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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식과 유전자의 기억작용
玄 南 奎(제주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Ⅰ.머리말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다. 그 중에서 몸은 보고 만질 수 있으며 자나 깨나 항상 지니고 다니므로 그 존재성을 의심해 본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도대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것이 나오는 장소를 찾아내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하였던 사람들은 결코 적지 많았다.
이 글에서는 대승불교의 유식학에서 체계화된 제8식(아뢰야식, 종자식)에 관한 내용들 중에서 기억과 관련 된 내용들을 뽑아내고, 신경생물과학 분야에서 논의되는 학습과 기억에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여 두 분야에서 공통되는 사항을 비교 검토하여 봄으로써 신경과학이나 양자역학 및 상대성 이론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도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하기에 앞서서 우선 동역학에서 제기되는 인과성 문제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보통 물리학은 정밀과학으로서 그 자체 내에 어떤 문제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완벽한 학문으로 비전공자들에게는 생각되어 질 수도 있으나, 인과성 문제를 검토하다 보면 물리학도 그 철학적인 개념의 바탕이 완벽하지 않은 학문 체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리철학 분야에서는 인과성 문제가 이미 제기되었으므로 이것에 관한 해법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적절한 답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일부의 서양 철학자들이 논의하였던 좀 색다른 인과성에 관한 논의들을 검토하고 나서, 물리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타키온 물리학과 불교의 중심철학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연기사상에서의 연기공식의 의미를 상기해 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에 제8식과 유전자의 기억작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나서 이를 비교 검토하여 종자식과 시냅스 및 활동전위와의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을 수 있음을 제시하려고 한다. 끝으로 심신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사례들을 열거하고 나서, 제9식(비정식)을 물질과 마음의 식으로 보고 있는 관점도 주목하고자 한다. 하지만 티벹 불교에서 제9식을 비정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경전인 ‘본유경’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할 예정이다. 우리가 만약 비정식을 하나의 학설로 받아드릴 수 있다면,
양자역학의 파동함수와 상대성 이론에서 논의되는 타키온에 대하여 지금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Ⅱ. 인과성문제와 여러 해결 방안들
1. 동역학에서의 인과성문제
물리학에서 제기되는 인과성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논문으로 발표되었는데,[1]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은 물론 고전전자기학이나 우주론 및 양자장론 등에서도 인과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따라서 과학의 기초 학문인 물리학에서 이러한 철학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관한 해결책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2. 다방면의 인과성 문제 해결 방안
1) 철학적 논의
모든 대상이 서로 원인 또는 결과가 될 수 있으므로 실제로 인과관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8개의 일반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면서,[3]
인과성에 관한 탁월한 업적을 냈던 흄은 어떤 특정의 원인이 특정의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인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부인하였다. 이것은 과학혁명이 완성된 다음에 나온 논의여서 그 당시 이것이 학계에 미친 파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칸트는 철학사에 길이 남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 또한 작용하는 원인의 대부분이 그것의 결과와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4]
이것에 대해서는 동시인과의 개념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5]
인과를 논함에 있어서 동시인과를 인과관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원인 사건과 결과 사건이 동시에 발생함을 뜻하기 때문에 어느 사건이 원인이 되고 다른 사건은 결과로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를 인과관계로 볼 수 있는가라는 개념상의 혼돈을 초래하게 된다. 어떻든 라이헨바흐는 원인과 결과를 시순에 의하여 구분하는 것이 불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인과관계는 “만일 ~라면, ~이다”라는 관계로 표현되므로, 인과관계는 같은 유형의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시험해 봄으로써 증명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원인과 결과를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것이다. 원인은 관련된 사건 중 먼저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못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 질서를 인과 질서에 의해 정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 질서와는 무관하게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기준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6]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과관계는 예외 없는 반복을 일컬을 뿐이며,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었다는 생각조차도 불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인과 법칙과 단순한 우연의 일치를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반복밖에 없으므로, 인과관계의 의미는 예외 없는 반복을 주장하는 진술로 표현된다. 인과관계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원인과 결과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즉 결과는 원인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의 기원은 의인화된 생각이므로 불필요한 생각이다. 인과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만일 ~라면 ~이다”라는 것뿐이다.[7]
또한 원인과 결과를 대칭 관계로서 간주하느냐, 반대칭 관계로서 간주하느냐에 의하여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발생한다거나 시간적 선후 성을 지니고서 발생한다거나 할 수 있다. 만일 원인과 결과를 상호조건적인 대칭관계로서, 혹은 함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설명한다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으므로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성에 관한 논의 중에서, 인과성을 반대칭 관계로서 간주하던 것이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통념이었던 것도, 인과성이 그 본성상 그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라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인과성을 논의할 경우에 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인과성을 반대칭 관계로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실용적 정당화의 설명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다. 물론 테일러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이러한 기왕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상호 조건설을 제시하게 된 것은, ‘인과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이제까지의 견해와는 다른 접근 방식도 있을 수 있음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하여 원인의 규정과 같은 인과성에 관한 논의는 주관성의 개재가 불가피하며, 일반적으로 해당 시기에 과학자 공동체에서의 공공성에서 얻어진 상호 주관성 안에서 성립된다고 하겠다.
[8]그러나 이 경우에도 인과성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대칭 관계이거나 또는 반대칭 관계에 의한 분석만을 주장하고 있고 그 둘을 전부 고려해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C. G. Jung도 심성현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비인과적 동시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논하였음을 주목할 만하다.
