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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서인지 매번 제일 늦게 버스에 오르는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한 곳인 국궁의 명소라는 예천의 용문사로 향했습니다. 김룡사에서는 약 33km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1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이 되었습니다. 예천 용문사는 남해 용문사, 양평 용문사와 더불어 국내 3대 용문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세 곳의 사찰을 순례하였고, 오후 2시가 지난 시각이라서 그런지 버스가 출발하자 얼마 있지 않아 모두들 꿈나라로 찾아나서서인지 차내는 묵언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창밖에 보이는 논과 밭에는 보리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산들도 잿빛의 두터운 겨울옷을 벗고 제법 연두빛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잠깐 눈을 붙였는가 했는데, 버스는 소백산용문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돌아서 용문사 주차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난 제10차 순례 때를 상기하면 이른 시각에 마지막 순례지에 도착한 셈이었습니다. 일주문은 그냥 버스를 타고 통과하는 바람에 나중에 순례를 마치고 나오면서 잠시 버스를 세우고 찍었던 사진입니다. 혼자 생각이지만, 누구든지 일주문부터 걸어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사찰을 찾는 이들을 위한 바른 가르침이 아닌가 여겼습니다.
<소백산 용문사 일주문>
용문사(http://www.yongmoonsa.org/maha/index.html)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입니다.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따르면, 신라시대 경문왕 10년(870년)에 두운(杜雲)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두운대사는 풍기에 있는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스님입니다. 용문사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내려올 때 이 사찰을 찾다가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하였고 있는데, 이때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지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이 나와서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 이후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명종 1년(1171년)에는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어 낮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恒規)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대법회를 열었는데, 개태사(開泰寺)의 국통 전치(顚緇)대사가 강(講)을 맡았답니다. 그 뒤 성종 9년(1478년) 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1480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 용문사라 하였으나, 정조 7년(1783년) 문효(文孝) 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는 다시 소백산 용문사로 고쳤다고 전합니다. 헌종 1년(1835년)에는 화재로 폐허화된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대사 등의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용문사는 보광명전을 비롯하여 16동의 전각이 세워져 있는 예천에서 규모면에서 가장 큰 고찰로, 세 가지 이적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 용이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을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라고 합니다. 문화재로는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 용문사 교지(보물 제729호), 목불좌상 및 목각탱(木刻幀: 보물 제989호),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145호), 자운루(경북 문화재자료 제169호)가 있으며, 그밖에 현존하는 당우로 진영각(眞影閣),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회전문(迴轉門), 범종루, 강원, 천불전(千佛殿), 일주문, 요사채, 두운암(杜雲庵)과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普光明殿), 응향각(凝香閣), 단하각, 해운루 등이 있습니다. 특히 대장전은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데, 이 대장전은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건립한 오래된 건물이며, 대장전 안에 있는 윤장대(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림으로써 경전을 읽는 효과를 낸다고 하여 만든 기구)는 국내 유일의 불경 보관대로, 이 윤장대를 돌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세계적 문화유산입니다. 또한 목불좌상 및 목각탱은 대추나무로 만든 후불탱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작품이며, 사천왕상(四天王像)과 일주문(一柱門)은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
대장전은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년)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답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입니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윤장대는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입니다. 대장전의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습니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 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입니다. 아래 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8각의 집 모양을 얹었습니다. 8각의 집 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8개의 문이 달려 있습니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한쪽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윤장대는 보존이 잘 되어있고 8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입니다. 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년)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대장전의 고풍스런 자태>
