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이 모임은 시작부터 별다른 목적이 없었다. <타짜>의 고니가 도박에 손댄 그날, 해필 누나는 위자료를 받아왔고 만사 조때부렀듯, 인생사 모든 사단은 '나 조땔 거야, 나 조땔 거야.' 호들갑 떨 때, 누군가 마른 조와 장작을 잔뜩 들고 나타나 조를 때는 우연. 멀쩡한 이름 두고 왜 온갖 야채와 공구들이 난무하는지 갸우뚱하던 내게도 허걱, 이제는 돌(멩이)까지 등장했구나! 일장탄식을 질러버린 그날이 온 거시다. 모든 재앙의 원점이. 훗날 바위(바우)의 등장으로 식겁했다는 전설도...
< 조를 때는 현장 > "공부해야 되는데..."를 주문처럼 흘리고 다니는 멩자께서 친히 안동으로 강림하시는 바람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에 노출됐다. 특히 "저도 몰라요, 헤헤." 크리가 해맑게 터질 땐, 세인들이 더욱 깊은 혼란에 빠졌다. 개인적으론 "오, 작은 눈으로 예리한데요?" 드립을 맞고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자기도 눈 작으면서. 뭔가 배우는 거야 닥치는대로 하다보면 된다지만, 그 뭔가가 전체 판도에서 어디쯤 위치하는가는 일시 파악이 어렵다. 지知의 영역이 내 눈 크기라면 문제될 게 없다만, 넓어질수록 줄줄이 비엔나로 엮인다. 한 가지를 파면 온갖 게 꼬이는 법. 바로 이 시점에서 멩자님의 심후한 내공이 우리를 인도하는 거시다. 정답보다는 더욱 꼬이는 쪽으로ㅋㅋ 어쩌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 모름은 산더미처럼 불어난다. 그걸 모르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조또, 이런 모름의 세계가 있었다니!" 깨닫는 순간, 망연자실, 명백하게 확신하던 전제들마저 춤을 춘다. 우습게도 안다는 건 몰라가는 과정이다. 숭산 스님 왈, <오직 모를 뿐>. 소크라테스 왈, <너 자신을 알라>. 공자 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뭐.. 뭔 개소리야!
그러나 우리 야메들은 결단코 깨달음을 목적으로 살지 않기에, 구토방지선을 넘지 않는다. 대강 아, 이런 얘기구나 감 잡으면 더 파고 들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추구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독서가가 되어야지, 어째서 성공가가 된단 말인가. 문학구장에 자주 간다고 문학을 잘 이해할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뭘 억지로 아는 일은 진절머리나지만, 낯선 여자 뭔가로 가득찬 세상.을 감지하는 순간, 삶은 하렘 <숨은 모름 찾기>를 개봉한다. 그걸 글로 쓸지, 음악으로 만들지, 그림으로 담을지는 학교 선생님도 관심 없다. 꼴리는대로. 다만 주화입마에 빠져 구토방지선에 접근했을 때가 문제인데, 살다보면 분명 한글인데 의도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들을 마주친다. 실컷 읽었더만 머리 속에 <뭐라카노?!>가 요동치면 환장하는 거다. 대강 감 잡았다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보니 <뭐였더라?!> 멘붕오기도 한다. 하여, 이 뻘짓을 떠올리게 되었다. 올해 나를 괴롭힌 주범들을 차례대로 꺼내 확인사살함으로써 분명 읽었다는 기억은 남아있는데, 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는 참사를 방지하도록. 어차피 사견이니, 이런 것 같네 없이 단정적 우김으로 일관한다. 또한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여러 할배들의 정신을 받들어 저작권 따위는 개무시한 <편집>되겠으니, 불만 있는 분은 조용히 발 닦고 주무시며, 웰빙전선을 지키시면 되겠다. 1. 아나키즘 첫 책은 아나키즘이다. 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알지만, 이는 번역 강국 일본의 똥탕이다. 하여, 중국 아나키스트들은 <반강권주의>라 고쳐 불렀다. 아나키즘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 반대하고, 시장의 폭력에도 맞서기 때문이다. 시장과 국가를 반대하는 쪽으로는 공산주의와 썸남썸녀로 지내다 뒤통수 맞고 탈탈 털렸고, 내 꺼인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 가부장제와 개발주의를 반대하는 쪽으로는 <에코 아나키즘(사회생태주의)>과 <아나코 페미니즘>을 낳았다. 특히 사회생태주의는 환경 문제를 접근하는 유력한 관점으로 성장했다. 아나키즘의 핵심은 <자율>과 <더불어 사는>이다. 본문에 "세상 만물 하나하나에 저마다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 각각의 가치를 올곧게 실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 본다."