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놈 남산에서 집단폭행을 당하다 *
이듬해
다시 찾은 교정을 새삼스러운 듯 교문을 지나서 운동장의 중앙을 가로질러서
교무실 앞에 선 촌놈은 쭈뼛 쭈뼛 머뭇거리다 교무실 문을 두드려 노크를 한다.
“ 똑똑!! ”
교무실에서 선이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 들어와! ”
과학과 영어를 겸하시던 박 선생님의 목소리다.
공부를 안 하거나 조금이라도 선생님의 기분에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인정사정 두지를
않고 학생들을 두들겨 패는 무서운 선생님의 목소리에 다소 주눅이 들며
다시 호랑이 선생님과 일 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문을 열기가 싫어진다.
지금의 교육계에선 통용이 되지를 않을 당시의 선생님이 내리는 체벌폭력의 위용이었다.
“ 드르륵....”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마치 처음 들어와 보는 곳처럼 낯설다
들어서며 선생님들께 꾸벅 인사를 하고 두리번거리며 수학을 맡고 계신 담임선생님을 찾는다.
일 년 만에 뵙는 낯익은 선생님들이 눈에 들어온다.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의아한 듯 촌놈을 쳐다보며 미소를 보낸다.
작년 이맘때 눈물을 흘리며 담임선생님의 무릎 앞에 꿇어 앉아 울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수학선생님이 업무에 열중 하시다 뒤늦게 등 뒤를 돌아보시며 촌놈의 얼굴을 쳐다본다.
선생님의 미소가 얼굴 가득 번지는가 싶더니 환하게 웃으시며 촌놈의 손을 덥석 잡는다.
작년의 그 느낌...
촌놈의 손을 꼭 잡고 말씀을 하신다.
“ 왔구나, 네가 돌아 왔구나. 아버지는 안녕하시고? ”
“ 네, 선생님....”
다시 말끝을 흐리며 촌놈은 눈물을 글썽인다.
“ 남자는 울면 안 된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어 인내 하거라, 알았느냐? ”
촌놈은 말없이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 지난해엔 하급생이던 아이들이 동급생이 되어 조금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길 바란다.”
“ 힘들면 선생님께 말을 하거라 ”
“ 네...”
담임선생님은 3학년 교실로 촌놈을 앞세우고 가신다.
선생님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신 다음 촌놈이 쭈뼛 거리며 따라 들어선다.
수학을 담당 하셨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확실한 행동을 보여 주시던 분이다.
본인이 학생들에게 한 말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며 체벌 또한 확실하게 하시는 분이다.
“ 반장! ” 하고 호명을 하신다.
“ 차렷! 경례! ”
선생님에게 학생들이 인사를 한다.
“ 잘 들어라. 작년에 3학년이었던 학생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일 년을 쉬었다가
다시 복학을 하였다. “
“ 낯설게 대하지 말고 우정을 맺기를 바란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일어나면 해당 학생은
곧바로 정학 처리를 할 것이며, 그래도 안 되면 퇴학 처리를 할 것이다 알겠나!? “
“ 네!! ”
선생님은 촌놈의 입장에서서 보호를 해 주신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기도 질투도 얼러대는 아이들도 없이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당시 중고등학교의 규율은 엄격하여서 상급생과 하급생의 관계는 마치 군대의 군기와 같은
위계질서가 확실한 때였다.
선생님은 바로 그 점을 염려 하시고 2년 동안 촌놈이 상급생으로서의 위치에서
하급생이었던 지금의 동급생 아이들에게 받았던 대우에 대한 그들의 열등의식으로 인하여 촌놈에게
보복차원의 폭력을 염려하여 교칙을 앞세워 엄포를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별로 시비를 거는 일 없이 대해 준다.
어느 듯 여름방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올 즈음 서울로 시집을 간 큰누이에게서 편지 한 통이 날라 왔다.
보고 싶었던 누이...
