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병에 단단히 걸렸나 보다. 석 달 만에 다시 트레킹을 간다니. 1월의 안나푸르나 트레킹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좀더 철저히 준비를 했다. 가장 큰 투자를 한 것은 사진이다. 지난번에는 휴대형 저장장치가 고장 나서 낭패를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주 미니노트북을 장만했다. 트레킹을 하면서 무진장 사진을 찍어 저장할 수 있고, 정리까지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지난번과 같은 캐논의 EOS 300D와 롤라이35S. 초소형 필름카메라인 롤라이35S는 지난번 푼힐에서 떨어뜨려 고장이 난 것을 5만원을 들여 수리했다. 20년 이상 처박아 두었던 것인데, 지난번 보니 색감과 해상력에서 디지털카메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삼각대는 지난번보다 더 가벼운 것으로 마련했다.
고글도 준비했다. 911 테러로 동료를 잃은 뉴욕시 소방대원이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페루의 설산을 올라가다가 고글을 잃어버리고 시력을 잃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색안경은 동네안경점에서 샀는데, 렌즈가 빠져나가고 다리가 부러지는 조악품이었다. 안경에 간단히 붙일 수 있는 편광렌즈도 준비했다.
몹시 춥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방한대책도 강화했다. 고소증에 대비해서 물을 계속 마셔야 한다고 해서 1.8리터짜리 호스가 달린 물주머니도 준비했다. 에베레스트 지역에 간다니까 아는 사람이 GPS(위성위치확인장치)를 주었다. 이럭저럭 포터에게는 맡길 수 없는 물건만 한 짐이다.
출발 직전, 미국에 주문했던 워싱턴포스트기자의 이라크전 종군기 “In the Company of Soldiers"가 왔다. 도중에 읽을 생각으로 이 책도 배낭에 넣었다.
3월 25일
인천공항에서 홍콩을 거쳐 카트만두까지 순조롭게 갔다. 네팔항공이 한 시간 가량 지체했지만, 그게 무슨 대순가. 가지고 간 책을 반쯤 읽으니 카트만두였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네팔짱의 산적두목은 머리를 짧게 깎아 날씬하게 변신해 있었다. 공항에서 기계적으로 발급하는 비자 비용은 30달러. 이번 트레킹은 15일 이상이므로, 이 해 말까지 네팔에 다시 입국할 때는 비자피를 내지 않아도 된다. 해가 가기 전에 다시 오라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슬리핑백을 가지고 갔으므로 짱 근처 장비점에서는 그 안에 넣는 내피 한 개만 샀다. 추위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얇은 플리스로 만든 것인데 한 장에 500루피(8천 원 정도)다.
3월 26일
7시 반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국내선 공항청사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가 탈 고르카항공의 비행기는 오지 않는다. 네팔 국내항공사 중에서는 가장 믿을만하다는 항공사인데 말이다. 우리 다음 편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던 포터들까지 떠났다. 영문도 모르고 지루하게 기다린 끝에 10시 40분, 우리는 결국 예티항공으로 바꿔 타고 루클라로 향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날 네팔국왕이 우리가 탈 비행기를 타고 포카라로 갔다는 것이다. 국왕도 국영 로이얼 네팔항공의 악평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주기장에 나가서도 뙤약볕 밑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우리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나는 사전정보에 따라 맨 앞줄 왼쪽 자리를 잡았다. 조종석을 볼 수 있고, 히말라야의 산들을 볼 수 있는 자리다. 비행기는 캐나다제 쌍발 디하비랜드. 낡았어도 안심이다. 소련제 항공기에다 타이어가 빤질빤질하게 닳았던 몽골 국내선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스튜어디스가 귀마개 솜과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비행기가 산악지대 상공에 들어가면서 기체는 흔들렸고, 몇 사람은 멀미로 머리를 파묻었다.
40분 정도 비행했을까. 앞창으로 루클라공항의 활주로가 항공모함 갑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그 활주로를 향해 충돌하듯 돌진한다. 착지한 항공기는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가면서 속도를 줄이다가 주기장으로 들어간다. 이 공항의 활주로는 짧기 때문에 20도 가량 경사되어 있다. 착륙할 때는 이 경사를 올라가면서 속도를 줄이고, 이륙할 때는 계곡을 향해 내려가면서 속도를 얻는다. 모르고 있으면 괜찮지만, 알면 손에 땀이 난다.
루클라는 이미 해발고도가 백두산보다 높은 2,845m나 되는 곳이다. 이제부터 모든 행동을 천천히 해야 한다. 고산병은 특별한 대책이 없고, 시간을 들여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을 많이 마시고 이뇨제를 복용하여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원래 약을 싫어하지만, 고산병에 걸리면 큰일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작심하고 매일 아침 이뇨제 다이아막스를 한 알씩 먹었다. 손발이 저려오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별 일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카트만두에서 데려온 포터 이외에 몇 명을 더 고용했다. 앳된 고교생 같은 체구를 한 포터도 몇 명 있었는데 18세라고 한다. 그 몸으로 20kg에 가까운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는 것이 놀랍다. 포터들은 하루 1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고 그 힘든 일을 한다. 그래도 다른 일에 비하면 수입이 좋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용한 포터 중에는 우리나라 TV에 나가면 틀림없이 뜰 것 같은 미소년도 있었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바짝 마른 사람도 있었다. 이 친구는 비실비실하면서도 도중에 길옆에서 점심까지 끓여먹으면서 끝까지 동행했다.