세상에는 우연이라고 할 만한 일이 제법 많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단순한 통계적 우연의 범주를 넘어서서 어떤 다른 규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규칙적이며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현상 속에 인과적 규칙성과는 다른, 혹은 이를 보충하는 또 하나의 법칙성이 개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한 것이 융의 “비인과적(非因果的) 관련으로서의 동시성(同時性)”이라는 저술이고 그의 동시성론은 지금까지의 인과율에 의한 자연법칙의 절대적인 유효성을 근본으로부터 흔들어 놓음으로써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변화시킨 현대물리학적 연구 결과로 인하여 더욱 그 이론적 토대를 확립하게 되었다.[9]
2) 타키온
요사이 물리학에서는 물체나 물질들 간에 서로 작용하는 현상을 기술함에 있어서 중력·전자기력·핵력이라는 용어를 쓰기 보다는 중력적 상호작용·전자기적 상호작용·강상호작용 이라고 표현한다. 어떤 물체에 힘이 가해졌을 때에 그 운동의 모습이 그 전과 달라지는 것과 관련하여 원인과 결과를 구분지어 논의해도 거시 세계에서는 모순점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미시 물리학에서는 곤란한 현상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예컨대 두 개의 동등한 소립자가 상호작용 할 때 서로가 아주 비슷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둘 중의 어느 한 입자가 원인 사건을 제공하여 다른 입자의 운동을 변화시켰다는 언급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힘의 개념이 불필요 하게 됨은 물론 진정한 의미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탄성 충돌과 같은 현상의 설명을 위해서도, 타키온 장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당구공과 같은 두 입자가 탄성충돌 하는 경우이거나, 전자기학에서 논의되는 쿨룽 법칙과 두 개의 하전입자가 서로를 향하여 접근하는 아주 간단한 경우, 원격작용설, 양자역학에서의 ‘EPR 역설’, 가상 광자들의 교환으로 잘 설명되는 QED에서의 black box 내부의 현상들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동시 인과를 도입한다면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10]
3) 연기공식
서양철학의 전통 내에서 물리철학에서 제기되는 인과성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철학에서 그 해법을 찾기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많은 과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학계의 시선은 따갑다. 그런데 현대의 서양 학문의 원천을 그리스에 두고 있으나 인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되는 것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인도와 고대 그리스의의 철학 전통은 서로 무관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철학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현대 문명을 이끌고 있는 서유럽 및 남북미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조상들이 먼 옛날 흑해와 발트해 사이의 넓은 영역에서 함께 살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철학의 전통 내에서 그 해법을 모색한다고 해서 서양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수학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 빚을 많이 지고 있는데, 그 책은 5가지의 공리에 기초를 두고 써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학은 연기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며, ‘연기공식’에 그 핵심이 들어 있다. 그런데 연기공식에는 ‘계기인과’뿐만 아니라 ‘동시인과’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붓다와 동시대인들의 인과론이 다양한 극단적인 이론[11]이었는데 반하여, 그는 자신의 인과성의 이론을 연기를 통한 중도적인 것이라고 설하였는데, 이 연기설은 원시불교의 숱한 교설 중 하나의 대표적인 교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달라졌는데, 초기의 아비달마 교학의 연기관에서는 연기란 다양한 법수(法數)들의 생성과 소멸을 제어하는 인과법칙이라고 보았으나, 중관파에서는 그런 견해는 교리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연기란 순간적 사건 계열에 대한 원리가 아니라 사물의 근본적인 상호 의존관계, 즉 요소인 법의 비실재성(법공[法空])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2]
초기 경전에 등장하는 연기(緣起)란 말의 빨리(Pali)어 어원은 paticcasamuppāda 이다. 이 paticca-sam-upāda 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복합어는 전(前)불교적인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불교 고유의 용어이다. Paticca 는 ‘연(緣)해서’란 의미이며, samupāda 는 ‘일어남(起)’, ‘함께 일어남(集起)’ 또는 ‘발생’, ‘생성’, ‘생기’의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연기란 ‘조건적 발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13] 그리고 초기 경전에 등장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연기에 관한 정의는 빨리어 문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재성은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a 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14]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15]
여기서 ① Imasmiṃ sati idaṃ hoti 는 조건에의 의존성, 존재상의 계기, 인과의 항상적 연접을 경험적으로 설명해주며, ② imassa uppādā idaṃ uppajjati 는 조건 진술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수동적 법칙성을 생산성의 원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추상적인 연기 법칙에 대한 구체적이고 존재론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③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 은 반사실적 조건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데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적 의존 관계를 명확히 해주며, ④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는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두 사건간의 생성적 의존 관계를 나타냄으로써 그 사실적 조건문을 강조한다.[16]
연기란 말 중에 ‘sam’이 무시간적 상의성(相依性)을 내포하고 ‘uppāda’가 시간적 인과성을 내포하고 있기[17]
때문에 연기에는 ‘연이어 일어남(繼起)’과 ‘함께 일어남(俱起)’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순서대로 일어나는 두 법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인데[18],
연기의 발생 원리에는 계기성과 구기성의 양면이 갖추어져 있어서 인과론적인 종적 관계로의 해석은 계기성에 착안한 것이고 인연론 중심의 논리 관계로의 해석은 구기성에 착안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19]
물론 이러한 연기공식 속에 계기인과뿐만 아니라 동시인과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인과성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교철학자들은 분명히 서양철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철학을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물질과 정신은 모두 그 실체가 없다(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고 표현된다)는 것이 그 차이점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야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등의 현대 과학이 수립되고 나서,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그것에 따른 자연관을 동양철학의 자연관과 비교 연구한 결과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것은 실체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철학적인 논의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서양인들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존재론적 물리주의도 결국은 유물론을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 그런데 유물론은 물질을 실체라고 본다. 