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형성>
유교(儒敎)는 공자(孔子)에 의해 개창되어 한자문화권에서 수천 년 동안 주류를 이루었던 종교·철학사상이다. 공자는 스스로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하였지만, 그 이전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체계화시킴으로써 유교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공자 이후 유교는 공자가 가르친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방법에 따라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여 그 가르침을 보완하는 역사를 이루게 된다.
공자가 집대성하고 체계화시킨 이전의 문화는 주로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문화를 가리킨다. 유교의 경전인 『서경(書經)』에 따르면 하왕조 이전에는 요(堯)의 당(唐), 순(舜)의 우(虞)왕조가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요와 순은 공자와 맹자(孟子)에 의해 도덕정치의 이상을 이룬 성자(聖者)로 추숭되었는데, 그 이후 요순시대라면 태평성대의 대명사가 된다.
여기서 공자와 맹자가 특히 이상으로 삼은 것은 요순시대에 이루어진 왕위계승제도였는데, 선양(禪讓)제도라고 일컬어진 이 제도는 나라 안에서 인재를 골라 통치 경험을 쌓게 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명해 뒤를 잇게 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요의 당왕조나 순의 우왕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하왕조의 실체에 대해서는 크게 밝혀진 것이 없어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하왕조의 경우 근래에 와서 유적 발굴과 새로운 유물의 출현에 의해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 왕통의 세계(世系)까지도 확인이 되고 있다.
하왕조는 순의 뒤를 이은 우(禹)에 의해 창립된 왕조로서 요순의 선양제도는 이때부터 장자상속의 왕위계승제도로 바뀌게 된다. 하왕조는 이후 17세(世) 439년 동안 지속되다가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걸(桀)에 이르러 왕조의 운명을 마감하게 된다. 공자는 “은대의 예(禮)는 하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고, 주대의 예는 은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주를 계승할 이가 있다면 비록 100세가 지나더라도 그 빼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공자의 사상이 하왕조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지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 다음 왕조인 은·주의 문화이다. 은대에는 왕의 조상신을 비롯한 천지·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일상의 모든 일들을 점복(占卜)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종교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조상에 대한 제사와 풍작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는 씨족연합의 단결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조상신이나 자연신을 주재하는 최고신인 상제(上帝)는 초월적·절대적 존재로서 인간의 운명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과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궁극적 근원이었다. 은왕조는 폭정을 편 제28대 왕 주(紂)에 이르러 기원전 1,122년 경 주왕조의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주대의 문화 역시 은대의 종교문화적 요소가 존재하였지만 인간 본위의 인문적 정신이 새롭게 흥기하게 되고, 절대적 주재자인 상제가 천(天)으로 대체됨에 따라 상제와 같은 절대적이면서 무형적인 존재의 실체와 권위는 의심받게 된다.
여기서 천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궁극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상체처럼 신비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천의 뜻[天命]을 따라야 하지만, 그 천명은 인간의 덕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덕은 인간이 수양하여 얻어진 사회적·도덕적 능력이다. 예를 들어 은왕조가 멸망한 것은 천명을 상실하였기 때문인데, 그것은 과도한 음주와 정치·군사의 부패가 원인이 되었다는 식이다. 따라서 주왕조는 밝은 덕을 쌓아 은왕조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원하여 새롭게 천명을 받은 것으로 된다. 이것은 초월적 주재자의 외적 권위보다는 인간의 책무와 도리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에서도 주왕조는 종묘(宗廟)의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의례(儀禮)에 따라 제사를 지냈는데, 의식에 참가하는 성원의 동작·언어·복장 등 의례상의 모습을 통해서 우아하고 절도 있는 조화의 미를 정신생활에서 길렀으며, 이 예속(禮俗)으로서의 의례가 축적되어 내부적 질서의 유지 규범으로까지 발전되고 인륜질서의 일반원리로 관념화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공자께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다”고 적고 있듯이 위와 같은 전대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체계화시켜 유교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공자는 중심 사상으로 인(仁)을 창도해 사랑을 강조했고 문화 현상으로 예(禮)를 일으켜 사회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맡은 자는 덕(德)을 베풀고 믿음[ 信]을 지켜야 한다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내세우기도 했다. 각계 각층의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된 이름[名]과 분수를 지켜야 안정과 평화·화합 그리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강조했고, 인간은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평등을 누릴 수 있고 정의를 분별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는 육예(六藝) 곧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를 과목으로 삼았는데, 이 육예에 달통한 72인의 제자 중에서도 안회(顔回)·민손(閔損)·언언(言偃)·복상(卜商)·재여(宰予)·단목사(端木賜)·염구(求)·중유(仲由)·증삼(曾參) 등이 뛰어났는데, 증삼에 의해 자사(子思)에게 도가 전해졌다.
