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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十五回 華元登牀劫子反 老人結草亢杜回
제55회: 화원이 침상에 올라 자반을 위협하고, 노인이 풀을 맺어 두회에 저항하다.
話說,楚莊王大集群臣,計議卻晉之事。公子側進曰:「楚所善無如齊,而事晉之堅,無過於宋。若我興師伐宋,晉方救宋不暇,敢與我爭鄭乎?」莊王曰:「子策雖善,然未有隙也。自先君敗宋於泓,傷其君股,宋能忍之。及厥貉之會,宋君親受服役。其後昭公見弒,子鮑嗣立,今十八年矣,伐之當奉何名?」公子嬰齊對曰:「是不難。齊君屢次來聘,尚未一答。今宜遣使報聘於齊,竟自過宋,令勿假道,且以探之。若彼不較,是懼我也,君之會盟,必不拒矣。如以無禮之故,辱我使臣,我借此為辭,何患無名哉?」莊王曰:「何人可使?」嬰齊對曰:「申無畏曾從厥貉之會,此人可使也。」
한편, 초장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진(晉)나라 군사를 물리칠 계책을 의논했다. 공자 측이 나와서 말하기를, “초나라와 사이가 좋기로는 제나라만한 나라가 없고, 진(晉)나라를 굳게 받들기로는 송나라보다 더한 나라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토벌한다면 진(晉)나라는 송나라를 구하느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감히 정나라를 놓고 우리와 다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계책은 비록 훌륭하기는 하지만, (명분으로 내세울) 빈틈이 없소. 돌아가신 초성왕께서 홍수에서 송나라 군사들을 패배시키고 송양공의 팔에 상처를 입혔으나, 송나라는 인내하였소. 궐맥(厥貉)의 회맹에서 송소공(宋昭公)이 친히 일을 당하였고, 그 뒤 송소공이 시해되고 공자 포(鮑)가 자리를 이어받아 지금 18년이 되었소. 마땅히 무슨 명분으로 토벌하겠소?” 했다. 공자 영제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나라 군주가 여러 번 사자를 보냈으나 우리는 아직 한번도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마땅히 제나라에 답례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결국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빌려주지 않을지 탐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따지지 않고 길을 빌려준다면 이는 우리 초나라를 두려워함이니 대왕께서 회맹을 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무례하게 우리 사신을 욕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실 삼을 수 있으니, 어찌 명분이 없음을 걱정하십니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누구를 사자로 보내면 되겠는가?” 하니, 공자 영제가 대답하기를, “신무외(申無畏)가 일찍이 궐맥(厥貉)의 회맹에 따라갔으니, 그를 사자로 보내면 됩니다.” 했다.
莊王乃命無畏如齊修聘。無畏奏曰:「聘齊必經宋國,須有假道文書送驗,方可過關。」莊王曰:「汝畏阻絕使臣耶?」無畏答曰:「向者厥貉之會,諸君田於孟諸,宋君違令,臣執其僕而戮之,宋恨臣必深﹔此行若無假道文書,必然殺臣。」莊王曰:「文書上與汝改名曰申舟,不用無畏舊名可矣。」無畏猶不肯行,曰:「名可改,面不可改。」莊王怒曰:「若殺子,我當興兵破滅其國,為子報仇!」無畏乃不敢復辭。明日,率其子申犀,謁見莊王曰:「臣以死殉國,分也:但願王善視此子。」莊王曰:「此寡人之事,子勿多慮。」
초장왕은 즉시 신무외(申無畏)를 불러 제나라에 사자로 가라고 했다. 신무외가 아뢰기를, “제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송나라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길을 빌려 달라는 문서를 확인한 다음에 관문을 통과시킬 것입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경은 길이 막힐까 두려워 사신으로 가지 않겠다는 것이오?” 했다. 신무외가 대답하기를, “지난날 궐맥의 회맹에서 여러 나라 군주들이 맹제(孟諸)에서 사냥할 때 송나라 군주가 명령을 어겨 신이 그 종들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송나라는 신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만일 길을 빌려 달라는 문서도 없이 송나라로 들어간다면 그들은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문서상에 그대의 이름을 바꾸어 신주(申舟)로 하고 무외(無畏)라는 옛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될 것이오.” 했다. 신무외가 여전히 가지 않으려 하며 말하기를, “이름은 바꿀 수 있어도 얼굴은 바꿀 수 없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만일 그대를 죽이면 내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멸망시켜 그대의 원수를 갚겠소!” 했다. 신무외는 이에 감히 다시 사양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는 아들 신서(申犀)를 데리고 와서 초장왕에게 알현시키면서 말하기를, “신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의 본분입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이 아들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것은 과인의 일이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했다.
