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쯤 많이 읽혔는데..
은희경 [殷熙耕 1959∼]
* 소설가.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二重奏)》가 당선되었다. 늦은 출발이었으나 첫번째 장편 《새의 선물(1995)》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타인에게 말걸기(199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1999)》 《그것은 꿈이었던가(1999)》 등 1년에 1권 정도로 발표하는 소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여성에게 강요되기 쉬운 기성개념으로 이뤄진 사랑이나 결혼을 둘러싼 도덕적 틀을 제거해 버리는 그녀의 대담한 표현은 <위악적(僞惡的)>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나, 많은 젊은 여성들로부터의 지지는, 그런 작품 세계가 여성들에게는 자기자신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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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내용 펌 /
미리 고백합니다. 저의 기억력이란 무척이나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주일 전에 본 영화의 결말조차도 가물거리기 마련이며 아무리 괜찮은 영화라고 떠벌리고 다니더라도 1달을 못가거든요. 물론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지만... 책이라고 크게 다르겠습니까만 내용은 다 잊었어도 그 책을 본 후에도 그 느낌은 남아 있어 그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괜찮다, 어떻다 하는 말들을 하고 다니는거지요. 아마도 지금부터 하게 될 은희경씨(혹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그 책을 읽었을 당시의 느낌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봐야하겠군요.
제가 책을 보는 방식은 글쎄요... 그것이 무엇이든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봅니다. 그래봤자 제목이 마음에 든다거나 저자가 누구라거나 하는 것에서 흥미를 느껴 보는 것이지만(절대로 줄거리에 대한 사전지식은 없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그 책의 제목에서 딱 꽂히는 필이 가장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 거의 필독 도서로 꼽히는 「삼국지」는 한번도 보지 못했고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으며 설사 봐야한다는 의무감에 도서관엘 가서도 은근히 앞지르는, 봐야할까라는 생각에 책 앞까지 손이 갔다가 다시 걷어들이고는 하지요.
제가 읽은 은희경씨의 작품은 「새의 선물(1996)」「타인에게 말걸기(1996)」「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1999)」「그것은 꿈이었을까(1999)」「마이너리그(2001)」군요. 생각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러고 보니 은희경씨의 이름으로 나온 장편은 혹은 중편은 다 읽었네요.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걸린 책은 워낙에 보질 않기 때문에 부석사이니 하는 작품은 안 읽어봤지만... 생각보다 많이는 읽었군요. 가장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이군요. 최근에 글을 쓰기 위해 읽은 것이 「마이너리그」이구요, 덩달아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책도 다시 한번 들여다 봤구요, 그 외에 「새의 선물」이나 「그것은 꿈이었을까」와 같은 책은 시간 관계상 다시 찾아보지 못해서 잘 기억을 못하고 있음을 미리 고백합니다. 어차피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을거예요.
은희경씨의 소설을 읽었던 것이 아마도 고등학교 때 인 것 같습니다. 학교 도서실에 갔다가 우연히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보았는데(제목이 마음에 들었을까요? 아니면 상을 받았다는데 한번 읽어봐야 폼이라도 나지...하는 어줍잖은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그다지 재미있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책이 두꺼워서 으레 짐작으로 지겹다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을 수도 있구요. 물론 은희경씨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보셨겠지만 말이죠...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뒤 그녀의 소설 혹은 수필등은 꾸준히 찾아보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은희경이라는 이름이 달린 모든 책들을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렇기에 「새의 선물」이라는 책은 은희경씨와의 길을 터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책이 되겠군요.
제가 신경숙씨의 글을 좋아하는 것도, 은희경씨의 글을 좋아하는 것도 슬프다는 감정을 그저 슬프다고 까발리지 않고 죽음을 그저 저 세상으로 가면 되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 그 표현 방식이 맘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환상적으로 그리지도 않지요. 아주 담담한 듯 하지만 감정이 베어나는 그런 느낌입니다.
글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감명을 줄 때는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억을 잘 풀어내어 읽는 사람들을 설득시켰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작가의 경우에는요.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져야 함을 물론이고 뛰어난 말빨도 필요합니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들(소위 작가나 소설가등의 이름표를 달고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만한 능력이 되어야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은희경씨도 신경숙씨도 박완서씨도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은희경씨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유머입니다. 배꼽을 잡고 뒤로 넘어질만한 웃음은 아니지만 은근히 미소짓게 하는 씁쓰레한 웃음. 씁쓰레할 수밖에 없는 웃음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읽을때면 더 가슴이 아파지기도 하는 아주 묘한 느낌의 웃음을 주는 유머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책 뒤에 나오는 추천사 비스무레한 글들에서 항상 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희경이라는 작가는 상당한 능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잘 조절하거든요. 화려한 수식어로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기보다는 작품 속의 그들을 볼 때 "쟤들은 저러면서 왜 붙어 다닌데?" 하다가도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어느새 제 자신이 설득되어 있거든요. 그녀 책에서 연인들의 모습을 보면 괜히 내가 사랑하는 기분이 들고 그들이 가지는 추억도 마치 제가 가지고 있는 추억인양 아주 그럴듯한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제가 사랑을 해 본 것도 아닌데 괜시리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말이죠... 하지만 그다지 반가운 것은 아니예요. 그 책에서의 여자는 대부분 무미건조한 표현을 하기에 일쑤이고, 남자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참 멋있어 보이기도 하더군요. 아마도 사랑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글쎄요... 「마이너리그」는 좀 다른 느낌일 수도 있겠군요.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은근히 가슴을 콕콕 찌르는 그 날카로움입니다.