우리 일행 13명에 포터 13명과 가이드 한 명의 대부대가 되었다. 가이드는 안나푸르나 때도 동행했던 만이다. 그동안 한국말이 약간 늘은 것 같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람이다. 우리와 모습이 비슷한 구릉족 출신에다 크리스천이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영어와 일본말을 할 줄 안다. 한국말만 좀더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는 공항 바로 옆에 있는 세르파 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트레킹을 시작했다. 이날 목적지는 팍딩(2,610m). 대체로 내려가는 길이라 힘은 들지 않지만, 안나푸르나와는 달리 길이 잘 정비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먼지가 많고 바람이 분다. 모두들 얼굴을 가리고, 마스크를 했다. 길목마다 커다란 바위에는 티벳문자로 라마교의 불경이 새겨있다. 이 지역에는 우리와 비슷한 모습의 티벳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곳은 티벳문화권이다.
우리는 멀리 앞에 보이는 눈이 덮인 꽁데산을 따라 전진, 팍딩에 도착해서 이날 묵을 칼라파타르 로지를 잡았다. 실내화장실에 양변기까지 있는 것이 신기했다. 주인 남자가 진짜 노스페이스 다운자켓을 입고 있어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더니, 뉴욕의 한국 그로서리에서 일하다가 잠시 귀국했다고 한다. 네팔에서 볼 수 있는 노스페이스 옷은 대부분 가짜다.
먼저 와있던 미국 사람들이 휴대형 정수기를 꺼내서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여기 물은 바이러스로 오염되어 그냥 마시지 못한다. 찬 물이고 더운 물이고 사 마셔야 하므로 정수기가 있으면 물 값이 절약될 것 같다. 안나푸르나를 다녀온 한 대원의 말에 의하면 네팔 산악지대의 물은 오랜 변비도 단숨에 뚫렸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방이 모자랐는지 대장과 나에게는 주인이 사용하는 기도실이 배정되었다. 불상과 울긋불긋한 장식, 각종 제기가 있는 방에서 이날은 잤다. 다음 날 아침 남체바자르에서 열리는 토요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이동하는 이 고장 사람들이 밤새도록 로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3월 27일
아침 일찍 남체바자르로 향해 출발했다. 고도를 3,440m로 올리는 것이므로 본격적인 트레킹의 시작이다. 나는 여기까지 가면 일단 성공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걸었다. 도중 리버뷰 레스트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토마토 수프라는 것이 너무 맑다. 토마토를 충분히 넣지 않은 것 같다. 안나푸르나보다 음식은 못한 것 같다.
도중 조르살레에 사가르마타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다. 입구에 고산병에 관한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어있다. 이런저런 증세가 나타나면 즉시 하산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가르마타란 우리가 에베레스트라고 부르는 산의 네팔식 이름이다. 티벳에서는 초모랑마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는 입산허가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말을 타고 내려오는 트레커가 있어 사진을 찍었다. 금방 후회했다. 바로 뒤에 목발을 든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트레킹 도중 부상한 모양이다. 길이 고르지 않아 말을 타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길은 두드코시라는 강을 두고 왼쪽 또는 오른 쪽 산의 허리를 따라 올라간다. 강에는 현수교가 몇 개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강철제라 끊어질 염려는 없겠지만, 워낙 긴데다가 강한 바람이 불고 있고, 자칫 진동이 어긋나면 중심을 잡기 어렵다. 내려다보면 빙하에서 내려오는 잿빛 강물이 흘러간다. 이 다리를 무거운 짐을 실은 야크가 건너간다. 다리에는 울긋불긋한 람다(불경이 인쇄된 깃발)가 많이 붙어있다. 어디나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는 깃대를 세우거나 줄을 매놓았고 이 람다가 휘날린다. 바람에 실어 부처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큼직한 삼각대를 설치해 놓고 비디오카메라로 이 현수교를 찍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팀으로, 11월에 방송될 HDTV 프로그램을 제작중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 모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셔터가 눌러지지 않는다. 카메라의 오토포커스가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수동으로 돌려 사진을 찍었다. 자동 위주로 설계된 카메라를 수동을 찍기는 쉽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초점이 빗나간 사진이 많이 나왔다. 항상 문제는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튀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현수교를 건너서 다시 급경사를 올라가면 남체로 넘어가는 고개가 나온다. 총을 가진 군인들 몇 명이 그곳에서 네팔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외국관광객은 그냥 통과다. 이 나라에서는 관광객은 특별대우다. 잠시 숨을 가다듬으면서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노”였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 길.
유명한 남체바자르의 토요시장은 이미 끝났다. 올라올 때 우리는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만났다. 그들은 물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우고 점심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 고기를 볶고 있던 사람들은 틀림없이 장사를 잘했을 것이다. 육류는 귀하고 무척 비싸다.
