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비밀(the open secret)의 관점은 깨달음의 본질에 관한 명백히 다른 두 종류의 의사소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개인적인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추구하는 “개인”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것을 찾도록 방향을 제공한다. 비개인적인 것은 “개인”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것은 많은 형태로 나타나는데 폭넓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개인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비개인적인 것은 친숙하지 않고, 에너지적인 것으로 직면(energetically confronting)한다. 개인적인 메시지는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분리된 구도자라고 불리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개인적인 것은 분리되고 불충분한 것처럼 보이는 몸에 체화된(embodied) 느낌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외관상의 구도자를 개인적인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환상을 찾도록 내모는 환상의 상태라고 본다.(분리된 적이 없다, 분리된 것처럼 착각될 뿐이다)
자기가 잃었다고 느끼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구도자의 믿음과 생각을 지원하고 부추기는 어떠한 견해도 이원적인 환상을 강화하고 영속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옳은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외관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비개인적인 관점은 분리와 깨달음에 관한 모든 관념들, 개념들, 믿음들 또는 생각들이 다만 언제나 그것들에 반대되는 것(opposite)의 투영(반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항상 표현될 수 없고 알려질 수 없는 것을 향하여(towards) 또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져서(away from)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외관상의 분리는 본질적으로 몸에 체화된 수축된 에너지로 보인다. 그 수축된 에너지는 알 수 없고 비개인적인 그 무한한 살아있음으로 그저(아무 이유 없이) 그리고 갑자기 외관상으로 해방될 수 있다.(Being : 해방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원래 해방되어 있다) 환경 또는 상황은 전혀 관계가 없다.(Being :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명백한 또는 명백하지 않은-관념들도 에너지로 억류된 분리감에 결코 작용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어떤 이에게는 강렬하게 느껴진 “영적 체험”이 개인적인 깨달음의 사건으로 보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가르치려고 하는 바람이 생길 수 있다. 스승이 하나임(oneness)의 본질을 설명할 때는 그러한 의사소통이 때때로 “비이원(non-dual)”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사소통이 예를 들어 자기탐구, 명상 또는 정화의식 등을 통하여 구도자가 그 하나임을 획득하도록 도울 수 있는 과정을 권유함으로써 자기모순이 된다. 개인이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찾을 수 있도록 “이 순간을 살기” 또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또는 “두려움 받아들이기”에 대한 부추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개인적인 처방들은 종종 구도자의 감정을 고무시키고, 그들에게 새로워진 희망과 목적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이상만을 불어넣는 것의 반복을 수반한다. 바로 그 개인적인 처방의 내재된 속성에 의해, 시간 속의 스토리 안에서 두 사람간의 이러한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인 처방의 영향은 일시적이다. 그것은 필요를 충족시킨다. 잠시 동안은.
비개인적인 의사소통은 체화된 분리의 경험(embodied experience of separation)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구도자의 외관상의 딜레마(Being : 외관상으로는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리된 적이 없다)를 깨닫고 밝힌다. 그것은 무한한 살아있음과 무한한 살아있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만족감과 갈망의 본질을 정확하게는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being : 그 본질은 설명이나 묘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어떠한 종류의 타협 없이(방편을 쓰지 않고) 절대적인 필연성과 추구행위의 희망 없음, 그 희망 없음 안에 숨겨져 있는 자유의 선물을 드러낼 것이다.
누구도 이 비개인적인 메시지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칭송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을 기쁘게 하고 도와주고 변화시킬 어떤 개인적인 주제는 없을 것이다. 이 메시지에는 그들이 스스로 꿈꾸고 바라던 모든 것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가능성 외에는 “개인”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인의 정체성, 추구행위, 희망과 꿈들이 위협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이 메시지의 거부가 있을 수 있고, 자아실현으로 이어지는 인간에게만 유일한 개인의 자율성(self-autonomy)의 환상을 돕고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적인 메시지로 되돌아감이 있을 수 있다. 그때 비개인적인 메시지는 비판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애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때문이다. 개인적인 구속의 환상의 실체를 밝히는 무조건적인 자비로부터만 생기는 단 하나의 영구불변성에 대응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 밝힘(계시)으로부터 누구의 것도 아닌(being : 개인은 없으므로) 공명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떻게“개인”이 비개인적인 것을 알아들을 수 있나?
어떻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앎이 있을 수 있나?
어떻게 “개인”이 그들 자신의 부재에 “맞서는” 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구도자가 이미 전부(모든 것)인 것을 붙잡을 수 있나?
어렵다. 불가능하다. 놀랍도록 무의미하다. 붙잡을 분리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wholeness)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완전한 무한하고, 비개인적이며, 무조건적인 자유이다. 전부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everything)인 전체(wholeness)는 또한 어떤 것(anything)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이다.(Being : 전체이기 때문에 어떤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이원론은 이원론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는 의미 있는 여행(추구의 여정)을 하고 있는 자아의 스토리로 나타날 수 있다.
전체는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가진 분리된 개인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전체는 깨닫고 다른 사람이 깨닫게 될 수 있도록 돕는 개인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전체는 나누면서도 자기 자신을 비이원이라고 부르는 의사소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하여 외관(모습)의 작용 속에서, 전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으면서 모든 장소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분리된 무엇인 척 할 수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있는 놀랍고 불만족스러운 꿈같은 스토리이며 또한 전혀 목적이 없다. 그러나 외관상의 구도자에게는 분리로부터 생기는 고통과 갈망이 완전히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구도자는 영적인 산에 올라야 할까 아니면 그저 흘러가게 하고 삶에 항복하여야 하나? 그것이 질문인가? 아니면 질문도 없고 해답도 없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추구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아마 갈망되는 사랑하는 것은 이미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찾기 위하여 구도자는 행동했다.
아마 추구하는 몽상이 그 무한한 에너지-분리를 모르고, 주제 또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로 녹아든다면, 불현 듯 그러한 갈망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안긴다.
출처 : "This Freedom", Tony Parsons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