申舟領了出使禮物,拜辭出城。子犀送至郊外,申舟吩咐曰:「汝父此行,必死於宋。汝必請於君王,為我報仇,切記吾言!」父子灑淚而別。不一日,行至睢陽,關吏知是楚國使臣,要索假道文驗。申舟答言:「奉楚王之命,但有聘齊文書,卻沒有假道文書。」關吏遂將申舟留住,飛報宋文公。時華元為政,奏於文公曰:「楚,吾世仇也。今遣使公然過宋,不循假道之禮,欺我甚矣!請殺之!」宋公曰:「殺楚使,楚必伐我,奈何?」華元對曰:「欺我之恥,甚於受伐﹔況欺我,勢必伐我。均之受伐,且雪吾恥。」
신주는 사신이 가져가야 할 예물을 수령하고 초장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후에 영성(郢城)을 나갔다. 아들 신서는 송별하려고 교외에 나왔다. 신무외가 당부하기를, “네 아버지는 이번에 가면 반드시 송나라에서 죽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군왕에게 청하여 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내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했다. 부자가 눈물을 뿌리면서 헤어졌다. 곧 신무외 일행이 수양(睢陽)에 이르니,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초나라 사신을 알아보고 길을 빌리는 문서를 요구했다. 신주가 대답하기를, “초장왕의 명령을 받들어 제나라에 가는 사신이라 제나라의 초빙 문서는 가지고 있지만, 길을 빌리는 문서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니,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신주를 관문 밖에 머물게 하고 송문공에게 급히 알렸다. 그때 송나라는 화원(華元)이 정사를 맡고 있었다. 화원이 송문공에게 아뢰기를, “초나라는 우리와 대대로 원수지간입니다. 지금 사자가 공공연히 송나라를 지나가면서 길을 빌리는 예의도 차리지 않으니 우리를 심히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청컨대 사자를 죽이십시오.” 하니, 송문공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신을 죽이면 초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칠 것이오.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했다. 화원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업신여김을 받는 수치가 침략을 받는 것보다 더욱 심합니다. 더욱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우리를 칠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정벌을 받을 바에야 우리가 받은 치욕을 갚아야 합니다.” 했다.
