의인이자 죄인’인 셈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관점에서 보면 의롭지만, 나를 위한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밖에서 나를 보면 죄인인 것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여 완성을 향해 성장해 간다.
다. 의인과 선행의 관계: 의인의 표징으로서의 선행
이러한 의인론이 인간의 모든 선행을 배제하는 데서 비판의 빌미를 주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이 된다. 과연 이러한 신앙에 의한 의인은 신자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모든 선행을 무력화하며, 정적주의를 조장하는 것인가? 루터는 윤리의식의 마비를 바탕으로 믿음만 강조하는가?
그러나 의외로 답은 쉽게 나온다. 선한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즉,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음 같이, 믿음에 이어서 비로소 선행이 좇아 나온다는 것이다.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의로워져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신자들 안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선행을 행한다. 이로부터 선행이 따르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참 믿음은 적극적으로 자선을 베풀며 선을 행한다. 의와 구원의 확신은 한번 내적으로 경험되면, 내적 필연성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선한 행동으로 이웃을 섬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우리의 선과 구원을 위해 내어준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필요하고 유익한 사라의 봉사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된다. 선행은 믿음에서 나오고, 신앙은 선행에 의해서 그 진실성이 드러나고 강화된다. 사랑과 선행은 우리가 의로워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선행은 믿음의 열매로서, 믿음이 진정으로 실체적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는 표가 된다. 믿음이 선행의 내적 근거라면, 선행은 믿음의 외적 증표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신앙의 삶은 그 자신 안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 안에 산다. 이와 같이 볼 때, 루터의 의인론은 윤리적 행위를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활성화하고 촉구한다.
루터의 이러한 영적인 깊은 깨달음과 확신은 중세의 타락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가공할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의를 불타는 확신으로 천명하였다. 그가 폭력을 사용한 농민들의 전쟁에 부닥쳤을 때, 초기의 호의적 태도를 바꾸어 반(反)농민혁명 세력으로 돌아섰다는 역사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인론을 중심으로 한 개혁적 신학사상은 오늘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3. 칼빈의 의인론과 성화론
가. 의인론의 본질: 성화(聖化)와 불가분의 의인(義認)
칼빈은 하나님의 주도권 및 인간의 응답과 관련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의롭다 인정되는 믿음의 의인이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복종의 요구와 어떻게 일치되는지에 대한 문제(의인과 성화의 관계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여 성화론을 먼저 다루었다. 믿는 자가 성령이 일으킨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의롭게 받아들여지고(義認), 동시에 윤리적으로 갱신된 삶을 산다(聖化). 칼빈은 기독인의 삶에서 선행이 간과되고 믿음만을 강조한다고 하는 가톨릭 신학에 맞서 성화를 먼저 다룬 것이었다. 그렇다고 성화가 의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양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두 가지 은총으로 상호 불가분의 것이었다.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현실이고 그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양자는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 없고 상호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아는 지식이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다. 성령은 그러한 믿음과 확신을 일으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며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의인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한 믿음의 사건에서 파악한다. 이 믿음에서 생명의 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재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 같이 믿음만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복음의 의를 얻게 한다고 본다. 그리고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자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불완전한 인간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의인이자 죄인’). 그러므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옛사람을 날마다 죽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칼빈은 성화를 이렇게 시간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과정으로 생각한다.
나. 성화론의 성격: 거듭남과 회개를 바탕으로 한 자기부정과 십자가 지기
칼빈에게 의인과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사귐을 통하여 얻는 두 가지 동등한 은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된 하나님의 한 화해의 행동으로서 상이한 효과를 지닌 다른 두 요소인 것이다. 이렇게 성화는 의인과 함께 속해 있고, 의인과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그러면서도 성화는 여전히 독자적으로 남는다. 의인이 성화에서 분리되면 ‘믿음만’이라고 하는 표어 아래 신앙은 나태한 정적주의로 빠진다.