우리는 상점가를 지나 언덕 위쪽에 있는 노를링이라는 로지에 들어갔다.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과 양변기가 있었고, 방마다 충전을 할 수 있는 컨센트가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노트북으로 그 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했다. 상점에 내려가서는 빨간 플리스 셔츠를 한 개 샀다. 우리 돈으로 만원도 안 되었지만, 트레킹 도중 아주 유용하게 입을 수 있었다.
고도차가 50m는 족히 넘을 이 언덕에 마을을 만들어 놓은 네팔사람들의 노력이 놀랍다. 그들은 바위를 까면서 계속 로지를 짓고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급경사 길을 오르거나 내려가야 한다. 다행하게도 우리 대원에게는 한사장부부가 두통을 느낀 것을 제외하고는 고소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움직이면 숨이 가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른 새벽 산악사진작가 박선생은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일몰이나 일출사진을 찍는다. 나도 덩달아 몇 장 찍어보았지만, 무척 힘이 들었다. 삼각대를 쓰려고 했더니 어디서 부딪쳤는지 다리가 찌그러져 뽑아지지 않는다. 가장 가벼운 놈을 골랐더니 재질이 너무 약한 것 같았다. 안나푸르나에서는 다리 하나가 빠져 쓰지 못했는데. 어쨌든 이번 트레킹사진에는 화려한 일출사진이 포함될 수 있었다.
3월 28일
오늘은 고도적응을 위해 샹보체(3,720m)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날이다. 남체의 사원을 지나 가파르고 먼지투성이 뒷산을 한참 오르면, 넓은 초원지대가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비행장이 있고, 마침 헬리콥터가 싣고 온 짐을 부리고 있었다. 짐 속에는 장작도 있다. 학생들로 많이 볼 수 있는데 힐라리여사가 세워주었다는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를 비롯해서 히말라야의 설산이 그대로 보이는 언덕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현대식 에베레스트뷰 호텔이 있었다. 이렇게 멋진 곳에 이런 호화호텔을 지어놓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많은 일본 관광객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차를 마셨다.
하산 길의 잔디밭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백두산의 흑풍구 같았다. 저절로 도레미송이 나왔다.
호텔 앞 옥외화장실은 제주도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2층으로 되어 있었다. 배설물은 아래층 바닥에 깔아 놓은 짚더미에 섞어 비료로 만드는 모양이다.
점심은 주방을 빌려 수제비를 끓였다. 기압이 낮기 때문에 끓여서 조리하기 쉽지 않고 설익는다. 여기서는 압력솥이 필수품이다. 식당에 있던 영국인에게 권했더니 한 그릇 먹었다. 맛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먹었는지 모르겠다. 산타클로스처럼 수염을 기른 호주인은 아들이 칼라파타르에 올라갔다 왔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가 가려는 바로 그 산이다.
저녁은 네팔식 볶음밥. 머리가 약간 무거워진 듯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고소문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3월 29일
오늘은 이번 트레킹의 한 고비인 텡보체(3,860m)까지 가는 날이다. 이 곳은 커다란 라마교 사원이 있는 이 지역의 교통중심지다. 고도를 400m 가량 올리는 것도 문제지만, 마의 4,000m권에 진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많은 트레커들은 텡보체까지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텡보체까지는 오르막길이지만 도중 탐세르쿠 로지에서 점심을 먹고 큰 어려움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찐 감자가 맛이 있었다. 밭에서 금방 뽑아 온 캐비지도 인기였다. 전면과 측면으로 보이는 설산의 장관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다.
텡보체의 한 쪽 언덕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콤바(라마교 사원)가 있고, 그 다른 쪽 넓은 공터에는 로지와 캠핑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 경사진 곳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잘못 차면 공은 언덕 아래로 한없이 굴러간다. 군데군데 간단한 의류를 파는 장사꾼들이 있다. 우리가 잡은 로지에는 양변기와 바케츠에 담은 물을 호스로 연결해 사용하는 샤워시설까지 있었다. 우리 방 바로 옆은 네팔인들을 위한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지만, 기온이 낮아서인지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송아지들이 한가하게 누워있었다. 까마귀가 그 위에 앉아서 벌레를 잡아먹는다.
3월 30일
콤바에서 울리는 징소리에 잠을 깼다. 침낭 속에 뜨거운 물을 넣은 물병 덕분에 몰랐지만, 일어나보니 방안의 물이 얼어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식당은 자기 전까지 난로를 피우지만, 객실에는 난방이 아예 없다. 이제부터는 카메라와 노트북까지 침낭 안에 넣고 자야겠다. 기대를 했던 침낭내피는 추위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몸에 말리고 불편해서 쓸모가 없었다.
드디어 고소증세가 나타났다. 어제 오후 풀밭에서 송아지를 쓰다듬으며 좋아하던 한사장의 부인이 밤새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페리체(4,240m)로 가는 도중 데보체(3,820m)에 있는 보건소에서 진찰을 받아보기로 하고 모두 함께 출발했다.