乃使人執申舟至宋廷,華元一見,認得就是申無畏,怒上加怒,責之曰:「汝曾戮我先公之僕,今改名,欲逃死耶?」申舟自知必死,大罵宋鮑:「汝奸祖母,弒嫡姪,幸免天誅﹔又妄殺大國之使,楚兵一到,汝君臣為虀粉矣!」華元命先割其舌,而後殺之。將聘齊的文書禮物,焚棄於郊外。從人棄車而遁,回報莊王。莊王方進午膳,聞申舟見殺,投箸於席,奮袂而起。即拜司馬公子側為大將,申叔時副之,立刻整車,親自伐宋,使申犀為軍正,從征。按申舟以夏四月被殺,楚兵以秋九月即造宋境,可謂速之至矣!潛淵有詩云:「明知欺宋必遭屯,君命如天敢惜身?投袂興師風雨至,華元應悔殺行人。」
이에 송문공은 사람을 보내 신주(申舟)를 송나라 조정으로 잡아오게 했다. 화원이 초나라의 사신을 한 번 보고 그가 신무외라는 것을 알았다. 화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일찍이 우리 선군의 종들을 죽여놓고, 지금 이름을 바꾼다고 죽음을 피할 것 같으냐?” 하니, 신주가 자신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송문공 포(鮑)를 보고 크게 꾸짖기를, “너는 할머니를 범하고 적자인 조카 소공(昭公)을 죽였다. 요행히 하늘의 죽임을 면했으나, 또한 대국의 사자를 함부로 죽여서 초나라 군사가 도착하면 너희들 군신들은 가루가 될 것이다.” 했다. 화원이 명령하여 먼저 신무외의 혀를 자른 후에 죽였다. 제나라에 바치려고 가져가던 문서와 예물은 교외에서 불태워 버렸다. 수행원들이 수레를 버리고 달아나 초장왕에게 보고했다. 초장왕이 바야흐로 점심을 먹다가 신주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젓가락을 자리에 던져 버리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곧 사마 공자 측(公子側)을 대장으로 삼고 신숙시(申叔時)를 부장으로 삼아 바로 전차를 정비하여 친히 송나라를 쳤다. 신서를 불러 군정(軍正 ; 군 법무관)으로 삼아 종군하게 하였다. 신주가 그해 여름 4월에 피살되었고 초군이 송나라 경계에 도착한 것은 그해 가을 9월이니 아주 신속한 출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연(潛淵) 선생은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송나라를 업신여겨 목숨을 잃게 될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하늘과 같은 군왕의 명령이라 감히 몸을 아끼리오?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군사를 일으켜 비바람처럼 도착하니, 화원은 지나가는 손님을 죽인 것을 응당 후회하게 되었다.” 했다.
楚兵將睢陽城圍困,造樓車高與城等,四面攻城。華元率兵民巡守,一面遣大夫樂嬰齊奔晉告急。晉景公欲發兵救之。謀臣伯宗諫曰:「林父以六百乘而敗於邲城,此天助楚也,往救未必有功。」景公曰:「當今惟宋與晉親,若不救,則失宋矣。」伯宗曰:「楚距宋二千里之遙,糧運不繼,必不能久。今遣一使往宋,只說:『晉已起大軍來救。』諭使堅守。不過數月,楚師將去。是我無敵楚之勞,而有救宋之功也。」景公然其言,問:「誰能與我使宋國者?」大夫解揚請行。景公曰:「非子虎不勝此任也。」解揚微服行及宋郊,被楚之遊兵盤詰獲住,獻於莊王。
초나라 군사들이 수양성을 포위하고 성 높이와 같은 누거(樓車)를 만들어 사면에서 성을 공격하였다. 화원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순찰하는 한편 대부 낙영제(樂嬰齊)를 진(晉)나라에 보내 위급을 알렸다. 진경공(晉景公)이 군사를 일으켜 구하려고 하니, 꾀가 있는 신하 백종(伯宗)이 간하기를, “순림보가 600대의 전차로 정나라를 구하러 갔다가 필(邲)에서 초나라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를 구하러 군대를 보내도 틀림없이 공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지금 오직 송나라와 진(晉)나라가 친한데 만일 구하지 않는다면 송나라를 잃을 것이다.” 하니, 백종이 말하기를, “초나라는 송나라까지 2천 리나 떨어져 있어, 군량을 운반하기가 쉽지 않아 반드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사자 한 사람을 송나라에 보내, 다만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이미 대군을 일으켜 구하러 온다.’라고 하고, 견고히 지키게만 하십시오. 그러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초나라 군사는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초나라와 대적하는 수고를 치르지 않고 송나라를 구하는 공로가 있게 될 것입니다.” 했다. 진경공이 그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묻기를, “누가 능히 송나라에 사자로 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부 해양(解揚)이 가기를 청했다. 진경공이 말하기를, “자호(子虎 ; 해양)가 아니면 이 임무를 맡을 수 없다.” 했다. 해양이 미복으로 송나라 도성 밖에 도착했다가 초나라의 순찰병에게 발견되어 심문당하여 초장왕에게 바쳐졌다.
