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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제1판 2013년 / 제2판 2018년)
제7권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 쾌락
제1장 여섯 가지 성격, 통념들
피해야 할 성격에는 악덕, 자제력 없음, 짐승 같음이라는 세 가지 유형이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이 가운데 처음 두 유형에 상반되는 것들은 분명하다. 첫 번째 유형에 상반되는 것은 미덕이라 불리고, 두 번째 유형에 상반되는 것은 자제력이라고 불리니 말이다. 짐승 같음에 상반되는 것은 초인적 미덕, 즉 영웅적이고 신적인 미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마 가장 적절하리라. (246)
자제력과 참을성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하지만, 자제력 없음과 유약함은 나쁘고 비난받을 만한 것 같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자신이 헤아린 것을 견지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 것 같고, 자제력 없는 사람은 자신이 헤아린 것을 포기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 것 같다. (248)
자제력 없는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념情念 때문에 행하는 반면, 자제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들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이성적 원칙 때문에 욕구들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248)
어떤 사람은 이런 자질들을 가진 사람(자제력 있고 참을성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절제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무차별적으로 방종한 사람은 자제력 없는 사람이라고, 자제력 없는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이 둘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또한 때로는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자제력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때로는 실천적 지혜가 있는 영리한 사람 중에도 자제력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248~249)
제2장 통념에 대한 논의
소크라테스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자제력 없는 행동을 하는) 이런 견해를 철저히 반박했는데, 자제력 없음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선의 것에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무지해서 그럴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49)
이런 견해(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는 사람들의 소견과 분명히 일치하지 않는다. (249)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지식보다 더 강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에 상반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제력 없는 사람이 쾌락에 굴복할 때는 지식이 아니라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50)
그렇다면 쾌락에 저항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일까? (…)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다. 그렇게 되면 같은 사람이 실천적 지혜가 있으면서 동시에 자제력이 없어야 하는데, 자진하여 최악의 행동을 하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250)
자제력 있는 사람이 강하고 나쁜 욕구를 가져야 한다면, 절제 있는 사람은 자제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 자제력 있는 사람은 절제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지나친 욕구도 나쁜 욕구도 절제와는 양립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자제력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욕구를 다 가져야 한다. (250~251)
자제력이 무슨 의견(이를테면 잘못된 의견)이든 고수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자제력 없음이 모든 의견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또한 좋은 형태의 자제력 없음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251)
확신과 합리적 선택에 따라 즐거운 것을 행하거나 추구하는 사람은 헤아리지 않고 자제력이 없어 그러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는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됨으로써 더 쉽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그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면 확신이 바뀔 경우 그만둘 테니까. 그러나 자제력 없는 사람은 확신이 바뀌어도 여전히 그릇된 행동을 고집한다. (252)
제3장 상충하는 의견을 예비적으로 고찰하다
무조건 자제력 없는 사람은 모든 대상에 관련되지 않고 정확히 방종한 사람이 관련되는 대상들에 관련되며, 그런 대상들에 단순히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상들에 특정한 방법으로 관련되는 것이 특징이다. 방종한 사람은 언제나 눈앞의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합리적인 선택에 끌려가는데,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눈앞의 쾌락을 추구한다. (254)