는 문장이 나온다. 거의 <착하게 살자>급 당연한 소리인데, <만물 하나하나>에 방점을 찍으면 순결한 개체존중사상으로서 대강 감이 온다.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포르 <내가 낸데>의 훌륭한 토대이자, 다 때려치고 만인이 리더가 될 때, 위계는 자동삭제 된다.는 <하기실음 관두등가> 사상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반강권주의 앞에 <감놔라 배놔라>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거다. 홍동백서 이런 거 모른다규. 간디 역시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반대하며 국가 없는 민주주의와 마을 자치를 꿈꿨던 사상가였고, 촘스키 같은 비판적 지식인과 존 케이지 같은 현대 예술가, 톨스토이 같은 문호도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하였으니, 괜히 초장부터 쌍심지 켜고 경계할 필요 없겠다. 아나키즘을 사상적 밑거름으로 삼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존내 많다. 저자는 혹시나 헷갈릴까봐 자유주의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자유주의 역시 하도 용법이 많아 뭘 지칭하는지 혼란스럽지만, 일단 문맥 속에서 대강 감 잡고 넘어가자.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자유는 단지 고립된 개인의 자유, 특히 개인의 무한한 소유를 보장하는 자유다. 아나키즘이 강조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율성이 사회적 관계에 의존한다는 의미의 자유다. -본문 중 그러나 현실은 검색 시대. 손꾸락 몇 번만 튕겨도 자유주의스러운 아나키즘이 등장한다. <아나코 캐피탈리즘>은 자유시장 경제를 극단적으로 지지하며,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이쪽 이론을 많이 갖다 쓰는 바람에 바람 잘 날이 없단다. 저자는 아마도 이쪽 아나키즘은 소개하기 싫었을 듯. 당연하게도 좌파 아나키스트들과의 관계도 매우 안 좋다고. 아나코 캐피탈리즘 왈, 자유시장과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건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다. 필연적으로 권위적인 정부에 닿을 테니, 아나키즘이라 부를 수도 없다. 주류(?) 아나키즘 왈, 우파놈들이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항해온 아나키즘에 똥칠을 하고 있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걱정된다. 기타. 책에 등장하지 않는 아나키즘을 몇 개 더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물론 다른 것도 엄청 많다). - 아나코 프리미티즘 : 무정부 원시주의. 우가우가. <= 아나키즘이란 단어를 듣고 잘 모르겠는데, 왠지 이건 아니다 싶은 분들은 대개 <아나키즘=무정부주의=우가우가>의 삼단 크리가 터졌을 확률이 높다. - 아나코 자연주의 : 아나키즘적 자연주의를 뜻한다. 채식주의, 자유연애, 나체주의로 유명하다. 발그레. <= 결혼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연애 + 나체주의 = 야동천국 쯤으로 생각되겠지만, 실제 그렇지는 않다. - 후기 아나키즘 : 후기 구조주의와 혼합된 아나키즘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자파티스모(사파티스타 민족 해방전선의 사상)까지 포괄하는 사상. <= 구토방지선에 근접하는 대표적인 서술되겠다. A=B+C+D인데, 나는 하나도 모르겠는 입장이다. B를 찾으면 B=E+F+G인데 역시나 하나도 모르겠는 입장이 이어지며 결국 토하게 되는 시스템. 여튼 아나키즘은 그 스펙트럼이 겁나 넓고, 대개 빵빵한 조직력하고는 거리가 좀 마이 멀다. 역사적으로 고생도 많았고, 그 고생의 최대 원흉은 공산주의 자본주의였으니까 저자의 관점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아나키즘은 전통적으로 사적 소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프루동은 사적 소유를 <도둑질>이라 그랬고, 아나키스트 대부분이 비슷한 시각을 이어간다. 구체적으로 이것 저것 쪼개지는데, 인간의 자발성에 기초한 상호부조의 연대와 공동체 건설이란 공통 뼈대를 갖는다. <아나코 코뮤니즘>(크로포트킨), <아나코 콜렉티비즘>(바쿠닌), <정강주의>(마흐노), <아나코 생디칼리즘>(혁명적 조합주의), <에코 아나키즘>(사회생태주의) 등 묵직묵직한 내용들이 나오니 책 읽으며 아래 들어가서 꾹꾹 누질러 보면 되겠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B%82%98%ED%82%A4%EC%A6%98 공산주의도 결국은 아나키즘으로 향한다. 