특수 상대론에 의하여 물질은 에너지라고 볼 수 있으며, 에너지보존법칙은 물리학 이론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에너지는 항상 없어지지 않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대의 우주론에서는 대부분의 우주가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생겨났다고 보고 있으므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생각하면 우주 전체의 에너지는 과거나 현재는 물론 미래에 걸쳐서 영(0)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 자체도 실체가 있다고 말하기가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물리주의라는 개념조차도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리주의적인 토대 위에서 논의되는 심리철학의 심적 인과관계에 있어서 심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을 초래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물리적 사건이 심적 사건을 초래하는 경우를 어떻게 인과적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초기 불교의 ‘연기 공식’에서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논의뿐만 아니라 ‘동시 인과’에 관한 내용도 함께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연기 공식’을 보다 구체화한, 현상계의 모든 존재의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연기설’에서는 존재의 개념 대신에 ‘법’의 개념을, ‘존재의 세계’ 대신에 ‘법계’라는 개념을 사용하므로 써 심신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가가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육근(六根) 육경(六境)과 같은 주객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설법하였다는 것과, 신경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마음의 본질을 알기 위한 인지과학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서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인지과학은 이제야 마음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지만 불교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이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석가가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어려운 오온은 물론 ‘연기설’에 이르기까지 45년을 계속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하여 서로 다른 방법으로 논했던 과정에서는 ‘존재’라는 개념 대신에 ‘법계’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0]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의 하나로 볼 수 있는 유식학의 아뢰야식을 설명하는 종자의 의미에도 동시인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종자가 비록 성숙하여 현행되지만 현행의 시간 내에서 순간순간마다 종자의 성능은 결코 소실되지 않으며, 항상 그것과 서로 부합하여 현행(現行)하므로 모든 현행은 모든 종자의 공능(功能)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복숭아나무에 비유하면, 복숭아나무의 가지, 꽃, 열매와 최초 한 톨의 핵(씨앗)은 긴밀한 관계가 있어서, 핵이 비록 변멸(變滅)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긴 잠력(潛力)은 일체의 가지, 잎, 꽃, 열매와 더불어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21]
지금까지 이 절에서는 보아왔듯이 흄에 의해서 특정의 원인이 특정의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인과의 ‘필연적 연관성’이 부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칸트나 융에 의해서도 동시성이 논의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불교철학의 중심 개념을 이루고 있는 ‘연기공식’ 속에는 동시인과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음도 보았으므로 불교철학 내에서는 도처에 동시인과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심신문제에 대한 불교의 심리 철학적 논의는 서양의 그것보다 적지 아니하게 다를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예측 가능하다. 그런데 서양의 심리철학은 신경과학적인 업적을 논의에 포함시켜 발전하고 있는 과정에 있음에 비하여, 불교의 심리철학은 지금부터 1500여 년 전의 인도의 해부학이나 의학 등의 과학을 토대로 하여 과거에 이미 체계화 되었던 것이므로 현재의 학문과는 많은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망원경의 도움으로 본 우주와 같은 거시 세계와 입자가속기나 현미경의 도움으로 본 원자나 소립자와 같은 미시 세계에 대한 세계상이, 과거 불교 사상가들을 포함한 동양의 현인들이 마음의 눈으로 보았던 자연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카프라 등과 같이 과학과 철학을 겸비한 학자들이 일찍이 지적하였다.
그러나 첨단 학문 체계들인 신경과학이나 우주론 등에서는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이 없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최첨단에 서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양한 논의를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이 다소 무리인 것이 사실이나, 다음 절에서는 제8식과 유전자의 기억작용에 대하여 비교 논의하고자 한다.
Ⅲ. 제8식과 유전자의 기억작용
1. 제8식의 기억작용
앞에서 인과성 문제가 물리학의 많은 부분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 해법은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고, 언제 그 답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말 할 수 없다. 몸은 물질로 이루어 졌고 마음은 물질과 같이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심신문제는 풀기 어려운 인과성 문제에 해당한다.
현대 과학적인 연구 업적을 토대로 하여 이것을 해석해 본다면, 몸은 결국 소립자들의 모임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데 그 소립자들은 장으로 나타내어진다. 그러나 장은 국소적이 아니고 퍼짐성이 있어서 동시에 넓은 공간에 분포하는 성질을 가지므로 국소적인 공간 성질을 가질 것으로 생각되는 소립자의 모습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 특히 두뇌의 어느 특정한 곳에 전기장을 내는 하전입자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내는 어떤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마르면 물을 찾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며, 칭찬 들으면 기뻐하고, 비난을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과정에는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급속하게 발전하는 신경과학의 업적을 바탕으로 한 심리철학적 논의에서도 심신 문제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과거와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지구상에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에 종교의 영향이 모든 방면에서 너무 컸기 때문에 마음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 결과가 동양의 그것보다도 질적이나 양적으로 적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심신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철학적인 바탕에서 논의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동양철학적인 문헌들을 토대로 하여 연구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동양철학에 관련한 문헌 중에서도 마음에 관한 것은 불교철학의 유식학에 관련된 자료들이 다른 어떤 문헌보다 더 적합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논리뿐만 아니라 수행에 의한 체험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의식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유식학 중에서도 기억에 관련된 논의부터 먼저 조명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 어떤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두뇌에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에는 지구상에서 동물들 중에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고도의 문명을 건설하여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도 인간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때의 기억은 두뇌에 저장된 어떤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넓은 의미로는 온갖 도서관이나 문서 보관소뿐만 아니라 컴퓨터 등에 저장된 모든 자료들을 말한다. 인간은 이러한 자료들을 저장해 왔고 또 필요로 할 때는 항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질에 관한 수많은 논의는 석가 자신이 그 당시의 몸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상세하게 설명했던 경전들에 뿌리를 둔다.[22]
그러나 석가가 멸한 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학문이 발전하였는데, 너무 논리적으로 불교 이론을 체계화 시키다보니 나무만 보고 숲은 못보는 폐단과 같은 현상이 생겼다고 보여 진다. 즉, 설일체유부 등에서는 석가가 제창한 무아설에 위배되는 논설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중관학이 체계화됨으로써 이러한 잘못을 어느 정도 바로잡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유식학이 발전되었다.
대승불교가 흥기하기 시작하면서 심식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유식사상이 발달하였다. 특히 해심밀경에서는 7식, 8식이 최초로 설해지고 있다. 미륵이 그 경을 인용하여 심⋅의⋅식(心⋅意⋅識)[23]
을 각각 아뢰야식[24]⋅마나식⋅육식이라 하고 있다.”[25]
유식에서는 제6식에도 의근, 즉 제6식이 생기는 장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26]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신경생리학의 입장에서 그 소재를 생각해 본다면 고피질을 포함한 대뇌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27]
유식학이 체계화 될 당시에는 감각기억이나 단기기억 혹은 장기기억이라는 질이 다른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 방법도 없었고 모든 것을 일괄해서 기억해 그것을 아뢰야식이나 종자[28]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바,[29]
유식에서는 기억 기능을 아뢰야식, 그것을 구성하는 기억조직의 단위를 종자라고 부르고 있다.[30]
그리고 유식에서는 무시(無始) 이래 우리들은 감각적인 혹은 심리적인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찰나 찰나에 종자에서 기억이 인출되고 연을 갖고 모이고 뇌 속에 형상을 만들고 찰나 후에 사라져 간다고 한다.[31]
그리고 유식에서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들어가 있는 기능적인 것으로서 규정되고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종자는 찰나에 생멸 변화하고 그 변화에 의해 결과를 일으킨다.
