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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귀신 이야기
나는 종이귀신입니다. 헌책장사를 하는 자칭 남산골샌님 딸깍발이가 나를 낳았습니다. 나는 그의―이하 샌님으로 불러주기로 하지요. 그가 스스로 남산골샌님을 명분으로 삼고 있으니― 잡기장 첫 장에 쓰인 문장을 탯줄로 삼아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종이귀신, 글자 위에서 춤을 춘다.’
지난 봄날 어느 늦은 밤, 나는 샌님을 찾았습니다. 샌님은 그날 속상한 일이 있어 술을 과하게 마시고 가게 안 골방에 누워 잠들어 있었습니다.
“거기 누가 있나?”
“내가 왔습니다. 당신의 종이귀신.”
샌님은 3층 건물 지하실의 32평 공간에 터질 듯이 많은 책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60대 초반의 장사치입니다. 혼자 소주병을 기울이는 게 유일한 취미라서 핑계만 있으면 술을 먹고 헌책방 구석자리 골방에 큰대자로 눕는 걸 즐기는데, 그날도 정량 이상의 음주를 하고 금세 죽을 듯이 앓아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불러 주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할 것을, 차라리 저렇게 할 것을…’하고 후회를 하며, 나를 불러 원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까?”
샌님의 앓는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역시 술에 의지해서 풀어야 할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기는, 맞을 짓만 골라서 하고 살았지.”
한참 만에 나온 샌님의 독백입니다. 무슨 맞을 짓을 하며 살아 왔는지, 기왕 운이 떨어졌으니 율을 맞추어 보기로 하지요.
“이 책들, 이게 어디서 나왔지요?”
오전 일찍 고물행상이 1톤 차로 실어온 헌책 백여 권이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여성잡지와 야한 외국 잡지인…… 그게 그날 샌님의 심정을 상하게 한 첫 번째 원인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책이에요?”
“내가 판 책 같아서…… 누구한테 샀어요?”
샌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노려보며 질문을 했습니다. 당연히 고물행상의 대답은 시원치가 않습니다.
“동네에 들어갔다가 불러서 가져왔는데, 책 주인은 모르겠네요.”
모른다고 하는 게 당연합니다. 요즘의 고물행상은 엿가위 짤각거리고 다니던 손수레 시절과 다릅니다. 1톤 화물차 타고 확성기로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이동식 중소기업이어서 헌책 백여 권 따위로 귀찮은 일을 겪는 건 딱 질색인 것입니다.
“전부 내리세요. 내가 팔았던 책이니 내가 사야지요.”
샌님이 차에서 책을 내려 권수를 세는데 그제야 고물상이 중얼중얼 책의 출처를 털어놓습니다. 나름 꺼리는 게 있었지 싶습니다.
“죽었다던데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혼자 살다…… 며칠 만에 발견돼서 그냥 무연고 시신으로 치웠다고…… 연락할 만한 가족도 없었다나 봐요.”
일순, 샌님의 얼굴이 붉어지고 온몸이 돌덩어리가 된 듯 굳어집니다.
“사기 싫으면 관둬요. 죽은 사람하고 같은 방에 있던 거라서 냄새가 배여 있으니 싫다면 가져가야지 별수 있나. 파지 집에다 달아먹어야지. 10원 올라서 키로 당 130원이라는데.”
고물행상은 투덜대고 있고, 샌님은 잔뜩 굳어 있고…… 스스로 부르듯 남산골샌님의 별난 모습은 모조리 흉내를 내고 있더군요.
‘나는 종이귀신, 글자 위에서 춤을 춘다.’
내가 나설 차례가 온 것입니다. 저 바보 샌님은 틈만 나면 울상이니 수습할 몫은 다 내 차지지요. 그렇다고 특별히 해줄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샌님의 과거를 되새겨 심사를 편케 해주는 게 고작이지만요.
잠깐 여담입니다만, 헌책방 안에서 죽은 사람 책을 빼면 뭐가 남습니까. 샌님이 잠들어 있는 골방 안에는 오십년, 백년 된 책이 수두룩한데, 원래의 소장자들이 어디에 계실지 따지기로 한다면 그 혼란이 볼 만할 것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날 고물행상을 통해 책을 내보낸 망인은 샌님의 오랜 고객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가죽을 다루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쓰러진 40대의 산재환자였는데, 툭하면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게 병이었다는군요. 다니던 공장이 영세업체라 보상도 못 받고 나와서 생활보호대상자 1급의 혜택으로 살아왔다는데, 매월 25만원을 은행으로 받아 5만원 남짓을 책 사는데 쓰고 나머지로 컨테이너 박스 임대료 내고 쌀 사먹고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 산재환자 고객이 유독 추위가 심했던 지난겨울을 잘 견뎌내고 봄이 되자마자 죽었던 겁니다. 추위는 견뎌도 봄은 못 견뎌 한다더니 그예 간 거지요.