촌놈에겐 엄마와 같았던 큰누이의 편지를 받아들고 봉투를 뜯기도 전에 가슴에 안고 울컥 눈물부터 보이던 촌놈은
조심스레 편지를 개봉한다.
< 사랑하는 동생에게...>
매일 눈뜨고 잠자리에 들어도 너와 네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 한단다.
아버지는 안녕 하신지 몹시 궁금하구나.
네 동생이 어린나이에 집안 살림을 하느라 참으로 애처롭구나.
...............................중략.............................
이번 여름방학에 서울에 올라 와.
아버지께 이 편지를 보여 드리면 보내 주실 거야.
동생들과 함께 올라오면 좋겠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우선 네가 먼저 왔다가 가고 다음기회에 동생들을 들르도록 할께...
...........생략.............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서울은 어떤 곳일까...
동경의 대상이었던 서울을 큰누나가 초청을 한 것이다.
아버지의 허락을 쉽게 얻어내고 여름방학이 돌아오길 학수고대를 하며 보내는 시간들이
하루가 천리와 같다.
몇 일되지 않는 여름방학의 기다림을 뒤로하고 방학식을 마치고 학교 정문을 나서며
아이들에게 서울 가는 자랑에 침이 마른다.
마냥 들뜬 기분을 살리며 집으로 돌아온 촌놈은 주섬주섬 방학 숙제물을 챙겨서 가방에 넣는다.
동생들의 부러움 속에 서울을 향해 버스에 오른다.
비포장도로를 덜컹이며 한 시간 삼십분 여의 시간이 지난다음 원주역에 도착을 하여 서울행
기차에 오른 촌놈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처음 타보는 기차는 왜 그렇게 신기하고 신나는지...
누이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에 청량리역 도착시간을 누이에게 알렸기에 열차에서 내려 푸렛홈을 나오니
행여 동생을 놓칠세라 누이와 매형의 눈동자가 분주하다.
“ 누나~~~~! ”
달려드는 누이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누이의 눈물을 볼로 받아야했다.
매형의 안내로 청량리에서 전차(당시의 대중교통)를 타고 독립문까지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홍은동에서 내린다.
누이 부부의 안내에 따라 어느 큼직한 중국집에 들어가 그토록 먹고 싶었던 짜장면을 곱빼기로 시켜주는 매형이
너무나 멋져 보인다.
다음날 아침...
매형은 운영하는 사업체를 직원에게 맡기고 촌놈과 누이를 데리고 겸사겸사
하루의 휴가를 내고 처남인 촌놈과 누이를 데리고 관광에 나선다.
당시 시골 사람들이 서울구경을 하는 제 1코스가 남산이다.
지금이야 도로를 너무나 잘 닦아 놓아서 오르기 손쉽지만, 당시는 토끼길 같은 소로(小路)였다.
케이블카가 당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걸어서 남산을 오른다.
당시는 어린이 회관이 완공되지 않았을 때이다.
지금의 어린이 회관 옆의 긴 계단을 오르면 분수대가 있었고 분수대를 지나면 팔각정을 오르는 좁은 길이 있다.
남산의 6부 능선 정도엔 청와대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 있었고 시골사람들은
남산의 관광기념으로 반드시 그곳에서 청와대와 북한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정규(?)코스를 구경을 하고 내려와서 남대문을 구경을 하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곁들이고 누이 댁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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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어 내려가며 '수학선생님'이라는 글씨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중학교 때 담임은 아니었지만 유독 절 예뻐해주셨던 수학선생님께서
10여 전에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나셨습니다.
남산...
지금은 남산타워를 'N서울타워'라고 하지요.
가끔 비빔밥 먹으러 가는 곳~
묵향님의 추억 담긴 글에
제 추억도 떠오르는 시간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서당을 뒤로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 와서는
수학선생님이 반겨 주시는 교정이 새로웠지요^^
지금도 가을 총동문회 날이면 선생님을 찾아
뵙고 있지요^^
머물러 주시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