(2) 데이터가 정보로서 종자에서 나오는 경우, 정보와 종자는 동시에 더욱이 벗어나지 않고 존재한다 (과구유,果俱有).
(3) 종자는 찰나 생멸하나 식이 움직일 때 반드시 같은 정보를 주도록 끊어짐 없이 한결같이 일류상 속(一類相續)하여 같은 정보를 준다(항수전, 恒隨轉)
(4) 종자에 기억되어 있는 데이터의 성질은 그것에서 나오는 정보의 성질을 결정한다(성결정, 性決定).
(5) 하나의 종자는 항상 단번에 과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원인과 인연을 가졌을 때 비로소 현 상이 된다(대중연, 待衆緣)
(6) 색법의 종자는 색법의 정보를 나타내듯이 종자는 결코 다른 정보의 종자를 나타내지 않는다(인자 과, 引自果)
이 정의에서 종자는 데이터를 기억한 메모리 혹은 기억되어 있는 데이터의 범위에서 정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32] 이러한 추상적인 종자식의 개념에 대하여 추론하기 위해서는 유전자란 용어를 사용해서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보다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들 종자들은 마치 염색체 안에 든 유전자 정보와도 같아서 일정한 조건을 만나면 그 구체적인 특성은 드러나지만 저장식의 상태에서는 감지하기 어렵다. 또한 무수한 세월 동안 저장식에 쌓아 온 과거 경험의 종자들은 너무나 많아서 그 양과 크기를 짐작할 수가 없다.”[33]
인간에게는 수십억 년의 오랜 세월 동안에 쌓아온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보통의 인간은 150년을 넘게 살 수가 없으므로, 그 이상의 경험을 이야기할 근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죽고 나서 영혼이 빠져 나갔다가 그대로 환생하여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고 그 영혼이 과거 생의 온갖 기억을 다 간직하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환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서양에서는 환생에 관해 조사해 놓은 문헌만도 매우 많다는 것을 안다. 컴퓨터에서 검색하여 그 목록만 뽑아서 정리해도 책 한권이 될 분량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과거의 삶의 경험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불충분 하다. 따라서 아뢰야식에 대한 이해도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과거의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흔적을 우리는 어디엔가 가지고 있다.
우리 몸은 수백 조 개의 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각 세포마다 1개씩의 세포핵이 있으며, 각각의 핵 속 에는 23쌍의 염색체가 있다. 각 쌍은 모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부모는 각자 부모에게서 염색체 중의 일부를 각각 물려받았을 터이고 그 부모는 또 그 부모에게서 이렇게 끝 없이 거슬러 올라 갈 수가 있다. 따라서 지놈(genome)이나 유전자에 대한 논의를 하면 이러한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만약 이뢰야식에도 이와 같은 생명의 이어짐과 관련된 개념이 있다면 이러한 과학적인 개념과 비교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이름에 <아타나식>이란 것이 있다. <아타나>란 사물을 지탱하며 유지한다는 뜻이다. <아뢰야식>에는 사람의 생존을 지탱하며 유지해 가는 면이 있으며, 그 한 면을 꺼내 이름 붙인 것이 <아타나식>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존을 지탱하며 유지해 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생명>이다.[34]
2. 유전자의 기억작용
우리는 적어도 태어나기 전의 모태에서의 활동을 기억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뱃 속에서 일정 기간 키워 주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나 단편적으로나마 유아 시절의 사건을 기억하는 사례가 많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최면 상태에서 전생의 기억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모두 사실로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부의 정자와 모의 난자가 수정되어 하나의 완성된 세포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세포 분열을 거듭 한 후에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고 그 이후에 모태 내에서 얼마 동안 생장한 후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정자나, 난자 또는 수정란에 마음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만약 없다 라고 대답 하면, 세포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에 어느 시기에서부터 마음이 생기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글을 쓰거나 읽는 중에도 마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항상 마음만 먹으면 떠올릴 수 있는 유사한 경험(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므로, 이렇게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논의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기억의 기원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의 뇌에 기억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어떤 물질이 필요하며, 그런 물질이 어떻게 반응하면 기억이 생겨나는가 하는 의미로서의 기원이다. 말하자면 기억의 ‘물질적 기원’의 탐구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최근의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발전에 의해 ‘기억유전자의 추구로 발전해 가고 있다. 심리학과 생리학은 기억이 뇌 안에 있다는 것, 즉 뇌세포들이 이루는 네트워크 안에 저장되어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이제 분자생물학은, 기억이 만들어지고 보존될 때 그 뇌세포 안에서 어느 유전자가 활동하여 기억을 어떻게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는가를 규명하려 하고 있다. 또 하나는, ‘기억’이라는 현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역사적 기원의 의미이다. 생물진화의 아득한 옛날부터 기억은 소중히 계승되어 오늘의 우리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따라서 이 역사적 기원의 문제는 기억의 ‘진화적 기원’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억의 진화적 기원은 사실 기억의 물질적 기원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기억의 물질적 기원을 유전자와 단백질에서 찾을 수 있다면, 기억의 진화적 기원은 그 유전자와 단백질이 탄생한 시점, 즉 세포가 만들어진 시점에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에 갖추어진 ‘기억한다’는 능력이 그런 생물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기억 메카니즘의 기본을 알기 위해서는 실험이 될 수 없는 인간을 떠나 연구에 알맞은 동물을 사용하는 것도 효과가 있다.[35]
그런데 살아있는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하여 뇌를 해부하고 그것 중의 어떤 한 조각을 떼어내서 실험을 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적절한 실험 동물을 가지고 기억에 관한 실험을 하는 것이 인간의 기억의 기전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학습과 기억에 관한 연구에 이용되는 많은 동물 들 중에서 우리나라의 해안에서도 많이 잡히는 군소(Aplysia)라는 실험동물을 이용한 학습과 기억에 관한 세포생물학적 연구결과가 좋은 예가 된다. 기억에는 단기기억(유지 시간이 초, 분, 시간)과 장기기억(유지 시간이 일, 주, 년)이 있는데 군소의 습관화와 민감화에 관한 실험으로부터 이들의 기전이 서로 다름이 알려졌다.
