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금강계단에 봉안한 통도사는 국지대찰과 불지종가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명실상부한 도량이다. 사진은 통도사 금강계단. |
“全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禮不休”(부처님 사리 여기에 모셨으니, 수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쉼 없이 예경케 하라) 영축총림
통도사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도량으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며 불지종가(佛之宗家)이다. 역대 선지식들의 수행 가풍을 온전하게 계승하고 있는 통도사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일 역시 소홀하게 여지 않고 있다. 총림 지정 30년을 맞은 ‘통도사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불지종가, 선교양종 대본산’
박물관 자비원 영농법인 등 다양한 부설기관 시대와 호흡
총림(叢林). 강원, 율원, 선원 등을 갖춘 종합수행도량이다. 영축총림 통도사(주지 원산스님)는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佛寶)사찰로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사찰이다. 신라시대 자장율사 창건 이후 국지대찰의 면모를 유지해온 통도사는 ‘아름다운 수행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사부대중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진하고 있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후 1300년 가까이 한국불교의 중심도량 역할을 수행해 왔다. 조선시대 억불과 임진왜란에도 굴하지 않고 법등(法燈)을 이어온 통도사는 영남 남부의 대본산(大本山)으로 대중의 귀의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계율근본도량으로 수사찰(首寺刹)의 사격(寺格)을 유지했으며, 조선 초에는 나라에서 기도처로 지정한 수위사찰(首位寺刹)의 위상을 겸비했다. 대한제국 당시에는 전국 16개 수사찰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의 제일 도량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불교에 맞선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본산(大本山)으로 지정됐다. 통도사 주지 원산스님은 “자장율사의 창사(創寺)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역대 조사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면서 “그 같은 수행정신을 잊지 않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통도사 대중들은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축총림에는 선원, 강원, 율원 등에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묵묵히 정진하고 있다. 통도사 선원은 근세에 접어들면서 개설됐다. 1899년 봄 통도사 백운선원 수옹(睡翁)스님이 범어사 금강선원의 개원을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영축산에도 수좌들이 머물며 정진한 것으로 보인다. 영축산에 자리한 백운암은 통도사 산내 암자로, 만공스님이 1901년 새벽 종소리에 깨우친 도량이다.
통도사에 선풍(禪風)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900년 무렵에 경허(鏡虛)스님이 직접 통도사에 오면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전(普光殿)에 선원을 개원해 이때부터 보광선원으로 불렸다. 이후 통도사에는 납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성해(聖海)ㆍ구하(九河)ㆍ경봉(鏡峰)ㆍ월하(月下)스님은 물론 용성(龍城)ㆍ혜월(慧月)스님 등 근현대 선지식과 경향에서 운집한 수좌들이 정진했다.
통도사 강원(승가대학)의 원류(原流)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다. 1906년 통도사 총섭(總攝) 성해스님이 황화각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하면서 비롯됐다. 이후 10여 년간 운영된 불교전문강원은 해방 직전까지 운영되며 강맥(講脈)을 이었다. 이후 한국불교 정화불사가 마무리되면서 다시 문을 연 통도사 강원은 월운(月雲)ㆍ홍법(洪法)스님 등 대강백이 후학에게 교학을 가르쳤고, 지금은 현진스님이 학인을 지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통도사는 영축율원에서 스님들이 율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종단 기본교육과정을 마친 스님들이 율장을 연구하는 상설교육기관인 통도사 율원은 혜남스님이 율주를, 덕문스님이 율원장을 맡고 있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스님이 한국을 대표하는 율사(律師)이기에 전통 계승 노력을 게을리 않고 있다.