마르크스 왈, <공산주의가 궁극적으로 완성되면 정부 따윈 필요 없다네>. 단지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야 된다고 봤는데, 여기서 썸남썸녀는 이별하게 된다. 아나키스트 왈, <한번 독재로 들어가면 싹쓸이(?) 과정에서 괴물로 변해, 결국 영구독재로 흐른다네>. 역사는 아나키스트들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쪽으로 흘렀다(물론 인정치 않는 예외적 견해도 있다).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같이 싸우다가도 급한 불 꺼졌다 싶으면 냅다 서로를 지웠다. 주로 아나키즘이 관광당했는데, 아나키즘 진영에서도 역관광이 벌어졌다. 김좌진 역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이회영, 신채호, 박열 등도 아나키즘 노선을 취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들). 무엇보다 아나키즘에 대한 비판 역시 산더미처럼 널려 있으니 세트로 살펴보면 좋겠다. 특히 공동체적 이상이 전사회적 구성요소로 등장하기 이전에,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상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비판이 기억에 남는다. 뭔들 안 글캤냐만. 역사적으로도 착근에 성공한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그 영향력만은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구석구석 크고 작은 변화의 씨앗이 되었다. 바쿠닌, 신채호는 <반란의 본능과 파괴적 충동>에 희망을 걸었고, 크로포트킨은 <서로 돕고 보살피는 연대>에 희망을 걸었다. 새로운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을 바탕으로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사회적 아나키즘∙개인적 아나키즘. 폭력 수단을 인정∙불인정. 인간의 선함을 기반 삼느냐∙마느냐 등 답 없는 고민들이 펼쳐진다. <소련형 사회주의의 실패>는 결코 <자본주의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지상 과제로서 경제 성장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전자는 개인에게 부와 권력의 집중을 허용했고, 후자는 중앙 정부에 그 집중을 허용했다. 자본주의는 다국적 기업을 위시한 대기업, 사회주의는 중앙 계획 정부에 의해 운용되었고, 어느 체제에서나 민주적인 국민 참가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아나키즘이 사회주의를 국가주의로 비판한 것은 정당했다. 그러나 아무런 전략이 없는 아나키즘을 사회주의가 공상이라고 매도한 것도 정당했다. 이제는 전략을 짜야 한다. 아무리 엉성하다고 해도 전략이 있어야 한다. 그 전략은 다양하게 펼쳐져야 한다. -박홍규 성씨 문화와 두레 등 한국 역사에서 공동체주의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고 한다. 나라는 반드시 백성이 있어야 했지만, 백성은 반드시 나라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 거시다. 아나키즘은 오늘날 사회생태주의, 반전사상, 징집거부 운동, 대안학교 운동, 소비조합-생산조합 운동, 농촌공동체 운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2.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담겨 있다. 빵의 쟁취를 부가 텍스트로 삼았는데, 사랑산카페에 검색하면 나오니 이용하면 되겠다. 상호부조론의 핵심은, 종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경쟁 외에도 협동이 있는데, 니네들 이런 거 생각해봤어? 되겠다. 진화 관련 썰은 네다섯 번째 책들에서 다시 나오니 제끼고. 크로포트킨은 존중 받아 마땅한 개인들이 사유제로 인해 억압받는다고 보고 소유의 개념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인류가 현재까지 이뤄놓은 성과는 과거와 현재의 육체적, 정신적, 집단적 노력 덕택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 성과를 독점할 권리가 없다. 모든 사물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은 지식까지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했다. 그래서 곁가지이긴 한데, 지식재산권에 대해 좀 썰을 풀어볼까 한다. 