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되지 못한 고통은 반드시 투사된다:
타인의 얼굴 제대로 바라보기
요즘 드라마 한 편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제목부터 이미 심리학 논문의 첫 문장 같은 이 드라마는, 재능을 둘러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인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공포를 정면으로 주시한다.
주인공 황동만은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세계는 가혹하다. 주변에는 이미 이름을 떨친 감독들이 즐비하고, 황정만은 그 빛나는 목록 속 어디에도 자신을 끼워 넣지 못한 채 날을 보낸다. 문제는 그 열등감이 그를 안으로 침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던진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감독들에게 덮어씌운다. 저 사람이 문제다. 저 세계가 부당하다. 저 성공이 기만이다. 자기 내면에서 시작된 고통의 화살이 어느 순간 타인을 겨냥한 검이 되어 있다. 이것이 투사(投射, projection)다.
투사한 고통은 어디로 가는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관리되지 않을 때 반드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 진실을 임상의 언어로 정식화했다. 자아(ego)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동이나 감정인 수치심, 열등감, 분노, 욕망을 의식 표면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무겁고, 너무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자아 이미지를 위협한다. 그래서 자아는 그것을 밖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그 추방된 감정을 타인에게 귀속시킨다. "나는 열등하지 않다. 저 사람이 나를 열등하게 여긴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 세계가 나를 실패로 몰아가고 있다." 황동만의 분노가 정확히 이 구조 위에 서 있다. 그의 분노는 자기 고통의 투사다. 타인을 향한 공격은 사실 자신을 향한 자기 고발의 전도(顚倒)다. 투사한 고통은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프로이트가 밝힌 것은 메커니즘의 절반이다. 칼 융(C.G. Jung)은 더 깊은 층위를 열었다. 투사되는 것은 억압된 나쁜 충동만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의식에 통합되지 못한 자기 전체의 미발현 부분 즉, 융이 그림자(Shadow)라 부른 것이다. 황동만이 다른 감독들에게서 격렬하게 혐오하는 것, 혹은 격렬하게 시기하는 것, 그 어느 극단이든 그것은 자기 내면의 무언가가 바깥으로 반사된 신호다. 그가 가장 질투하는 감독의 자질은 사실 그 자신이 가장 깊은 곳에서 열망하는 자신의 가능성이고, 그가 가장 경멸하는 감독의 특성은 사실 자기 안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자신의 그림자다. 투사는 자기 내면의 지형을 타인이라는 스크린 위에 투영하는 행위다. 타인을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대개 자신을 보고 있다.
심리적 거울의 함정
이 투사가 왜 이토록 자연스럽고 저항하기 어려운지를 이해하려면 사회심리학자 찰스 쿨리(Charles Horton Cooley)가 일찍이 제시한 통찰로 돌아가야 한다. 쿨리는 인간의 자아가 타인의 반응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거울 자아(Looking Glass Self) 개념이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구성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쿨리의 사회심리적 거울이 실제로 작동되지만 이 거울이 작동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함정에 빠진다. 물리적 거울은 나와 거울상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이고, 거울의 유리면은 나와 무관하다. 쿨리가 제시하는 사회 심리적 거울인 타인은 다르다. 타인은 자신의 감정, 욕망, 기억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이고, 그 타인에게 비친 나의 모습은 타인의 내면 상태와 뒤섞인다. 이 혼합 속에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자아는 바로 이 경계의 모호함을 자기 보호를 위해 활용한다. 내 안의 열등감이 타인의 경멸로 느껴지고, 내 안의 분노가 타인의 적대로 지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적 거울은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허물고, 그 혼돈 속에서 투사는 자기방어의 가장 손쉬운 경로가 된다.
황동만이 다른 감독들을 적으로 읽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심리적 거울 속에서 자신의 고통이 타인의 얼굴 위에 덧씌워지기 때문이다. 거울은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관리되지 않은 고통은 거울을 왜곡시켜 타인의 얼굴을 자신의 내면으로 채운다.
일상의 풍경들
이 역학은 드라마 속 황정만에게만 일어나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일상의 가장 평범한 장면들 속에 이미 깊이 박혀 있다.
부하직원을 끊임없이 무능하다고 평가하는 리더가 있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무능한 부하들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부하의 무능으로 투사함으로써 자아를 보호한다. 자녀에게 집요하게 성취를 강요하는 부모가 있다. 그 강요의 근원은 자녀의 미래에 대한 순수한 염려만이 아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 자신의 열등감을 자녀라는 스크린 위에 투사하고 있을 때가 많다. 동료의 성공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 분노는 동료를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포기해버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애도가 분노의 형태로 투사된 것이다. 타인의 관계를 과도하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의심은 타인의 배신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 아니다. 자신 안의 배신하고 싶은 충동, 혹은 배신당할 자격밖에 없다는 자기 무가치감이 투사된 것이다.