莊王認得是晉將解揚,問曰:「汝來何事?」解揚曰:「奉晉侯之命,來諭宋國,堅守待救。」楚莊王曰:「原來是晉使臣!爾前者北林之役,汝為我將蒍賈所擒,寡人不殺,放汝回國﹔今番又來自投羅網,有何理說?」解揚曰:「晉楚仇敵,見殺分也,又何說乎?」莊王搜得身邊文書,看畢,謂曰:「宋城破在旦夕矣,汝能反書中之言,說汝國中有事,『急切不能相救,恐誤你國之事,特遣我口傳相報。』如此,則宋人絕望,必然出降,省得兩國人民屠戮之慘。事成之日,當封你為縣公,留仕楚國。」解揚低頭不應。莊王曰:「不然,當斬汝矣!」
초장왕은 진나라 장수 해양을 알아보고 묻기를,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하니, 해양이 말하기를, “진경공의 명령을 받들어 진(晉)나라 구원병이 올 때까지 굳게 지키도록 송나라에 권유하러 왔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원래는 진(晉)나라 사신으로 왔겠지! 너는 전날 북림(北林)의 싸움에서 우리 위가(蔿價) 장군에게 사로잡혀 온 것을 내가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 주었더니, 이번에 다시 우리의 그물에 걸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하니, 해양이 말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는 원수 간이니, 죽임을 당할 뿐이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해양의 몸을 수색하여 문서를 얻었다. 그 문서를 읽고 말하기를, “송나라 도성은 아침저녁에 함락될 것이다. 너는 편지의 내용과는 반대로 진나라에 일이 있어서 ‘급히 구해줄 수가 없어, 너희 나라의 일이 잘못될까 걱정되어 특별히 나를 보내 입으로 전하게 했다.’라고 하면, 송나라 사람들은 절망하여 반드시 나와서 항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초나라와 송나라의 많은 인민을 죽이는 참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성사되면 마땅히 너를 봉하여 현공으로 삼아 초나라에 머물러 벼슬하게 하겠다.” 하니, 해양이 머리를 숙이고 응하지 않았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러지 않겠다면, 마땅히 너를 참수할 수밖에 없다.” 했다.
解揚本欲不從,恐身死於楚軍,無人達晉君之命,乃佯許曰:「諾。」莊王升解揚於樓車之上,使人從旁促之。揚遂呼宋人曰:「我晉國使臣解揚也。被楚軍所獲,使我誘汝出降。汝切不可!我主公親率大軍來救,不久必至矣。」莊王聞其言,命速牽下樓車,責之曰:「爾既許寡人,而又背之,爾自無信,非寡人之過也。」叱左右斬訖報來。解揚全無懼色,徐聲答曰:「臣未嘗無信也。臣若全信於楚,必然失信於晉,假使楚有臣而背其主之言,以取賂於外國,君以為信乎?不信乎?臣請就誅,以明楚國之信,在外不在內!」莊王嘆曰:「『忠臣不懼死。』子之謂矣!」縱之使歸。
해양은 원래 초장왕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했으나, 초나라의 군중에서 죽으면 진나라 군주의 명을 송나라에 전할 길이 없음을 걱정하여, 거짓으로 허락하여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했다. 초장왕은 해양을 누거(樓車) 위에 올려서 사람을 시켜 재촉하게 했다. 해양이 마침내 송나라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진나라 사신 해양이다. 나는 지금 초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은 나에게 송나라가 항복하도록 권유하라고 한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항복하면 안 된다. 우리 주공께서 친히 대군은 거느리고 여러분들을 구원하려고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다.” 했다. 초장왕이 그 말을 듣고 빨리 누거에서 끌어내리라고 명령하여, 그를 꾸짖기를, “너는 이미 나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고, 다시 배신했으니 네 스스로 신의가 없어서 죽는 것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다.” 하고, 좌우에 소리쳐 해양을 참한 후에 보고하라고 했다. 그러나 해양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신은 신의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신이 만약 오로지 초나라에 신의를 지킨다면, 반드시 진나라에 신의를 잃는 것입니다. 가령 초나라의 신하가 주군의 말을 배신하여 외국의 뇌물을 받는다면 군주께서는 그것을 신의라고 하겠습니까? 신의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신은 죽기를 청하여, 초나라의 신의는 외국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자기 나라 사람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해양을 석방하여 돌아가게 했다.