우리는 자제력 없는 사람도 잠든 사람이나 미친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과 비슷한 상태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지식은 자신과 동화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제력 없는 사람은 배우처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256)
자제력 없음의 원인을 자연과 결부하여 다음과 같이 고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의견은 보편적인 것에 관련하고, 다른 의견은 개별적인 것들, 곧 지각이 지배하는 영역들에 관련한다. 이 둘의 결합에서 단 하나의 의견이 도출되면, 혼은 논증이 문제될 경우에는 그 결론을 긍정해야 하고, 실천이 문제될 때는 즉시 행동해야 한다. (256)
자제력 없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과 의견 탓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의견은 그 자체로 올바른 이성에 상반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상반할 뿐이다. 올바른 이성에 상반하는 것은 욕망이지 의견은 아니니까. (257)
자제력 없는 사람이 어떻게 무지를 몰아내고 지식을 회복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술에 취하거나 잠든 사람의 경우와 같으며, 자제력 없음이라는 감정 상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257)
자제력 없는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파악해봤자 지식이 되지는 못하고 (…) 단지 되뇌는 방법으로 파악할 뿐이다. (257~258)
자제력 없음이라는 감정 상태에서 생기는 지식은 엄밀한 의미의 지식으로 볼 수 없다. 또한 감정에 끌려다니는 지식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감각적 지식에 불과하다. (258)
제4장 자제력 없음의 영역
자제력 있는 사람과 참을성 있는 사람, 자제력 없는 사람과 유약한 사람 모두 쾌락과 고통에 관련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쾌락을 낳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은 필요하지만, 어떤 것은 그 자체로는 바람직하나 지나칠 수 있다. 필요한 쾌락들이란 영양섭취와 성욕 등에 관련된, 방종과 절제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 육체적 쾌락들이다. 다른 쾌락들은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는 바람직한데, 승리・명예・부 그리고 그 밖에 그처럼 좋고 즐거운 다른 것들이 그렇다. (258~259)
자신 안에 있는 올바른 이성에 반하여 이런 것들(승리・명예・부 그리고 그 밖에 그처럼 좋고 즐거운 다른 것들)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자제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은 돈이나 이익이나 명예나 분노와 관련하여 자제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조건부로 그렇게 부른다. 그들을 무조건 자제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무조건 자제력 없는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있어 자제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 이 점은 자제력 없음은 무조건 그렇건 특정한 관점에서 그렇건 과오라고 비난받을뿐더러 악덕이라고 비난받는 데 반해, 우리가 앞서 언급한 마음가짐들은 그런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259)
육체적 향락에 관련된 쾌락을, 합리적 선택에 따라서가 아니라 합리적 선택과 자신의 판단에 반해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허기, 갈증, 더위, 추위, 그 밖에 촉각과 미각에 관련된 온갖 불편 같은 지나친 고통들을 회피하는 사람은 자제력이 없다고 불린다. 그런 사람은 (…) 무조건 자제력 없다고 불린다. (260)
자제력 없는 사람과 방종한 사람을 같은 부류로 (…) 보면서도 방종한 사람을 특정 쾌락과 관련해 자제력 없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같은 부류로 보지 않는다. 같은 쾌락과 고통에 관련되지만 같은 방법으로 관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종한 사람은 선택해서 행동하지만,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260)
절제와 방종과 같은 쾌락에 관련되는 마음가짐들만을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으로 보아야 한다. (262)
제5장 병적인 쾌락들
본성이 원인이라면 누구도 그런 사람들을 자제력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마찬가지로 습관 때문에 마음가짐이 병적인 사람도 자제력이 없다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이런 마음가짐들을 지배하거나 그것들에 지배당하는 경우는 무조건 자력이 없음이 아니라 유추적인 자제력 없음이다. (263~264)
어리석음이든 비겁함이든 방종함이든 괴팍함이든, 지나친 마음가짐은 모두 짐승 같거나 아니면 병적이다. (264)
어떤 자제력 없음은 짐승 같다고, 어떤 자제력 없음은 병적이라고 불리지만, 인간의 방종에 상응하는 자제력 없음만은 무조건 자제력 없음인 것이다. (265)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은 방종과 절제와 동일한 대상들에 관련되며, 다른 대상들에 관련되는 자제력 없음은 비유적으로 그렇게 불리지 무조건 자제력 없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265)
제6장 분노와 욕구에 자제력 없음