공자에 의해 개창된 유교의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그런데 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일정하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의 물음에 각기 달리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질문하는 제자의 자질·처지·이해 능력에 따라 그 깨우침을 열어주는 방향으로 대답을 해 주었던 것인데, 제자들이 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내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克己復禮)”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공자의 이런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인이란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자를 풀어보면 인은 이인(二人) 즉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희(朱熹)도 인을 주석하기를 ‘사랑의 원리(愛之理)’이고 ‘마음의 덕(心之德)’라고 하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인(仁)은 친야(親也)”라고 했는데 친은 ‘사랑한다’, ‘가까이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는 “가까운 사람을 가까이 사랑하는 것이 인이다”라고 했으며, 그 밖의 여러 책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이란 그 마음이 흔연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이란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인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가 대개는 그 근본사상을 사랑에 두고 있듯이 유교에서도 그 바탕이 되는 사상은 역시 사랑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유교에서의 사랑은 그 주고받는 과정에서 단계적이라는 점이다.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사랑하고서 남을 사랑하는 것’ 즉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그런 뒤에 그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를 “나의 늙은 부모를 늙은 부모로서 받들고서 남의 늙은 부모에게로 미치고, 나의 어린 자식을 어린 자식으로서 사랑하고서 남의 어린 자식에게로 그 사랑이 미치게 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사람이란 자기 부모·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본능적 정리이기 때문에 남의 부모 자식을 내 부모 자식과 다름없이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조건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널리 사랑하라거나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주라고 한들 심정적으로는 수긍이 될지 모르지만 그대로 실천하기란 누구나 쉽지 않다. 자칫하면 형식적인 사랑, 위선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본능적인 정리를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부모를 사랑하고서 그 절실한 사랑을 그대로 미루어서(확충해서) 남의 부모도 사랑한다든지, 내 형제를 사랑해서 그 사랑을 그대로 미루어 남의 형 아우도 사랑하며, 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확충해서 남의 자식도 사랑한다면 보다 생생하고 진실한 사랑을 남에게도 베풀 수가 있는 것이다.
단계적이라는 말은 차별과 의미를 달리한다. 내 육친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을 그대로 타인에게로 옮겨야 된다는 뜻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아끼는 그 본능적인 사랑을 고스란히 남에게로 넓혀야 한다는 그런 뜻이다. 가까운 데에서 멀리로 뻗치는 이런 사랑의 단계적인 적용은 인간 아닌 짐승이나 사물에게도 미치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널리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우주 안의 모든 사물에게도 베풀어야 하며, 그것은 한결같이 내 몸 사랑하듯이 절실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유교의 근본사상인 인은 이와 같이 가까운 육친에서 먼 타인에게로, 또 인간에게서 모든 사물에게로 번져가는 것으로 그 베풂의 원리를 삼는다. 또한 유교가 공자에 의해 개창되었음에도 공자의 이름을 따지 않고 ‘ 유(儒)’ 자를 쓰고 있는 것은 유교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 자는 그 문자 구성이 ‘인(人)’과 ‘수(需)’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구하여 갖추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자전(字典) 상으로는 유(柔:부드럽다)·유(濡:스며들다, 젖다)·윤(潤:붇다, 윤택하다) 등으로 설명되고 있으니, 이는 곧 ‘어진 이가 가르친 도리를 배우고 익혀서 자기 몸에 젖게 한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 ‘유’ 자는 학자 또는 선비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공자의 가르침도 결국은 이러한 ‘유’의 세계를 증진시키는 데에 그 궁극적인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유교의 경전인 『시경(詩經)』·『서경』·『역경(易經)』 등이 이미 공자 이전에 형성되고 있었던 사실 또한 그러한 입장에서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다. 결국 이 ‘유’ 자는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에 필요한 풍부한 지식과 드높은 품덕을 갖춘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유자(儒者)의 행실에 대해서 『예기』『유행(儒行)』에서는 “밤낮으로 열심히 학문하여 물음에 응대하고, 충성과 신의를 깊이 간직하여 천거되기를 기다려, 힘써 실행하여 취해지기를 고대한다.