로지를 겸하고 있는 보건소에는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의사가 있었다. 의사는 진찰을 하더니 그 곳에서 쉬다가 회복되면 트레킹을 계속하라고 했다. 우리는 한사장 부부를 남겨두고 트레킹을 계속했다. 우리는 고도 4,000m 지점에서 점심을 먹은 뒤 계속 걸어 3시쯤 페리체의 아마다블람 로지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상황이 일변했다. 주위는 황량한 벌판이다. 나무가 없어 식당의 난로는 야크똥을 말린 것을 땐다. 8시가 지나면 한 부대에 500루피(8,000원 정도)씩 내고 사서 때야 한다. 야크 배설물도 이곳에서는 귀중한 자원이다. 화장실은 10여 미터 밖에 있다. 배설물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재래식이다. 냄새는 그렇다고 해도, 쭈그려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면 머리가 핑핑 돈다. 한밤중에 여길 갈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이뇨제와 많이 마신 물 때문에 밤중에도 적어도 세 번을 화장실에 가야 한다. 아마도 대부분은 끝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 적당히 처리했을 것이다.
두어 시간 지났을까. 보건소에서 쉬고 있던 한사장부부가 나타났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의외로 빨리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그 보건소 병실 벽에는 박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저녁이 되자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먹는 문제는 없다고 자신했던 나도 식욕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숨이 가쁘고, 식욕이 떨어졌다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런대도 포터들은 저녁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우린 노래를 하나 따라 부르는 데도 숨이 찬다.
3월 31일
당초 계획으로는 여기서 하루 더 묵으며 고소적응을 위해 추쿵(4,740m)까지 갔다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장은 날씨가 좋고 언제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최종 로지가 있는 고락셉(5,140m)까지 직행하기로 바꾸었다. 이 결정은 적절했다. 우리가 성공한 뒤 곧 이 지역에 폭설이 내렸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꽁치통조림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모두 식욕을 잃었기 때문에 아침은 가지고 간 햇반과 통조림을 먹기로 했다. 꽁치통조림을 데우려고 난로 위에 올려놓았는데 워낙 기압이 낮았기 때문인지 폭발한 것이다. 그 앞에 있던 대장이 꽁치를 뒤집어썼다. 부상은 없었지만 꽁치 냄새가 그처럼 지독한지는 몰랐다. 아무리 씻고 빨아도 냄새는 며칠 동안 가시지 않았다. 난로 위에 걸어 놓았던 손수건은 그 후 몇 번 빨았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아 결국 버리고 말았다.
이 날은 고소순응을 위해 툴카(4,620m)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우리는 4,850m 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도중에 영국인 팀을 만났다. 늙은 부인 한 사람이 앉아서 울고 있었다. 우리는 뜨거운 물을 마시게 하면서 격려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전날 밤 내린 눈은 햇볕이 나자 말끔 사라졌다. 드디어 우리는 5,000m 문턱까지 간 것이다.
4,280m 지점에 있는 에베레스트 레스트랑의 메뉴판은 서울 어느 레스트랑 못지않게 다양하고 화려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 메뉴판을 사진으로 찍었다. 밀크티가 30루피, 뜨거운 물 한 컵이 15루피, 삶은 계란 2개가 90루피, 볶음밥이 110루피다. 여기까지 등짐으로 지고 왔을 맥주 한 캔이 200루피(3,000원 정도)라는 게 놀랍다. 하지만 고소증이 무서워 아무도 알콜 음료에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내려가고 있다.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중환자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 날 아침에도 헬리콥터가 떴다. 고소병으로 죽은 포터도 있다고 한다.
로지에 남아있던 한사장 부인의 상태가 악화되었다. 의사를 불러오는 데 40달러, 헬리콥터를 부르면 300만원이 든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더 이상 트레킹은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가이드와 포터 몇 명이 한사장부인을 업고 보건소가 있는 데보체로 내려갔다. 성공 축하를 위해 한사장이 아껴두고 있던 포도주 한 병과 소주팩도 그들의 짐과 함께 내려갔다. 우리 일행은 이제 11명으로 줄었다.
우리도 특별히 고소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 식욕을 잃었다. 모두 입에 맞는 음식이 없어 고작 주문하는 것이 네팔의 라면뿐이다. 나는 두통은 없었지만 머리를 누르는 듯한 압력을 느꼈다.
4월 1일
고소적응으로 하루를 보낸 우리는 마지막 로지가 있는 고락셉으로 향했다. 점심은 세르파 로지. 도중 한사장부부를 보건소로 업고 내려갔던 가이드 만과 포터들이 올라와 우리와 다시 합류했다. 그 험한 길을 이웃마을 드나들 듯 다니는 그들의 체력이 놀랍다. 한사장부인은 보건소에서 산소호흡으로 완전히 회복되었고, 그대로 내려가 루클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 로지 벽에는 상장이 몇 장 붙어있었다. 이 식당에서 일하는 우타르 쿠마르 라이라는 청년이 작년에 고락셉-만체바자르 간 42km를 달리는 에베레스트 마라손에서 1등을 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을 불러 보니 자그마한 체구였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이틀은 걸려야 갈 수 있는 거리를 4시간 1분 44초로 달려 우승했다고 한다.
