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해(1839) 8월 19일 성 마태오 종도 첨례 후 5일에 서소문 밖에서 9인이 참수 치명 하니라
✝ 조 가롤로
조 가롤로는 근본 강원도 회양(淮陽)사람이라. 부모가 외인으로 5세에 모친이 죽고 가산이 점점 탕진함에 집을 떠나 삭발위승하여 몇 해를 지내고 후에 퇴속하여 남의 집에 붙이이니 그 사이 허다한 고초를 받다가 나이 23세부터 북경 마부(馬夫)를 다녀 약간 푼전을 얻어 부모와 동생을 봉양하더라. 사람이 강직하고 심히 청렴한 고로 동행이 믿고 아름다이 여겨 이르기를 “행중 마부중 제일이라”하더라.
연지 삼십에 문교하니 때에 유 아우구스띠노(유진길)와 정 바울로(정하상)의 모든 교우들이 신부 영접하기를 경영하나 연행(燕行)하는 여러 사람 중에 마땅하게 권화하여 대사를 의논할 사람이 없는지라. 아우구스띠노와 바울로가 전에 연행 할 제, 지내어 보니 성품이 착하여 마땅한지라.
교중에 상의하고 아우구스띠노가 한 교우 집에 가서 권화한데 처음은 황홀하여 깨닫지 못 하겠다 허더니 연일 강론을 듣고 명백히 깨달아 독실히 수계하기로 허락하고 문교한 지 몇 달이 못 되어 아우구스띠노를 따라 길을 떠나 주당에 들어가 영세, 견진, 성체, 고해 등 성사를 받잡고 도리와 열심 수계함이 심상(尋常)보다 초월하여 겸화(謙和) 인내하며 애주 애인하여 애긍을 힘쓰고 또한 권화한 자가 10여 인이나 되더라. 그 아내를 권화하되, 고집하고 듣지 아니하더니 힘써 개유함에 귀화하여 열심 수계하다가 극진히 선종(善終)하니라.
또 같은 열심 교우 집에 재취하여 항상 가인으로 더불어 강론을 힘쓰며 도리를 인하여 속담(俗談)은 적게 하고 염경묵상(念經黙想)시에는 간절한 통회를 발하더라. 해마다 연행하여 주당에 들어가 주교 전에 동국에 신부가 임하시기를 청하니 장차 9년에 이르러 유(劉方濟)가 임하시고 또 나 탁덕(羅鐸德)이 임하심에 유 신부는 돌아가시고 정신부(Shastan)가 임하시니 이 같은 중대한 사정을 여러 번 성사함은 대개 가롤로의 주선한 바이니 그 가운데 노심 근고함은 어찌 다 형용할 바이리오?
나 신부(Maubant)가 처음으로 향촌에 전교하실새 신부가 말씀을 널리 통치 못하는 고로 판성사에 언어를 대신하여 돕더라. 항상 치명할 원의가 간절하여 “아무쪼록 목숨을 바치고 갖가지 고난을 받아도 오주 예수의 십자가 길을 따르리라”하더니 기해(1839) 춘(春)에 연행하였다가 돌아올새 길에서 꿈을 꾸니 예수가 다불산이라 하는 데서 뵈실새 좌우에 성 베드로, 성 바울로, 양위 종도가 뫼시고 섰는지라 예수 가라사대, “이 해에 네게 치명 대은을 주노라” 하시니 몇 번을 고두(叩頭) 감사하여 이같이 하기를 양차에 함에 연고를 정치 못하고 집에 돌아옴에 사세가 극히 위험한지라.
심신을 정제하여 가속더러 “위주치명하자”하고 예비하고, 이리저리 피신하다가 5월에 후취 처가와 한가지로 있더니 가롤로는 마침 나갔다가 문전에 이른즉 포졸이 이르러 유동(幼童)까지 다 잡아 가는지라, 한가지로 행하되 포졸들은 모르더라. 따라가며 생각하되 자헌코자 하나 主志가 어떠하실지 생각이 만단이라. 뜻을 결단하여 “마땅히 사세대로 하리라” 정지(定志)하고 사관청에 함께 들어가 문목 거조(擧措)를 듣고 즉시 포장집에 올리거늘 따라가서 구경하니 군졸이 잡인을 내쫓을새 종시 나가지 아니하고 보니 등을 미는지라 거스리니 성명을 물음에 “저기 잡히어 온 사람의 주인이로다”하니 포장께 거래하고 잡아들여 성명과 사조를 묻고 하옥하더라.