습관화[36]에 대한 기억은 단기형과 장기형이 있으며 10회에서 15회 군소의 등 쪽에 있는 대롱을 자극하는 훈련과정을 거치면 단기기억 현상을 볼 수 있는데, 몇 시간이 지나면 이런 기억은 소실되면서 아가미가 수축하는 정도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런 훈련과정을 더욱 반복하면 습관화가 장기기억화 되는데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나도 아가미는 원래처럼 수축하지 않는다. 이러한 습관화의 단기, 장기 기억 장소는 감각뉴런과 운동뉴런 사이의 연결부 즉 시냅스에 있음이 밝혀졌다. 습관화에 의하여 일어나는 시냅스의 변화는 아가미 수축 반사에 관련되는 신경계의 전기생리학적 측정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감각뉴런을 10회에서 15회 반복 자극을 주면 운동뉴런으로의 신경 전달이 급격히 감소하는 바 이는 이온 통로가 불활성화 되어 신경전달자의 분비가 줄어드는 것이 한 가지 이유로 알려져 있다.[37]
민감화[38]가 일어나는 해부학적 장소는 습관화의 경우처럼 감각뉴런과 운동뉴런 사이의 시냅스이며 습관화의 경우처럼 장기 및 단기 민감화가 존재한다. 군소 몸의 꼬리에 민감화 자극을 한 번 가하면 아가미 수축 반사의 민감화는 분에서 시간 단위 밖에 유지가 안되는(단기기억) 반면에 4회 이상 자극을 주면 며칠간 유지될 수 있다(장기기억). 이때 발생하는 시냅스에서의 변화를 보면 단기기억 및 장기기억 모두 신경전달자의 분비가 촉진되고 있으나 이를 유도하는 분자 메카니즘은 다르다고 알려졌다. 단기기억은 세포내에 이미 존재하는 단백질을 이용하여 형성되기 때문에 단백질 합성 또는 mRNA 합성 저해제를 인위적으로 처리하더라도 단기기억은 저해 받지 않는다. 반면에 이러한 처리를 하면 장기 기억은 유도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기 기억은 새로운 유전자 및 단백질의 발현[39]을 필요로 하고 있다. 또한 장기기억에서는 시냅스의 수가 증가하는 구조적 변화가 수반되고 있다.[40]
우리는 어떤 대도시 주위에 신도시가 형성되는 것을 본다. 그 신도시에 아파트, 학교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면 인구가 많아지고 구 도시와 연결하는 교통량도 훨씬 더 많아지게 된다. 하지만 기존의 도로는 보통 좁은 상태를 얼마 동안 지속하고 있어서 그 도로가 확장되기 전까지는 심한 교통 체증 현상을 빚게 된다. 이때 그 도시에서는 다른 사업 보다 도로 확장 사업을 우선 시행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천 억 개 정도의 신경세포들은 세포분열 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그것들 사이의 연락 수단이라고 볼 수 있는 축색이나 수상돌기는 얼마든지 더 만들어 지거나 두꺼워 질 수 있으며 세포들 사이의 연결 수단인 시냅스의 수도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경전달자가 분비되는 신경 말단은 varicosity라고 하는 부풀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5-HT를 반복처리하면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이 구조의 수가 증가한다. 이들 처리로 인하여 감각뉴런의 뉴런 성장 막 단백질 apCAMs(Aplysia cell adhesion molecules)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이 보고 되었다.
그 반면 운동뉴런에 있는 apCAMs는 영향이 없다. 5-HT 처리 후 1시간 이내에 apCAMs 가 약 50% 정도가 감소하고 있다. 이는 apCAMs 단백질의 구조상 세포질에 존재하는 부위에 있는 PEST라는 아미노산 배열이 존재하는데 단백질 분해 효소에 의한 apCAMs 파괴에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apCAMs이 감소함으로써 감각뉴런으로부터 나오는 축색다발(fascicles)이 흩어지면서 분리되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때 따로 분리되는 축색 가지는 운동뉴런에 새로운 시냅스를 만들기 위한 최초 단계로 믿어지고 있다.[41]
“결국 기억은 신경세포의 시냅스 연결에 구조와 기능적 변화를 주어, 기억과 관련된 어떤 자극이 오면 그 신경 연결이 효율적으로 가동 되도록 하여 그 내용이 계속되도록 한다. 결국 기억에 관련된 신경 생물학적 기전으로서는 1) 시냅스의 가소성에 의한 것과, 2) 서로 다른 시냅스를 구성하고 있는 뉴런들이 전기적으로 동조진동(synchronized oscillation) 함으로써 서로 간에 전기생리학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능력이 가소적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42]
그러나 이러한 기전이 밝혀 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 앞으로 연구해야할 분야가 산적해 있다. 그러면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내용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 이들 가운데에 세 가지만을 여기서 제시해 볼 필요가 있다.
