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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상급_예수와 함께 박해당할 때
마태복음 5:11-12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누가복음 6:22-23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가 또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난 월요일(1. 11)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5인 미만' 사업장에서 51세 여성 노동자가 플라스틱 파쇄기에 끼어서 사망했습니다. 폐비닐, 노끈 등을 압출기에 넣다가 스크루 컨베이어에 오른팔이 끼어 과다출혈로 현장에서 사망한 것입니다. 이분은 2인 1조로 근무해야 하는 위험 환경인데도 혼자서 근무하다 아무도 모르게 죽어갔습니다.
사실 이번 사고는 막을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5월 광주 광산구의 한 목재공장 노동자 김재순 씨가 파쇄기에 빨려 들어가 사망한 뒤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유사업종에 대한 전수조사가 있었습니다.
조사를 맡았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해당 사업장에 ▲파쇄기 개구부 덮개 설치 ▲비상정지 스위치 설치 등을 권고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직접 투입하는 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권고는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호퍼에 투입하는 방식이 안전한 방식으로 꼽히지만, 공단은 컨베이어밸트 설치를 권고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 측 비용 부담이 크다는 것이 이유였죠.
컨베이어벨트 설치 비용은 약 300만 원 정도인데, 노동부 클린사업(영세사업장 안전보건관리시스템 구축을 위한 보조 지원)을 통하면 정부와 비용을 반반 부담할 수 있어 150만 원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단지 사업주의 150만 원 비용지출을 염려하는 공단 측의 배려 덕분에 아까운 목숨이 희생당한 거죠.
이 일은 2년 전(2018. 12월) 김용균 청년의 죽음으로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던 위험의 외주화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라는 과정 위에 벌어진 또 하나의 기업 살인입니다.
그동안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기업 살인을 막기 위해 기업을 처벌하는 법 제정을 요구해 왔습니다. 매년 2,000명 이상 죽어 나가는 열악한 노동환경도 개선하라고 요구하였죠. 재해 참사 유족들은 목숨을 건 단식으로 열악한 노동 현실에 처해 있는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하청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국회는 국민의 요구에 밀려 지난 1월 8일 '중대 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심의 과정에서 이 법이 그 실효성이 의심될 정도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법 적용을 제외하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공포 이후 3년 동안 유예하는 예외 조항이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처벌 규정도 사라졌습니다.
이를 두고 노동계에서는 “대다수 중대 재해가 발생하는 작은 사업장의 현실을 무시한 법 제정”이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2019년 산재 사고 사망자 10명 중 8명(79.6%)이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라는 것입니다. 또 "법을 빠져나가고자 사업장을 쪼갠 '50인 미만, 5인 미만 가짜 사업장'이 속출할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우려하던 일이 며칠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소규모 영세사업장일수록 사망사고가 훨씬 빈번합니다. 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인간의 목숨도 더욱 가볍게 취급되기 때문이죠. 2019년 산재 사고로 숨진 노동자는 855명인데, 전체 사망자의 77.2%가 50인 미만의 중소업체에서 나왔습니다. 그중 절반가량인 35%가 5인 미만 사업장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런 소규모 사업장에서 '생명존중'을 명확히 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 처참한 죽음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경영계는 ‘기업경영 의지를 꺽는 법이다. 안전사고는 모두 과실에 의한 것인데도 최고경영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주들은 원하청 구조 등으로 일선 현장을 담당하는데, 그러면 당장 범법자가 되기 때문에 사업의 존폐를 고민할수 밖에 없다고 강변하죠.
그동안 그렇게 안전 문제를 지적하였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반성도 없었던 우리 자본주의의 민낯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며 자기들 배를 채워 왔던 당사자들이 이런 무책임한 언사와 협박을 남발할 수 있는 세상인가 봅니다.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한 법적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2008년부터 기업살인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업무와 관련하여 노동자나 공중의 안전조치를 소홀이 해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에게 가혹할 정도의 책임을 묻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법의 적용 대상은 기업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빠져있는 정부 기관도 포함됩니다. 법을 위반한 경우 통상 연간 매출액의 2.5~10% 범위에서 산업재해 벌금을 내야 합니다. 더 심각하게 위반하였을 경우에는 상한선 없는 징벌적 벌금 부과도 가능합니다. 또 벌금 외에 유죄가 확정된 사업주의 이름과 기업의 범죄사실을 지역 또는 중앙 언론 등에 공표하는 제도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법률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과 법인이 국적에 상관없이 적용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이 있어서 현재 영국의 산재 사망률은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법원은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의 가해자인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가습기 살균제의 원료물질의 유해성이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판결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이마트 및 제조업체의 전직 임·직원들 총 11명 모두가 풀려났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교회의 강찬호 안세영 집사님 가정이 연루되어 있고, 강찬호 집사님은 가족대책협의회 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어린 나래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치료를 받았던 때가 생생합니다. 퇴원 후 나래의 치료 과정을 지켜본 우리로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판결이었습니다.