한편 통도사는 수행기관 외에도 성보박물관과 사회복지법인 자비원, 영농법인 등 다양한 부설기관을 갖춰 시대와 호흡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불행 중 다행으로 병화(兵禍)를 피한 통도사는 옛 모습이 훼손되지 않은 대표적인 도량이다. 그로인해 국보급 문화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며, 선대 스님들이 전해준 문화유산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성보박물관은 통도사 참배객들에게는 또 하나의 환희심을 전해준다. 그리고 영농법인은 스님들이 백장청규(百丈淸規)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물론 친환경 청정농산물을 사회적으로 회향하기 위한 방편으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재가불자들을 위한 각종 기도와 신행활동은 물론 일반 주민이 참여하는 문화행사도 다채롭게 제공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와 함께 화엄산림, 각종 재일기도, 포살법회는 물론 불교대학을 통해 불법(佛法)을 바르게 익힌 재가불자를 양성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수행자 본연의 모습”이라고 강조한 통도사 주지 원산스님은 “최선을 다해 수행하면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도사 주지 원산스님
‘나와 남, 출ㆍ재가 하나’
명확히 인식할 때, 상구보리 하화중생 완성
“자장율사가 창건한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도량으로 한국불교의 상징입니다.”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원산스님
<사진>은 국지대찰, 불지종가라는 자긍심을 잊지 않고 수행과 전법의 도량이라는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원산스님은 “개산(開山)이래 역대조사들이 도량을 수호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살고, 그 가르침을 대중에게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면서 “총림의 위상에 맞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원산스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의 합당한 자세”라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불교의 완성”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남이 차별되어 있지 않고, 궁극에는 하나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통도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에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행사를 잇달아 열고 있는 것도 이같은 취지에 부합한다. 단순히 사중(寺中) 행사로 그치지 않고, 주민과 함께 하는 ‘열린마당’을 개최해 불교의 불이(不二)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원산스님은 양산시민들에게 통도사를 무료로 개방하기도 했다.
원산스님은 “통도사 주지 소임을 원만하게 수행하여 영축총림의 전통을 잘 계승하기 위해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참선수행과 교학연찬을 겸비한 원산스님은 조계종립 승가대학원장과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통도사 백련암 무문관에서 3년간 용맹정진했다.
통도사 ‘중점 불사’
보광선원 요양병원 건립
총림 사격에 걸맞은 수행 전법활동 전개
통도사자비원 산하기관 의료진의 진찰. |
통도사는 총림(叢林)의 사격(寺格)에 맞는 수행전통과 전법활동을 펴고 있다. 산내 대중은 물론 산문 밖의 이웃에게 자비행을 전하는 소임을 묵묵히 이행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보광선원 신축불사와 요양병원 건립 불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우리나라가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최근 빠르게 대두되고 있는 ‘노인문제’를 적극 해결하는데 앞장서겠다는 원력으로 요양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1991년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통도사 자비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복지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영축총림이 요양병원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이다. 통도사 주지 원산스님은 요양병원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불교의 대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진정한 회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는 다름 아닌 ‘봉양정신(奉養精神)’의 발로”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통도사는 수좌들의 수행공간인 보광선원이 참배객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에 위치해 있어 신축불사를 추진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금강계단과 대웅전, 설법전 가까이에 보광선원이 있어 수좌들이 정진하는데 적지 않은 불편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정진에 영향을 미치고, 노후되어 퇴락한 상황이기에 독립된 공간에 보광선원을 신축해 수행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도사는 “여러 인연 있는 분들의 신심어린 동참을 기대한다”면서 “신앙심의 고취와 더불어 봉양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참여를 기다리겠다”고 당부했다.
통도사 부설기관
통도사자비원 활동...‘부처님 자비’ 상징
통도사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
영축총림 통도사는 스님들의 수행과 신도들의 신행활동 외에도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자비원은 ‘나누는 마음, 따뜻한 인정’이란 모토 아래 어려운 이웃들을 지원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통도사 자비원 대표이사 원산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대중에게 회향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면서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영축총림 통도사 부설 기관 목록이다.
사회복지법인 자비원, 자비원양로원, 자비원요양원, 자비원전문요양원, 자비원재가노인지원센터, 도솔천노인종합사회복지관, 내서종합사회복지관, 창원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도산노인복지관, 울산시립노인요양원, 울산남구종합사회복지관, 울산선암호수노인복지관, 울산남구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 울산남구노인보호전문기관, 울산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울산학대피해노인쉼터, 아나율장애인보호작업장, 경남학숙, 부산연꽃어린이집, 김해연꽃어린이집, 통도사유치원, 통도사어린이집, 통도사자비도량, 밀양시립노인요양원.
