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날씨가 매우시죠? 요즘엔 매운 맛이 대세래요. 치킨도 매운 맛, 갈비도 매운 갈비, 날씨도 매운 날씨... 괜찮네요. 오늘은 찬미예수님 탄생 전 마지막 대림 4주일 미사로 성탄준비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교우님들 자신의 존재가 아기 예수님 태어나시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드는 마지막 주일미사이니만큼 사랑이라는 예수님, 신뢰라는 예수님, 용서와 화해, 평화라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태어나실 수 있도록 이 미사 정성껏 바치셨음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미사를 바치면서 복음의 두 여인과 아담과 하와를 비교하면서 두 여인이 환희와 기쁨에 차서 서로 그 기쁨을 나누는 장면을 묵상하고 그 기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려고 합니다. 성모님은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몸이므로 아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여인(가임기가 끝났다는 뜻)인데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여 6개월 이상 된 상태입니다. 성모님 태중엔 예수님이, 사촌언니뻘 되는 엘리사벳 태중에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많은 똑똑하고 슬기로운 현대인들은 산부인과적인 지식정보를 갖고 이야기합니다. “에이,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저도 의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성경말씀의 뜻은 산부인과적인 잘못된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음이 본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것, 가임기가 지난 여인이 임신했다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45절을 함께 볼까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두 여인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본뜻이지, 우리의 산부인과적인 의학정보를 혼란시키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아기를 가진지 얼마 안 된 어린처녀(지금 나이로 치면 15-16세)인 성모님과 나이 많은 여인(지금 나이로 치면 50이 넘은 나이)인 엘리사벳은 만나서 기쁘게 서로에게 축복을 해주며 기쁘게 인사하고 기쁨에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조건으로 보면 결코 기뻐할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이 기뻐할 처지가 아닌 것은 당연하고 엘리사벳도 마냥 기뻐할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왜죠? 노산 중에 노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이 40에 아기를 가지면 노산이라고 산부인과 의사들이 긴장하는데 엘리사벳은 노산이면서 초산이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기뻐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나 서로 축복과 기쁨의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었을까요? “아기 낳다가 잘못 되는 것 아닌가?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가져서 잘못된 아기가 출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을 깨끗이 버릴 수 있었을까요? 4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아기를 갖게 해 주신 그분께서, 가임능력이 끊어진 여인에게 아기를 갖게 해 주신 그분께서 출산하고 육아하는데 대한 걱정은 걱정도 아닌 것이죠.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으신 엘리사벳이 노산이면서 초산인 그 모든 근심걱정을 벗어버릴 수 있는 원인이 45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리한 인간적인 조건을 가진 성모님과 엘리사벳께서 근심의 그늘이 하나도 없이 만나 기뻐하는 모습과 비교되는 모습이 아담과 하와에게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에덴의 뜻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기쁨의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계명만을 지키면 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그 나무열매만 따먹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이었습니다. 그것만 지키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동산이 에덴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않고 깨뜨렸고 ‘기쁨의 동산’에서 ‘안기쁨의 동산’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내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나간 것이죠. 그래서 근심, 특히 창세기에 나옵니다. “여인아, 너는 이제 아기를 낳을 때 엄청나게 고통 받고 근심이 많을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기쁨과 걱정 근심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고통받는 공간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 보세요. 하와는 왜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나 근심걱정하는 여인이 되었고 성모님과 엘리사벳은 어떻게 다시 기쁨의 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우리가 기쁨의 동산에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고 다시 기쁨의 동산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세 여인(하와, 성모님과 엘리사벳)을 통해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교우님들 삶이 “나는 걱정이 많아.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 걱정, 맑은 날에는 우산장사 아들 걱정...나는 왜 이렇게 근심 걱정이 많을까? 며느리가 아기를 안 가지면 안 가진 대로 걱정, 가지면 가진 대로 걱정, 낳으면 낳은 대로 걱정, 유치원걱정, 초등학교, 중고등대학교 걱정, 취직걱정....” 왜 우리의 삶은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기쁨의 삶, 에덴의 삶이 아니라 하와의 삶과 흡사합니까? 그 원인은 하와의 삶,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삶 안에서, 복음 안에서 교우님들께서 잘 건지시고 스스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 하나 따먹었다고 사람을 그렇게 내치시나? 무슨 하느님이 그래?” 그런 유치한 뜻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을,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정면으로 깨뜨렸다는 것, 깨뜨리고 나서도 자기 성찰도 없이 부인하고 남 탓하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결집된 그 삶이 바로 낙원에서 추방된 안기쁨의 삶, 걱정근심의 삶, 이래도 고통 저래도 고통인 삶이 되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 전 마지막 주일미사 대림 4주 미사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우님들 성모님과 엘리사벳은 인간적인 여러 가지 근심걱정의 조건들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만나 서로에게 축복하고 기뻐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두 여인의 태중에 있는 아기들까지 기뻐 태동을 했겠습니까? 어떻게 이들은 그런 인간적인 근심걱정거리를 갖고도 그렇게 기쁘고 평화롭고 안정된 그래서 축복해주는 말을 시처럼 쏟아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교우님들 표정을 보면 지금 초산에 노산인 표정입니다. 우리는 그런 조건이 아닌데에도 불구하고 왜 에덴의 삶을 살지 못합니까? 45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주님의 계명아래 그 말씀을 지켜나간다면 내가 에덴동산에서 살 것이라는 그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적당히 하느님의 계명에 발 담그고 다른 한쪽 발은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난 곳에 적당히 발 담그고....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좋아하는 “적당히” 생각하시는.... 그래서 미사 하실 때에는 조금 평화롭기도 하지만 세상 속에 나가면 금방 에덴동산이 아닌 근심걱정의 동산에서 시달리시고....
잠시 묵상하시면서 에덴의 기쁜 삶, 오늘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환희에 찬 만남에서 나오는 기쁨의 삶을 주시려고 아기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복음말씀과 하느님 계명 안에서 그것을 지키고 살고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 살 때 내가 에덴동산에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기쁨 중에 살 수 있다는 오늘 복음 메시지를 마음에 잘 받아들이셨음 좋겠습니다.
잠시 각자 묵상기도 합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