<대장전 안 왼쪽에 서 있는 윤장대>
<대장전 안 오른쪽에 서 있는 윤장대>
목불좌상 및 목각탱은 숙종 10년(168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 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 등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ㆍ중ㆍ하 세 줄로 배치시키고 있습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습니다. 가운데 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습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습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 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 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 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대장전 안의 목불좌상과 목불탱>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영상회괘불탱(보물 제1445호)은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삼존불상 가운데 통견(通肩)의 적색 대의(大衣)에 밝은 회청색 내의를 착용한 본존 불상은 머리 높이가 180cm이고 머리 광배의 폭만도 무려 273cm에 이르러 10m가 넘는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적색 대의에는 봉황문과 화문, 격자문, 연화문 등의 둥근 무늬가 전체에 걸쳐 정연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내의에는 흰색의 연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본존불 하단 좌우로는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였는데, 두 상 모두 손 모습과 천의(天衣)의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본존불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신체의 자세 및 벌리고 서 있는 발의 모습, 인물의 크기와 형태, 보관, 지물 등이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면 상단 본존불상의 머리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자리하였으며, 배경으로는 황·적·청·녹색의 색구름대(彩雲帶)를 깔고 감청색의 하늘을 두어 공간감을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림 내부 하단 가운데 쪽에 왕실의 안위를 발원하는 내용의 글이 있으며, 테두리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 괘불탱은 괘불탱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1705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둥글넓적해진 얼굴에 근엄함이 엿보이며,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등 17세기로부터 18세기로 넘어 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이 아닌 부처상으로써 지물(연꽃 가지)을 드는 새로운 도상의 예를 보여주어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보광명전과 마주한 자운루는 2층 누각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년)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년)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년)에도 다시 고쳐 지었다고 합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습니다. 자운루의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와 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 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보광명전 앞 마당에서는 직접 보이지 않는 자운루 편액>
<자운루의 뒷 모습>
용문사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 들어가니 오른편에 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라고 적힌 커다란 비석이 서 있었고, 그 맞은편에 회전문(迴轉門)이라고 하는 천왕문이 조금 높은 위치에서 버티고 서있었습니다. 이렇게 문 자체가 움직이거나 회전하는 장치가 없는데도 회전문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회전문에 모신 사천왕상은 그 규모가 장대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회전문을 들어서면 이번에는 소백산용문사라는 높다란 2층 누각(해운루)이 앞을 가로막고 섰고, 그 아래의 통로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니까 웅장한 보광명전이 나타났습니다. 대부분의 일행들이 곧바로 보광명전에 들러 참배를 했지만, 이미 예습으로 들은 바도 있고 하여 달리 대장전부터 들리기로 했습니다. 대장전은 보광명전에서 봐서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가장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장전에 들어가니 좌우에 듣던 대로 윤장대가 서 있었고, 삼존목불좌상과 목각탱이 금색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윤장대는 돌아가지 않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래된 마루바닥이 삐걱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긴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봄볕과 같은 따스하고 온화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보광명전에 들러 참배를 하면서 이틀 전 3월 26일 오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백령도 앞바다에서 영문도 모르고 침몰한 해군 장병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빌고 또 빌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보니, 멀리 펼쳐지는 준령들이 한가롭게 보였고, 눈앞에는 범종각이 서 있었습니다. 한편 보광명전의 좌측면과 우측면 및 뒷면에는 팔상도와 심우도가 상하 2단으로 그려져 있어 다른 사찰에 비해 특이했습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을 의미한다는 회전문>
