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명진 스님이 24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가진 면담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 시절인 지난 2007년 10월 13일 자승 총무원장이 이상득 의원을 데리고 왔다. 당시 자승 원장은 '이명박 후보가 봉은사에 와서 스님과 신도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발언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명진 스님은 27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도 "당시 자승 스님이 이상득 의원과 함께 봉은사, 용주사 등 여러 사찰을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는 종단 지도자가 한나라당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승 총무원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지난해 총무원장 선거 때도 청와대와 국정원 등 여권이 자승 스님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며 "당시 봉은사 다래헌에 사무실을 차려둔 자승 스님이 통화 때마다 이상득 의원의 이니셜인 '에스디(SD) 영감'과의 통화라고 말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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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오전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열린 일요법회에서 이 사찰 주지 명진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의 직영사찰 전환 배경에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압력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
ⓒ 김도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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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등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자승 원장은 조계종 입법부 최고수장으로서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특정정당 후보의 선거운동원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종단 안에서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당초 총무원은 수도권 포교 강화를 목적으로 삼각산 도선사와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한다고 발표했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도선사는 빼고 봉은사만 지정하면서 의혹을 키웠다. 중앙종회 의결과정에서도 봉은사 직영 안이 중앙종회의 안건상정을 논의하는 총무위원회에서 부결되었음에도 총무원장이 직권상정해 3월 11일 종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날 봉은사 직영 안은 안건 중 맨 아래에 있었으나 종회는 법정스님 입적 소식이 전해진 어수선한 상황에서 다른 안건은 제쳐놓고 직영안을 전격처리했다.
봉은사 직영 안이 주지인 명진 스님은 물론 봉은사 신도, 공청회 등 불교 내부의 충분한 공감대 없이 변칙 처리되면서 애초 '도심포교를 위한 백년대계'를 위해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지정했다는 총무원의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했고 오히려 정치적 의혹만 키우고 있다.
현재 사태의 직접 당사자인 자승 원장은 모르쇠로 일관해 세간의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사이 원로회의나 중앙종회는 명진 스님을 해종행위자로 간주해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는 등의 성명을 발표하고 종단 내 개혁단체들은 자승 원장의 해명을 요구하는 등 종단 내 갈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의현 전 총무원장과 현 자승 총무원장
현 사태는 자승 원장의 태도에 달려있는 형국이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와의 부적절한 자리도 문제지만 정권에 맞춰 비판적인 승려를 절에서 축출하려했다면 그는 94년 정권의 지원으로 총무원장 3선을 노리다 승적까지 박탈당한 서의현 전 총무원장과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당시 서의현 전 원장은 3선을 시도하면서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경찰력을 지원받기도 했지만 국민여론의 악화와 개혁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서 전 원장이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조계종단의 정치예속화 때문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 전 원장은 92년 대선당시 개신교 장로였던 민정당 김영삼 후보를 위해 여당 선거운동원 이상으로 지지활동을 벌였고 급기야는 대구 동화사 대불조성자금으로 조성된 80억 원의 비자금을 김영삼 후보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 비자금은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건설 조기현 대표가 국방부 상무대 이전 공사비로 받은 돈으로 조성한 것으로 드러나 조계종단은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서의현 전 원장은 3선을 시도했고 이에 대해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석림동문회, 선우도량, 전국승가학인연합 등이 참여하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이하 범종추)'는 서의현 체제 타도를 결의했다. 서 전 원장 측은 범종추의 퇴진 시도를 자신이 장악한 중앙종회와 종정의 힘을 통해 제압하려고 했고 한편으로는 용역을 통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 역시 서의현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 경찰기동대를 동원해 총무원에 농성 중이던 범종추 세력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중앙종회의 결의와 정권의 지원으로 3선에 성공한 서의현 체제는 상무대 비리와 무차별 폭력행사로 불교신자들은 물론 국민들의 공분을 사면서 정권마저 등을 돌리자 곧바로 막을 내렸다. 이때 맹활약한 이가 바로 명진 스님이다. 94년 종단 개혁당시 수많은 스님을 비롯한 사부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복을 벗어 조계사 대웅전 불전에 올린 뒤 종단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이대로 승복을 벗겠다는 사자후를 토해내 참석자들을 울리면서 종단개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서의현 체제의 비리와 정치예속화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조계종 개혁운동은 인적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가자의 종단운영 참여 불허 등의 한계가 있었지만 권력관계에서 어느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2008년 촛불정국 때 20만에 달하는 불자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현 정부의 종교편향을 비판하는 법회를 개최해 권력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자승, 뒤로 숨지 말고 전면에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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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5일 오후 대장경천년축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
ⓒ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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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 원장의 전임인 지관 전 총무원장의 경우 2009년 5월 검찰의 표적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현 정부의 정치보복을 비판하면서 전국 교구본사에 분향소를 설치하도록 했고 직접 봉하마을로 내려가 분향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추모열기를 확산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조계종이 일련의 과정에서 정치적과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승 현 원장은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 벌였던 정치권과의 뒷거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자승 원장이 전임 총무원장들에 비해 매우 젊고 선승으로서 별다른 수행경력도 없음에도 조계종내 모든 계파의 지지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비호 외에도 특유의 친화력과 탁월한 정치력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대개 합의추대는 청담스님같이 법력이 높거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루어지지만 자승 원장은 조계종 최대종책모임인 화엄회 대표와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하면서 타 계파에 대한 적절한 배려를 통해 여러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승 원장은 2009년 10월 총무원장 당선증을 받은 후 기자들과 만나 현 정부와 불교계간의 갈등은 대화와 소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혀 전임 지관 총무원장과는 다른 행보를 보일 것임을 예고하기도 했다.
한때 자승 원장이 과천 연주암 주지를 할 때 명진 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면서 형제처럼 친했지만 현재는 봉은사 직영 건으로 둘 사이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모든 상황은 자승 원장이 초래한 것이다. 자승 원장은 결과적으로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평가다.
선승이지만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봉은사에서 열린 '10·27 법난 규탄대회' 후 투옥되고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서의현 체제를 뒤엎는데 큰 역할을 했던 명진 스님의 결기와 법력을 쉽게 보았다는 것이다. 명진 스님은 자승 원장의 스승인 정대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하고 중앙종회 부의장까지 지낼 정도로 조계종 정치를 훤히 꿰뚫고 있다.
자승 원장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명진 스님의 폭탄발언을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커지고 있다. 명진 스님의 주장이 틀렸다면 그를 종단에서 추방해야 할 것이고 맞는다면 스스로 총무원장직을 내놓아야 한다. 명진 스님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권력과 보수언론에서는 명진 스님의 과거 행적을 뒤져 작은 허물이라도 폭로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조차 명진 스님은 각오한 듯하다. 자승 원장은 명진 스님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다. 자승 원장은 종회나 원로회의 뒤에 숨지 말고 총무원장직을 놓고 명진 스님의 주장에 답해야 한다. 그것이 조계종 최고 수장으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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