1. 수많은 기억 정보가 과연 어디에 저장되며, 어떤 기전을 통해 뇌피질에서 기억을 형성하고
저장되고 인출되는가?[43]
2. 대뇌피질과 그의 하위피질(subcortex) 부분의 신경망이 기억에 관련되어 어떤 기능을
하는가?[44]
3. 해결되어야 할 또 다른 큰 의문은 무엇인가?[45]
오늘날의 신경과학은 수십 년 전의 수준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기억의 기전만 놓고 보더라도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연구해야 할 일들이 많은 분야이다. 더구나 마음의 본질을 논의할 단계에 이르려면 수십 억 년의 진화의 기억을 갖고 있는 지놈에 대한 모든 염기 서열을 밝히는 정도에서 벗어나서 그 이외의 기전이 다 밝혀져야만 할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적, 진화론적 경로를 검토해 보면, 마음은 늘 있어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영구불변인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단순한 마음(그것이 마음이었다면)을 가진 존재에서 진화했고, 그 단순한 마음을 가진 존재는 더 단순한 마음을 가진 존재에서 진화했다. 지금부터 40억 - 50억 년 전, 간단하건 복잡하건 마음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 최소한 이 지구 상에는 - 시절도 있었다.[46]
3. 종자식과 시냅스 및 활동전위
기억이란 주제 하에서 제8식인 아뢰야식과 종자식에 관한 개념과 신경과학에서의 개념이 서로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이제 모색해 볼 시점이다. 우선 종자에 대한 정의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1) 종자는 찰나에 생멸 변화하고 그 변화에 의해 결과를 일으킨다.(刹那滅義)
-> 여기에 대해서는 찰나의 의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찰나는 구사론에 의하면 1/75초 정도의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13ms 정도의 시간에 해당한다. 이 시간에 생멸하는 현상으로서는 신경 세포에서 활동전위가 발생하고 난 후 다시 휴지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생멸 개념이 유사
하다.
(2) 종자가 현행(現行)치 않을 때에는 각 종자의 자류(自類)가 전멸후생(前滅後生)한다.
-> 각 각의 신경세포는 휴지 상대에 있거나, 일정하게 발화(beating)하거나, 일정기간 발화와 휴지 하는 것은 반복(분출발화,bursting)하거나 한다. 외부의 자극이 없어도 스스로 그런 상태를 지속 한다.
종자가 인연이 익어서 외계에 현행할 때 종자가 현재의 과를 발생시켜야 한다.(果俱有義)
-> 신경세포 내의 전위가 일정치 이상에 도달하면 축삭에서 활동전위가 발생하여 그 끝 방향으로 전파되고 시냅스 영역에 이르면 소멸되는데 이런 전위가 시냅스의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를 유 발하고 이는 다음 세포의 활동 전위를 발생케 한다. 최종적으로는 운동 신경세포를 발화시키며 이 운동세포에 연결된 근육세포를 수축시킴으로써 행동이 있게 된다.
(3) 종자는 찰나 생멸하나 식이 움직일 때 반드시 같은 정보를 주도록 끊어짐 없이 한결같이 일류상 속(一類相續)하여 같은 정보를 준다(恒隨轉義).
-> 각 세포마다 휴지, 일정한 발화, 분출발화 등을 지속한다. 물론 어떤 세포는 이들이 모두 한 세 포에서 일어나거나 규칙적이지 않은 활동전위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활동전위의 진폭은 일정하게 유지한다.
(4) 능훈(能薰)의 현행이 선성(善性)이면 소훈(所薰)의 종자도 선성이다(性決定義).
-> 어떤 신경세포의 활동전위가 이웃 신경 세포로 전파될 때 그 신호의 모양은 비슷하게 전파된다.
(5) 하나의 종자는 항상 단번에 과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원인과 인연을 가졌을 때 비로소 현 상이 된다(待衆緣義)
- 신경세포 한 개당 1000개 정도의 시냅스가 있다고 한다면, 이 신경세포가 발화(firing)하기 위해 서 내부 전압을 일정 기준 이상으로 높이는 데에는 이들 시냅스들 각각이 신경 전달 물질을 배 출하는 효과를 합해야 하는데, 1000여 개의 시냅스 각각이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하는 개체와 그 배출 양에 대한 경우의 수는 매우 많을 것이다.
(6) 색(色)과 심(心)은 별인(別因) 별과(別果)이다(引自果義).
-> 아직 마음에 대해서 신경과학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이르다.
이와 같은 종자식의 정의와 신경과학적인 연구 결과와의 대비로부터 추론 할 수 있는 것은 이 종자의 일부 특성들은 활동전위와 시냅스의 성질과 대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논의의 범위를 좀 더 확장시킨다면, 종자식을 포함하는 아뢰야식의 개념 중의 일부분에는 지놈(genome; 장기기억과 관련된 시냅스 가소성과 관련지을 수 있는 유전자 발현을 총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과 대비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Ⅳ. 비정식(非情識)과 심신문제
1. 심신 문제
비정식에 관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 서양철학에서는 심신문제에 관해서 지금까지 어떤 유형의 논의가 있어 왔으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심리 문제에 관한 오늘날의 사유를 지배하는 존재론적 그림은 데카르트적 그림과 현저하게 다르다.