책은 그래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컨테이너 박스를 그대로 둘 수도 없고 하여, 철거하는 과정에 고물행상이 횡재를 한 거지요.
망인이 된 그 고객, 어지럼증 때문에 글씨를 못 읽었다는군요. 그림을 보는 정도가 독서의 전부였는데 플레이보이나 허슬러 계열의 야한 미국 잡지들을 주로 보았다는군요. 나름 성생활이었던 거죠. 이쯤 설명하면 샌님이 책을 척 알아보고 아파했던 이유를 짐작하실 만하지 싶습니다마는.
암튼 샌님이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고 감정이 격해졌다면 종이귀신이 출동한 이유로 합당하다 싶고, 샌님이 골방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 싶기도 한데, 실은 샌님이 그날 실심하여 나를 불러낸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후속타가 있었던 것입니다. 잔뜩 저기압이 되어 있던 그날 오후에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형님, 한국의 헤이온와이는 물 건너 간 것 같습니다.”
대뜸 그렇게 말하는 전화 속의 상대는 나이가 몇 살 적은 탓에 아우를 자처하는 헌책장사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헤이온와이는 영국에 있는 헌책마을의 이름이라는데, 헌책장사 세계의 꿈같은 것이라더군요. 헌책방의 메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책방을 더 키워 그렇게 가겠다고 하더니만, 살짝 엿들었더니 그에 연관된 신세타령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지요? 또 무슨 심정 상하는 일이 있었어요?”
샌님의 질문에 동료는 장사꾼 고유의 엄살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이하 대화를 들어보기로 하지요.
“형님네는 손님 좀 있어요?”
“적막강산이네요. 파리만 잡았어요.”
“도대체 왜 이러죠? 책 보다가 얼어 죽은 사람이라도 있나,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야……”
“그러게 말입니다. 종일 소설책 몇 권 팔았어요.”
“알라딘인가 뭔가는 손님이 많다고 신문에 났던데, 그놈들 때문이 아닐까요?”
“설마? 거기는 서울인데……”
“요즘은 차가 흔해서 거리는 문제가 안 돼요. 형님 계시는 오산이야 영향이 없을지 몰라도 의정부는 말도 아녜요. 아주 초토화되었다니까요.”
“오산도 수도권인 건 마찬가지지요. 하기는 열아홉 군데나 만들어 놓았다니 장사가 되기는 되나 보네요.”
“돈 갖고 처발라 놓으니…… 주차장 시설까지 완벽히 해놓았다더라고요.”
“오나가나 대기업 횡포로군요.”
“인터넷에 올려서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까 봐요. 이제 조막만한 헌책방들은 다 망했어요.”
두 사람은 30분 남짓 핸드폰을 붙들고 신세타령을 했습니다. 대기업 ‘알라딘 문고’가 헌책방을 낸다고 하여 설마 했던 게 두세 해 전인데 어느새 열아홉 곳을 개장했다고 기막혀 하는 등으로 타령조 일색의 대화였습니다.
“다녀온 손님들 말로는 팔리게 해놓았다더라고요. 소설책 하나도 말끔한 것만 꼽아놓고…… 우린 이제 다 망했어요.”
그리고 이어진 게 무너진 꿈에 대한 탄식들입니다. 헌책장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샌님과 통화를 하는 동료도 실패작 인생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사회운동인가 뭔가를 진하게 했다가 여자를 만나는 바람에 끝장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고 그런 사람끼리 자학 비슷한 걸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다음은 그들이 중구난방으로 늘어놓은 이야기들인데, 얻어들은 순서대로 펼쳐놓아 볼 테니 참작하여 읽어주세요.
우리가 한국의 헤이온와이를 꿈꾸었던 적이 있기는 하나요? 헌책마을 헤이온와이, 그건 헌책장사들의 꿈인데 당연히 동참해야지요. 니르바나이고 샹그리라이고 엘도라도인데…… 옛말 하시네. 지금은 유토피아가 된 것 같습니다. 이룰 수 없는 세계, 존재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꿈으로는 가져보는……. 그렇군요. 꿈이었을 뿐이군요. 손님들에게 차 한 잔 권해드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이루기 힘드네요.
