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복음의 원형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인사말을 전하고 이어서 몇 마디 덕담을 나누더니, 곧바로 고린도 교회의 분열상을 지적하며 책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1~14절을 보겠습니다.
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린도교회에 적어도 네 개 이상의 파벌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본문입니다. 그리스도파,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가 있었네요.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렇게 바람직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 본문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돌아가야 할 곳은 초대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원형, 즉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복음의 원형을 교우님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구요. 18절을 보겠습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랍니다.
유대인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주변 강대국을 제압하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가져오는 다윗왕국의 계승자이어야지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일 수 없었기에 거리낌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사형판결을 받고 죽은 사람을 종교의 창시자로 믿는 건 어리석은 선택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바울은 강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신학자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 십자가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이해하는 십자가는 인류에 대한 대속입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이 이해하는 십자가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상징이며,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 눌린 자, 애통하고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의 선언을 목숨을 다해 지켜내신 약속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해석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의로운 죽음이 그대로 땅에 묻혀 사라질 수 없었기에 제자들의 가슴에 뜨거운 소망의 불길로 되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에 부합하며 현대과학과 모순되지 않는 해석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해석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교우님들이 잘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드린 말씀이 있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해서 활동하시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돌아가신 본 훼퍼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 것이다.” 아마 많이들 기억하실 줄 압니다. 우리가 모델로 삼고 돌아가야 할 곳은 초대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원형, 즉 예수님의 삶과 말씀 자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20년 이상 지나서야 신약성서에서 가장 빠른, 바울의 서신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바울의 생각과 주장을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요?
바울의 첫 서신이 기록된 지 20년 정도 지나서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서의 기록 사이에는 약 40년 이상 되는, 긴 전승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4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전달자들의 실수나 왜곡이 전혀 없었을까요?
바울의 편지나 복음서가 발간된 이후에는 더 이상 문제가 없었을까요? 오늘날 성서의 원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복사본일 뿐입니다. 사본과 사본을 대조해가면서 최대한 원본에 접근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본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실수나 왜곡은 없었을까요? 복사한 사람이 첨언한 것은 없을까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성서 안에는 아예 사라진 절도 있습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괄호 안에 ‘몇 절은 없다’ 라는 표기가 가끔 있는데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모든 기록을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러나 성서는 정금이 아니라 금광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펄펄 끓여서 불순물을 분리해내야 비로소 정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작업이 바로 현대신학이 말하는 성서비평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보수정통신학이 말하는 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초대교회를 뚫고 들어가 복음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 지 교우님들께서 잘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