宋華元因解揚之告,繕守益堅。公子側使軍士築土堙於外,如敵樓之狀,親自居之,以闞城內,一舉一動皆知。華元亦於城內築土堙以向之。自秋九月圍起,至明年之夏五月,彼此相拒九個月頭,睢陽城中,糧草俱盡,人多餓死。華元但以忠義激勸其下,百姓感泣,甚至易子為食,拾骸骨為爨,全無變志。莊王沒奈何了。軍吏稟道:「營中只有七日之糧矣!」莊王曰:「吾不意宋國難下如此!」乃親自登車,閱視宋城,見守陴軍士,甚是嚴整,嘆了一口氣,即召公子側議班師。
송나라의 화원은 해양이 전한 말을 듣고, 성을 수리하여 더욱 굳게 지켰다. 공자 측(公子側)은 군사를 시켜 성밖에 토산을 쌓았다. 토산은 마치 높은 망루와 같아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수양성 안의 일거일동을 살펴 알았다. 화원도 역시 성안에서 토산을 쌓아 마주 보게 했다. 가을 9월부터 포위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여름 5월이 되었다. 피차간에 아홉 달 동안 대치하여 수양성 안에는 식량과 마초가 모두 바닥나고 사람들도 많이 굶어 죽었다. 화원은 다만 충의로 그 부하들을 격려하고 백성들을 감읍시켜, 심지어 자식들을 바꾸어 잡아먹고 해골을 주워 땔감으로 했지만 투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초장왕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군리(군 사무관)가 아뢰기를, “군중에 다만 7일분의 양식이 있습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나는 송나라를 파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하고, 스스로 전차를 타고 송나라의 도성을 살펴보면서 송나라의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아주 엄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입으로 한숨을 쉬고 곧 공자 측을 불러 철군을 의논했다.
申犀哭拜於馬前曰:「臣父以死奉王之命,王乃失信於臣父乎?」莊王面有慙色。申叔時時為莊王執轡在車,乃獻計曰:「宋之不降,度我不能久耳。若使軍士築室耕田,示以長久之計,宋必懼矣。」莊王曰:「此計甚善!」乃下令,軍士沿城一帶起建營房,即拆城外民居,并砍伐竹木為之。每軍十名,留五名攻城,五名耕種,十日一更番,軍士互相傳說。華元聞之,謂宋文公曰:「楚王無去志矣!晉救不至,奈何?臣請入楚營,面見子反,劫之以和,或可僥倖成事也。」宋文公曰:「社稷存亡,在此一行,小心在意!」
신서가 초장왕의 말 앞에서 절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의 아비는 왕의 명령을 받들다가 죽었는데, 왕께서는 신의 아비에게 신의를 잃을 것입니까?” 하니, 초장왕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그때 신숙시가 초장왕의 전차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다가 계책을 말하기를, “송나라가 항복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머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군사들에게 막사를 짓고 농사를 짓게 하여 오래 버틸 계획을 보여주면 송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아주 좋소.” 하고, 이에 명령을 내려 군사들에게 수양성을 따라 그 일대에 성 밖 민가를 헐거나 대나무를 잘라서 막사를 짓고, 군사 10명 중 5명은 남아서 성을 공격하고 5명은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며, 열흘에 한 번씩 교대했다. 군사들이 서로 말을 전하여, 화원도 그것을 듣고 송문공에게 말하기를, “초장왕이 물러갈 뜻이 없습니다. 진(晉)나라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신이 청컨대 초나라 진영에 들어가서 자반(子反 ; 공자 측)을 만나 겁박하여 화의를 맺겠습니다. 혹시 요행으로 성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송문공이 말하기를, “사직의 존망이 이번 행차에 달렸으니 부디 조심하시오.” 했다.