1300년 수행가풍 올곧게 전승하기 위해 ‘최선’
통도사는 ‘한국불교의 원류’와 같은 도량이다. 사진은 지난 2011년 4월 통도사에서 열린 구족계 수계산림.불교신문 자료사진 |
창건주 자장율사와 통도사
“하루를 살아도 파계하지 않겠다”...1300년 통도사 지켜온 ‘원동력’
자장스님 진영. |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불법(佛法)을 계승하기 위해 통도사는 최선을 다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16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영남 남부지역의 대본산(大本山) 역할을 수행한 유서 깊은 도량이다. 이 같은 전통은 근현대에 들어서도 계승됐다. 국지대찰의 위상을 지키는 것은 물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선지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山門을 열고 금강계단을 개설해 佛之宗家의 면모를 갖춘 祖師이다. 신라시대 眞骨 출신으로 20대 초반에 佛門에 귀의한 자장율사는 세속의 벼슬을 맡으라는 王命을 따르지 않고 수행에만
몰두했다. 거듭된 요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조정에서는 목숨을 빼앗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장스님은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破戒를 하고 100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후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중국 종남산과 오대산에서 주석하며 정진한 자장스님은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부처님 가사 한 벌과 발우 하나, 그리고 부처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를 전해 받고 643년 귀국했다. 이때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낙동강까지 후퇴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자장스님이 신라로 돌아오자 선덕여왕은 스님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추대할 만큼 존경했다. 대국통으로서 스님들에게 계를 설하고 백성들에게 안심법문(安心法門)을 하던 자장스님은 646년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개설했다. 이 때 부처님 진신사리를 금강계단에 봉안했다. 그 뒤로 전국 각지에서 스님과 불자들이 몰려들었고, 자장스님은 이들에게 계를 설했다.
자장스님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신라는 물론 한반도 전역에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또한 젊은 스님들이 뒤를 이어 당시 세계적인 국가인 중국 당나라 유학을 떠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혔다. 자장율사는 우리나라에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처음으로 전한 고승이다. 스님이 <화엄경>을 강설할 때 52명이 나타나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이때 자장스님의 제자들이 52명이 깨달음을 성취한 것을 기념해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 이름이 ‘지식수(知識樹)’이다.
통도사가 경봉스님이 시작한 이래 매년 연말에 화엄산림법회를 봉행하고 있는데, 이 또한 원류는 자장율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 10성(聖)의 1인으로 추대되기도 한 자장율사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 1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觀行法)> 1권 등을 저술했는데, 안타깝게도 전해오지는 않는다. 세속의 이익을 멀리하고 오직 불법(佛法)에 귀의해 수행 정진한 자장율사의 가르침은 영축총림 통도사가 1300년 가까운 역사를 유지해온 원동력이나 다름없다.
통도사의 선지식
구한말 일제강점 가시밭...불지종가 조선불교 수호
영축총림 통도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위기에 직면했다. 국권을 침탈한 일본제국주의는 불교를 앞세워 조선인의 정신을 무장해제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수행자들은 통도사를 지키고 조선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통도사의 寺格을 일신하는 한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구현하려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1984년 영축총림 지정 이전의 성해ㆍ구하ㆍ경봉ㆍ벽안 스님과 초대 방장 월하스님, 그리고 현재 방장 원명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성해남거(聖海南巨, 1854~1927)
구한말인 1892년 통도사 승통(僧統)에 취임해 도량을 일신했다. 3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승통을 맡은 스님은 자장율사의 수행가풍을 온전히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5년 통도사 총섭(總攝)이 된 스님은 이듬해 황화각(皇華閣)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도제양성에 힘썼다. 또한 신학문을 가르치는 명신학교도 개교해 인재를 길러 희망을 일궈가고자 노력했다. 1911년에는 부처님 진신 사리탑을 보수할 때 적극 나서 성공적으로 회향하고, 보광선원장으로 납자들을 지도했다.
