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화폐속 이슬람건축(3) 핫산 술탄 모스크
/최준석 조선일보 카이로 특파원

(이집트100파운드 지폐)
![핫산_술탄_모스크_정면_모습(작은크기)[2].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25%2F25%2F3%2F%25C7%25D6%25BB%25EA_%25BC%25FA%25C5%25BA_%25B8%25F0%25BD%25BA%25C5%25A9_%25C1%25A4%25B8%25E9_%25B8%25F0%25BD%25C0%2528%25C0%25DB%25C0%25BA%25C5%25A9%25B1%25E2%2529%255B2%255D.jpg)
(핫산 술탄 모스크 정면 모습)
이집트 100파운드 지폐 속 이슬람 건축은 핫산 술탄 모스크다. 그 크기가 압도적이다.건물 앞면의 길이가 76미터, 높이가 36미터로, 중세 이슬람 세계의 주요 건축물로 꼽힌다.
미나렛(첨탑)의 높이는 땅에서부터 84미터이며 중세 이집트 이슬람 건축물중 가장 높다.
모스크는 카이로의 가장 유명한 중세 건축물인 살라딘 성의 서쪽 바로 아래에 있다.
거대한 회색 건물로, 비슷한 모양과 크기인 리파이 모스크와 나란히 서있다.
핫산 술탄 모스크는 이집트의 중세 마지막 왕조인 맘룩 시대(1250-1517년)인 1356-1361년에 지어졌다. 핫산(Hassan bin Al-Nasir Muhammad bin Qalawun,재위 1347-1351,1354-1361년) 술탄이 세웠다.
모스크에는 두 개의 쌍둥이 미나렛(첨탑)이 서있는데, 하나가 1659년에 붕괴됐다. 당시 사고로 300명이 죽었다고 한다. 동쪽 벽 위에 서있는 작고 조악한 미나렛은 이후 그 자리에 세워졌다. 모스크의 주 출입문인 동쪽에 있는 포탈 역시 이집트 최대다. 공들인 장식도 높이 평가받는다.

(핫산 술탄 모스크의 이완)
내부도 크기에서 압도적이다. 주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 복도를 걸어가면 거대한 공간이 나오는데, 십자가 모양이다. 십자가의 네 군데 끝 부분은 기도하는 공간인 ‘이완’(iwan)이고, 십자가의 중심 지점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큰 분수 구조물이 있다. 모스크의 이 부분은 천정이 없으며 하늘이 보인다.
![핫산_술탄_마드라사의_퀴블라(작은크기)[1].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25%2F25%2F3%2F%25C7%25D6%25BB%25EA_%25BC%25FA%25C5%25BA_%25B8%25B6%25B5%25E5%25B6%25F3%25BB%25E7%25C0%25C7_%25C4%25FB%25BA%25ED%25B6%25F3%2528%25C0%25DB%25C0%25BA%25C5%25A9%25B1%25E2%2529%255B1%255D.jpg)
(핫산 술탄 마드라사의 퀴블라. 윗 부분이 반원 모양인 미흐랍 옆에 있는 4개의 대리석 기둥은 십자군 전쟁 때 팔레스타인 교회에서 빼앗아 왔다고 한다.)