사실 마이너리그는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길수록 우리네 인생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뼈 속 깊이 가지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냥 평화롭고 싶은데 그렇기는 쉽지 않거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마이너리그이기 때문이죠. 몇몇의 주목받는 메이저리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어차피 마이너리그에서 있기 때문에 주목받는거죠. 참 슬픈 현실이죠. 기왕이면 같은 출발선상이고 싶지만 x같은 세상에서는 아닌 듯해도 은근한 계급이 존재하죠. 그 슬픔이 잘 베어납니다. (정작 그들은 그것을 슬프다고 생각할런지는...글쎄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 있는 같은 제목의 글을 소개하는 작가의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작가의 경험인 듯해요.
언젠가 늦은 밤 우리는 서대문에서 아현까지
가로수의 수를 세기 위해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갔다.
그날은 비가 왔다.
검게 젖은 포도 위로 불빛들이 흘러다녔다.
일생 일대의 느린 운전.
다 세고 나자 그가 물었다.
몇시야?
내가 대답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덧붙이기) 수박 겉핥기군요. 그럼에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다음주에는 역시나 엉성하겠지만 신경숙씨에 대해 쓸께요... 안뇽~
ⓒ 영상틀... 14기 이혜진 (2002년 2월)
**** 이하 " 은희경 - 마이너리그 중에서 " 2004.5.31 글 / 2004.6.7 펌
"우리의 인생은 죽죽 뻗어가기보다는 그럭저럭 꼬여들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안에서 서열을 매기고 역할을 맡기고 죄과를 묻느라 수선을 떨었다. 남자의 인생과 사내들의 우주, 그 성취와 좌절에 대해 진지한 금언을 남기느라 목젖을 떨어댔으며 때로 소주잔 위에 눈물을 뿌리고 낯모르는 이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누가 세계 최고 부자이며 최대의 바람둥이인가, 어느 나라 여자와 어느 나라 경치와 어느 나라 음식이 최고인가 아닌가 따위를 화재삼아 술을 마셨다.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어쨌거나 가족을 부양했고, 그런 틈틈이 겸연쩍어하면서도 모르는 척 자질구레한 죄를 저질렀다. 그러는 동안 우리 모두 공평하게 사십을 넘겼다.
만수산 드렁칡.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남자들이란 꼭 무슨 가능성이나 대가를 계산하고 여자들에게 촉수를 뻗는 것이 아니다. 잠깐 동안의 택시 합승, 그보다 더 짧게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경우까지도 여자와 함께 있게되면 어떻게 해볼 마음도 아니면서 사내로서 존재증명의 본능이 가동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국의 옛 붕우지도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친구간에는 돈을 융통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친구간에는 서로 선을 권하고 잘못을 나무라야 한다.
둘째 항목이야 너무 당연하 말이라서 "도"라고 이름붙이기가 싱거울 정도이다. 문제는 첫째 항목인데, 고결한 우정에 돈이 개입돼야 한다고 하니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맞는 면도 없지 않다.
인간관계란 애증이 섞여야만 깊어진다. 못보다는 나사가 벽면과의 공유면적이 더욱 많아 훨씬 더 단단히 박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프게 할수록 관계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또 사람의 관계에서 돈관계만큼 애증의 진폭을 많이 가진 것도 없다. 그러니 친구 사이에 돈이 개입되어야한다는 게 이상한 말만은 아니다."
며칠 전에 다 읽은 은희경의 묵은 소설 "마이너리그"에서 따왔습니다.
그 여자 특유의 신랄함이 느껴지는 소설이죠.
흔한 연애소설도 아니고 주인공의 인생역정이 찬란한 그런 소설도 아닙니다.
그저 발에 채이고 밟힐 정도로 흔한 우리 주변 사내들의 얘기입니다.
자세한 줄거리야 많은 분들의 관심 밖일테고
관심있으신 분들은 따로 읽으실테니..
다만 소설가 은희경이 관찰한 "보통" 남자들의 모습이 그럴듯해보여서
옮겨 보았네요.
**** 이하 2004.5. 31 새의 선물에 관한 어느 독자의 평을 6.8 옮김
시라는 것이 작가 한 사람의 내밀한 정서를 그 가슴 밖으로 풀어내려는
몸짓에 의해 이루어지는 산물이라고 한다면, 소설은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 낸
시·공간 안에서의 여러 인간들의 입을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내려는 것
으로서 탄생된다 라는 것이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이다.