두 갈래로 쪼개진 세계라는 데카르트적 모델에서, 실재물과 그것의 특징적 속성이라는 층으로 되어 있는 세계, 즉 체계적으로 ‘단계’나 ‘질서’라는 층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모델로 대치되었다. 밑바닥 단계가 존재하고 그 단계에는 미시 물리학이 우리에게 말해 주듯이,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물질은 가장 기초적인 물리적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대상들은 어떤 기초적인 물리적 속성과 관계로 특징지어진다. 밑바닥 단계에서 상위의 단계로 올라가면, 우리는 하위의 단계에 속하는 실재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들을 발견하고, 더욱이 어떤 주어진 단계에 존재하는 실재물들은 그 단계와 구별되는 속성들의 집합에 의하여 특성 지어 진다고 생각한다. 더 상위의 단계에서 우리는 ‘생기적’ 속성을 갖는 세포와 유기체를 발견할 것이고, 더 올라가서는 의식과 지향성을 갖는 유기체를 발견할 것으로[47]보고 있는데, 밑바닥 단계의 소립자 층과 마음을 갖는 유기체 단계 사이에 여러 층이 존재한다고 봄으로써 보다 더 심신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지금까지 층으로 되어 있는 모델의 특징은 대답되지 않은 하나의 중요한 물음을 남겨놓는다: 어떻게 어느 주어진 단계에서 실재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속성이 인접한 단계의 실재물을 특징짓는 속성과 관계 맺을까?[48]
그런데, 철학에서 존재론적 문제는 실재하는 세계를 두 가지 이상의 세계들로 분리하고자 하는 데서 생기는데, 물질세계와 심적 세계를 구별하고자 하는 이원론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또 한편으로는 존재론적 문제는 실재 세계의 다원적 현상을 한 가지 차원으로 환원하여 보고자 하는 데서 생기는 바, 우리가 마음이라고 믿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심적 현상은 모두 물질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런 문제를 생기게 한다.[49] 과학자의 입장에서 이 두 경우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접근시켜 본다면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를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심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다루기 힘든 것으로 판명되었던 부분은 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이 접속되는 부분[50]에 대한 본성을 밝히는 문제로 볼 수 있다. 유물론자는 심적 사건이 물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관념론자는 물리적 사건이 심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또한 이원론자는 어떤 심적 사건도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어떤 물리적 사건도 심적인 것이 아니라고 올바르게 주장하나 접속 문제에 대해서는 틀리게 그 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51] 그러나, 완전히 심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물리적인 것도 아닌 둘 사이를 연결하는 형이상학적 시멘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52]
그런데 프리스트(Priest)는 심신 문제를 해결하는 많은 시도들은 두 개의 목록들 중의 한 쪽이 다른 쪽으로 환원하는 잘못된 형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53]고 지적했다. 사실상 각 술어들은 의미론적으로 반대편으로 환원이 불가능하므로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이 동시에 실제적이라는 그의 견해는 철학적 분석 이전의 것이고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것도 심적인 것일 수 없고, 그것이 심적이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것도 물리적인 것일 수 없다.[54]
우리는 여기에서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두 세계를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심신 문제를 잘 다루고 있는 기능주의[55]의 입장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기능주의는 정신이 물질인가/아닌가 하는 전통적인 심리철학의 논의와는 그 논의의 차원(dimension)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전통적 분류에 의해 일원론 또는 이원론으로 말해지기 어려운 새로운 이론이다.[56]
이렇게 기능주의는 존재자의 구성적 구조 중심의 전통적 사고에서 존재자가 수행하는 기능 중심의 사고로 개념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57] 그리고 칼 융도 정신이나 물질만이 아닌 하나의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였다.
칼 융의 이론에 있어서 동시성 이론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신과 신체, 정신과 물질 너머에 정신도 물질도 아닌 하나의 세계, 그리하여 정신과 물질을 매개하는 것의 존재와 작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순간이 이 삼차원 세계 너머에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곳에서 동시에 위대한 과학적 발견, 사상적 개명이 일어나게 하는 무의식의 원형적 배열의 가능성과 미시물리학이 이룩한 많은 발견이 분석심리학의 원형설과 비견된다는 최근의 주장은 물리학, 수학, 뇌 생리학과 분석심리학의 보다 긴밀한 협동과 상호 연구가 앞으로 활발해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58]
2. 물질과 마음의 식: 비정식(非情識)
앞 절에서 보았듯이 심리철학 내에서도 심신문제가 미해결의 과제로서 계속 논의 중에 있으며 그 주장하는 논리로 보아서는 이 분야에서 앞으로 더 연구를 계속한다 해도 쉽게 그 문제가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자료가 비교적 많은 불교의 심리철학에서 이런 문제와 관련 지울 수 있는 내용을 비교 검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철학에서의 ‘심신’은 원시불교에서는 ‘명신(命身)’으로 나타내고 있다.
원시 불교는 우선 12처설[59] 등을 통하여 서양 심신론에 대비한 원시 불교의 ‘명신(命身)’관의 입장을 마련한다. 곧 ‘인간에게서 비물질적 심적 존재는 설정되며 그 심적 존재는 육체를 이루는 물질과는 분리될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육체에 대하여 인으로서의 작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60]
또한 다음 경문은 명신에 대한 일원론적인 견해와 이원론적인 견해를 극단적인 견해로 규정하여 배척한 뒤 명신의 문제에 대한 중도 정관(正觀)이 12연기에 있음을 설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명이 곧 신이라는 견해가 있으면 범행주(梵行住)[61]가 없으며, 명이 곧 신과 다르다는 견해가 있어도 범행주는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양단을 떠나 중(中)으로 법을 설하니 곧 십이연기 이느니라.[62]
그런데 심신이 동일한 가 다른 가에 대하여서는 부처님이 침묵을 지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12연기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심리철학이라 할 수 있는 유식학[63]은 5-6 세기 무렵에 나란다에서 학문의 주류를 이루었다.[64] 그런데 유식학파가 세친 이후 두 경향[65]으로 나누어져서 내려왔는데, 그 한 가지가 진나에서 법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인식론적인 고찰을 주로 하는 것이다. 호법이 이 계통에 속한다.[66]유식학파 가운데서 또 다른 한 계통은 식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외계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식도 또한 없다고 주장하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을 일단 식 가운데에 수용한 뒤에 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해에 도달하지만 그것은 공이 마음 상태에 나타나서 드러난 것이다.[67] 밀교는 이 유식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밀교에서는 제8식에 다일심식(多一心識, 생멸문의 소의로 곧 차별적 현상을 아는 후득지(後得智)에 해당)과 일일심식(一一心識, 진여문의 소의로 평등일여의 진리를 깨닫는 근본지에 해당)을 더하여 10식을 세운다. 6식은 대소승에 공통적이며, 법상종에서는 6식에 마나식과 아뢰야식을 더하여 8식설을 세웠는데, 밀교에서는 석마하연론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10으로 구분하고[68] 제8식 까지는 유식론의 구분과 같으나 생명체와 물질에도 각각 한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다일심식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앞으로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 더구나 그것이 물질의 마음(비정식)이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면, 이 개념은 심신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일심식 (多一心識)이 물질의 마음 즉 제9식에 해당하고, 일일심식(一一心識)을 제10식 이라고 하고 있다. 물질(무정(無情) 또는 비정(非情))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점이며,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질은 물론 그 물질의 최종 입자도 물질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밀교의 분류에 따르면 제9식은 아마라식이나 진여식이 아니라 물질의 마음 또는 다일심식이며 제10식이 곧 진여식 또는 일일심식인 것이다. 밀교에서는 흙이나 돌에도 다 제9식이 있으며 이것은 제10식이 굴러서 변하여 이루어진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제9식 즉 물질의 마음이야말로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며 5온이 다 진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필요한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불교심리학과 현대물리학과의 접점이 되는 것이다.[69]
