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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백성’ 되길 거부, 만주 집단이주 의성김씨 내앞문중의 항일투쟁에서 ‘혁신과 통합’의 참뜻을 배우자
해방 순간까지 독립운동기지 건설…51년간 비타협적 투쟁 좌우통합운동 앞장…독립유공자 36명 배출, 단일문중 최대
좌와 우가 타협없이 충돌하는 사회에서는 대의와 통합을 외치는 중도파가 설 자리가 없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도 그랬다. 부르주아민족주의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독립운동 중 하나를 선택한 사람만이 해방 후 반쪽의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족통합을 우선으로 두고, 좌우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주의 중도파들은 남북 양쪽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이런 왜곡은 더 심해졌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이념에 개방적이고 유연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책임연구원은 “일제하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은 이념에 개방적이고, 통합을 중요시했으며, 비타협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했다”며 그 대표적 인물로 일송 김동삼(1878~1937)을 손꼽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희곤 소장(안동대 교수)은 일송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일송과 석주 이상룡은 1910년 만주로 망명해 조선인의 삶과 항쟁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들은 유교적 시각에서 이념을 해석하고 수용하려 했다. 공산주의를 공자가 말한 ‘대동세(大同世)’로 이해하려 했다. 독립이 우선이고, 이념은 도구일 뿐이었다. 안동 전통양반가의 후손이었지만 만주족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중국옷을 입고 머리를 깎을 정도로 유연했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한 논문에서 “남북 분단정부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김동삼 김형식을 비롯한 천전 인사가 추구하던 진보적 중도 민족주의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배제 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퇴계 학통 이은 대성리학자 3명 배출
일송을 이해하려면 먼저 의성김씨 내앞 문중의 내력을 살펴보아야 한다. 내앞 문중의 중시조는 청계 김 진(1500~1580)공이다. 내앞 문중은 1500년 무렵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川前里)에 뿌리를 내렸다. 1914년 당시 내앞 문중은 임하면 전체 전답의 27%를 소유할만큼 부를 축적했다. 청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소과에 급제하고, 그 중 세 명은 대과에 급제했다. 넷째가 학봉 김성일(1538~1593)이다. 학봉은 퇴계 이 황의 적통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국했다. 퇴계학통은 퇴계 이 황- 학봉 김성일- 장흥효- 이현일- 이 재· 김성탁- 이상정- 유치명- 김흥락으로 이어진다. 김성일 김성탁 김흥락이 내앞 문중이다.
권문세가· 전통양반 대부분 식민통치 협조, 기득권 유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조선조에서 영화를 누렸던 대부분 권문세가들은 식민통치에 협조했다. 독보적 존재는 백사 이항복 이후 영의정 9명, 좌의정 1명을 배출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우당 이회영, 이시영 6형제다. 이들은 전 재산(800억원 상당)을 처분해서 만주로 집단이주했다. 다수 전통양반가들도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거치며 일제에 타협해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중앙권력에서 소외됐던 안동의 남인계열 양반가문 상당수는 항일을 선택했다. 안동 양반가의 덕목은 ‘인(仁)’보다는 ‘의(義)의 실천’이었다. 이는 안동에서 독립유공자 283명, 자결로 항거한 순국선열 10명이 나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의성김씨 내앞 마을(학봉 김성일 이래 소종택을 이어온 의성김씨 금계마을 포함), 이상룡(1858~1932,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대표되는 고성이씨 도곡마을, 퇴계 이 황의 후손으로 독립유공자 25명을 배출한 진성이씨 예안 하계마을이 대표적 항일문중이다. 퇴계의 11대손인 향산 이만도(1842~1910)는 나라가 망하자 24일간 단식 끝에 순국했다. 일순간에 목숨을 끊는 자결조차 죄스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독립운동 명가 중에서도 돋보이는 게 의성김씨 내앞 문중이다.
척사의병운동 주동자들이 스스로 애국계몽운동가 변신
내앞 문중의 51년 항일투쟁은 학봉 김성일의 11대종손인 서산 김흥락(1827~1899)에서 시작된다. 서산은 퇴계의 정맥을 이은 안동유림의 상징이었다. 1894년 전국 최초로 안동에서 갑오의병운동이 일어난 이래 1895년 을미의병, 1896년 병신의병의 정신적 지도자는 서산이었다.
1907년 유인식 이상룡 김동삼은 “배우는 게 힘”이라며 영남지역 최초의 3년제 중등교육기관인 협성학교를 설립한다. 의병활동때는 금계마을 학봉 후손들이 앞장섰지만, 애국계몽운동에는 큰 집인 내앞 마을이 열성적이었다. 청계의 종손인 김병식이 교장을 맡고, 김동삼이 교감을 맡았다.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처음에는 신교육을 반대했지만, 2년 후에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교사와 기숙사로 내주고, 작은집으로 이주한다. 전통양반들이 ‘혁신유림’으로 변신하고, 내앞은 신교육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척사의병운동의 당사자들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한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지역을 빼면 보기 드문 일이다.