華元探知公子側在土堙敵樓上住宿,預得其左右姓名,及奉差守宿備細。捱至夜分,扮作謁者模樣,悄地從城上縋下,直到土堙邊。遇巡軍擊柝而來,華元問曰:「主帥在上乎?」巡軍曰:「在。」又問曰:「已睡乎?」巡軍曰:「連日辛苦,今夜大王賜酒一罇,飲之已就枕矣。」華元走上土堙,守堙軍士阻之。華元曰:「我謁者庸僚也。大王有緊要機密事吩咐主帥。因適纔賜酒,恐其醉臥,特遣我來當面叮囑,立等回復。」軍士認以為真,讓華元登堙。堙內燈燭尚明,公子側和衣睡倒。華元逕上其床,輕輕的以手推之。公子側醒來,要轉動時,兩袖被華元坐住了。急問:「汝是何人?」
화원은 공자 측이 토산 위의 망루 위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좌우 측근들의 성명을 탐문하여 미리 알아 놓고, 또한 지키는 초병들의 거처도 자세하게 파악했다. 밤이 되자, 화원은 전령 모습으로 분장하고 조심스럽게 성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곧바로 토산 쪽으로 다가갔다. 순찰병이 딱딱이를 치며 오는 것을 만나자 화원이 묻기를, “원수께서는 위에 계시는가?” 하니, 순찰병이 말하기를, “계십니다.” 했다. 화원이 또 묻기를, “벌써 주무시는가?” 하니, 순찰병이 말하기를, “연일 노고가 많아서 오늘 밤에는 대왕께서 술 한 통을 하사하셔서 술을 마시고 이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했다. 화원이 토산 쪽으로 달려가니 토산을 지키는 군사가 저지했다. 화원이 말하기를, “나는 대왕의 전령 용료(庸僚)다. 대왕께서 긴급한 기밀 사항을 원수께 분부하셨다. 조금 전에 하사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웠을까 걱정하여 특별히 나를 보내어 원수께서 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대면하여 분부를 전달하라고 하셨다.” 하니, 군사가 그것이 참말인 줄 알고 토산 위로 올라가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토산 위의 망루에 등불이 밝게 켜져 있고, 공자 측이 옷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화원이 곧바로 침상 위에 올라가 가벼이 손으로 밀었다. 공자 측은 깨어나서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양쪽 소매를 화원이 깔고 앉았다. 공자 측이 급히 묻기를, “너는 누구냐?” 했다.