우리 야메들의 지평에선 이쪽이 훨씬 진입장벽이 낮다. 소유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엔 우리의 상상력이 좀 마이 갇혀 있는데, 디지털 쪽으로 가면 무척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키드로 자라 지금도 인터넷 중독에 빠져 사는 1人으로서 디지털 정보의 공유 가치에 대해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도 있는 거시고. 사고체계는 끊임없이 결합∙해체되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생각재료 자체가 곧 나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디부터가 독창적인 내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생각의 재료인지 알 수 없다. 선택지를 고르는 건 내 판단이나, 떠오른 선택지의 범위는 내가 다 새겨 넣은 게 아니다. 인식과 표현의 근원은 대부분 어디선가 줏어듣거나 누군가 그렇게 생각한 무엇이다. 언어 기반의 미디어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의 퇴화가 동시에 얽히면서, 인식과 표현의 독자성은 매우 희미해져버렸다. 마츠오카 세이고 아저씨는 창의성이란 결국 어디서 줏어들은 거, 이미 있는 걸 이래저래 편집한 <편집 기술의 창의>일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고유한 독자성이 부정되면, 지금 기준의 표절도 코미디로 전락한다. 우리의 인식과 표현은 뭐가 근원인지 알 수 없으니까. 음악이건, 미술이건, 글이건, 컴퓨터 프로그램이건, 완성 과정에서 투입된 정보, 그 정보의 어디부터가 내 독자성인지 말하기 어렵다. 당장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조차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이러한 <편집 지식>을 팔아먹는 게 옳은 걸까? 구조적으로 독자성이 별로 없는 이 개념에 대해,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나? 무려 바다를 건너온 미심쩍은 수입농산물이 우리 동네에서 생산한 로컬푸드보다 싼 건, 당연한 게 아니고 일종의 사회적 선택이다. 일련의 지랄 맞은 사회적 선택이 겹쳐 오늘 우리는 로컬 푸드를 잃어버린채, 6차 산업 드립에 접어들었다. 사회적 선택이 정당했는지는 제끼고, 여기서는 수입농산물이 로컬푸드보다 싼 게 <선택>이란 점만 생각하자. 세금을 어디서 걷고, 어디에 쓸 것인지를 비롯한 수많은 선택이 있었던 거다. 지식재산권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재산권을 인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현 세계의 제도는 지식재산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제도의 성립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재료에 <창의성은 사실 편집에 불과하다.> 혹은 <지식재산권 따위 애당초 없는 개념이다.> 같은 선택지가 빠져 있기 쉽다는 점이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세계에 가깝다. 회사 다닐 때 지식재산권 보호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기업 간 지재권 분쟁도 사실 내용 경합보단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해석 다툼 성격이 짙다. 산업재산권에 해당하는 특허의 60% 이상이 무효 판정으로 사라진다. 특허 등록 요건 중 하나인 <진보성>이란 게 겁나 모호한 기준인데다, 청구항을 들여다보면 업자(변리사)들의 말장난에 다름 아님을 깨닫게 된다. 특허에 포함된 창의성의 지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외려, 그래서 지식재산권 자체가 무기요, 방패이자 전략적 뽀찌로 활용가치가 높은 거다. 그리고 이게 디지털 영역으로 가면 더 골 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꺄아♡ > 물질의 소유권과는 다르게 디지털 정보는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국화주를 1,000병쯤 담았다면 그건 다 내 꺼고, 내 맘대로 마시거나 팔 수 있다. 먹든 팔든 쓴 만큼 병은 줄어든다. 반면, 디지털 콘텐츠는 쓴 만큼 줄지 않는다. 한번 따면 다시는 원본이 없는 꽃술하곤 다르게, 복제 자체가 곧 원본이다. 원본의 가치 손상 없이 무한정 복제할 수 있다. 동시에 구매하지 않고 입수하기도 손쉽다. 디지털 정보와 물질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현재 물질의 가치는 <희소성>으로 압축되는 고유함에서 뽑아내지만, 정보의 가치는 <관계성>을 기반으로 삼는다. 