우리는 너덜지대와 초원, 계곡을 계속 올라갔다. 가지고 간 GPS 고도계에 5,000m가 나타났다. 우리는 환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 손가락 5개를 활짝 폈다. 우리는 드디어 5,000m를 넘어선 것이다.
이날 오후 우리는 고락셉에 있는 히말라얀 로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 위로는 더 이상 로지가 없다. 칼라파타르에 올라가기 위해 브라질팀을 비롯해서 몇몇 외국인들이 쉬고 있었다. 저녁은 영양보충을 위해 처음으로 야크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질기고 기름이 한 점도 없었다. 옆에 있던 외국인들도 한 점씩 먹어보고 맛있다고 야단이다. 여기서 야크 고기는 귀중품이다.
주인에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냐고 물었더니 일본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다카하시수상도 2년 전에 왔었다고 한다. 다카하시라면 관방장관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일본 장관이나 수상이 이 곳에 다녀간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 날 저녁 사진을 정리하려고 노트북을 켰는데 에러메시지만 나오고 작동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애를 쓰다가 배터리만 전부 소모하고 말았다. 카메라 고장에다 노트북까지 말썽이다. 이렇게 되면 사진촬영계획이 엉망이 되는데... 거금을 투자해서 산 노트북이 말을 듣지 않다니. 일단 저장은 포기하고, 다른 메모리를 사용해서 촬영을 계속하기로 했다.
4월 2일
일출을 보아야 한다고 해서 5시에 로지를 출발했다. 이른 시간이라 모두들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나는 파워젤 한 개를 입에 넣었다. 마지막 고소등정이기 때문에 이뇨제도 먹지 않았다. 아니, 먹는 것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작가 박선생은 더 좋은 장면을 잡기 위해 이미 3시에 혼자 올라가고 없었다. 브라질팀도 우리보다 한발자국 앞서 출발했다. 우리는 평지를 얼마쯤 가다가 곧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5,000m가 넘는 산에서 그런 경사를 오르자니 숨이 차고 힘도 들었지만 그보다 공포감이 앞섰다. 이러다가 고소증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갑자기 꾸꾸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작은 닭 크기의 새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등산객이 주는 모이를 먹기 위해서다. 날지는 못하는 새 같았다. 세계의 지붕 밑에서 사는 이 놈들도 생존을 위해 그동안 적응을 한 것이다.
드디어 정상이 나타났다. 5,550m. 백설이 빛나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정작 에베레스트는 역광으로 시커멓게 그 윤곽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이드가 쿰부, 푸모리, 로체, 눕체 등 줄줄이 이름을 대는 데 도대체 어느 게 어느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는 듯 하더니, 마치 무대의 조명을 킨 듯 주위가 밝아졌다. 태양이 에베레스트 정상 위로 솟았다. 마치 적외선 전열기를 킨 것처럼 단숨에 추위가 사라졌다. 껴입은 옷이 거추장스러워졌다.
칼라파타르 정상은 의외로 춥지 않았고 바람도 조용했다.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여기까지가 일반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다. 6,000m가 넘으면 전문등산인이나 올라갈 수 있고, 입산료도 껑충 뛴다고 한다.
로지까지의 하산 길은 한 시간 정도. 내려오면서 보니 주변이 온통 빙산지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두터운 먼지 층으로 덮여 있어 군데군데 흰 부분이 들어나 있을 뿐이다. 물이 말라버린 호수도 있다. 로지 부근의 넓은 공터에는 현수교에서 만났던 디스커버리팀이 거대한 텐트촌을 세워놓고 있었다. 본부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텐트는 거대한 돔형 텐트였다.
부부처럼 보이는 젊은 미국인들이 우리를 보고 “안녕하세요?” 한다. 2년 전 서울에서 영어강사를 했다고 한다. 우리 모습을 보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젠 네팔에서도 가끔 “안녕하세요?”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네팔 말처럼 “나마스테!” 한 마디면 좋을 텐데. 트레킹 도중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마스테!”를 던졌다. 여기서 국적이나 인종은 의미가 없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하고, 이 한 마디로 금방 친구가 된다. 이러다가 “나마스테”가 국제어가 되지 않을지. 그러나 일단 카트만두로 돌아오면 모두 남이 되어버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나마스테”를 하지 않는다. 상황이 사람을 이렇게 사람을 바꾼다.
우리는 로지로 다시 내려와 아침을 먹고 하산 길을 재촉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 곯아떨어졌다. 이날은 페리체까지 단숨에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하산 길은 의외로 힘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셀파 로지에서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모두 곯아떨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항상 오후에는 기상이 악화된다. 오전의 그 맑던 날씨는 어디 가고, 역풍이 강하게 불면서, 가스가 차서 멀리 볼 수 없다. 잘못하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그 동안 식욕부진으로 먹은 것이 별로 없어 모두 체력이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대원 한 사람은 거의 탈진상태에 달했다.
우리는 5시 30분께 스노우랜드 로지에 도착했다.