파주 출판단지에 한국의 헤이온와이를 표방한 북 카페가 생겼다던데 별로라고 하더군요. 나도 단골고객에게 들었어요. 그나마 소식을 듣고 누군가 성공했구나 하고 힘이 되었는데…… 신문에 실렸더군요. 주인장이 기자출신이라는데 출신이 그쯤 되면 이런 광고성 기사도 실어주는구나 하고 질투를 하기는 했지만…… 역시 한국의 헤이온와이는 어려운가 봐요.
두 사람이 그렇게 희망이 생략된 결론으로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샌님의 귀에 한국의 헤이온와이가 별거냐고 속닥거려주었습니다. 자신감 내지 명분을 줄 속셈이었지요.
앞에서 잠깐 말했지만 샌님은 자신을 비하해 부르기 시작하면 영원한 딸깍발이 신세가 되기 십상인 낙방거사 출신입니다. “이렇게 대강 살며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어울려 늙어 가면 그 뿐”이라고 말하며 비극의 주인공 폼으로 울상을 짓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불출이기도 하였고요.
전국 제일의 헌책방이라는 ‘긴 감자’가 이웃 도시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도 심정이 상하기는 했지만 절망까지는 없었던 샌님인데…… 책이 수십만 권이고 주차장 낀 자기 건물 갖고 손님과 커피 한 잔 마실 공간이 있고…… ‘긴 감자’가 이룬 성취인데 평소에 꿈꾸었던 경치이지만 먼저 이루었다고 동료를 질투하기에는 샌님이 읽은 책의 양이 넘쳐났던 거지요.
물론 샘을 내기는 했지만…… 수십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고 비틀어보기도 하고…… “쌓여 있는 책은 책이 아닙니다. 읽히기 위해, 혹은 나중에 다시 읽기 위해 죽간에 그림 닮은 글자를 끄적거려 묶어 놓았던 게 책의 시초 아닙니까.”하고 충고말까지 만들어 혼자 지껄여 보기도 하고…….
하기는 충청도의 산속 어딘가에 헌책마을을 흉내 내어 내려갔던 선배 헌책장사의 소식이 샌님의 속을 뒤집어 놓은 적이 있기는 했지요.
“텔레비전에서 방송하기에 가보았더니, 볼 만한 책이 없어요.”
다녀온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데, 듣는 표정이 벌써부터 안타까움 일색입니다. 볼 만한 책이 없다는 건, 팔아먹은 만큼 보충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니 운영이 어렵다는 말과 같다고 지레 짐작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팔린 만큼 재충전을 시키지 못하면 “볼 만한 책이 없네요.” 소리를 듣기 십상인데 지방에서는 그게 어려운 겁니다.“우리나라의 책은 6.25가 다 쓸어갔고 화장실용 휴지로 다 버려졌다.”고 농담을 빙자하여 편들어 주기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변명을 해주어 위로로 삼고 싶었던 것이지만, 거기를 다녀왔다는 고객이 전문 수집가 수준의 일류여서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예부터 금서가 많던 나라, 이웃 나라의 황제 이름조차도 휘자(諱字)라 하여 따로 모셨던 나라, 조선시대로 와서는 통치수단 명목으로 고려조 때의 서적들을 다 쓸어버렸고, 왜나라 통치 때는 말까지 박살내려 했었으니 남아 있을 책이 있겠느냐고 명분을 주려 해보았습니다마는, 속상한 게 가시겠습니까. 도마 위에 오른 선배 헌책장사를 대신하여 싫도록 자책이나 해볼 뿐이지요.
그런저런 이유를 들어 장사가 망사라고 결론을 내린 후, 샌님은 잔뜩 흐린 얼굴로 분위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한 잔 마실 명분을 만든 것이지요. 아무도 없는 헌책방 안에서 홀짝홀짝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종이귀신 보기에도 좋은 풍경은 아닙니다마는, 그게 그때의 상황에서 샌님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이쯤해서 샌님의 정체를 밝히고 넘어가기로 하지요. 도대체 어떤 인생의 주인공이기에 종이귀신을 동반자로 갖고 사는지 알아볼 겸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끌어가려면 최소한의 정보는 공개해야 하는 게 상식이기도 한즉.
샌님은 사회가 말하는 고시낭인 출신으로 가지고 있던 책을 일용할 양식과 바꾸는 방법으로 가판대를 차렸다가 책장사가 된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샌님이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고시 명색으로 불렸는데, 샌님이 어느 분야의 고시에 실패한 낙방거사인지는 스스로 털어놓은 적이 없어 잘 모르겠네요.