흔하지 않기 때문에 지탱되는 물질의 가치에 비해 정보의 가치는 대개 널리 공유될수록 더욱 높아진다. 정보의 공유는 공명으로 이어져, 새로운 정보를 낳는다. 전유와 공유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우리 사회는 모든 가치 기반을 물질에다 두어왔다. 이게 핵심이다. 디지털 정보는 이 물질 기반 시스템에 맞지 않는 거다. 소유권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인 성질을 갖는다. 소유권자가 배타적 권리를 확보하는 게, 오늘날 물질 기반 체계의 가치인데(크로포트킨 할배는 이것부터 거부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그런 망상은 붕괴된다. 요거 내꺼, 이건 니꺼 백날 주장해본들 소용 없다. 저작권 관련 소송이 과거에 비해 늘었다고 하지만, 공유되는 정보량에 비해 해수욕장 모래알 수준이다. 지긋지긋한 물질 소유 시스템보다 정보의 공유 가치에 매료된 사람들도 꽤나 많다. 많은 저작권자∙소유권자들이 지식재산권 거부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다. 학자는 자신의 논문이 더 많은 학자들에게 참조되길 바라고, 시인은 자신의 시가 더 많은 사람의 가슴에 울리길 소망한다. 저작권법은 이런 공유 가치마저 범법으로 재단하는 깔끔함을 보여줬다. 만든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저작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CCL 제도를 도입했으나 시끄럽기만 더 시끄럽다. 그 질서는 애초에 이 질서가 아니라서. <선택이 아닌 강요된 세계>를 주입하기 위해 과거엔 <교육>이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이쪽(ICT)이 더 관건 아닐까. 집단지성의 힘은 정보 공유에 뿌리 박고 자라며, 그 맛을 본 이상 통제가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시다. 주요 정보가 훨씬 널리 공유되고, 비판 여론이 활발하게 형성되어도 딱히 뭐 변하는 건 없더라만.. 마찬가지로, 물질 역시도 공유된 관계성에 비해 내 지분은 해수욕장 모래알 수준일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도 가질 수 없는 걸까? 아니다. 세상 천지 내 것 하나 없더라도, 억울할 건 없다. 시부럴 꺼이꺼이 온천지가 우리 모두의 <점유>를 허한다면 그게 더 큰 자유 아니겠는가. 요거 내꺼, 이건 니꺼 하기 전에 사람과 사람, 세상 만물 하나하나 사이에 <어떤 관계를 구축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보다 실체에 가까운 상상이다. 그리고 되고 안 되고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좀 간지나게 잘 살다 갔다 싶은 할배들은 모두 안 될 거 뻔히 알면서도 뚜벅뚜벅 걸어간 사람들이다. <위대한 희생>은커녕 충만한 일상을 살다간 분들이 대부분이고. 소유하지 않고도 향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배운 사람은 그 배운 바 지식을 자랑으로 삼을 게 아니라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그 지식으로 남에게 군림하는 도구를 삼으니 병이 들어도 한참 병이 들었지요. 흔히들 <지적 소유권>이란 말을 하는데요, 참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런 엉터리없는 말이 어디있습니까? 그 어떤 <지식>이 제 것입니까? 자기 혼자서 얻은 <지식>이 어디 있어요? 모두 역사의 산물이요 우주의 것인데 말입니다. 그걸 어째서 <내 것>이라고 울타리를 치고 물건 팔듯이 팔아먹겠다는 겁니까?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중... ▶ 덧붙여, 컴퓨터 게임에 대하여 < 대구 남부정류장 인근 게임방 > 한국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인터넷 컴퓨터 게임이라는 유령이... -배틀크루저 앞서 말했듯, 디지털 콘텐츠는 하나 만들면 무한에 가깝게 팔 수 있다. 많이 생산할수록 고정비가 분산되는 규모의 경제와는 차원이 다른 급으로, 이건 단위당 변동비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돈벌이 차원에서 보자면, 콘텐츠 산업의 이익 구조는 현대자동차의 그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이 침 고이는 문화콘텐츠산업의 최전선에 컴퓨터 게임이 있다. <문화가 곧 힘이다>,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등의 슬로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알맹이가 <문화가 곧 돈이다>, <우리 것이 가장 잘 팔린다>라는 것도 알고 있고. 