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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바라보다.
정 성 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저께 나의 스마트폰 벨 소리로 지정해 둔 ‘사운드 오브 싸일런스(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발신 번호를 보니 동네 이장의 알림 통화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들었다. “어제 강성마을 J * * 씨가 별세하였습니다. 내일이 발인 날이니 문상하실 분은 오늘 중으로 T 장례식장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듣는 귀가 의심스러웠다. 놀라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듣기를 몇 번을 들어 봐도 J 씨가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J 씨는 내가 사는 한동네의 같은 또래로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 온 순진한 농부이다. 이 지역 출신 나의 친구인 고교 동기생과 초등학교 동기생이라 나와는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다.
사나흘 전에 걷기 운동을 하며 J 씨의 복숭아밭을 지나칠 때도 건장하게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더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J 씨에게 인사를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었다. 최신 품종 복숭아나무 가지를 몇 개 얻어 자기 복숭아나무 가지에 접목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품질 좋은 복숭아를 수확할 것이라는 한껏 부푼 기대감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러던 그가 죽었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동네의 다른 친구에게 확인 전화를 해 보니 갑자기 심장마비로 운명했다고 한다.
살아 있다는 게 너무나 허망스럽다 생각을 하며 시내 볼일을 보고 아내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향에 불을 붙여 예를 올리고 동갑내기로 부부 사이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J 씨의 아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가뭄으로 자두밭에 물주기가 한창 진행 중이라 자두밭을 둘러보고 집에 돌아왔더니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응급차를 황급히 불러 병원으로 가다가 운명했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만해도 사인이 심장마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장례식장 식당에서 망자네와 가깝게 지내는 동네 아주머니가 뜻밖의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J 씨의 사망원인이 심장마비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한다.
아내와 다투고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J 씨는 삶을 비관하여 농약을 먹었다고 한다. 자두밭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갔으나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 사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아내와 다툰 내용까지 소상하게 이야기해 준다. J 씨는 평소 좌골 신경통으로 고생하다가 고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서울 모 병원에서 요통 내시경 시술을 몇 년 전에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술을 했어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전처럼 일을 많이 할 수도 없고 고통으로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 지인이 자기 친척 조카뻘 되는 이가 구미 모 종합병원에 의사로 근무하게 되었으니 그곳 신경외과 진료를 한번 받아 보라는 권고에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진료 결과 수술 경비가 사백만 원이 드는 척추 디스크 수술을 해야만 통증이 멈출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미루어 짐작해 보면 큰돈이 드는 척추 수술을 두고 아내와 심한 말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말다툼 후 아내는 자두밭 급수 핑계로 현장을 벗어나고 혼자 남은 J 씨는 자존감을 흔드는 말에 도화선이 된 생각들, 즉 내가 돈 사백만 원의 값어치만도 못 되는 하찮은 존재라는 그런 비참한 생각들 그리고 육체적 고통으로 점철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절망감, 화를 돋운 상대에 대한 잘못된 복수심, 이런 생각들이 부추기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집에 있던 농약을 마셨던 것 같다.
J 씨 죽음의 내막을 상세히 들어보고 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느 집에나 흔히 있을 법한 부부간의 말다툼이 아니었던가? 부부 금실이 좋았던 J 씨 아내는 앞으로 얼마나 죄책감으로 시달릴 것인가? 생사를 갈랐던 그의 마음속 판단시간은 10분도 아니요 10초도 아니다. 평소 죽으려고 착착 준비해온 사람이 아니라 단 몇 초 사이로 삶과 죽음이 갈렸다는 걸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평소 성질이 대단히 급했던 J 씨라고 해도 단 몇 초만이라도 자기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과연 농약병에 손이 갔을까? 한정된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J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마음 상태는 ‘분노’ 즉 ‘화’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마음 상태를 겪으면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마음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그 농도가 더욱더 짙어진다고 한다. 특히 ‘화’는 생각을 먹이로 삼아 무한히 자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무한히 팽창해진 심리상태는 흥분을 동반한 고립에 빠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행동을 저지른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판단이다. 이럴 순간에 다수의 사람은 참아야 한다고 조언할 것이고 또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참으면 당장은 자기 생명을 구하고 과도한 폭력으로 발생하는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는 맺어지지 않겠으나 엄청난 스트레스와 비굴함으로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처는 본인의 몸과 마음에 쌓여 일종의 다른 질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럴 순간에 어떻게 해야만 나의 외부세계와 내부세계 모두가 평정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슬기롭게 넘어갈 수가 있을까? 중국 불교의 2조 ‘혜가’대사와 스승인 ‘달마대사’의 대화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 ‘혜가’는 스승인 ‘달마대사’를 찾아가 마음이 매우 괴로우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평정하게 할 수 있을지 가르쳐 달라고 하니 ‘달마대사’는 그 불편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에 ‘혜가’는 괴로운 자기 마음의 실체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괴롭던 그 마음이 바라보는 순간 사라지고 본래의 평정한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물론 도를 깊이 닦은 고승들의 방법이라 우리 일반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크게 세 갈래로 퍼져 전파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티벳 불교가 되고 또 하나는 북쪽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된 북방불교이고 나머지 하나는 실론 섬을 거쳐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로 전파된 남방 불교라고 한다. 북방불교는 중국을 거치면서 이미 그곳에 존재해 온 도교 등 토속 신앙으로 다소 왜곡되고 다시 우리나라에서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신앙과 전통에 영향을 받아 많은 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소 멀어진 종교가 되었다고 몇몇 불교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불교는 부처를 믿고 복을 기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가 제시한 방법으로 수행하여 괴로움을 없애 현세에서 행복해지고 궁극에 이르러서는 해탈하여 나고 태어남이 없는 영원의 행복을 얻는 종교라고 한다.