세상이 한창 어지럽게 돌아가던 1980년 봄, 샌님은 수유리 화계사 근처 대로변에 소유하고 있던 책 모두를 벌려놓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세상 시끄러운 거야 말품 팔아 대충 때우고 생계전선에 열중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나는 종이귀신, 글자 위에서 춤을 춘다.’
헌책장사 첫날, 샌님은 그렇게 기록하여 나를 세상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헌책 속에 끼어 따라온 잡기장 노트를 내 몫으로 할양하여 첫 장 윗줄에 세로로 두 줄 적어놓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몇 줄 더 붙여 싯줄 명색으로라도 만들 속셈이었겠지요.
당시 샌님의 행색은 초라함 외의 표현은 생각나지 않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샌님은 자신의 독서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온갖 분야의 책을 잡다하게 모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10여년 고이 모셔두었던 책들을 손수레에 싣고 나가 길가 가로등 밑에 벌려놓고 ‘200원·500원·1000원’의 명패를 붙여 팔아치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무협소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소설류와 선데이서울·주간경향이 대부분이었던 잡지들은 당시 내게 붙여진 200원·500원·1000원의 상품명들이었습니다. ‘선데이서울 200원’, ‘소설책 500원’, ‘무협지 전5권 한질 1000원’, ‘기타 전문서적 1000원 이상’하는 형식이었지요. 카바이트 등불은 시늉만으로 켜놓고 가로등 불빛에 조명을 의지하는 그의 좌판은 의외로 성황을 이루어 샌님은 첫날 3만원을 버는 승전보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또 시험에 낙방을 한 후 “에라, 다 때려치우자”하고 충동적으로 소장도서 모두를 내다 팔 게 되었음이 확실한 그날의 행사는, 샌님의 남은 반생의 직업을 결정해 준 뜻 깊은 행사였고, 나와의 인연을 시작한 첫 번째 행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4년, 샌님과 나는 일만 이천여 일을 함께 지내왔으니 대단한 인생역정을 겪은 셈입니다. 나로서는 원해서 태어난 결과가 아니니 횡액을 만난 셈이 되겠지만요.
지금의 현신처럼 샌님의 인생에 전기가 될 만한 사건이 있을 때, 나는 샌님의 기억 속에서 박차고 나오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공적을 내세울 게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관념 속에서나 등장하는 종이귀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단한 무엇이 있겠습니까. 절망적인 장면에 나타나 그나마 남은 기억을 살려 다음 장면을 긍정적으로 끌어가는 정도였지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일은 병자 스스로 해야 할 일이고, 의사는 팔을 붙잡아 주는 일 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하니 응당 그렇게 처신해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생을 쫙 꿰어야 하는데, 다행히 나는 샌님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종이귀신이라서 잘 버텨내곤 합니다.
그때에 그렇게 시작한 샌님의 헌책 노점은 닷새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습니다. 책을 사들이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지요. 예로부터 선비말짜의 책장사가 대개 그러했다지만, 소장도서 내지 기증받은 책을 팔아서 술 한 잔 하고 양식 조금 장만하고 해서 자본을 바닥내고 나면 그걸로 끝이 됩니다. 책이 보충이 안 된 책방의 모습이야 알 만하지 않습니까.
다행히 샌님의 생활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어서 한동안 쉬는 사이에 책을 구하는 방법을 터득하더군요. 고물상을 통해 가정집에서 버린 책들을 사오는 것이지요. 두어 달 후 다시 시작된 그의 좌판은 제법 틀이 잡혀 있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더니, 야시장 좌판 수준으로 시작한 샌님의 책방은 날로 커져서 다섯 평짜리 헌책방으로 발전하고, 오늘날 서른두 평 5만권의 책방이 되었는데, 오로지 나 종이귀신이 춤을 춘 결과이니 박수라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샌님이 남산골샌님 딸깍발이를 자처하게 된 동기는 책장사를 하기 전의 출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고시낭인이 실제로 본 책은 시험 준비 수험서보다 소설책이 더 많은 실정이었으니 갈데없는 남산골샌님이었던 것이지요.