이날 선고 직후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와 피해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의 판결에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조순미 씨는 내 몸뚱이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증거인데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며 울부짖었고, 조모씨는 "그 제품을 써 사망에 이르고,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면서 투병을 하는 저희 피해자들은 과연 무슨 제품을 어떻게 썼단 말이냐"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작년 7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1만 4천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습니다.
가습기살균제는 지난 1994년 출시된 후 2011년에 판매 금지됐는데, 이 17년 동안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은 모두 627만 명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이 가운데 67만 명이 폐 질환이나 피부, 뇌, 심혈관 질환을 새로 앓거나 증상이 악화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정부에 접수된 가습기살균제 사망자 수는 1,553명입니다. 실제 접수 사망자수가 이번 사망자 추정치의 11%에 그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법원은 기업 살인 행위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법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칙을 신봉하나 봅니다.
이번 법원의 무죄 판결은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한 물건을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은 기업과 그 경영진의 부주의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됐다는 사실조차 외면한 상식 이하의 결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긴 최근 우리는 상식과 국민감정에 반하는 수많은 판결들을 지켜보았으니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정초부터 우울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 오는 소식,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즐겁고 기쁜 것이 더 많다면 그 사회는 분명 살만하고 희망이 넘치는 사회일 것입니다.
2021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다. 나 자신이 처한 상황, 내 가족, 내 직장, 내가 속한 사회, 인류의 상황 모두를 살펴보아도 그리 희망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죠.
사실 인류역사상 모든 사람들이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던 세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혹 있었다고 한다면 전설 속에 나오는 무릉도원이나 아니면 부탄과 같이 모두가 가난하지만 스스로 자족할 줄 아는 나라와 같은 예외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살고 싶은 세상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평등과 평화가 구현된 나라일 것입니다. 차별과 배타가 없는 곳, 자신의 욕심 때문에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 곳 말이죠.
예수님 역시 이런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라를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라고 불렀죠. 그리고 이 나라를 소유하고 이루기 위한 거룩한 싸움에 우리를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팔복에 대한 말씀을 주시며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배척하고, 욕하고, 박해하고, 비방하고, 너희를 대항하여 온갖 험담을 할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러한 날,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이 말씀을 직접 듣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동의가 되시나요?
어찌보면 예수님은 궤변과 같은 이상한 논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모든 박해와 고통이 원인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당하는 건 나인데,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분이 내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니요?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얼핏 스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뭔가 있으니 이토록 당당하게 자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미움, 박해, 비방, 험담을 기쁘게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겠죠?
예수님의 이 주장과 요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때문에 당하게 되는 모든 고난과 고통이 진리와 정의 편에 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예언자 반열에 서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죠. 이 생각 속에는 세상이 지금 뭔가 불의하고 부정하며, 잘못되어 있다는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그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을 예수님과 더불어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이죠. 예수와 더불어 예언자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고난도 박해도 없었을 테니까요.
두 번째로는 그 고난과 고통 뒤에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상과 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곧 주어질 새 하늘 새 땅에서 큰 상과 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상은 나만 누리는 상은 분명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누리게 될 상이죠. 예수님이 꿈꾸어 온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그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 평화를 누리는 곳이죠.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배척되지 않는 곳입니다. 사람의 가치나 동식물, 미생물일지라도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곳이죠. 이런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며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 두 가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예수와 함께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 세상과 짝하면 될 일이지요. 우리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한 길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 사람으로 세상 변혁을 위해 기꺼이 고난의 삶을 택할 것인가? 세상의 불의를 용납하고 그들과 짝하여 살 것인가? 당신은 어떤 길에 서실건가요?
저는 주님께서 누가복음 6:23에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좌절이 오더라도 절망에 빠져 새 하늘 새 땅의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보면 수 없는 좌절과 투쟁, 그리고 희망을 반복해 왔습니다. 저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더라도 이런 삶이 계속 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개인사와 가정사, 그리고 우리 사회와 관련된 일들 속에서 늘 반복되어온 구조이죠.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니 견뎌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좌절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자신만, 혹은 자기 가족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야 어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회의 다수를 이룬다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지옥을 향해 내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 욕심 차리자고 남을 희생시키는 사회가 온전하다면 그건 기적입니다. 불과 몇%의 탐욕스런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굴종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독점, 독재 사회가 되고 말겠죠.
우리 한울림 교회는 34년 동안 예수의 가르침을 붙잡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잠시 잠깐 좌절도 있었고, 포기도 했고, 절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잘 견디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려고 세상의 비난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한대로 우리는 하늘나라를 상급으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K-방역 일선에서 애쓰시는 방역당국과 의료진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온갖 적폐들과 대항하며 핍박받는 모든 사람들 위에 주님이 주시는 희망과 축복이 넘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1.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