자, 여기서 컴퓨터 게임은 바야흐로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로 올라선다. 컴퓨터 게임은 다른 모든 문화 파트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부가가치를 단독으로 창출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일등공신으로 온갖 빨아주기가 창궐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욕을 먹는다. 외국에서 뜨면 닥치고 추앙하는 게 일반적인 한국의 경향임을 고려할 때, 왜 컴퓨터 게임만 천시 당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 천박한데, 유독 하나만 자꾸 거론하는 건 부당하다. 지나친 암기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키며 운전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률을 높이기 때문에 시험 공부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컴퓨터 게임 하는 게 건강에도 좋은데 말이다. 아직도 학교에서 뭔가 배운다고 생각하는 머저리가 있다면, 당장 때려치고 컴퓨터 게임이나 한판 더 하는 게 상생의 길이다. 컴퓨터 게임할 자유를 달라고 집단탈교 해버리면, 집단탈당 전문가들이 칭찬의 <허가>를 선사할지니. 3.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나는 환경문제에 별로 관심 없었다. 환경운동에 관하여,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요~ 데헷♡> 이런 포스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판에, 팔자 좋다고 비꼰 적도 있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해, 흑흑. 그 결론이 나의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치명적 허점이 생기는데, 그건 선택지라고 부를 만큼의 정보 자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무지>가 단순히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 가짐을 갖고 한결 같이 노력해온 결과라 주장한다. 무지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라는 거다. 그렇다. 어떤 걸 모른다는 건, 대개 모른채로 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름을 아는> 사람이 되려면, 필사적으로 눈을 돌려왔던 것들을 포착해야 한다. 내 경우엔 <환경>이 그랬다. 이 시점에서 궁금해지는 게, 환경은 뭐고 생태는 또 뭔가? 단어 뜻은 니가 사전 찾아보고, 환경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서 전통적 관점이 기존 사회의 틀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면, 사회생태주의는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니까 나 같은 야메는 <사회생태주의> 그러면 뭔가 상당히 얌전하고 팔자 좋은 느낌인데, 실상은 국가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 전체를 갈아엎어야 된다는 강렬한 결론을 품고 있다. 사회생태주의는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기존의 다양한 관점들을 까는데(거의 다 깐다고 보면 된다), 자연보호 포스터에 머물러 있던 나로서는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았다. 일단 메뉴판부터 보고 주문하자. 뭔 주의, 뭔 주의 보다보믄 골치가 아픈데, 헷갈리게 이름까지 알 필요는 없고, 내용만 보믄 되겠다. 원래 뭐든 내용으로 드러나는 거다. 개량주의 : 생태문제를 <작금의 정치∙경제 시스템> 틀 속에서 생각. 대규모 경제 조직, 중앙집권적 정치권력은 정당한 거임. 환경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보다 생태적인 정책이나 활동을 채택하도록 정부∙기업에 압력을 가하면 되는 거임. 혁신주의 : 생태문제가 <작금의 정치∙경제 시스템>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의문 제기. 기업은 돈 버는 거 외에 관심 없고, 정부는 기업 똥 닦아주고 있으니 되겠어 안 되겠어? 의회민주주의도 정치 기관에 권력이나 집중하고 앉았으니 되겠어 안 되겠어? 