조선시대 남산골에 모여 살던 가난한 선비들에게는 남의 문집을 베껴 써주는 아르바이트가 있었다고 하지요. 글 새경을 팔던 선비들의 후예가 헌책장사라는 건 샌님이 내세우는 장사치 명분인데, 그때의 딸깍발이들이 몇 부 더 베껴 써서 시중에 돌린 게 소위 출판업과 대본업의 시작이었다고 그럴듯하게 후속담까지 엮어 읊어대지만, ‘믿거나 말거나 시리즈’책 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샌님이 일방적으로 전한 지식이니 믿거나 말거나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딸깍발이 남산골샌님들은 가난뱅이의 대명사입니다. 같은 딸깍발이 신세의 친구가 나막신 딸깍거리며 찾아오면 마누라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술대접을 했다는 남산골샌님들을 본받아 샌님도 사람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경기가 영 아니올시다라서 울상만 짓고 있습니다마는.
‘나는 종이귀신, 글자 위에서 춤을 춘다.’
샌님은 자칭 시인으로 무언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비장미가 있는 문장을 조합해내기를 즐기는데 위의 문장도 그런 치기의 한 순서로 갑자기 생각해낸 것이었습니다. 낭인이었지만 원 소속을 잊은 건 아니어서 돌아갈 명분이 생길 때까지 생계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헌책장사가 직업이 되어버린 게 슬펐을 것입니다.
새벽 3시, 잠들었던 샌님이 벌떡 일어납니다. 골방 안의 수집품들을 닥치는 대로 헤집어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습니다. 때때로 웅얼웅얼 뜻 모를 소리를 지껄여 대기도 하니 술 먹은 값을 단단히 하는 셈입니다.
샌님의 골방 안에는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수집품 명목으로 잡다하게 놓여 있습니다. 명나라 영력제(永历帝) 연호가 붙은 한적(漢籍)부터 시립도서관 소장도서였다가 흘러나온 사서류 책들과 1940년부터 1960년대까지의 초·중·대학교 교재가 있고, 옛날 돈과 우표가 첩으로 쌓여 있는가하면 40원짜리 지하철 표와 2원 50전짜리 전차표도 있습니다.
샌님은 “내 컬렉션은 남이 버린 것들입니다.”하는 자조의 말을 아무렇게나 해대면서도 장사꾼 근성을 잊은 건 아니어서 인터넷이라는 걸 이용해 사진 찍어 올려 옛날 책과 잡동사니들을 팔고는 합니다. 대박 수준의 횡재를 했다는 소문은 들은 적 없지만 가게 문을 닫을 정도도 아닌 걸 보면 적자 면은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듯 연명한다지만 냉정한 눈으로 보면 샌님의 직업인 헌책방은 노후대책이 전혀 없는 불량산업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뿅뿅뿅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에 종이책 장사라니…… 몇 년 후부터는 교과서도 전자책으로 나올 거라고 예고가 되어 있는 시대에 손가락 끝에 침 발라가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란……”
고객들 중의 누군가가 걱정해준답시고 한 말입니다. 샌님의 직업인 헌책방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로는 종이귀신보다 단골고객들이 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염려 덕분에 살아가는 분수에 샌님은 취미가 다양합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글쎄 남의 일기장을 모은다니까요. 다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취미는 없는 것 같지만, 프라이버시의 상징이자 비밀 중의 비밀인 일기장을 모은다는 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사들인 헌책들 속에 일기장이 있으면 화들짝 눈알이 뒤집혀서 허둥지둥 감추는 모습은…… 책장사의 직업병이라고는 하지만, 남의 비밀 글을 훔쳐보는 샌님의 습관은 후생에 짐승으로 태어나기 딱 좋은 악업일 것입니다.
샌님이 남의 비밀 훔쳐보기에 열중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샌님은 환지통(幻指痛)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사를 남의 과거로 대체하여 얼버무리려는 속셈으로 평소에 않던 일을 해보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들으면 당장 입원하라고 하실 일입니다마는, 외견상 보통사람과 다른 면이 전혀 없는 샌님인지라 아직 미친놈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변환기에 이 땅에서 청년기를 보낸 사람으로 온전한 정신 가진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다는 건 샌님의 지론입니다. 샌님의 별난 행동은 그에 연한 반작용의 병적 발작이었다고 푼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샌님이 만들어 수시로 나타나게 하는 종이귀신은 병증이었을 것이고, 헤이온와이의 꿈은 방편으로 찾아낸 궁여지책의 치료법이 되겠지요.
“나는 종이귀신, 글자 위에서 춤을 춘다.”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샌님의 목소리인데, 한밤중의 헌책방 안에서 듣는 외마디 소리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샌님과 종이귀신인 나 단 둘만이 있는 지하 헌책방이기에 소름끼쳐 할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겠습니다만, 샌님의 별난 행동 뒤에 숨은 사연은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종이 귀신, 글자 위에서 춘다. 내가 생명을 얻는 것은 온전히 글자가 장식될 때뿐, 나 스스로는 화장실용 휴지가 될 운명이라고 해도 거역할 재주가 없다.”