4월 3일
밤새 눈이 내려 주위가 은세계로 변했다. 올라갈 때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관이었다. 시커멓던 산도 흰 옷으로 갈아입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사고가 있었다. 대원 한 사람이 배낭 속에 넣어 두었던 돈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큰 돈은 아니라고 한다. 어디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의심스럽기는 그의 배낭을 지고 온 루클라의 포터이지만, 확증이 없다. 우리는 가이드와 포터를 모이게 한 다음 그 이야기를 하고, 하지만 그들이 한 것으로는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포터 중에는 못된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우리 포터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보이면 유혹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날 목표는 올라 올 때 묵었던 텡보체다. 오전 중에는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내려갈 수 있었다. 점심은 팡보체에서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인으로 통할 수 있는 아주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조그만 식당이었다. 아들 같은 소년이 함께 일을 하고 있어 사진을 찍고 나서 물어보니 동네 아이라고 한다. 아들은 카트만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식당을 경영하고 있으니 아들을 유학 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영어를 잘 했고, 음식도 먹을 만했다. 그러나 주방에 내려갔다가 못 볼 것을 보았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주문한 튀긴 만두를 맨손으로 꺼내어 그릇에 담고 있었다.
텡보체에 도착한 우리는 올라갈 때 잤던 그 로지에 다시 들어갔다. 여기서 우리는 실로 오래 간만에 더운물을 한 바케츠씩 사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이제 고소공포증도 없었고, 살 것 같았다. 식당 안의 난로에서는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문명세계로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이다.
나는 컨센트가 있는 주방에 들어가서 노트북으로 사진을 정리했다. 전기 사용료를 150루피 내라고 한다. 자가발전기를 돌리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노트북은 정상적으로 동작했다. 돌아와서 안 것이지만, 노트북의 하드디스크가 낮은 기압에서는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고, 잘못하면 큰 손상이 생긴다고 한다. 노트북이 그럴 정도니 우리 뇌는 괜찮은지 모르겠다. 셀파 중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많다고 한다.
넓은 부엌에는 10W 정도로 보이는 형광등 두개가 켜있을 뿐으로 무척 어둡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모든 물자를 등짐이나 소에 실어 운반해 와야 하기 때문에 연료나 에너지는 귀중품이다. 그래도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지는 않아서, 대부분의 로지에서는 태양전지로 낮에 충전했다가 밤에 형광등을 키고 있고, 위치가 좋은 곳에서는 폭포나 바람을 이용한 소형발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바케츠로 파는 샤워용 더운물도 태양열로 데운 것이다.
4월 4일
영어강사를 했다는 젊은 미국인 부부는 루클라까지 직행한다는데, 우리는 트레킹 첫날 묵었던 팍딩까지만 가기로 했다. 일정이 순조로웠기 때문에 예비일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들릴만한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점심은 올라 올 때 만체바자르에서 묵었던 노를링 로지에서 먹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 잠을 잤다.
우리는 만체바자르를 출발, 현수교를 몇 개 건너면서 귀로를 재촉했다. 항상 그렇듯이 오후가 되자 날씨가 악화되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다가 말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박이 쏟아지더니 폭우로 변했다. 계곡으로 물이 쏟아졌다. 나는 포터가 지고 가는 카고백을 열어 우산과 판쵸를 꺼냈다. 그 비속을 힘들게 걸은 끝에 우리는 5시 쯤 팍딩에 있는 한 로지에 도착했다. 대장은 비가 오자 즉시 근처 로지를 잡을 생각을 했지만, 멀리 나간 선두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밖에서 본 로지는 큼직하고 화려했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방에는 전등도 없었다. 문짝이 맞지 않아 열고 닫기도 힘들었다. 실내화장실이지만 재래식 변기였다. 무엇보다도 돈만 따지는 주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초 계획에는 이 곳에서 이틀간 묵으면서 염소 한 마리를 잡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리는 저녁에 트레킹 시작 후 처음으로 맥주 한 캔씩 마셨다.
이 로지에는 빨간 유니폼까지 갖추어 입은 프랑스의 청소년팀도 묵고 있었다. 이제 막 고소증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트레킹을 시작한 그들에게 우리는 개선장군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칼라파타르의 장관을 설명하는 내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이 날 밤 나는 심한 기침을 했다. 감기에 걸렸다.
4월 5일
우리는 아침 일찍 그 로지를 떠나 가트라는 곳에 우리 팀만으로 방이 차는 조그만 라마 로지에 들었다. 주인이 아주 친절했다. 우리는 빨래를 해서 말리기도 하고 짐을 정리하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되자 어김없이 기상이 악화되고 비가 쏟아졌다. 위에서는 그 비가 눈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올라가는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로지의 길가 식당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들려 차를 마시거나 점심을 먹었다. 혼자서 여행 중이라는 일본인 젊은 여성도 있었고, 나와 똑같은 카메라를 가진 스페인 친구도 있었다. 이름이 오스트라는 이 스페인 친구는 작년에는 피레네산맥을 종단했고, 이번에는 한 달 동안 쿰부지역 모든 곳을 들린다고 했다.