이러니 덩치만 큰 정치 기구말고 풀뿌리 운동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거임. ------------------------------------------------------------------------------------------- 환경 담론에서 맨 처음 나타난 건 표층생태주의다. 자원 절약이나 과학기술적 처치를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게 인간중심적이라고 비판을 하며 나온 게 심층생태주의인데, 이건 또 인간 자체가 환경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랍시고 인간혐오주의 냄새를 풍긴다. 둘 다 개량주의에 속한다. 개량주의는 돈 많은 기업의 영향력, 시민보단 기업에 따르는 정부, 이익에 따라 결과를 생산하는 전문가, 편향적 언론 등이 손에 손잡고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자연>이라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깔린다. 모든 인간이 공동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고, 인류 전체를 위해 그건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 대신 너무 가면 조땔 수 있으니까 적당히 제동 걸 필요가 있다. 인류를 위해서. 뭐 대강 이런 건데, 좀 더 나가면 자연을 신비화하고, 전근대 사회를 미화하기 쉽다. 아울러 윤리적 소비 운동 같은 체제 내부의 운동이나 녹색 자본주의(녹색 성장ㅎㄷㄷ..)도 포함된다. < 어서와~ 생태주의는 처음이지? 내가 다 까줄게~♡> 머레이 북친은 이걸 싹 다 깠다. 환경문제가 왜 발생했고, 그걸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되는지를 혼란시킨다고. 일타 몇 피야 이게? 인간 사회 내부의 불평등은 가려버린 채, <모든 인간-자연>의 구도로 문제를 단순화하는 걸 지적하는데, 인간 즈그끼리 불평등한 거하고 자연 파괴가 대체 뭔 상관이냐 싶지만, 중간에 <산업자본주의>를 갖다 낑구면 좀 더 쉽게 연상이 된다. 세계를 쥐어짜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백인 남성이야말로 환경파괴의 주범이지, 굶어죽어가는 아프리카 흑인 소년 때문에 환경파괴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백인들의 삶의 방식과 무자비한 산업화가 환경문제를 야기한 원인인데, 별다른 구분이나 경계 없이 모든 인간을 뭉뚱그리면 문제의 핵심을 놓친다는 얘기. 흔히 선진국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객이 너무 많아서>라고 말하는데, 그 많은 인구수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곳이 개발도상국이다. 정작 개발도상국 1인당 자원소비량이나 자연에 미친 영향은 선진국보다 훨씬 적다. 미국에서 1명이 태어나는 건, 개발도상국에서 200명이 태어나는 것과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 자본이 무한한 확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결코 동일한 존재가 아니었고, 환경파괴의 책임도 같다고 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인간들 사이의 자원 소비 격차∙환경 파괴형 생산 양식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걸 없애는 게 자연과 공생하는 전제라는 거다. 즉 <인간-인간> 간의 지배가 <인간-자연> 간의 지배와 떨어질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중심적 접근도 거부한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파괴하거나 지배하는 것 또한 <인간-인간> 간의 지배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왕, 존내 설득력 있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간에 계층과 지배를 유지한다. 인류를 해방하는 참된 생태 사회는 모든 계층과 지배를 배제할 때 가능하다는 게 결론이다. 자연을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위계구조가 없는 사회가 도래해야만 <자연지배>를 넘어설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위계질서로 구조화된 사회가 종식되지 않는 한, 이러저러한 의식이나 주문, 환경신학이니, 소위 자연적 생활방식이니 하는 것들도 다 무익한 거라고 주구장창 깐다. 자연의 영성 개념이나 동양적 신비주의도 <현실 파악 능력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며 탈탈 털린다. 