분노에 자제력 없음이 욕구에 자제력 없음보다 덜 수치스럽다는 사실을 고찰하기로 하자. (…) 분노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에 복종하지만, 욕구는 이성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욕구가 더 수치스러운 것이다. 분노에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에 지배당하지만, 욕구에 자제력 없는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욕구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265~266)
우리는 본성적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을 더 쉽게 용서하는데, 욕구는 공통적인 만큼 만인에게 공통된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을 더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노와 성마름은 지나치고 불필요한 쾌락을 바라는 요구보다 더 본성적이다. (266)
욕구에 자제력 없음이 분노에 자제력 없음보다 더 수치스러우며, 자제력과 자제력 없음은 육체적 욕구와 쾌락에 관련되는 것임이 명백하다. (…) 그중 어떤 것은 종류와 정도에서 인간적이고 본성적이며, 어떤 것은 짐승 같으며, 어떤 것은 장애나 질병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절제와 방종은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에만 관련된다. (267)
제1원리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의 악은 언제나 덜 파괴적인데, 그것은 지성이 제1원리이기 때문이다. (268)
제7장 쾌락과 고통에 대한 여러 태도
자제력 없는 사람과 자제력 있는 사람은 쾌락에 관련되어 있고, 유약한 사람과 참을성 있는 사람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마음가짐은 그 중간이다. (268)
쾌락에는 필요한 것도 있고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있다. 필요한 쾌락이라도 어느 정도까지만 필요하고, 쾌락이 지나치거나 모자랄 필요는 없다. 이 점은 욕구와 고통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쾌락을 추구하거나, 필요한 쾌락을 어떤 다른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해서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은 방종하다. (…) 쾌락을 추구하는 데 모자라는 사람은 방종한 사람과 반대이고,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이 절제 있는 사람이다. (…) 누구든지 욕구가 없거나 약할 때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사람을 욕구가 강할 때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사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며, (…) 그런 까닭에 방종한 사람이 자제력 없는 사람보다 더 나쁘다. (269~270)
자제력 있는 사람은 자제력 없는 사람에 대립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은 유약한 사람에 대립된다. 참을성은 욕구에 저항하는 것이고 자제력은 욕구를 이기는 것인데, 저항하는 것과 이기는 것은 (…)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제력이 참을성보다 더 바람직하다. (270)
대다수가 저항하고 또 저항할 수 있는 것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은 유약하고 나약하다. (270)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방종해 보이지만 사실은 유약한 사람이다. 놀이는 (…) 이완弛緩인데,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완에 지나치게 탐닉하기 때문이다. (271)
자제력 없음에는 성급함과 허약함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허약한 사람은 숙고하지만 감정에 휘둘려 결심한 바를 견지하지 못하고, 성급한 사람은 숙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정에 휘둘린다. (271)
성급함으로 인한 자제력 없음은 특히 민감하고 격정적인 사람에게 많다. 민감한 사람은 (…) 너무 급하고, 격정적인 사람은 너무 격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상에 따르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272)
제8장 방종과 자제력 없음의 또 다른 차이점
방종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충실하므로 뉘우칠 줄 모른다. 그러나 자제력 없는 사람은 누구나 뉘우친다. (…) 방종한 사람은 치유될 수 없지만 자제력 없는 사람은 치유될 수 있다. (…) 일반적으로 자제력 없음과 악덕은 종류가 다르다. 행위자는 자신의 악덕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자제력 없음은 의식하기 때문이다. (272)
자제력 없는 사람 중에 성급한 사람이 이성적 원칙을 가졌으면서도 견지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낫다. (…) 자제력 없는 사람은 (…) 적은 술에도 금세 취해버리는 사람과 같다. (272)
자제력 없음은 악덕이 아니다. (…) 그럼에도 빚어진 행위는 서로 비슷하다. (…) 자제력 없는 사람도 사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악한 짓을 한다. (272~273)
자제력 없는 사람은 올바른 이성에 어긋나는 육체적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되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반면, 방종한 사람은 그런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에 확신을 갖고 추구한다. 따라서 자제력 없는 사람은 (…) 설득당할 수 있지만, 방종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미덕은 제1원리를 보전하지만 악덕은 제1원리를 파괴하며, (…) 제1원리들을 가르쳐주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본성적인 것이든 습관으로 획득된 것이든 미덕이 우리가 제1원리를 올바르게 사고하게 해준다. (273~274)