그 친구의 바지가 좋아 보여서 물어보았더니 250달러짜리 스위스제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프로는 아니며, 그냥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일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 날 오후 계획했던 염소를 잡아 잔치를 했다. 팍딩에서 올 때 포터가 어린 염소 한 마리를 끌고 왔는데 바로 그 놈을 잡은 것이다. 이 일대에서는 도살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잡은 다음 가져 왔다고 한다. 루클라에서 고용한 포터 팍상이 솜씨를 부려 요리를 했다. 모두들 맛이 있다고 야단이었다. 포터에게 졸졸 끌려가는 염소가 애처롭다고 하던 여자들도 맛있게 먹었다. 팍상은 10월로 계획하고 있는 마나슬루 트레킹에 아마 요리사로 고용될 것 같다.
저녁에는 모두 기운을 회복해서 파티를 열었다. 포터들은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체력은 물론이고, 노래나 춤... 우리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리에겐 그들처럼 함께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노래가 없다.
4월 6일
가트에서 루클라까지는 그야말로 넘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올 때는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비 덕분으로 길이 깨끗해졌기 때문에 경치를 감상하면서 아주 상쾌한 트레킹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제 고소증이나 체력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역광으로 보이는 주변의 경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아주 조그만 소녀가 도쿠라(대바구니)를 지고 가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노 포토!”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람쥐처럼 다라났다. 저 애가 어른이 될 무렵이면 이런 트레킹은 불가능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클라의 관문을 통과하기 직전 “빈 라덴” 차림이 우리를 맞았다.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한사장 부부였다. 그 동안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근처 3,500m 고도의 산도 올라가 원주민의 생활도 보았다고 한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루클라는 향불이 깔리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라마교의 큰 스님이 방문해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기다렸더니 산에서 그 큰 스님의 행렬이 내려왔다. 사진으로서는 의외의 수확이다. 큰 스님은 가마를 타고 있었다. 보안군이 깔려 경계를 했다.
우리는 루클라 첫 날 점심을 먹었던 레스트랑에서 중국식 국수로 점심을 먹은 다음 루클라의 포터들과 작별했다. 한몫 쥔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남아서 다음 트레킹팀을 기다릴 것이다. 이번에 번 돈은 대부분 어머니에게 갖다 주고, 자기들은 팁으로 준 돈을 쓴다고 한다. 착한 아이들이다.
정원에서는 남자대원들이 그 동안 기른 수염의 모습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한사장은 서울까지 그 모습으로 가겠다고 했다. 언제 다시 이런 수염을 길러볼 것인가.
저녁에는 닭을 잡아 요리를 했다. 한사장이 비장했던 포도주와 소주가 나왔다. 식당에 있던 일본인 한 사람에게 닭죽을 먹어보라고 했더니 입맛을 다시면서 몇 그릇이나 비웠다. 그는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가 먹던 닭죽을 달래 먹었다. 뼈전문가라는 그는 김치를 잘 먹고, 한국친구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천황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실도 이야기 했다. 그는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지식인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항에 바짝 붙어있는 호텔인데도 방에 전등이 없었다. 밤에는 자가발전으로 식당의 전등을 키고 있었다. 충전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200루피를 내란다.
4월 7일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찍 공항으로 갔다. 날씨는 흐렸지만 비행기는 시간에 맞추어 왔다. 이번에는 오른쪽 자리를 잡았다. 히말라야의 산이 보이는데, 올 때만큼 감동은 없다. 아침이라 기류도 안정되어 비행은 순조로웠다.
카트만두는 야당세력이 주동한 번다(스트라이크)가 한창이었다. 공항에 나온 버스나 택시는 번호판을 떼거나 “관광객전용” 간판을 걸고 “불법”운행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번다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기면 불을 지르는 등 보복이 있기 때문에 그런 편법을 쓰는 모양이다. 경찰도 번호판 없이 운행하는 택시를 그냥 보고만 있다. 모든 상가가 철시를 했지만, 문을 반쯤 열어놓거나, 아주 당당하게 열어 놓고 장사를 하는 상점도 있다.
관광객들의 거리 타멜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이렇게 힘들고 불편한 곳인데도, 굳이 오라고 하지 않는데도 관광객들이 넘친다. 한 구석에서 정부군과 게릴라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데도 사람들은 온다. 그 것이 네팔의 매력이다. 철조망을 쳐놓은 금강산에다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우물 안 개구리식 발상이 새삼 우스워진다.
오후에는 소녀 여신 쿠마리가 있다는 사원을 구경했다. 가는 도중 공원부근에서 반정부시위대를 만났다. 그들은 주먹을 휘두르며 “왕 물러가라”를 외쳤다. 망치와 낫을 그린 붉은 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모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랜데.... 이 날 3만 명가량이 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경찰은 왕궁 입구 쪽에 진을 친 채 그냥 바라보고 있었고, 충돌은 없었다. 옛날 우리 역사의 한 시점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2001년 6월, 왕세자였던 아들에게 사살당한 비렌드라 전국왕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 기넨드라왕은 인기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의회정치를 탄압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왕세자는 자동차에 미쳐있다고 한다. 네팔인들의 집에 걸어놓은 왕의 사진은 대부분 현국왕이 아니라 전국왕의 것이다. 쿰중에 있는 힐라리중학교를 방문했던 일본인 말에 의하면 그 학교에는 현국왕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교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에드먼드 힐러리경이 세워준 것으로 유명해진 이 학교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중학교일 것이다.
