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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지독한 아픔이다. 일본유학까지 하시고 마산 거부의 장남이신 우리 아버님의 초현대적인(?) 생활로 어머니와 별거하시고
나는 어머니 따라 서울 올라와 노량진 본동초등학교에 며칠 늦게 입학하였다. 주위의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고 학교에서 출석을 호명하면 "예"라고 대답해 아이들의 놀림거리였다. 그 후로 벙어리가 되어 2학년 올라가면서 "네"라고 답하니 내가 정말 벙어리인 줄 알았다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린 계집아이의 자존심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해마다 집으로 선생님께서 가정방문 오실 때가 지옥이었다. 아버지와 살지 않는 티 감추려고 이웃에게 재떨이와 남자 모자와 옷가지도 빌려 벽에 걸어놓고 어머니에게 애원했다. 아버지는 사업상 집에 잘 안 계시지만 절대 별거 사실은 말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나 매번 어김없이 선생님께서는 그날 이후면 "경혜 꼭 열심히 공부해라! 홀로 널 키우시는 어머님에게 보답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에 대한 원망으로 심한 열병을 앓았다. 어머니는 여행사에서 일본관광안내원으로 일하셔서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 모르고 살았지만
가난해도 식구들이 모여 사는 집은 절대적인 내 소원이었다.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던 아이. 광주리장사라도 우리 집에 와주면 좋아하고 떠나면 쓸쓸해하던 아이. 해마다 방학 때면 웃으며 떠나고 올 때는 눈물범벅이 되어 올라오던 나는 이별에 익숙하련만... 역전 한 귀퉁이를 붙들고 통곡하던 어린 계집아이가 오늘도 내 내면을 휘돌고 있다. 아버님은 미안하다 하며 갖은 물질로 채우려 하셨지만,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아셨다. 꼭 중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그리고 나 같이 살자고
손가락 걸어 약속하고 아버님의 소중한 수첩에 적어 드렸다. 오매불망 그리는 5라는 숫자만을 선호하며 신봉했다. 사업상 상경하셨다가 나만 만나고 가시는 아버님을 보내고 깜깜한 밤에 올라간 노량진 교회 종 아래서 한없이 울던 때도 있었다. 모든 것이 꿈으로 끝나는 것을 깨닫던 날은 끔찍했다. 다만, 나 혼자서 만이 겪는 고통이었다. 주위의 나를 아는 어른들은 애가 아니라 어른 애라 하였다. 징그우리만큼 애 답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즐기지 않고
만화방에서 좀 논다는 오빠들이 "쟤는 아버지도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산다!"라고 놀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방과 후 책가방으로 하나 가득 만화책 빌려 집으로 와서 종일토록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사실 나는 공부도 잘했고 선생님께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어도
내 유일한 친구였던 경임과 명은을 만난다면 고마움을 한껏 표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거슬러가 쓰라린 기억의 눈물을 줄줄 흘릴 것이다. 살다 보면 꿈에서 가끔 나타나는 어린 계집아이의 수심이 현실처럼 마음에 알알이 박힌다. 한쪽에서 웅크리고 있는 가여운 아이가 나를 서럽게 하지만 이젠 묻어두는 기억이고 뚜렷한 어른이다. 나는!
(P.S: 훗날 앞날의 위기감을 느끼고 새사람으로 변신하였다. 6대 종합예술의 하나인 연극을 하였다. 이야기꾼이 되어 여고시절 때에는 쉬는 시간에도 여기저기서 불러대던 소리는 "경혜야! 재미난 얘기마저 해줘~"
황사비 내리는 날에 눈물이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