의관의 옷차림은 예의에 알맞고, 동작은 공경되고 신중하며, 크게 사양함은 마치 거만스러워 보이고, 작게 사양함은 마치 거짓처럼 보인다. 금(金)이나 옥(玉)을 보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신의를 보배로 삼고, 토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의(義)에 서는 것을 토지로 여기며, 많이 쌓아두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글로써 부를 삼는다. 자신의 한 몸이 위태로울 수 있더라도 뜻한 바를 빼앗길 수는 없고, 비록 자신의 거동이 위협 당해도 결국은 그 뜻을 펴가며, 언제나 백성의 고통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자들은 현실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에 오염되지 않는 하나의 계도자적 역량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자문에 응할 수 있는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 어떠한 권세나 물욕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적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회만 되면 정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평소 연마한 충성과 신의로써 공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것 등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사상적 영역은 실로 방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 사회적 역할은 실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교가 긴 역사 기간 동안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여 그 내용을 달리하면서도 유교로서 동일성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이러한 기본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유교전개>
우리 나라의 유교사(儒敎史)에서 볼 때 1392년 조선의 성립은 비단 정치권력의 교체뿐만이 아니라 사상적인 대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제까지 귀족의 비호 아래 고려의 사상계를 주도하였던 불교는 고려가 멸망함에 따라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쇠퇴해 갔으며, 그 대신 고려말의 제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개혁을 도모하고 급기야 왕조의 교체까지 성공한 신흥 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새로운 사상, 즉 주자학(朱子學)이 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 초의 사상계에서는 새로운 국가의 지배 이념인 주자학을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기 위한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고려말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주자학 이론 체계의 도입과 배불사상 고취라는 두 가지 방면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주로 성균관(成均館)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고려말에 활약한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조선 초에 활약한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이었다. 이색은 최초로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그 문하에서 조선 초의 중요한 성리학자들을 배출해냈다. 정몽주 역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사회윤리와 가족윤리의 확립을 도모하는 등 조선성리학 정립에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그는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켜 조선 건국과 함께 피살당함으로써 의리정신(義理精神)을 존중하는 후대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조선성리학의 도통(道統)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들도 역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지만, 그러나 보다 체계적인 이론을 가지고, 보다 엄격한 태도로 불교에 대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완성시킨 인물은 정도전이었다. 조선 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는 『심기리편(心氣理篇)』과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어 주자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 등에 대한 논리적 비판을 가하였으며, 유교 이념에 입각한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비해 권근은 조선성리학 발달의 기초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입학도설(入學圖說)』·『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등에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설명을 통해 리기(理氣)를 엄격히 구분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황(李滉)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도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다.
정도전 등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기초가 닦여진 조선은 성종 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함으로써 유교 이념에 입각한 통치 기구를 완비하고 문화적으로도 세종 대에 이르러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유교 이념에 입각한 법전의 편찬은 태조대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육전(經濟六典)』 등이 있었고, 태종대의 『속육전(續六典)』, 세종대의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성종대의 『경국대전』·『대전속록(大典續錄)』, 중종대의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등이 있었다. 유교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한 법전의 편찬은 유교가 어떻게 국가·사회적으로 응용될 수 있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성균관과 향교(鄕校)를 건립해 선성(先聖)·선현(先賢)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였다.성균관은 고려시대의 국자감을 계승한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적 의미와 비중이 더욱 컸으며, 유교 특히 주자학적 이념의 사회·국가적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조선은 토지제도나 공납에서의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특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함에 따라 부상한 훈구파 대신들의 토지겸병은 그와 같은 경제적 위기를 더욱 조장하였다.