만삭의 임산부도 망명길 식민지에서 출산하는 것 거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내앞 문중은 또 한 번 자기 혁신을 한다. 계몽주의자들이 대개 개량주의 또는 친일파로 전락했지만 이들은 비타협적 투쟁노선을 선택한다. 경술국치 직후 협동학교의 주역이었던 이상룡 유인식 김대락이 문중을 이끌고 남만주로 집단이주를 단행한다. ‘일제에 세금을 낸 술로 제사를 지내고, 가옥세를 낸 집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앞문중에서는 22가구 50여명이 망명길에 나섰다. 김대락의 손부와 손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1910년 12월 24일 안동을 출발해서 다음해 4월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했다. 이들은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세웠으며, 군대를 조직했다. 당시 경학사의 사장은 이상룡이었고, 이회영이 내무부장, 김동삼이 교육부장이었다. 망명객들은 벼농사를 개척했지만 물이 차서 실패를 거듭했다. 풍토병이나 마적과 싸워야했다.
이상룡은 한인마을을 개척하고, 청년을 끌어모아 독립운동 전진기지를 개척했다. 김동삼은 이들을 기반으로 서로군정서와 같은 군사조직을 만들어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전투에 내앞 사람 여럿이 참전했다. 1920년 10월 일제가 서북간도에 있는 조선인 마을과 학교를 불태우고 학살할 때 내앞 문중도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삼광학교 교장이며 김동삼의 동생이었던 김동만이 이때 죽었다. 이른바 ‘경신대참변’이다.
1914년 김대락이 망명지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0세. 김동삼도 1931년 일제에 체포됐다.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망명했던 이상룡도 1932년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 향년 75세.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데려올 생각을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동에 남은 문중 사람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 만주에 돈과 인력을 끊임없이 수혈해야 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유림단 사건에 연루됐다.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1887~1946)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라는 오명을 감수했다. 노름꾼으로 철저히 위장하며 자금공급책 역할을 했다. 700 마지기 농토를 팔고, 종가를 세 번이나 팔았다. 그는 해방 후에도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뒤늦게 공적이 알려져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파락호’ 오명 감수하며 독립운동자금 조달한 종손
식민통치가 길어지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꿈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내앞 문중 사람들은 김정식(1888~1941), 김대락의 아들 김형식(1877~1950)을 중심으로 북만주 하르빈 동북 취원창(지금의 거원진)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다. 김형식은 민족학교를 열어 교장을 맡았다. 1945년 해방 당시 취원창에는 수십 호의 내앞 문중이 망명농장을 개척하고 있었다. 해방은 됐지만 내앞 문중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형식은 이미 1944년 연안 독립동맹의 북만지부 책임자로 위촉되어 있었다. 김동삼이 이념을 초월하는 중도 민족주의자였다면, 김형식은 중도좌파라고 할 수 있다. 평양으로 간 월송은 혁명자후원회장을 맡았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으로 선출됐다.
1950년 금강산 장안사 국영 양로원에서 휴양 중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룡폭포에 몸을 던졌다. 향년 74세. 내앞문중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혁신을 거듭하며 문중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51년 항일투쟁에 바쳤다. 해방 무렵 학봉 종가에 성한 수저가 5벌뿐이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최고의 독립운동 명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부족함이 없다. 서산 김흥락의 제자 60명, 내앞 문중 36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해방이후 후손들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문중 모든 것 조국에 바쳤지만 후손들의 삶은 순탄하지 못해 김동삼의 큰며느리와 손자는 1987년에야 중국에서 영구 귀국했다.
문중 출신 소장학자 김건태(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온 문중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기 때문에 1920년 이후에는 가세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며 “혈기왕성하고 문제의식이 강한 젊은 층들이 모두 만주로 이주했기 때문에 집안의 문화적·학문적 전통도 끊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일제 강점기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 거의 없는 것도 안동 지방 일부 문중과 다른 집안 전통이다”고 말했다.
청계공의 16대손인 김종갑 산업자원부차관은 “어렸을 때 가난 속에서도 수많은 문중어른들의 묘 위치를 외우는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었다”며 “그렇지만 이런 문중 분위기가 원칙을 지키는 삶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인 학봉의 15대손 김종성(사업)씨는 “선조들의 기질을 보면 원칙을 지키려 하지만, 이념에 개방적이고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유연성을 발휘했다”며 “후손들도 이를 닮으려 한다”고 말했다.
안동 천전리 협동학교 터에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서고 있다. 대지 8000평, 건평 800평 단층건물로 금년 8월이면 개관한다. 내앞마을이 경북북부지역의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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