야당은 의정복구를 요구하고 있고, 모택동주의자라고 부르는 반정부세력은 지방에서 무력투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네팔에 오기 직전 서부지역에서 이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관리와 경찰관 수십 명을 납치했다. 정부군이 즉각 반격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이들 뒤에는 중국과 인도의 영향력 다툼이 있고, 왕정의 존속을 바라는 미국의 입김도 있다고 한다.
이 날 저녁 텔레비전에는 국왕이 군복차람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광경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기도 어용방송이 있다.
4월 8일
번다는 사흘 째 계속되고 있지만, 작은 버스를 하나 전세내서 관광을 하기로 했다. 평상시의 두 배인 4,000루피를 내라고 한다. “관광객전용”지만 위험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자동차가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까 오히려 공기는 깨끗하고 거리가 조용했다. 우리가 탄 차는 거침없이 길을 달려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박타푸르로 갔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마을은 옛 네팔왕국 수도로 당시의 건물이 낡고 찌그러진 상태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그 곳에서 그릇도 만들고, 공예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며칠 묵으면서 둘러보아도 좋을 만큼 과거의 역사가 살아있었다. 입장료 10달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파슈파티나트사원으로 가는 길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사람들이 몰려가는 광경이 보였다. 폭동인가? 운전사는 버스를 길옆으로 빼서 세워놓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잠시 뒤 돌아온 그는 다시 버스를 몰고 나갔다. 차 한 대가 불타고 있었다. 그 것을 보기 위해 사방에서 수천 명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음 날 신문에 그 사진이 나왔는데 왜 불이 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다.
화장터로 더 유명한 파슈파티나트사원은 두 번째지만, 처음 가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다시 들어갔다. 상류쪽 다리 바로 아래서 화장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곳은 돈이 있는 사람들의 화장터다. 사람들의 입은 옷이나 반듯한 장작더미가 그것을 말해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의식을 그대로 찍을 수 있었다. 슬퍼하는 여인 (부인일까), 손을 모으고 하늘을 응시하는 남자(아들일까)가 있었다. 장작더미 위에 놓인 시체의 머리와 늘어진 팔이 보였다.
상주는 머리를 면도로 밀고, 벌거벗은 몸을 흰 헝겊으로 한 장으로 허리를 두른다. 태어났을 때의 모습일 수도 있고,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데 대한 징벌일지도 모른다. 시신 주위를 몇 번 돌던 상주는 장작에 불을 붙인다.
그 다음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원이었다. 거대한 돔이 인상적이지만, 그저 한번 보고 지나갈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번다 속에서도 알찬 카트만두 근교관광은 끝났다.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권장하고 싶은 코스다.
저녁은 서드아이라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영국산 쇠고기라는데 정말 환상적이었다. 모두들 한 점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다. 세계에서 이렇게 맛있는 스테이크를 이렇게 싼 값으로 먹을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을 것이다.
4월 9일
아침 일찍 카트만두공항으로 갔다. 이제 방콕을 거쳐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지막 휴대품검사를 한 자리였다. 검사원은 배낭 속에 들어있던 꿀을 빼놓았다.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10달러를 보이지 않게 배낭 안에 내놓으란다.
잠시 생각했다. 항의를 할 것인가. 20여 년 전의 우리 공항이 생각났다. 이런 것을 부패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루클라로 떠날 때도 공항에서 보안요원이 대장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생존수단일지 모른다. 부패나 부정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생각해 보았는가. 나는 돈을 주었다. 지금도 내가 한 결정이 잘 한 것인지 확신이 없다. 다음에 갈 때는 꿀은 짐 속에 넣어야겠다.
가지고 갔던 책은 방콕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다 끝냈다. 책 소개가 그럴 듯 했고, 저자가 퓰리처수상자라고 해서 거의 39달러나 주고 속달로 주문했는데 속았다. 내용이 좋으면 번역을 해서 다음 트레킹 비용을 마련할 생각이었는데.
타멜에서 네팔의 전통칼 꾸꾸리를 기념물로 사왔던 한 대원은 인천공항에서 “도검류”라고 뺏겼다. 날이 시퍼런 주방용 식도는 괜찮고, 장식용으로밖에 쓸 수 없는 “도검”은 안 된다는 게 우리나라의 제도다. 세계 최악이라는 네팔의 관료제도보다 나을 게 전혀 없다.
카메라는 서비스센터에 가지고 갔더니 두말없이 단 하루 만에 고쳐주었다.
첫댓글 상현언니는 귀국 후 이빨을 다뽑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하던데 그래도 마냥 넘치도록 즐거워합니다. 전화통화하는 동안 저 또한 덩달아 흥분했습니다. 누군가 그러데요! 네팔을 다녀온 사람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동감하시죠?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을 겁니다. 자꾸 가야죠. 칼라파타르 트레킹은 마영희가 꼭 참가했어야 했는데.
함께 못했어도. 글과 사진을 보니 함께 갔다온 기분으로 흥분이 되네요. 상현 누님 건강 빨리 회복하셔요. 백두산님은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