이에 따라 토지제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개혁의 단행을 주장하는 일단의 유교적 이념에 투철한 지식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림파(士林派)였다. 사림파는 원래 고려의 멸망과 함께 순국한 정몽주와 길재(吉再)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서 주자학 연구에만 몰두한 성리학자들이었으나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목도하고 스스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이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종직(金宗直)·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이었다. 영남 사림의 종주인 김종직은 인정(仁政)을 통치 이념으로 하고, 사회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덕을 확립시키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후에 그는 성종의 총애를 받아 관직에 나아갔는데, 토지개혁에 대한 그의 주장은 훈구파와의 대립을 야기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훈구파에게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하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도 유배당하였다. 이것이 조선조 사화(士禍)의 시작이 되었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의 세력은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조광조가 중종의 신임을 받아 다시 관계에 등용되기까지 중앙정계에서 제거되었다. 조광조는 김종직·김굉필의 학맥을 이었고 성균관에서는 유숭조(柳崇祖)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시종일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상으로 하여 소격서(昭格署) 폐지, 현량과(賢良科) 실시, 훈구파 축출 등의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조치는 왕실과 훈구파 모두의 이익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통해 희생되었으며, 그에 따라 왕도정치를 현실 속에 구현해 보려던 사림파의 정치적 희망은 무산되었다.
이언적 역시 사화의 희생자였다. 그는 조선 전기 4대사화의 마지막인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해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을사사화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마지막 대결로서 거기에서도 사림파는 훈구파에게 패배하였으며, 그것을 계기로 사림파는 다시 정계 진출보다도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언적은 조한보(曺漢輔)와의 무극태극(無極太極) 논변을 통해 리(理) 중심적인 학설을 제시함으로써 조선성리학의 한 흐름에 선하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4대사화를 전후한 조선조 유학의 흐름은 유교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현실적 경세론으로 특징지어지며, 사상적으로는 리 중심적 경향이 대두되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의 경향과는 달리 독자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학자들도 있었는데, 김시습(金時習)과 서경덕(徐敬德)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시습은 당시의 유자들에게 공통된 경향이었던 과거 응시, 관료적 성향, 철저한 배불론 등을 거부하고 일생을 방랑과 기행으로 점철하였다. 그는 특히 태극(太極)의 실체를 음양(陰陽)의 기(氣)로 규정하였다. 서경덕은 김시습보다도 철저하게 기 중심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며 형태가 없는 기의 상태를 태허(太虛)로 규정하고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은 이 태허의 동정(動靜)에 의해 생성된다고 하여 기를 만물생성의 근원으로서 위치지웠다. 또한 그는 태허의 동정이 태허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리(理)의 실체성과 주재성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후에 이이(李珥)에 의해 일부 수용되었다. 1498년의 무오사화로부터 약 70년간 계속된 사림파에 대한 탄압은 조선의 사회적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 반면에 사림들로 하여금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할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조선성리학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언적이나 서경덕에게서도 이미 나타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던 이황과 이이에 의해 조선성리학은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고 조선성리학으로서 개화하게 되었다.
이황은 생의 전반을 사화기에 보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 학문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의 사상의 기조는 주자학의 계승이었지만, 특히 도덕론과 심성론(心性論) 방면에 중점을 두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황은 사단과 칠정에 관하여 리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리기호발설을 주장하고, 능동적인 리는 곧 사단이며 순선(純善)이라는 인식을 근저로 도덕실천론을 구상하였다. 그에게서 리와 기는 존재론적인 원리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원리였으며, 그 때문에 리기의 존재론적인 설명에서도 리기의 차이를 강조하여 주자학에서보다도 더욱 리와 기를 선악·귀천(貴賤) 관계로 파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는 곧 리를 정신적인 존재, 기를 감성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그것으로부터 존재론적인 리기의 개념을 포괄하려는 이른바 도덕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자기수양의 내적 체험과 깊이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이황이 주희(朱熹)를 계승한 최대의 점은 리기론보다도 수양론으로서의 거경궁리(居敬窮理) 사상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황은 당대의 조야와 사림으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아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후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황과 동시대 학자로서 조식(曺植)은 산림처사로서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선비의 지조를 보여 주었는데, 그는 성리학 외에도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한편 이황의 리기론은 주희를 계승하고 있었지만 주희의 리기론과 상충되는 부분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이는 이황의 이론을 비판함으로써 자기 사상을 전개시켰다. 