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은 72명의 제자를 파송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본문은 9장에 나와 있고 마가와 마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72명을 파송했다는 기록은 마가와 마태에는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이야기와 대동소이합니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라거나,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빌라거나,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는 당부의 말씀들이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와 거의 같이 72명의 제자들에게도 맡겨집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에는 파송 받는 제자들의 숫자가 72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개역개정판에는 70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사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본에는 70명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사본에는 72명이라고 되어 있기에, 어느 사본을 기준으로 번역했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록된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72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께서 회개하지 않는 도시에 화를 선포하시는 내용과 선교여행을 떠났던 72명의 제자가 돌아와서 예수께 보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20절을 보겠습니다.
17 일흔두 사람이 기쁨에 넘쳐 돌아와 보고하기를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하였다.
1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19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현대신학자들은, 이 본문도 예수님 당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일세기 후반 교회의 열망이 반영된 본문으로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넘쳐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이 일을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답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이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철부지 어린 아이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 아이는, 실제로 어린 아이를 뜻할 때도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제자들에게는 드러내주셨다는 일이 무엇인지, 22~24절을 보겠습니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23 예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아들,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제자들은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니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많은 예언자들과 왕이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했지만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는데, 제자들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왕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제자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이 본문 역시 일세기 후반의 교회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먼저 25~28절을 보겠습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만의 고유 자료입니다. 29~37절을 보겠습니다.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 예수께서 응답하여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알레고리는 우리말로 풍유라고 하는데,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비유법의 일종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구원의 길을 말하는 알레고리인데, 예루살렘은 교회고, 여리고는 타락한 곳을 의미하며, 강도는 사탄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봉변을 당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를 떠나 세상의 악한 길로 갔다가 사탄의 계략에 빠져 죽게 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의 율법과 제도를 의미하는데, 율법도 제사도, 그 어떤 제도로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상처에 기름을 발라주고 포도주로 씻어준 다음에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줍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기름은 성령을,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지 말고 살아야 되는데,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떠나는 것이 곧 방탕한 삶이며, 사탄은 그런 사람을 그냥 두지 않고 사망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떠나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을 구약의 율법도 제도도 구원할 수 없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보혈로 그 죄를 씻어주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시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본문은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은 알레고리로 오래 동안 읽혀지고 해석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이런 해석을 해서 교회에 정착시킨 사람이 우리가 ‘성 어거스틴’이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는 엉터리 해석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이 이야기가 비유라는 암시가 없습니다. 36~3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이 말씀이 결론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처럼 그렇게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는데 사마리아인은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이 유대지도자들인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와 장로들인데, 사제와 수도사들인데, 그들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천하게 생각하는 사람, 상종하기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의 상황에서 생각해보자면,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모두 외면한 피해자를 외국인 노동자가 구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조건 없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네가 정말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문의 율법교사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10장의 마지막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입니다. 38~42절을 보겠습니다.
38 그들이 길을 가는데,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41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본문에도 일세기 후반의 교회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공동체를 운영하자면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구성원과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주로 여자들이 맡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면 알아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고 잘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불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은 그런 상황에서 공동체 지도자들이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교회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우선순위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