<회전문 안의 거대한 사천왕상 (1)>
<회전문 안의 거대한 사천왕상 (2)>
<해운루와 그 아래로 보광명전에 이르는 통로>
<보광명전의 모습>
<보광명전 앞의 범종각>
<보광명전의 비로자나불>
<보광명전의 왼쪽 벽면에 그려진 팔상도와 심우도의 한 장면>
다시 발길을 돌려 명부전, 응진전을 지나 용문사의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극락보전으로 향했습니다. 봄이라서 그런지 여기저기에 공사를 한 흔적이 남아 있고, 아직도 나무를 심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천불상를 모신 극락보전에 오르는 왼쪽에 원통전이 있었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니까 용문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용문사 안에서 봤을 때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산으로 둘러싸인 듯한 형세였습니다. 용문사는 보광명전과 해운루 그리고 회전문이 일직선상에 자리를 잡고 있는 형상이며, 보광명전에서 봐서 오른편에 성보유물관, 왼편에 영남제일강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운루와 영남제일강원 사이에는 자운루가 있고, 영남제일강원 왼쪽에 해우소가 있었습니다. 또한 보광명전 오른편인 극락보전 앞에는 응향각이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고, 성보유물관 앞에서 바라본 보광명전 방향으로는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약수의 흐름을 조절하는 듯 보였습니다. 한참동안 각자 뿔뿔이 용문사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바람에 단체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이미 버스에 탑승한 일행도 있어 하는 수 없이 남은 인원으로 하여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하루에 네 곳의 사찰을 순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남은 성보유물관도 들리기로 했습니다. 성보유물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에는 모조 윤장대를 비롯한 유물들이 있었고, 지하에는 두운대사를 비롯한 역대 조사들의 초상화 16점과 다양한 기록물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마침 일월광이 모조 윤장대 옆에 놓인 종이를 보고는 가족들의 이름과 함께 소원성취와 건강을 비는 문구를 적고 있기에 따라서 어머니와 둘째 누님 가족들도 적어 윤장대에 넣고는 세 바퀴를 돌리면서 진심으로 기원을 했습니다.
<명부전>
<응진전>
<극락보전 전경>
<극락보전 안의 천불상>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
<극락보전 쪽에서 바라본 용문사의 전경>
<해운루의 앞 모습>
<영남제일강원의 웅장한 자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응향각>
<성보유물관에서 바라본 보광명전과 거대한 쌍바위>
<성보유물관에 있는 소형으로 개방된 윤장대>
성보유물관 입구에 있다는 조선시대 대학자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1420년 ~1488년)의 시(詩)를 그냥 스쳐 지나와서 되돌아보았고, 화엄경에 나오는 연화장 세계를 형상화 했다는 '화장찰해도'라는 유리 공예품은 보기에도 아름답기 그지 없었습니다.
용문사(龍門寺)에 다시오니
산 깊어 세속의 시끄러움 끊겼어라.
절에는 승탑(僧榻)이 고요하고
묵은 벽엔 불등(佛燈)이 타오르네.
외줄기 샘물 소리가 가녀리고
첩첩한 산봉우리 달빛을 나누고 있네.
우두커니 앉아 깊이 돌이켜 보니
내 여기 있음조차 잊게 되누나.
(註) 승탑(僧榻): 스님의 자리
<화장찰해도 유리 공예품>
벌써부터 버스를 타고 집으로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일행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유물관을 나왔습니다. 성보유물관을 돌아나오면서 보광명전 쪽을 바라보니 해운루 옆에 비스듬히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외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아직도 보광명전의 비로자나불 양쪽에 세워졌던, 통일기원과 경제회생을 기원하는 문구는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여러 고찰들을 순례하고 있지만,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고찰들 나름대로의 특색과 멋은 물론 중생들의 삶과 다름없는 빈부의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된 사찰일수록 한 두 번씩의 화재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도 낙산사며 향일암이 화재로 손실을 입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런 화재는 인재이기에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이번에는 오후 5시가 되지 않은 시각에 마지막 순례지인 용문사를 뒤로 하고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일요일이지만 경북 지역이라서 가는 길이 막히지 않으면 예정했던 7시가 조금 넘으면 출발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가는 중간에 저녁 공양을 하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의성과 군위를 지나 지칠 줄 모르고 달려 청도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된장찌개로 간단하게 저녁 공양을 들고, 밤 9시가 가까운 시각에 하단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제12차 순례는 서울에 있는 봉은사와 조계사 그리고 도선사로 정하고, 제11차 고찰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누며 다음 순례일을 기약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습니다. 함께 하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합장>
<성보유물관을 돌아나오면서>
첫댓글 감사님 순례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이미 가진 것 모두 내려놓는다" 는 게 참으로 쉽고도 어렵습니다
늘 수고 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성불하십시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