때문에 시는 작가의 오랜 고뇌가 그의 언어에 의하여 구절 구절마다 극적으로 표현되어있는 반면에 소설은 작가의 말이 작품 속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 어딘가에 꾸욱
숨겨져 있다.
삶이 늘 그렇듯이 소설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우리에게 그 의미를 제 스스로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도대체 누가 옳고 그르며 어떤 것이 정의에 더 가까운지는 수 많은 문장 속 은유들 속에서 바로 당신이 찾아내어야 할 몫인 것이다.
작가가 펼쳐내는 대사가 많으냐 적으냐를 떠나, 어느 의미에서 소설은 시보다 더 어려운 수수께끼놀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언제나 그보다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법. 그러하므로 삶의 고통과 희열을 흥미진진하게 관조하고 싶으신 분들이여, 그대들은 소설을 볼 지어다.
내가 추천하고자 하는 소설,『새의 선물』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아주 적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관념적인 산문이 전해주는 두리 뭉실한 교훈에서 벗어나, 삶을 향해 스트레이트로 날리는 펀치와 더불어 씁쓸하면서도 아릿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한 번쯤 손에 들어도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또한 문학을 읽으면서 어떤 작가가 지닌 독특한 개성을 새로이 느끼고 싶으시다면, 지독하리 만치 이지적이고 치밀한 은희경의 문체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은희경은 독자들에게 작품을 "음미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장 하나 하나의 "씹는 맛"을 제공하므로 당신은 읽는 동안 우선 "선데이 서울"지나 "도시락 혼식검사" 등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에 대한 리얼한 정경묘사와 작중 인물들에 대한 그 딱 부러지는 심리묘사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야기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엄마가 자살한 이후 1960년대 어느 평범한
시골마을에 있는 외할머니댁으로 옮겨와 자라나게 된 진희라는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진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그다지 유리하거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까닭에 어린 나이에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을 정의내려버린, 대단히 이지적이고 영악한 아이이다. 그 애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언제나 어른들이 바라는 그만큼 모범적인 아이로 행세한다.
주인공은 또한 삶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를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나누어 극복하는 극기훈련으로 삶의 위기를 막아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어리석은 삶의 덫에 빠진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을 관찰하며 거기에서 삶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여러 의미들을 되새겨낸다.
거봐, 삶은 이런 거라구. 당신들 왜 그걸 모르는 거야, 이런 식으로.
그러나 삶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배려를 받지 못하고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삶에서 더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라고 그 애도 이야기하듯이. 무엇이든 너무 일찍 알아버린 영리한 아이는, 더 크고 더 대단한 것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한 흥미를 금방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삶의 의미라니. 이미 삶의 이면을 다 알아버린 주인공에게 더 이상 새롭거나 감동적인 것은 없다. 주인공은 그래서 언제나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 소유의 기쁨과 상실의 슬픔, 고통에 비례하여 달콤한 사랑의 희열을 느끼지 못한 채 무감동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집착으로 얻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은 사실 고통받기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실 이 소설은 모든 것을 알아버린 주인공보다는 삶의 파도에 휩쓸리며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허위와 아픔을 내보이는 주변의 많은 개성적인 인물들- 이모, 광진테라 아줌마, 장군이 엄마, 최 선생, 미스 리, 혜자이모 남매, 홍기웅 등- 에게 더 많은 관심과 연민을 주고 있다.
도도한 냉정이 흐르고 있는 이 소설이 결국은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한 긍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성적인 인물들이 나타내는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 때문일 것이다.
삶은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이끌어 가는 농담인가?
아니면 삶이란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당신이 이 소설에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일단 이 소설은 당신이 삶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더라도, 오정희의 심사평에도 나와있듯 이 소설은 우선 무척 재미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삶의 그 내밀한 속살을 한 꺼풀 벗겨낸다는 것의 희열과, 알아버린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많은 허무를 동반하는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네 귀가 꼭 맞는 도형 같은 원만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혹 공감하지 못할지도..그러나 은희경은 말한다.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너그러웠다면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첫댓글"그날은 비가 왔다. 검게 젖은 포도 위로 불빛들이 흘러다녔다. 일생 일대의 느린 운전. 다 세고 나자 그가 물었다. 몇시야? 내가 대답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첫댓글 "그날은 비가 왔다. 검게 젖은 포도 위로 불빛들이 흘러다녔다. 일생 일대의 느린 운전. 다 세고 나자 그가 물었다. 몇시야? 내가 대답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새의 선물"은 고창(高敞)이 주 무대 였는대 등장 인물 상당수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고 작가의 부친이 운영한 고창 최초의 결혼예식장(동리 국악당 앞)은 고창군이 매입하여 모양성 화장실을 신축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