가롤로가 북경 왕래에 성교회 재물을 맡아가지고 오더니 당년 회환에 나오는 은으로 물건을 환매하여 왔으되 미처 수쇄(收刷, 물건을 돈으로 바꿈)치 못하고 많이 잡힘에 이튿날 포장이 문 왈,“이 물건이 다 누구의 것이며 누가 내어오라 하며 누구와 한가지로 하였느냐?” 하니 답 왈, “해포(한 해 가량) 북경왕래 하여 장사하는 것이로소이다.” 또 문 왈 “분주를 대고 동당을 대라” 하거늘 답, “천주의 계명이 사람을 해하지 말라 하시니 당을 대지 못 하겠나이다” 관장이 말하기를 “천주의 계명은 지킨다 하고 나라와 관장이 묻는 말은 대답치 못하느냐” 하고 팔 주뢰 하다가 다리 주뢰 하다가 더 할 길이 없는지라 공중에 높이 달고 무수히 난타하되 말이 한결 같더라. 좌기 4차에 치도곤 35도와 주뢰와 주장으로 띻어 혹독한 형벌을 하여 간(옥)에 가두니 곳곳이 살이 떨어지고 상하지 아니한 곳이 드문지라. 육신이 이지경이 되었으나 열정은 더욱 더하더라.
주교가 잡히심에 좌포청으로 가서 주교와 면지하고 “주장한 사람과 두 신부를 다 대래”하며 주뢰를 틀고 줄로 훑으며 나무를 세모지게 하여 다리를 깎고 이렇게 하기를 연 4차를 하니 살이 떨어지고 골절이 드러났더라. 좌기 합 8차를 당한 후 신부가 다 잡히시니 면지하고 문목 하여 한가지로 금부로 올려 연3일 추국에 형문 3차 후 결안 하여 전옥으로 나리오니 합 11차 수형 하니라.
장차 수레를 타고 법장으로 나갈 때가 가까웠는지라. 옥중 한 군사더라 이르되 “나는 좋은 데로 가니 집안사람더러 뒤를 따라 오라 전하여 달라”하니 그 군사가 와서 슬픔을 머금고 전하더라. 법장으로 나갈 때에 안색이 화평하고 칼을 받을 때에 혼연히 웃더라. 기해(1839) 8월 19일 성 마태오 종도 첨례 후 5일에 참수 치명하니 연은 45세요, 때는 천주 강생 후 1839년 이러라.
✝ 남 세바스띠아노
남 세바스띠아노(南履灌)는 거가 후예라. 부모가 봉교하더니 10세에 모친은 죽고 형제 4인이라. 열심 수계하고 세바스띠아노는 말째러라. 20여 세에 신유 풍파를 당하여 부친은 혹독한 형벌 아래 굴치 아니하고 귀양가 즉시 죽고 처가로 가 피하였다가 잡히어 정배하니 교우가 없는 곳이라 도리를 밝히지 못하고 조석으로 다만 주모경만 끊지 아니하나 첩을 얻어 자식을 낳고 지내더니 연지 오십에 병이 들어 죽을 듯한지라.
그곳 가까이 정배 온 교우에게 대세 한 후 5,6년 만에 귀양이 풀리어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도리를 밝히더니 버금 해에 유 신부(유방제) 영접하는 때를 당하여 위험을 불구하고 의주까지 가시어 모시고 돌아와 집주인 소임을 맡아 외면을 보살피며 열심 수계하여 염경 묵상을 독실히 하더니 풍파가 크게 일어남을 보고 피하여 시골로 갔으나 면치 못할 줄을 알고 치명 예비를 하더니 이름이 크게나 사면으로 구색함에 사세가 할일없이 된지라.
한 교우가 포졸을 데리고 가서 지시하니 잡히어 곧 경성으로 올라옴에 포장이 성명과 사조를 묻고 “친척을 대고 당을 대라” 하며 “배주하라” 하여 주뢰 1차하나, 노약한 기질이로되 견고한지라. 이튿날 형조로 옮겼더니 즉시 금부로 올려 연 3일 추국에 형문 3차하고 결안 하여 전옥으로 나리워 가둔 지 열흘이 못 되어 법장으로 나갈새 수레를 탈 즈음에 환흔(歡欣) 용약(勇躍)하며 한 군사더러 “너 옥중에 갇히인 나의 아내에게 전하여 달라”하며 말하기를 “동일(同日) 동사(同死)하자 하였더니 이는 못 하여도 동지(同地) 동사(同死)나 하자” 하더라. 8월 19일에 참수 치명하니 연이 60세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