이건 또 과거에 들은 적이 없는 소리네요. 샌님이 즉흥적으로 창작해 낸 문장인 것 같습니다. 시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샌님만의 액막이 주문 같은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는 종이귀신, 글자 위에서 춤을 춘다.’
샌님이 나를 빙자하여 만든 위의 문장은 갓난쟁이 종이귀신의 고고성으로, 샌님이 나를 명분으로 내세워 쓰는, 아니지요, 내가 샌님의 손을 빌려 끄적거리는 낙서장의 첫 장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었는데도 출세를 못한 자신을 조롱하려고 만든 비아냥거림인지, 책속에 파묻혀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 구별이 아리송하지만 아무튼 그는 나를 빙자해 자학 비슷한 걸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샌님이 남산골샌님을 자처하게 된 이유를 잠깐 엿보고 넘어가기로 하지요. 어느 날 이희승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를 보고 감동을 먹은 샌님이 무릎을 치더군요. 나막신 딸깍거리며 삼순구식으로 살면서도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는 남산골샌님들의 이야기를 대하고 ‘이거다!’싶었던 거죠. 고시낭인이 남산골샌님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었는데, 때마침 이희승 선생이 도움을 베푸신 것이지요.
글 새경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는 남산골샌님의 고사를 명분삼아 헌책방을 시작한 샌님은 내친김에 글쓰기까지 흉내를 내봅니다. ‘조편소설(爪篇小說)’ 명목으로 아주 짧은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는데, 주워들은 이야기들에 살을 붙여 그럴듯하게 만든 것들입니다. 종이귀신인 내가 보기에 제목이 ‘국어 한 줌’인 시리즈가 괜찮던데 한 편만 옮겨볼 테니 냉정히 평가해 주세요.
“초등학교 국어 책이요? 작년에 사가시지 않으셨어요?”
“얘가 볼 거예요. 그때 건 둘째네 애가 다 가지고 갔고.”
“작년의 그 아이가 아니군요. 닮긴 했는데……”
“스웨덴에 있는 큰 딸애 아들이에요. 지난 번 아이는 뉴질랜드에 있는 작은 아들 아이이고. 외사촌간도 핏줄이라고 이렇게 닮네요.”
“역시 이번에도…… 할아버님이 외국 나가신다더니……”
“그 고집을 누가 말려요? 또 일 저지른 거지. 사위한테 한바탕 하고 데려 왔다네요.”
가끔 오시는 할머니 손님과의 대화이다. 사연인즉슨 ‘그 고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아들딸 4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외국으로 나가 제각기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걸, 예의 ‘그 고집’ 할아버지가 쫓아나가서 번갈아 손자 하나씩을 데려 오신다는 거였다.
“할아버지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뭐가 대단해요? 며느리, 사위들에게 인심 잃고 사는 할애비가.”
말을 갓 배운 어린 손자들을 데려오는 탓에 아들딸의 배우자 되는 사위 며느리가 할머니에게 하소연을 해대는데, 할아버지는 ‘학교 보낼 때까지는 품안에서 기르시겠다’고 막무가내시라는 얘기였다.
“말하고 글만 가르쳐 놓으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제 핏줄은 안 놓게 돼.”
‘그 고집’ 할아버지의 고집의 이유였고, 책장사가 해마다 국어책을 팔게 되는 이유였다.
어떻습니까. 소설에 닮아 보이나요? 전문 글쟁이가 못 되는 샌님이 땀 뻘뻘 흘려가며 쓴 역작이니 비슷하면 박수를 쳐주세요.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옮긴 거라고 자랑삼는 샌님의 큰소리가 꼴불견이기는 합니다마는.
‘조편소설’ 한 편 덧붙이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제목이 ‘예비엄마의 태교 이야기’인데, 연결되는 이야기에 나 종이귀신의 고심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제비야 고맙다.’하고 왕자는 기뻐했습니다. 제비는 왕자의 칼자루에서 큰 루비를 쪼아 내어 입에 물고 지붕 위를 날아갔습니다.”
문을 들어서던 단골손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린다. 동화낭독대회가 열릴 장소로는 많이 부족한 헌책방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읽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제비는 하얀 대리석 천사가 조각되어 있는 성당의 탑을 지나…”
손가락을 들어 “쉿!”을 표시해 보인 후, 익살스레 귀동냥하는 시늉을 했다. 소리의 정체를 짐작한 손님이 미소를 짓는다.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더 나하고 지내지 않겠니?’하고 왕자가 부탁했습니다.”
