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대 철종실록]
3.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
본디 세도 정치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 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서 주창된 것으로
사람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다. 즉,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정학을 복돋는 일 등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세도 정치가 성립되기 위한 운영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공정한 언론과 인재의 등용,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신임 내지는 위탁 등이었다. 이 때문에 각 계파 간에 시비와 분열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화나 당쟁으로까지 비화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군주의 신임과 위탁을
빙자한 변태적인 세도 정치를 낳았다. 이렇게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를 세도 정치라
했는데, 이 때의 세도는 사림 정치가 지향했던 본래의 '세도(세상 세, 길 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독재 정치였기 때문에 '세도(권세 세, 길 도)'라 표기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정조의 유탁을 받은 김조순이
영조의 계비이며 사도세자 죽임의 주역인 김귀주의 누이이기도 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하면서 그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데 성공한다. 1804년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본격적인 척족 세도를 시작하게 된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이지만 벽파 정권에 협조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당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난 짓을 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자 정순왕후 편에서 세도를 휘둘렀던
벽파 일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힘을 쓰게 된다.
여기에는 안동 김씨 이외에 시파의 대가인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나주
박씨 등이 제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풍양 조씨 만영의 딸이
간택되는데, 효명세자가 일찍 죽자 그 소생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의 나이로 등극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정권을
잡아 여전히 안동 김씨 일문의 독재가 지속된다. 한때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이 정권에
접근했으나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그대로
이어진다. 그 이후 순원왕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가 정국을 휘어잡게 된다.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가 어찌나 드셌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병국이 훈련대장을 맡았으며, 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 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이 없는 조건하에서 삼정 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 정책의 극을 향해 치닫게 된다.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 일파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했으며, 이 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도학을 논해야 할 서원은 세도 정치의 외형적인
지주로서 노론측 당론의 소굴이 되었으며, 불법적인 수세권을 발동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왕권을 침해하는가 하면 관령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무관의 자제들은 활도 쏘아보지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다.
반세기에 걸쳤던 안동 김씨 시파계 일문의 독재는 세도 정치의 온갖 병폐를 전형적으로
드러내어 전국적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잦은 민란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곧 세도 정권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4. 철종의 가족들

제25대 철종 가계도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난 장조(사도세자, 장헌)는 숙빈 임씨와의 사이에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두었다. 은언군의 3남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의 3남이 바로 제25대 임금 철종이다.
철종(1831-1863)의 재위 기간은 1849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14년 6개월이었다. 부인은
8명으로 철인왕후 김씨,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궁인 이씨, 궁인 김씨, 궁인
박씨이고, 자녀는 숙의 범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혜옹주 하나뿐이었다.
철종의 자식들은 유난히 단명했다. 철인왕후 김씨가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외에 후궁과 궁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모두 일찍 죽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에게서 난 영혜옹주가 한 명 있을 뿐인데 그 또한 박영효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철인왕후 김씨(1837-1878)
철종 대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다섯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런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1863년 철종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의 예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