제자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물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하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은 산속에 궁궐 같은 절간을 짓고 금박을 입힌 거대한 부처상 만들고 부처를 공경하여 믿고 따르면 현세와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부처님은 부처인 자기를 믿지 말고 각자의 자신을 등불 삼아 수행하여 고통을 없애고 행복해지는데 그 행복해지는 방법을 굳게 믿고 행하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방법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방법은 불교 경전 중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는 반야심경의 글귀 중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 풀이하면“오온(몸과 마음)을 비추어 보아 텅 비어 있음을 알게 되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몸과 마음을 세세히 바라보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미스러운 것들이 사라져 텅 비게 되고 또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에 이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초기 불교가 전파될 당시 남방인 인도차이나반도의 여러 나라 즉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에서는 중국만큼 그렇게 정신세계가 확고하게 발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히 원래의 불교 가르침과 방법이 토착 정신세계에 왜곡되지 않고 잘 보존된 상태로 전파되고 계승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남방 불교에서 수행하는 방법인 자기 마음의 관찰로 고통을 없애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위빠사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 서양 젊은이들에게 크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서양 불교의 뿌리가 바로 이 남방 불교이다. 서양 불교는 신과 내세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의 정신수련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명상하여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는 일종의 사회 수련 운동이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 온몸을 찌릿하게 하는 육체적인 쾌락이 진정한 행복인가? 아니면 물질을 얻고 자기 욕망을 채우므로 일어나는 정신적인 만족이 진정한 행복인가? 아니면 지극한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오락이나 게임에서 체험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진정한 행복인가? 이 모두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통의 씨앗이라고 부처님은 진단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그 무엇에도 꺼들리지 않고 걸림이 없는 자유로움에서 오는 고요한 평정심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런 평정심은 영원히 지속 가능한가? 육체적인 쾌락, 만족감, 즐거움은 그 생성 근원이 나의 외부에 있어 내가 어찌하지 못한다. 하지만 고요한 평정심의 근원은 나의 내부에 있다.
누군가가 자기를 ‘화’나게 할 때 부처님은 자기가 스스로 자신에게 쏘아대는 2차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셨다. 1차 화살은 자기를 ‘화’나게 만드는 외부에서 날라 온 화살이고 2차 화살은 1차 화살을 맞고 자기가 자신에게 쏘아대는 생각, 감정, 느낌의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2차 화살을 맞지 않을 것인가? 1차 화살을 맞고 올라오는 마음 상태를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2차 화살은 발사되지 않고 그냥 물이 흐르듯 지나가 버리고 마음은 평정의 상태를 되찾는다고 한다. 설사 발사되었더라도 정곡을 맞추어 일어난 ‘화’가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으로 유발되는 많은 생각들로 ‘화’를 팽창시키지 않고 그저 떨어져 객관적으로 ‘화’ 난 자기 마음을 관찰할 수가 있다면 ‘화’로 인한 타인과의 불미스러운 사고를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의 내부세계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당장 눈앞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화’에 휩쓸리지 않고 어떻게‘화’를 바라볼 엄두가 나겠는가? 하지만 ‘화’가 우리에게 일어날 때 익숙해진 반응 메커니즘, 즉 흥분하여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저지르고 싶은 반응 말고도 떨어져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우리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앎이 쉽지 않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평소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바라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고 일상 실제 생활에서도 부정적인 생각, 느낌, 감정 등이 마음에 올라오는 것을 포착하여 관찰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 보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기보다 내 마음의 관찰자가 되는 것이 바로 법이라고 생각한다.
동네 친구 J 씨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나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서 일말의 죄책감마저 들게 한다. 평소 J 씨가 일하고 있는 밭을 지나치다가 새참으로 내온 막걸리를 몇 번 얻어 마신 적도 있고 친구의 친구라 술 한 번 같이 마시자는 말만 했지 함께 진정성 있는 술자리를 같이해 본 적이 없다. 술 한 번 먹자고 건성으로 말만 하지 말고 평소 자주 동네 ‘춘자네’막걸리집에라도 함께 앉아 마음 터놓고 술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혹시 술을 마시면서 평소 성질 급한 친구에게 ‘화’날 땐 ‘마음 바라보기’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줬더라면 그래도 과연 농약병에 손이 갔을까?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인간이 나고 죽는 엄한 인과응보의 관계를 누가 짐작이야 감히 할 수 있겠냐 만은 동네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나의 노년 생활에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사건 임에는 분명하다.
친구여, 저세상에서라도 마음을 부지런히 바라보도록 하시게나!
첫댓글 참, 삶 한갓 헛된 아바타와 같은 내 행동 어렵다. 그것 삶.
감사! 우째 만나기가 더 어렵노? 당구 죄다 잊어먹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