자제력은 좋은 마음가짐이고, 자제력 없음은 나쁜 마음가짐임이 분명하다. (274)
제9장 자제력과 절제의 관계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기가 어렵기에 우리는 이들을 고집불통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제력 있는 사람과 비슷한 데가 있다. (…)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자제력 있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 쉽게 설득되고 감정이나 욕구에 휘둘릴 때만 생각을 바꾸기를 거부하지만, 고집불통은 욕구에 민감하고 때로는 쾌락에 휘둘리므로 이성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 독선적인 자들이 고집불통이 되는 것은 쾌락과 고통 탓이다. (…) 그들은 자제력 있는 사람보다는 자제력 없는 사람과 더 비슷하다. (275)
쾌락 때문에 무엇인가를 행한다고 해서 다 방종하고 나쁘고 자제력 없는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쾌락 때문에 행할 때만 그러하다. (276)
자제력 있는 사람은 나쁜 욕구를 갖고 있지만 절제하는 사람은 갖고 있지 않다. 절제하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에 어긋나는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제력 있는 사람은 그런 쾌락을 느끼되 그런 쾌락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277)
자제력 없는 사람과 방종한 사람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방종한 사람은 그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77)
제10장 자제력 없음의 또 다른 특징들
같은 사람이 실천적 지혜가 있으면서 동시에 자제력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동시에 성품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옳은지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제력 없는 사람은 실천할 능력이 없다. (277)
자제력 없는 사람은 (…) 잠들거나 술에 취한 사람 같다. (…) 자발적으로 행동하지만 사악하지 않다. (…) 그는 반쯤만 사악하다. 그는 불의하지도 않다. 사전에 악행을 모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278)
자제력 없는 사람은 (…) 좋은 법률을 갖고 있지만 그 법률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국가와도 같다. (…) 하지만 사악한 사람은 법률을 이용하되 나쁜 법률을 이용하는 국가와도 같다. (278)
성급한 사람이 보여주는 자제력 없음이 숙고는 하되 자신의 결정을 견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자제력 없음보다 고치기가 더 쉽다. 또한 습관 때문에 자제력 없는 사람이 본성적으로 자제력 없는 사람보다 고쳐지기가 더 쉽다. (279)
제11장 쾌락을 비판하는 세 가지
쾌락과 고통을 연구하는 일은 정치철학자의 몫이다. 그는 (…) 그 기준이 되는 목적을 설계하는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280)
또한 쾌락과 고통을 고찰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도덕적 미덕과 악덕은 고통과 쾌락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행복에는 쾌락이 수반된다. (280)
① 어떤 사람은 좋음과 쾌락은 같지 않으므로 쾌락은 그 자체로도 우연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② 다른 사람은 어떤 쾌락은 좋지만 대부분의 쾌락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③ 그 밖에 모든 쾌락은 좋지만 쾌락이 최고선일 수는 없다는 제3의 견해도 있다. (280)
① 모든 쾌락은 본성을 향해 나아가는 지각 가능한 과정인데, 과정은 목적과 동류일 수 없다. (…) 절제하는 사람은 쾌락을 피한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도 쾌락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쾌락은 많이 즐길수록 그만큼 더 사고에 걸림돌이 된다. 이를테면 성적 쾌락이 그렇다. (…) 좋은 것은 모두 어떤 기술의 산물이지만 쾌락의 기술은 없다. 아이들과 동물들도 쾌락을 추구한다. ② 쾌락 중에는 수치스럽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도 있으며 사람을 병들게 하므로 유해한 것도 있다. ③ 쾌락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280~281)
제12장 앞서 말한 비판들에 이의제기하다
사물은 무조건 좋거나 누구에게는 좋은 두 가지 의미에서 좋은 것이기에 사람의 본성과 마음가짐도, 따라서 운동과 과정도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것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니 나쁘다고 생각되는 과정 중에서 어떤 것은 무조건 나쁘지만, 특정인에게는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바람직하다. 또 어떤 것은 특정인에게 바람직하지 않지만 때에 따라서 일시적으로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무조건 바람직하지는 않다. 또 어떤 과정은 쾌락이 아니면서 쾌락인 것처럼 보인다. 환자의 치료 과정처럼 치료 목적의 고통스러운 과정이 모두 그렇다. (281~282)
좋음은 활동이거나 아니면 마음가짐이다. 사람을 타고난 마음가짐으로 회복시키는 과정들은 우연적으로 즐거울 뿐이다. 욕망의 경우 활동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마음가짐과 본성의 활동이다. 관조의 활동처럼 고통이나 욕구가 수반되지 않는 쾌락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282)