(자세히 본 미흐랍)
십자가의 윗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의 ‘이완’에는 메카 쪽으로 향한 벽(퀴블라)이 있다.
이곳은 주 예배 공간이다. 모스크에서 가장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 있다. 퀴블라는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으로 공들여 만들어져 있으며, 퀴블라와 양쪽 면을 포함해 3개 면에 걸쳐 길게 한 줄로 아랍어로 글씨가 크게 조각되어 있다. 글씨의 배경에는 연꽃 모양 장식이 화려하게 되어 있다. 연꽃 장식을 당시 아랍세계와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흔적으로 일부 이집트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벽면의 글씨 장식)
니흐랍(메카를 향하는 벽이라는 걸 알리는 벽 속 장식) 옆에 서있는 대리석 기둥은 십자군 전쟁에서 노획물이다. 팔레스타인에 십자군이 세운 교회에서 가져왔다. 벽에 붙어 있는 설교단 민바르는 이집트에서 보기 드물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민바르의 문은 청동판이 입혀져 있다.
벽의 뒤에는 무덤이 있다. 당초 핫산 술탄이 자신의 무덤으로 만들었으나, 비명횡사한 그는 이곳에 영면하지 못했다. 기도를 하는 방향인 퀴블라 뒤쪽에 무덤을 설계한데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기도를 할 때마다 결과적으로 술탄의 무덤을 향해 몸을 숙이는 건축 구조는, 이슬람권의 정서를 감안하면 비 정통적이라는 비판이다.
벽의 왼쪽에 있는 청동 문을 밀고 들어가면 무덤 공간이다. 이곳에는 핫산 술탄 대신 그보다 한 세기 후에 사망한 한 아미르(아랍세계에서 지방 총독이나, 군 최고사령관을 가리키는 말)가 묻혀 있다.
마당에서 보이는 십자가 모양의 공간 사이에는 신학교인 마드라사가 있었다. 벽면 안쪽에 넓은 공간 네 곳에 4개의 서로 다른 법학파들을 위한 마드라사가 있었다. 관광객에 개방하지 않고 있다.
핫산 모스크는 모스크 기능보다는 신학교로서의 비중이 더 컸다. 이슬람 수니파에는 4대 법학파가 있는데, 핫산 술탄 마드라사는 카이로에서는 처음으로 이들 4대 법학파를 모두 가르친 마드라사였다. 학생 수만 400명이었다고 한다.

(마드라사 입구)
핫산 술탄이 모스크를 지을 시기를 전후 카이로에는 모스크가 끝없이 생겨났다. 1341-1412년 당시 수도 ‘알 카히라’에는 49개의 모스크가 새로 들어섰다. 핫산 술탄 모스크 건물은 100% 완공된 게 아니다. 건축의 골격은 완성됐으나 세부 장식은 끝내지 못했다. 너무 크게 구상을 했던 탓인지 핫산 술탄은 막대한 건축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로 인해 공사를 중단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 모스크는 엄청난 크기 때문에 카이로 사상 가장 높은 건축비가 들어갔다고 얘기된다. 하지만 ‘이집트 술탄이 이만한 건물을 지을 능력도 없느냐’는 외부의 비아냥을 들을 생각에 계속 공사를 강행했다고 한다.
핫산 술탄은 건축비를 당시 이집트를 강타한 흑사병 희생자들의 유산으로 조달했다. 흑사병은 1348년 최초로 카이로를 휩쓸었으며, 하루에 2만4000명이 죽었다는 기록을 1348, 1349년 카이로를 방문했던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남기고 있다. 핫산 술탄 모스크는 흑사병이 최초로 강타한 8년 뒤에 착공됐다. 핫산 술탄은 원성을 많이 들었던 만큼 평온한 죽음을 맞지 못했다.
모스크는 통치자에 반기를 든 세력에 의해 반란군 거점으로 많이 사용됐다. 맘룩 술탄 시대엔 최고 권력자에 대한 끝없는 모반 음모가 있었다. 예컨대 바르쿡 술탄(재위 기간 1382-1389, 1390-1399년)때는 반군이 이곳을 점령, 모스크 지붕에서 살라딘성을 향해 발포했다. 바르쿡 술탄은 반란이 진압된 뒤 재발 방지를 위해, 핫산 술탄 사원 바로 앞 광장에서 살라딘성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파괴했다. 이후 시대의 한 술탄은 병력을 파견, 모스크에 주둔하도록 해 반군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반란이 그치지 않자, 잔발랏(janbalat, 재위 1500-1501년)술탄은 1500년에 이 모스크를 아예 파괴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강력한 비판에 부딪히자 철거 공사를 중단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