잘남을 증명할 수 없을 때는 망가져서라도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이 황동만이 보여주는 투사의 가장 처절한 형태다. 탁월함으로 자신을 세울 수 없을 때, 인간은 파괴와 분노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한다. 이것이 드라마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다. 투사는 무능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관리되지 않은 고통의 필연적 출구다. 자신의 경계 안에 관리되지 못한 아픔이 크면 클수록 타인에게는 수소폭탄이 된다.
투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투사를 타인과의 관계 조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투사는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투사의 문제는 자기공감, 자기연민을 거쳐 자기긍휼에 도달할 때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된다.
시작은 자기공감(Self-empathy)이다.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있다." 이 진술은 단순해 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것은 용기를 요하는 행위다. 고통을 의식적으로 직면하는 것 자체가 자아에게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자기공감이 충분해지면 자신의 감정적 상처가 분출하지 않도록 돌보는 자기연민(Self-sympathy)의 단계에 도달한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면서 자신의 고통에는 가혹한 판사가 되는 역설이 투사를 가속하는 내적 구조다. 자신의 고통에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고통을 타인에게 던지려는 충동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자기연민은 최소한 고통이 투사되지 않고 자기안에 머물게 도와준다.
세상의 모든 투사는 자기긍휼(Self-compassion)에 도달할 때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된다. 자기긍휼은 단순한 자기 위로를 넘어선다. 자기긍휼은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을 지나, 고통의 원인 수준에서 자기 내면과 연합하여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그 고통조차 사랑하는 존재론적 전환이다.
황동만이 자신의 열등감을 타인에게 던지는 한 그는 그 열등감의 노예로 머문다. 그가 그 열등감을 "그렇다, 나는 지금 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이 고통도 나의 일부다"라고 끌어안는 순간, 투사의 회로는 비로소 끊어진다.
자기긍휼은 자신의 고통조차 사랑하는 행동이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위해 서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 사랑이 식으면 주인공이 아니라 하녀나 머슴이 된다.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고통조차 사랑하면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 자신을 고통의 수동적 피해자가 아닌 능동적 주체로 일으켜 세운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워져야 자신의 아픔이 원인의 수준에서 파악되어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자기긍휼 없이는 투사의 회로가 끊어지지 않고 무한반복된다. 관리되지 않은 고통은 반드시 투사된다. 이 명제의 역(逆)도 참이다. 자기자비로 자신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 고통을 타인에게 던질 필요가 없다.
타인의 얼굴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자기긍휼로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세운 사람에게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언어를 빌리면, 그것은 타인의 얼굴(visage)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우리에게 가장 원초적인 윤리적 요청을 건넨다고 말했다. 그 요청은 "나를 살해하지 말아요(Tu ne tueras point)"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살해를 금지하는 계명이 아니다. 타인을 타인 자체로, 즉 나의 투사 스크린이나 나의 욕망의 도구가 아닌 고유한 얼굴을 가진 존재로 만나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이다.
자기 고통을 관리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얼굴 위에 자신의 내면을 덧씌운다. 그는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등감이 투사된 스크린을 본다. 그에게 타인은 고유한 얼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의 용기(容器)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살해의 의미다. 황정만이 동료 감독들에게 저지르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는 그들의 얼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등감으로 그들의 얼굴을 덮어쓴다.
자기긍휼을 갖춘 사람만이 타인의 얼굴에 새겨진 "나를 살해하지 말아요"라는 메시지를 온전히 읽을 수 있다. 자신의 고통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타인 자체로 대면하는 윤리성을 확보한다. 이것이 진성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이 자기인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유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리더는 구성원을 자신의 그림자 극장의 배우로 캐스팅한다.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리더만이 구성원의 얼굴에 나타난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고통의 얼굴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제목은 이미 답을 품고 있다. 황동만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 싸움 속에 있다. 문제는 그 싸움을 자기 내면에서 치르느냐, 아니면 타인에게로 외주를 주느냐다. 투사는 고통의 외주화다. 자기긍휼은 그 고통을 회수하여 자기 안에서 소화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소화의 끝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리더십의 시작이며, 인간다움의 시작이다.
자신의 경계 안에 관리되지 못한 고통을 투사해 외주화 하는 행동은 심리적인 문제이어서 법에 걸리지는 않지만 인간이 행하는 행동 중 가장 잔인한 비윤리적 행동이다. 고통에 대한 투사를 관리하지 못하는 이들이 직책을 가지면 내노남불의 대명사 트럼프도 되고, 네탄야후도 되고, 윤석열도 된다.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 인사조직전략 명예교수 윤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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