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커밍데이
김 회 직
신록이 짙어가는 계절, 퇴직교원의 홈커밍데이에 초대한다는 문자메시지가 떴다.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설렜다. 금란지교를 나눌 수 있는 반가운 자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정집 첫나들이 가는 막내딸 심정이 이랬을까? 들뜬 기분으로 교문에 들어섰을 때 운동장에서는 손자 같은 남학생들의 체육수업이 한창이었다. 울창한 청록색나무숲과 그 한가운데에 펼쳐진 하얀 운동장이 그렇게 선명해보일 수가 없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잘 손질된 교정이 마치 창포물에 머리를 감은 것처럼 시원하고 산뜻하다.
체육대회, 가장행렬, 야외미술전, 시화전, 실내외 환경정리, 월요 애국조회, 중간고사, 기말고사, 봄 소풍, 가을 수학여행, 모의고사, 신입생 유치출장, 야간자율학습지도, 숙직근무, 학부모면담, 가정방문, 생활기록부정리, 시험문제출제, 채점, 연구수업,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교내 합창대회, 하계수련활동, 스승의 날 행사, 입학식과 졸업식, 직장배구대회, 교직원 야구시합, 미술대회 출전학생인솔 등등 내 젊음을 불사르던 시절이 바로 어제 일 같다.
퇴직한지 어느새 열다섯 해가 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그때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학교환경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다. 편리하고, 세련되고, 안전하고, 깨끗하게 정리되고….
퇴직하신 선생님 중 열여덟 분이 참석했다. 고인이 되었거나 우환 또는 개인적인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참석치 못한 분이 예닐곱쯤 된단다. 반가웠다. 너무도 반가웠다. 15년 만에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왜 안 그렇겠는가? 건강은 좋으냐고, 어떻게 소일하느냐고, 그렇게 두 손을 맞잡고서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풀었다.
각종 교육현황이 요약된 학교안내팸플릿의 보충설명을 듣고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SKY로 불리는 주요 3개 대학을 비롯하여 수도권 대학에 해마다 100여명 이상씩을 합격시킨다는 사실, 그리고 교육부와 교육개발원에서 평가한 전국우수학교 10개 학교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이렇듯 명문사학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니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한 후배 교직원의 열성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마음속의 나는 그대로인데 오랜만에 만난 다른 사람을 보고서야 나도 저렇듯 변했을 것이 아니냐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도 예전 모습 그대로라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흐뭇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세월을 꼭꼭 묶어놓는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강산이 한 번하고도 반이나 더 지난 세월을 어찌 그대로라 하겠는가? 어쨌거나 오랜만에 만나고 보니 퇴직 후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게 제일 궁금했다.
나처럼 고향집 놔두고 자주 들러보거나, 고향과는 상관없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별장식 전원주택을 짓고 그림처럼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널찍하고 전망 좋은 새 아파트로 입주해 마음 편히 살거나, 아예 농촌에 들어가 검게 그을린 건강한 농부로 살기도 할 것이다. 손자손녀 다 키워주고 나서 둘만의 취미생활로 오순도순 살기도 하고, 재능기부로 봉사활동을 해가며 의미 있는 일상을 젊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의 행복 론에 따르면 행복은 개인적인 특성과 생존 조건 그리고 건전한 욕망 등 3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인생관, 적응력, 경제력, 건강, 자존심, 대인관계 그리고 분수에 맞는 기대와 욕구 같은 것들이 행복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과하지 않은 균형적인 삶, <로스웰>이 말한 행복의 3대 요소를 적절히 갖추고 살아서 몸과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리라.
퇴직자 고참이라며 내게 인사말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 반갑고 즐거운 만남을 주선해준 학교 측과 후배교직원에게 고맙고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짧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득 먼 옛날에 있었던 교직원 단합 야유회가 떠올랐다. 젊은 옛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그때 불렀던 노래 한마디 부르고 싶었다.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가슴이 울컥 메워와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박수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누군가 “아 옛날이어-”라고 외치기도 했다. 후한 점심대접에 선물도 한 보따리씩 받은 홈커밍데이, 그 즐거운 한 때를 끝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언제쯤이나 또 만나보게 될지. 어디서 어떻게 살든 모쪼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주는 그런 눈빛들이었다. 헤어짐이 서운하고 많이 아쉬웠지만 전화로라도 자주 연락하자며 악수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후배현역교원들이 교문 앞에서 정중한 인사를 보내왔다. 멀리 창문을 통해 손을 흔들어주는 몇몇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초여름 오후였다.
첫댓글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군요..^^ '세월이 가면'을 애송했던 때가 저도 떠오릅니다. 학교에 선풍기와 난로가 있는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좋아했던 국어선생님은 잘 계실까 저도 문득 궁금해집니다.^^
짧았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서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던 옛 동료들이 이제는 눈에 띌만큼 늙어있다는 것이... 흐르는 세월을 어찌하겠습니까?
김선생님은 행복의 3대 요소를 고루 갖추신 행복한 분이십니다.
수 많은 제자들이 있고, 좋은 동료 선생님들이 계시고, 열정도 많으십니다.
홈커밍데이의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선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30여 년의 교직생활이 아직도 꿈에 자주 나타나곤 합니다. 홈커밍데이 때 서울에 사시는 육범수 교장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차 한 잔 하시고 가셨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회직 범수 아저씨 뵌 적이 오래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방학을 맞아 고향에 오신 아저씨한테 잠깐 영어를 배운 적이 있지요. 소식들어서 반갑습니다^^
15년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과하지 않은 균형적인 삶, <로스웰>이 말한 행복의 3대 요소를 적절히 갖추고 살아서 몸과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리라." 김선생님의 옥고에서 깊은 울림과 가르침을 주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뜻있는 자리에 참석하셨고, 느낀 바를 이렇게 수필로 독자에게 감명 주시니, 바로 이런 모습이 노년의 행복이지요.
윤회장님, 그렇게 좋게 봐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노년을 아름답게 보내려면 조금씩 양보하면서 손해보는 듯하게 살아야 된다고 해서 그리 해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잘 않됩니다. 옛 동료를 만난 그 날은 너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장 동료둘과 15년 만에 만나다는 사실은 정말 가슴 뛰는 일일 것만 같습니다. 고락을 함께 나누던 동요들과의 만남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겠지요. 건강하게 살아가시면서 행복을 누리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글을 통해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비록 짧았지만 옛 동료와 함께한 시간이 잊지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삶이란 추악거리를 자꾸자꾸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