아직 앳되게 들리는 젊은 여인네의 목소리가 대사 부분에 감정을 넣어가며 감칠맛 나게 잘도 읽고 있다. 헌책방 주인과 책 사러온 손님은 어느새 독서 삼매경에 빠져 드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 읽기를 끝낸다.
“나 좀 봐! 내가 또 소리 내어 읽었죠?”
헌책방 주인과 책 사러 온 손님은 입을 모아 시치미를 뗀다.
“아뇨, 못 들었는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둘러 책값을 치르고 나간다. 자신이 즉석 동화읽기대회를 벌였고, 책방 주인과 손님은 경청자였음을 짐작한 모양으로 얼굴빛이 약간 붉어져 있다.
“첫 아기를 가진 모양이군요.”
“좋을 때지요.”
남은 두 사람은 기분이 좋다. 행복에 겨워 열중해버린 예비엄마의 태교동화읽기대회의 현장에서 심사위원이 되었으니, 아니 그렇겠는가.
소설쓰기 중에서 가장 못난 방법이 자신의 이야기에 살붙여서 쓰는 것이라는데, 도무지 감정을 숨기는 방법을 모르는 샌님이 자기 책방 이야기를 썼군요. 암튼 그렇게 남산골샌님 짓을 착실히 하며 살아온 샌님이 잔뜩 울상을 하고 컬렉션 중에서 앨범을 한권 꺼내어 펼칩니다. 우표, 엽서, 전차표, 주택복권, 버스표 등의 흘러간 유가증권에, 지폐와 주화, 편지봉투, 편지글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여 있는 앨범입니다. 옛날 흑백사진을 모으던 사진첩을 대용한 거라서 두껍기가 한 뼘은 되어 보이는 앨범 속에는 별난 물건들이 가득 꼽혀 있습니다. 샌님이 일생 동안 모은 컬렉션 중에서도 최고들의 모임이었던 것입니다.
샌님이 앨범 안의 수집품들을 살펴보다가 주섬주섬 품안에서 아주 야한 그림을 한 장 꺼냅니다. 낮에 고물행상에게서 샀던 망인의 책 중에서 가장 야한 장면이 실린 한 장을 뜯어내어 감추어 두었던 것입니다. 쭉 빠진 몸매의 코쟁이 남녀가 한창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는 그림인데, 샌님이 앨범에 끼우면서 망인을 생각하고 한숨을 쉽니다. 혼자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살던 망인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보고, 북망산 행에 채찍질을 해준 못된 상행위였다고 자책을 했던 것입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에게 이런 걸 팔다니, 내가 죽일 놈이지……”
샌님의 기억 속에서 망인은 세상 고민을 도맡은 표정으로 책방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팔순 노인이 놀이공원의 곡예열차에 오르듯 잔뜩 굳어서 들어오고 있는데, 책방에 오는 건 어른이 된 후로 처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천자문 있어요?” 망인이 묻고, “천원입니다.” 샌님이 대답합니다. 망인은“그렇게 싸요?” 하고 놀라며 3000원을 놓고 갑니다. 어릴 때 아버님이 이만큼의 가치는 주고 사셨던 것 같다고…… 샌님이 2000원을 돌려주려고 따라가고, 망인은 사양하며 도망가고……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인데, 후에 망인은 그날이 먼저가신 아버님의 기일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샌님이 책장사를 시작하기 전, 처음 추억 찾기를 하였던 곳도 헌책방입니다. 어릴 적에 보고 푹 빠졌었다는 박계주 선생의 순애보와 심훈 선생의 상록수를 발견하고 감동을 먹던 헌책방 방문 첫날…… 그때를 생각해 내고 샌님이 또 청승을 떨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5일장의 책전에 나가 난생 처음 선물로 받은 책의 기억…… 철자법도 띄어쓰기도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달랐던 딱지본 이야기책들…… 춘향전 심청전 옥단춘전 이수일과 심순애…… 어린 날의 샌님이 본 책들…… 끝이 없을 듯 이어지는 추억들…….
망인과의 인연을 되새기다가 자신의 어릴 적까지 거슬러 심사가 불편해진 샌님이 앨범을 펴든 채 잔뜩 굳어져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습니다. 제풀에 슬픔을 증폭시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쯤 되면 종이귀신이 나설 차례입니다. 달래주는 건 항상 내 몫이었거든요.