이이는 사화가 끝나고 당쟁이 전개되는 시기에 살았으며, 이황과는 달리 정치적인 활동도 하였다. 그는 이황이 리를 이성적 작용으로서 파악하는 데 비하여 이성적 작용도 작용인 이상 기일 수밖에 없다고 하여 주희보다도 철저하게 리의 무위성(無爲性)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리가 드러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전제로 사단을 기발(氣發)로 파악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리기론을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집약되었다. 또한 그는 기가 물질적이며 시공간적으로 유한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같은 기의 성격을 기국(氣局), 시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는 리의 성격을 리통(理通)으로 규정하여 리기의 불상리(不相離)·불상잡(不相雜) 관계를 리통기국설(理通氣局說)로서 이론화시켰다. 이러한 리통기국설은 사회의 변화하는 상황과 불변하는 이법(理法)을 조화시키려는 목적 아래 여러 가지 제도개혁안을 제시한 그의 경세론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유교전개>
조선성리학을 확립시킨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사후 조선성리학은 이황의 성리설을 지지하는 입장과 이이의 성리설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분화되어 발전하였다. 전자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하여 보편적 가치의 근원인 리(理)를 능동적이고도 주재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그것을 기(氣)의 근원으로 삼아 도덕적 실천론과 사회윤리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대개 이이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리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는데, 이황의 대표적 문인은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이었다. 이들의 문인들은 후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유성룡 계통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병파(屛派)를 형성하였으며, 병파는 정경세(鄭經世)를 거쳐 유진(柳袗)·유원지(柳元之)로 이어졌다. 김성일 계통은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중심으로 호파(虎派)를 형성하였으며,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졌다. 정구의 문하에서는 이후경(李厚慶)·서사원(徐思遠)·황종해(黃宗海)·허목(許穆) 등이 나왔고, 장현광의 문하에서는 김응상(金應相)·정극후(鄭克後)·유진 등이 나왔다.
후자는 이이의 학설을 계승하여 리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리를 철저하게 정의(情意)와 조작(造作)이 없는 관념적 실체로서만 인정하였다. 이이의 문인들 가운데는 성혼(成渾)과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도 많았는데 이들은 후에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안방준(安邦俊)·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俊吉)·박세채(朴世采)·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이간(李柬)·한원진(韓元震)·조성기(趙聖期)·임영(林泳)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김장생은 예학(禮學)의 대가로서 이황의 문인 정구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에게 전해졌으며, 김집의 학문은 송준길·유계(兪啓)·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를 거쳐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송시열은 당시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남인(南人)인 윤휴(尹)와 격렬하게 대립하여 예송(禮訟)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학은 이단하(李端夏)를 거쳐 김원행(金元行)·박윤원(朴胤源)·권상하·한원진 등에게로 전수되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걸쳐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왕조 성립 이후의 최대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 두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사회질서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게다가 지방호족의 토지겸병과 그에 따른 민생의 피폐는 조선의 국가체제를 위기적 상황으로 몰고 갔다.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은 당쟁에 몰두해 있었으며, 새로운 지도이념이나 사회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17세기 후반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일부 사림은 권위화되고 형해화된 당시의 주자학을 비판하고 현실적 공리의식과 실증적 정신을 공통된 토대로 하여 새로운 사조를 창출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조의 실학사상이었다. 이수광(李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통해 천문·역학·지리·역사 등에 관한 고증을 소개함과 동시에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 학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러한 사조가 형성되는 데 앞장섰다.
그의 뒤를 이어 나타난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은 초기 실학사상을 대표한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유학의 전통적 토지제도론에 입각하여 토지제도를 중심으로 여러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며 신분제도와 문벌, 적서(嫡庶) 차별 등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전제(田制)·교선(敎選)·임관(任官)·직관(職官)·녹제(祿制)·병제(兵制)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익은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및 예학에 일가견을 가졌고 경세치용의 실학을 중심으로 양명학과 서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리학에서는 이황을 존숭해 『이자수어(李子粹語)』라는 선집을 냈고, 경세적 무실론에서는 이이를 높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서학(西學)과 관련해 종교적 신앙은 부정했지만 서양의 자연과학과 학술에 대해서는 찬탄하였는데, 그의 문인들은 후에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뉘게 된다.