이처럼 성해스님은 선대 조사들의 수행가풍을 올곧게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선각자이며 선지식이다. 스님은 1927년 음력 12월29일 “우연히 봄바람 만나 세상에 나왔네. 스승의 돌아간 곳 묻지 말라…”는 내용의 열반시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구하천보(九河天輔, 1872~1965)
성해스님의 전법제자로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해동고,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 1934년)를 설립하는데 앞장서고 마산 대자유치원과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유치원을 개원하는 등 인재불사에 관심이 컸다. 1917년에는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고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에 동참하기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1911년부터 1925년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구하스님은 마산 포교당 정법사, 진주 포교당 연화사, 창녕 포교당 인왕사, 물금 포교당 등 주요 도시에 통도사 포교당을 개설해 전법에 앞장섰다. 역경(譯經)에도 관심을 가져 해인사, 범어사와 함께 3사찰이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개원했다. 해방 후 중앙불교총무원장을 지낸 구하스님은 1963년 10월3일 입적했다.
경봉정석(鏡峰靜錫, 1892~1982)
성해스님 제자이다. 강원을 졸업 후 경전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래 반 푼어치 이익도 없다”는 구절을 보고 참선 수행으로 공부 방향을 바꿨다.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며 승속을 막론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 바르게 살도록 인도했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9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이사장을 지낸 스님은 1953년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을 지도했다. 언제나 자상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경봉스님이 18세부터 85세까지 매일 직접 쓴 일기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은 1982년 5월27일(음력)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벽안법인(碧眼法印, 1901~1987)
경봉스님 제자로 청렴결백하고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한 수행자이다. 제방선원에서 두루 정진하고 통도사 주지, 원효학원 이사, 동국학원 이사장, 중앙종회 의장, 원로원장 등 공직을 역임했다. 후학들의 존경을 받은 벽안스님은 1987년 12월25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오고 감에 때가 없네, 홀연히 왔다가니…”라는 내용의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노천월하(老天月下, 1915~2003)
구하스님의 법을 이었다. 1950년대부터 30여 년간 통도사 전계대화상 소임을 맡았다. 이사(理事)를 겸비한 월하스님은 효봉ㆍ청담ㆍ인곡ㆍ경산스님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대한불교조계종의 초석을 놓았다. 감찰원장, 중앙종회 의장, 동국학원 이사장, 조계종 총무원장, 개혁회의 의장, 조계종 종정을 지냈다. 통도사 방장을 역임한 월하스님은 2003년 12월4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원적했다.
원명지종(圓明智宗)
현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으로 경봉스님의 제자이다.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28안거를 성만하고, 통도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경봉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지난 2007년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어 납자들과 대중을 지도하고 있다.
통도사 산내암자
‘불국토’ 온 듯 국지대찰 실감
통도사 극락암. |
나라를 대표하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란 명성에 걸맞게 영축총림 통도사에는 18개의 산내 암자가 있다. 큰절을 중심으로
각각의 산내 암자가 수행과 전법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영축도량에 들어서면 마치 불국토(佛國土)에 온 듯한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
통도사 산내 암자 가운데는 고려 충혜왕 복위 5년(1344년)에 창건된 극락암을 비롯해 공민왕 23년(1374년)에 세워진 백련암 등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도량이 대부분이다. 사명암은 선조 6년(1573년)에 사명대사를 존경한 이기(爾奇)스님과 신백(信白)스님이 지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머물며 통도사 금강계단을 수호하던 암자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와 함께 1996년 창건된 서축암과 1999년 세워진 반야암 등 비교적 최근에 문을 연 산내암자도 있다. 옥련암은 장군수(將軍水)에 대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고, 서운암은 고려대장경을 도자기판에 조성한 16만 도자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다. 통도팔경의 하나일 만큼 경치가 빼어난 백운암과 비로암도 불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주말이면 자주 통도사 참배를 온다는 김명렬 불자는 “통도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각들이 많아 도량에 들어설 때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면서 “이와 함께 영축산 곳곳에 자리한 암자를 순례하는 것도 통도사가 주는 선물”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현재 통도사 산내암자는 다음과 같다. 극락암, 금수암, 관음암, 반야암, 백련암, 보타암, 비로암, 사명암, 서운암, 서축암, 수도암, 안양암, 옥련암, 자장암, 축서암, 취운암, 보살선원.
[불교신문2984호/2014년2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