목적이 과정보다 더 나은 것인 만큼 쾌락보다 더 나은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쾌락은 과정이 아니며 모든 쾌락이 과정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쾌락은 활동이자 목적이다. 쾌락은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때 생긴다. 그리고 모든 쾌락에는 그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다만 타고난 본성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쾌락에만 그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 (282~283)
쾌락은 본성적인 마음가짐의 활동이라고 말하되, ‘지각 가능한’ 대신 ‘방해받지 않는’이라는 말을 덧붙여 써야 할 것이다. (283)
즐거운 것 가운데 어떤 것이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쾌락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건강에 좋은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돈벌이에 나쁘다고 해서 건강에 좋은 것들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283)
실천적 지혜도 그 밖의 어떤 마음가짐도 그 자체에서 생기는 쾌락에는 방해받지 않고 이질적인 쾌락에만 방해받는다. 관조나 배움에서 생기는 쾌락은 우리를 더 많이 관조하게 하고 더 많이 배우게 할 것이다. (283~284)
쾌락이 어떤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 그런데도 향수 제조자나 주방장의 기술은 쾌락을 낳는 기술로 간주된다. (284)
동물과 어린아이는 좋지 못한 쾌락을 추구하며,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런 쾌락에 관련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그 쾌락은 욕구와 고통이 수반되는 쾌락, 곧 육체적 쾌락들과 그것들의 지나침이다. 그리고 방종한 사람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방종하다. 그런 까닭에 절제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피한다. 그에게도 그 나름의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284)
제13장 어떤 종류의 쾌락은 최고선이기도 하다
쾌락은 방해받지 않는 활동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쾌락이 무조건 나쁘다 해도 최고선은 일종의 쾌락일 것이다. (285)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은 즐겁다고 생각하며 쾌락을 행복의 구성요소라고 여기는데, 이는 당연하다. 어떤 활동도 방해받으면 완전하지 못한데, 행복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에게는 다른 자질 외에도 신체적 이점과 외적인 좋음과 행운의 선물이 필요하다. (…) 어떤 사람이 고문을 당하든 큰 불운이 겹치든 그가 좋은 사람이기만 하면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다. (285~286)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두가 쾌락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쾌락이 최고선이라는 증거이다. (286)
쾌락이나 방해받지 않는 활동이 좋음이 아니라면 행복한 사람의 삶도 분명 즐겁지 못할 것이다. 쾌락이 좋음이 아니고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도 있다면, 그에게 왜 쾌락이 필요하겠는가? 쾌락이 좋음도 아니고 나쁨도 아니라면 고통 역시 좋음도 아니고 나쁨도 아닐 텐데 그가 왜 고통을 피해야 하는가? 그리고 훌륭한 사람의 활동이 다른 사람의 활동보다 더 즐겁지 않다면, 그의 삶도 다른 사람의 삶보다 더 즐겁지 않을 것이다. (287)
제14장 쾌락의 여러 종류
우리는 왜 육체적 쾌락이 더 바람직해 보이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① 육체적 쾌락은 고통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 치료제로서의 쾌락은 강렬하며, 그래서 추구된다. 그런 쾌락은 그와 반대되는 고통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바람직해 보이기 때문이다. ② 육체적 쾌락은 강렬하기에 다른 종류의 쾌락을 즐길 수 없는 사람들이 추구한다. ③ 본성적으로 성급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치료제로서의 쾌락이 필요하다. 그들의 몸은 그들의 기질 탓에 언제나 고통에 시달리며, 그래서 언제나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288~289)
쾌락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어떤 쾌락은 (…) 타락한 본성에 수반되는 활동이다. 다른 쾌락들은 결함 있는 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것인데, (…) 우연적으로만 좋다. (288~289)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쾌락에는 지나침이 없다. 그런 쾌락은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심미적 또는 지적인 즐거움)에 속하고, 우연적으로 즐거운 것들에 속하지 않는다. 우연적으로 즐거운 것들이란 치료제로서의 즐거운 것들을 의미한다. (…) 그러나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이란 건강한 본성의 활동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290)
같은 것이 늘 즐거울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 만약 어떤 것의 본성이 단순하다면 언제나 똑같은 행위가 가장 즐거울 것이다. (290)
신들은 언제나 단 하나의 단순한 쾌락을 즐긴다. 운동의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없는 활동도 있는데, 쾌락은 운동보다는 정지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되기에 하는 말이다.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