이들 초기 실학자들의 사상이 실사구시의 입장에 입각하여 주자학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데 비해, 주자학의 권위에서 탈출하여 경전 해석에서 한대(漢代)의 고주(古注)를 중시해 직접적으로 고대의 유학을 연구하려는 학자들도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윤휴와 박세당(朴世堂)으로 그들은 당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주자학적 경학관을 거부하고 금기시되었던 노장(老莊) 사상에 대해 연구하는 등 자유스러운 학풍을 조성하려고 하였다. 특히 박세당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등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색경(穡經)』과 같은 농서(農書)도 지었다. 정제두(鄭齊斗) 또한 최명길(崔鳴吉)과 장유(張維) 등 초기 양명학자(陽明學者)들의 뒤를 이어 심즉리(心卽理)와 치양지설(致良知說) 등 당시 사상계에서 배척되었던 양명의 견해들을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학풍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리기론을 사상의 체계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양명학과는 다른 독특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자학의 내부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의 상위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불려지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었다.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동일한가의 여부에 대한 논란이었던 이 논쟁은 박현석(朴玄石)과 김창협의 논쟁에서부터 연원한 것이었지만, 실상 그것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권상하의 문하였던 한원진과 이간이었다. 이 논쟁을 통해 이간은 사물 또한 오상(五常)의 덕을 본성으로서 부여받는다는 견해를 표명해 인물성상동론(人物性相同論)의 입장에 섰으며, 한원진은 사물에게 품수된 기질이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그 본성 역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의 입장에 섰다. 이후 이 논쟁은 이간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기지방의 낙파(洛派)와 한원진의 입장을 지지하는 호서지방의 호파(湖派)로 나뉘어서 계속 진행되었다. 이 호락논쟁에 참여했던 학자로서 임성주(任聖周)는 이제까지의 전통적 견해와는 달리 기를 리의 근거로 삼고 기일분수(氣一分殊)를 리일분수(理一分殊)의 근거로 삼는 성리학설을 제창해 조선성리학에서 독특한 자취를 남겼다.
초기 실학자들에 이어 조선조 실학사상은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완성되었다. 초기 실학자들에 비해 이들은 첫째, 관학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 철저화, 둘째,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극복, 셋째, 이들을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혹은 북학파(北學派)로 불리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신기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상업 진흥정책의 제시로 특징지워진다. 이 같은 사조의 형성 배경은 청나라에의 여행 경험을 통한 서양 문물의 접촉과 당시 맹아적 형태로 현상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이었다.
홍대용은 실사구시의 학문적 가치를 고취하면서 신분질서를 개혁하기 위한 과감한 정책을 제시하였으며, 율력(律曆)·산수(算數)·갑병(甲兵) 등 기술적 분야의 중요성과 유효성을 역설하였다. 박지원도 홍대용과 같이 기술을 중시하는 한편 한전론(限田論)을 통해 토지개혁을 도모하고, 화폐제도의 정비와 상공업 진흥에 관한 여러 정책을 제시하였다. 박제가는 실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상공업 정책을 중시한 학자로 상업 활동에 의한 국력의 증강을 주장하여 해외통상을 장려하는 한편 상공업 발달에 장애가 되는 제반 신분제도·문벌제도·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정약용은 이 같은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의 가장 큰 특질은 인간을 덕성(德性)과 같은 도덕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개별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파악하여 사회분업론을 제창한 점에 있다. 즉 그는 새로운 인간관에 입각하여 사회구조론을 전개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실학사상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농업, 공업, 상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통한 국력의 증진을 도모하였으며, 각 경전에 대한 독특한 주석을 남기는 등 경학에서도 새로운 해석을 가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열강과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탈 위협의 증가와 천주교의 전파로 야기된 가치관의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서 다시 주자학적 이론이 발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전우(田愚)·이진상(李震相) 등이었다. 특히 이항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응하여 철저한 주전론을 전개함으로써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선구가 되었으며, 이 문하에서 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김평묵(金平默) 등이 배출되어 척사위정론의 사조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1876년 개항까지의 조선조 유교는 쇄국양이론으로 구체화된 척사위정론, 곧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사조는 을사조약을 통한 일제의 실질적인 조선 강제점령 이후 의병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근현대 유교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