그렇다면 성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거듭남’이다.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의 전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근거하며, 성령의 선물인 믿음을 통한 회개를 의미한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일어난다. 따라서 회개의 근원은 믿음이다. 그런 까닭에 회개는 믿음을 뒤따를 뿐 아니라, 믿음의 열매이기도 하다. 회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며 옛 생활과 정욕을 죽이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과 성령에 의한 새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회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옛 자아의 죽음은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죽이는 내적인 죽음과, 몸으로 당하는 치욕과 고난을 의미하는 외적인 죽음 두 가지로 설명된다. 그런가 하면, 살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는 삶이다.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 할 만한 그러한 삶은 그러나 평생이 걸리는 삶이다. 평생 동안 회개하고 죄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성화의 생활은 신자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두 가지의 제자직 규범에 의해 영위된다. 즉, 자기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마태복음 16:24). 인간본성의 부패를 깊이 인식한 칼빈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몸 전체로서 부정하고 싸우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타고난 욕망에 대한 억제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직의 표지인 참된 단순성과 정직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정은 결국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이루어진다. 자기부정의 진정한 내적 검증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결한 마음과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기다리며 그분의 인도를 받으려고 힘쓰고 있는 데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적극적인 자기부정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행한다. 그 선행은 대상의 반응과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한 자기부정의 삶은 단순히 극기와 엄한 훈련을 통해서 발생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일어난 믿음이다. 결국 믿음의 중요성이 다시한번 부각된다.
또한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성화과정이 진전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는 확신으로 우리 자신을 강화하고 인내할 수 있다. 십자가를 짊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와 친구가 된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영적인 기쁨을 느끼며 고통을 조절하게 된다.
루터와 대동소이한 의인론을 펼쳤으면서도 성화를 강조한 칼빈의 신학은 강력한 윤리의 근거를 확보하였다. 성화에 기초한 그의 기독교 윤리는 개인적 윤리를 넘어 사회적 윤리로까지 발전하여, 그를 혁명가라 부를 정도로 서구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펼친 성화의 삶은 개인적 윤리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의 성화 윤리는 교회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적 질서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부 보수 개신교회와 신자들이 칼빈신학을 ‘신앙으로만’, ‘은총으로만’, ‘성서로만’ 등의 표어로 호도하여, 그가 하나님 주권을 교회 안에서만 개인적으로 인정한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의 폭넓은 신학사상을 축소 왜곡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4. 나가며
인간이 아무리 애써보아도 전능 무한자 하느님의 마음에 쏙 들게 참될 수야 없는 일이다. 루터는 자신의 생을 통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흡족할 만한 삶을 드리고자 매우 치열한 노력을 경주하던 끝에, 인간의 그러한 한계를 통찰하고 하느님의 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수동적인 의’, 인간은 그저 받기만 할 뿐인 하느님의 절대적 선물로서의 의였다. 이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자기통찰이라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 인류사의 대발견이 아닐까 싶다. 이를 통하여 인류는 암흑과도 같던 중세의 종교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만인이 하느님 앞에 두려워 떨지 않고, 그분의 자비를 믿으며 자신의 생을 건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의라고는 하지만, 믿음의 삶 자체가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비(무)윤리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날이 거룩해지며 죽을 때까지 거룩해져 가는 노력을 더하는 삶이야말로 바른 믿음을 증명하는 표지였다. 이렇듯 성화와 의인의 불가분의 관계를 입증한 것이 또한 루터와 칼빈의 커다란 업적이라 생각된다. 비록 하느님 앞에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인간이며,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구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거룩함을 향한 그 자신의 노력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공로가 되지 않고, 구원의 믿음에 대한 한 증거로서 여겨진다는 통찰은 정말 인류사의 빛나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믿고 구원 받으세요~” 라고 말하는 전도자의 권유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을 얻은 기쁨에 더하여 거룩한 삶을 위하여 매일같이 애쓰는 행복한 삶이 덤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200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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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원은 율법의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얻어지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오직믿음'이라는 기치아래 정적주의에 빠져서도 안될 것이고..부단히 믿음이 실체적 진리임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에 동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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