사회 구조의 변혁 없이 의식 개혁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새로운 생태적 세계는 제도의 확립이 뒷받침되면서, 육아∙노동∙놀이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고. 머레이 북친은 아나키즘의 정신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나, 아나키즘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코뮌주의>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전통적 아나키즘과 뭐가 다른지는 총 복습겸, 아래 첨부한 PDF파일 읽으며 참고하심 되겠다. 해 떴으니 이제 자야하므로. 오늘 자지 않으면, 내일은 졸아야 하니까. 코~ zZZ ▶ 덧붙여, 환경문제와 과학기술에 관하여 열린 연단 <환경문제와 현대 과학기술의 이중성>에서 발췌 나는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목표는 <지속가능한 삶>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생활방식은 지구가 지탱해줄 수 있는 그것의 1.5배가 되었다. 북친이 말한대로 세부적으로는 국가별로, 계층마다 다른데, 총량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이건 미래세대가 써야할 걸 가불해서 써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삶의 수준을 성찰해야 한다. 거기엔 무수한 사치와 낭비가 들었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미친 긍정적인 기회에 대해 좋게 평가한다. 다만 환경을 앞에 걸면서 오히려 녹색세탁을 하는 경우는 경계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은 녹색성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사업이었고, 핵발전 기술은 주요 녹색기술로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하면서 칭송까지 받았던 과거가 있다. 과학기술을 어떻게 현명하게 사용할 것인지는 <과학기술 시민성>을 통해 일반시민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핵발전 역시 경제성이 있다, 안전하다, 말도 안되는 주장들을 하는데 공론장에서 민주적으로 논쟁을 해야 한다. 세상 어느 것도 중립적은 없다. 모든 것은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 그때,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지는 공론의 장을 통해 정보가 주어진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 분야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가 유통이 되어야 한다.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집단지성도 발휘되기 어렵다. 과학 지식 자체도 달라졌다. 과학자들이 명백한 답을 구할 수 있었던 <노멀 사이언스>의 시대는 지났다. 과학의 불확실성이 훨씬 높아진 시대에 전문가들조차 온전한 해답을 알기는 어렵다. 예컨대, 기후 변화에 대해 어느 과학자가 답을 갖고 있는가. 사용후 핵연료도 재처리에 대해 좋다, 나쁘다, 문제가 있다, 없다, 폐기물이다, 자원이다, 전문가들도 다 다른 입장이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해 누가 판정을 내려야 하는가. 그땐 각자의 입장을 뚜렷하게 제시해야 한다. 증거를 가지고. 그래서 사회적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어차피 이건 답이 알려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풀 수 밖에 없다. 일상적인 판단은 전문가들끼리 할 수 있지만, 대단히 큰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될 때에는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물어야 한다. 공론조사, 시민합의회의, 시민배심원제 등 다양한 시민참여적 의사결정 방식이 있다. 환경문제는 극단적인 몇몇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놓치기 쉽다. 세 가지 차원에서 접근이 필요하고, <과학기술 시민성>이 참여적 집단지성과 어우러질 때 해법을 찾을 수 있다. 1. 환경문제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2. 환경문제에 대한 책임의 정도는 같은가 3. 전체적인 총 소비 규모는 적정한가 -윤순진(토론 중) 2013-01-25_에코아나키즘과_생협.pd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