물론 이러한 ‘물질의 마음’과 유사한 논의를 한 스피노자 같은 서양 철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서양 철학은 실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철학이기 때문에 무실체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불교 철학과는 기본 개념부터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비정식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기전과 연관지어서 보다 더 기본적인 개념부터 검토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억도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세포 모두와 관련지울 수 있으며 생물학적인 생명의 전 역사를 간직한 기억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게놈과 출생 이후의 경험적 기억을 두뇌에서 간직하고 있는 정신적 기억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억을 생물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경세포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세포 생물에 있어서도 전부가 다 생물학적 기억을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기억은 우리의 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생물학적 기억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우리 몸 전체가 다 기억 작용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기억작용은 전신 세포가 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신적 기억 작용 다시 말하면 출생 이후에 의식 작용과 결부된 정신적 기억 작용만을 뇌세포가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정신적 기억 작용은 생물학적 기억 작용에 비하면 대단히 좁은 범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70]
이러한 문제를 더 논의하기 위해서는 유식학에서의 아뢰야식에 관한 논의와 분석심리학에서의 무의식에 관한 논의도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71]
3. 파동함수와 타키온에 대한 다른 해석
앞 절에서 심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정식을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그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는 없었다. 우선 비정식을 물질의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로 이국주가 제시한 소의경전(所依經典)인 본유경(本有經)[72]을 아직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정식을 도입할 필요성은 심리철학이나 신경과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요청되고 있다. 펜로즈의 경우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하고 있다. 그는 수학 철학 컴퓨터 물리학 및 신경과학에 두루 미치는 마음의 문제를 일찍이 언급하고 있다.[73]
인간의 뇌 속에서도 빅뱅 시 나타난 현상을 다루고 있는 우주론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사일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도전해 보고 싶은 의욕을 자극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거창한 우주론적인 논의 보다는 보다 더 기초적인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기본 개념에 대한 해석에 이러한 논의를 적용한다면 비정식에 관한 논의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다가 올 것으로 본다. 즉,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는 복소함수이다. 복소수는 실수부와 허수부가 있는데, 특히 허수부는 수학적인 대상일 뿐 관찰이나 측정과 관련되는 현실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현대 과학 기술은 복소함수를 적용시키지 않고서는 기본적인 연산도 실행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는 측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복소함수와 그것의 공액인 함수의 곱이 실수가 되므로 이것이 의미가 있다는 해석 만에 의지해서 실험도 하고 응용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동함수 자체이거나 파동함수와 또 다른 파동함수의 곱에 대해서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연산 결과가 실수가 되지 않고 복소수가 되어서 대상에 실제로 적용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가능하다. 타키온은 본질적으로 정지 질량이 순허수가 되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는 정지 질량을 측정할 수 없는 물질이 되어서 우선은 관심 밖에 둘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질량의 개념을 확장해서 복소수의 질량을 갖는 물체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이때 실수 질량은 우리가 아는 물질의 질량으로, 허수 질량은 타키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아직도 물질의 본질이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규명된 것이 아니므로 그것에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여유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리적인 요소를 순허수로 생각하는 복소수의 철학을 제시한 요시하루의 제안[74]은 무척 흥미롭다. 만약에 순허수부를 심리적인 요소에 대응시킬 수 있다면, 양자역학의 파동함수의 해석이나 타키온에 대한 해석이 우리 마음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12만 편 이상의 과학철학 분야의 논문이 나왔으면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는 ‘EPR 역설’ 문제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타키온을 검출하기 위해서 거대한 실험 장치를 구상할 필요 없이 생각하는 사람의 뇌 주위에 타키온 검출기를 설치하고 그것을 검출하려는 시도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Ⅴ. 맺는말
고전 역학이 완성되어 과학혁명을 마무리한 명예를 한꺼번에 가질 수 있었던 뉴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떤 특정의 원인이 특정의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인과의 ‘필연적 연관성’은 부인하였던 흄의 논의가 있었다. 이것은 후에 칸트가 새로운 철학을 완성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물리학 등의 과학이 처한 상황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20세기에 체계화된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등은 또 다른 과학혁명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러 학문 분야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 학문들의 배후에는 인과성 문제라는 물리철학 문제가 제기되어 수많은 과학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21세기에는 칸트와 같은 철학자가 나와서 새로운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를 요청하는 세기가 될 것으로 본다.
이 논문에서는 물리학에서 제기된 인과성 문제와 그 해법과 관련된 물리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논의를 먼저 검토해 보았다. 물론 인과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심신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심신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로 철학계에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논의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이것에 관한 직접적인 논의를 하지는 않고 의식과 관련이 있는 기억의 기전에 관해서 신경과학 및 분자생물학적인 관점과 불교철학의 제8식 중의 종자식과 관련지어서 대비해 보았다. 그 결과 제8식의 개념 중 일부에는 지놈과, 종자식의 개념 중 일부분에는 활동전위나 시냅스의 성질과 대비시킬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유식학의 논의를 제10식까지 확장시켰을 때, 제9식을 비정식으로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장차 심신 문제는 물론 양자역학 등의 물리학의 해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즉, 스피노자와는 다른, 심신 모두 실체가 없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제시 된 비정식을 토대로 하여 심신 문제를 논의 한다면, 오늘날의 심신문제에서 제기되는 것으로서 물질로 볼 수 없는 정신이 어떻게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우려를 처음부터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에서 논의되는 파동함수의 순 허수부에는 심리적인 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소립자의 정지질량을 복소수화 하였을 경우에는 그것의 순허수부를 허수의 정지질량을 갖는 성질이 있는 타키온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심신을 소유한 개체로 파악되듯이, 우리가 현재 소립자라고 하는 것도 보통입자와 타키온 결합체일 수가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이 물리학적으로는 복소수의 허수부에 대하여 심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줌으로써 측정 문제와 관련된 EPR 역설과 같은 문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음은 물론, 타키온에 관해서도 그 검출 장치를 설계하는 것에서부터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