나는 샌님의 기억에 개입하여 헌책마을 헤이온와이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던 시절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거다!”싶어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무엇이든지 읽어 치우던 기억…… 샌님은 책장사는 모든 분야의 준전문가는 되어야한다고 헌책마을의 자료가 될 만한 책이면 닥치는 대로 읽어치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헤이온와이의 창업자가 쓴 자서전은 읽지 않더군요. 모방이 될까 두려운 탓이라고 하였는데,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미 헤이온와이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동업자들의 업적을 부정한 이유도 스스로 이루어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겠지요.
샌님은 생각합니다. 대도시의 냄새가 짙은 헤이온와이는 꿈꾼 적 없다고. 상업적인 성공을 이룬 헌책방도 관심 밖이라고. 내가 설득했거든요. 당신은 당신의 헤이온와이를 이루십시오. 아니, 이미 이루었을지도……하고.
설득에는 증거가 필요한데, 아! 샌님이 증거가 될 무언가를 찾은 듯싶습니다. 노트를 찢어 만든 쪽지에 서툰 연필 글씨로 써놓은 한 줄 문장이네요.
“헌책방 할아버지, 빨리 나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샌님은 이태 전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수술을 받느라고 20일 남짓 입원해 있었는데, 퇴원하고 돌아와 책방을 열려는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문짝 가득히 건강을 기원하는 쪽지들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저씨, 언제 퇴원해요? 빨리 나오세요!” “할아버지, 빨리 나으세요! 보고 싶어요!”하고. 위의 문장은 그 중의 하나로 샌님의 보물 1호입니다.
앞서 샌님이 쓴‘조편소설’ 명목의 글들을 인용할 때 ‘예비엄마의 태교이야기’를 보셨지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소리 내어 읽던 예비엄마의 이야기. 그때의 뱃속아기가 자라서 샌님을 위해 위문편지를 남긴 것입니다.
연필글씨지만 또박또박 쓴 그 쪽지편지를 읽었을 때의 샌님의 감상은…… 누구나 한 곳에서 10년쯤 뿌리를 박고 살다보면 풍경이 된다지요. 샌님의 헌책방은 10년에서 한 해가 모자라지만 이미 풍경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 돌아다니고 이곳에 정착하자고 생각했을 때, 지하실이나마 30여 평 가게에 책을 꽉 채우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자 하고 미래를 결정했을 때, 샌님은 결심했습니다.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고. 이제 돌아다니는 일은 그만 두겠다고. 장애가 있는 몸으로 직장을 잡겠다고 기웃거리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에 폐를 끼치는 일이니 다시는 같은 짓을 않겠다고…… 그런데 그 꿈이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설명이 늦었습니다만, 샌님은 한동안 헌책방을 쉬었는데, 10여 년 만에 다시 열었을 때는 오른쪽 다리가 약간 짧아져 있었습니다. 막노동을 하다가 다쳐서 수술을 받았거든요. 샌님이 망인이 된 산재환자 고객과 친해지게 된 이유 중에는 동병상련의 감정도 작용한 바가 컸던 것입니다.
“헌책방 할아버지, 빨리 나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샌님이 보물 1호 쪽지편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습니다. 샌님은 자신을 납득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쉬운 것이 되어야한다고. 그래서 나는 지금 진리를 찾았노라고.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참 진리를 모르는 것이라고. 내가 충고했거든요. 아이들에게 쪽지 편지를 받았을 때의 감동을 잊으면 안 된다고. 일생 동안 읽었던 글들 속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돌이켜보라고.
샌님은 자신의 헤이온와이가 어디쯤인지 자각했던 것입니다. 더불어 나 종이귀신이 갈 곳도 정해진 셈입니다. 주인 따라 가는 게 종이귀신의 일인지라, 아마도 헌책방이 문 닫을 때까지는 샌님과 함께 이 도시에서 묵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마는.
재미있네요
잘봤읍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어릴적.변소귀신.생각나네요.ㅎㅎ
종이 귀신의 활자는 언제쯤 부활하려는지....
그리하여...
잘봤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리고 행복하십시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 세상이라 헌 책방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제다 학생 때 만해도 돈 아끼려고 헌책방에서 교과서를 사곤 했지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잘 봤네요~
잘 봤습니다
헌책방...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잘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네요. 고맙습니다.
예전엔 헌책방 골목 다니며 데이트 하고 좋은책 발견하면 보물 찾은듯 기뻤던때가 있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웠습니다 ^*^
🤣🤣🤣🤣🤣🤣🤣
안녕하세요 과하객님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