華元低聲答曰:「元帥勿驚,吾乃宋國右師華元也。奉主公之命,特地夜至求和。元帥若見從,當世從盟好﹔若還不允,元與元帥之命,俱盡於今夜矣!」言畢,左手按住臥席,右手於袖中掣出雪白一柄匕首,燈光之下,晃上兩晃。公子側慌忙答曰:「有事大家商量,不須粗鹵。」華元收了匕首,謝曰:「死罪勿怪!情勢已急,不得從容也。」公子側曰:「子國中如何光景?」華元曰:「易子而食,拾骨而爨,已十分狼狽矣。」公子側驚曰:「宋之困敝,一至此乎?吾聞軍事『虛者實之,實者虛之』。子奈何以實情告我?」華元曰:「『君子矜人之危,小人利人之危。』元帥乃君子,非小人,元是以不敢匿情。」
화원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하기를, “원수께서는 놀라지 마시오. 나는 송나라의 우사(右師) 화원(華元)이오. 주공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밤에 강화를 요청하러 왔소. 원수께서 만약 내 요청을 따른다면 지금 동맹을 맺겠지만, 만일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면 너와 원수의 목숨은 오늘 밤에 끝나게 될 것이오.” 하고, 말을 마치자 왼손으로는 누워 있는 공자 측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소매 안에서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를 꺼냈다. 등불 아래 비수가 밝게 빛났다. 공자 측이 황망 중에 대답하기를,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상의하여 해결하면 되지 이렇게 거칠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니, 화원이 비수를 거두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만 괴이하게 생각지 마시오. 정세가 이미 급하여 조용히 할 수가 없었소.”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형편은 어떠하오?”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아이들을 바꿔서 잡아먹고 해골을 주워다 땔감으로 하니, 참으로 낭패한 지경이오.” 했다. 공자 측이 놀라 말하기를, “송나라의 곤란함이 이렇게까지 되었소? 내가 알기로 병법에 ‘허(虛)는 실(實)처럼 보이게 하고 실(實)은 허(虛)처럼 보이게 한다’고 했소. 그대는 무엇 때문에 실정을 나에게 고하시오?”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어려움을 동정하고, 소인은 남의 어려움을 이용한다.’고 하였소. 원수께서는 군자이지 소인이 아닐 것이오. 그래서 성안의 사정을 감히 숨기지 않았소.” 했다.
公子側曰:「然則何以不降?」華元曰:「國有已困之形,人有不困之志。君民效死,與城俱碎,豈肯為城下之盟哉?倘蒙矜厄之仁,退師三十里,寡君願以國從,誓無二志!」公子側曰:「我不相欺,軍中亦止有七日之糧矣。若過七日,城不下,亦將班師。築室耕田之令,聊以相恐耳。明日我當奏知楚王,退軍一舍﹔爾君臣亦不可失信。」華元曰:「元情願以身為質,與元帥共立誓詞,各無反悔。」二人設誓已畢,公子側遂與華元結為兄弟,將令箭一枝付與華元,吩咐:「速行。」華元有了令箭,公然行走,直到城下,口中一個暗號,城上便放下兜子,將華元吊上城堙去了。華元連夜回復宋公,歡歡喜喜,專等明日退軍消息。
공자 측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소?”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나라 안은 이미 곤궁한 형편이지만 사람들의 투지는 시들지 않았소. 임금과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성과 함께 깨어지려 하는데 어찌 성을 내려와서 항복하겠소? 만일 송나라의 어려움을 동정하는 어진 마음을 베풀어서 군사를 30리만 물려 주시면 우리 주군께서 초나라를 따르고 맹세컨대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오.” 했다. 공자 측이 말하기를, “나도 속이지 못하겠소. 초나라의 군중에는 다만 7일분의 양식이 있을 뿐이오. 만약 7일이 지나도 성이 함락되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회군해야 하오. 막사를 짓고 밭을 갈라는 명령은 오로지 상대를 두렵게 하려는 것일 뿐이오. 내일 내가 대왕께 아뢰어서 일사(一舍 ; 3십리)를 퇴군하겠소. 그대 나라의 주군과 신하도 또한 신의를 잃지 마시오.” 했다. 화원이 말하기를, “이 화원이 진정으로 몸소 인질이 되어 원수와 함께 맹세를 하겠으니, 각각 후회하여 뒤집지 않기를 바라오.” 했다. 두 사람이 맹세한 다음, 공자 측은 마침내 화원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공자 측은 화원에게 영전(令箭 ; 군령전달용 화살) 한 개를 주며, 분부하기를 , “빨리 가시오.” 했다. 화원은 영전을 가지고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성 밑에 와서 암호를 외치니, 성 위에서 바구니가 내려와서 화원을 성 위의 토산으로 끌어 올렸다. 화원은 밤사이에 돌아와 송문공에게 복명하니 아주 기뻐하며, 다음 날 초나라 군사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次早天明,公子側將夜來華元所言,告於莊王,言:「臣之一命,幾喪於匕首。幸華元仁心,將國情實告於我,哀懇退師﹔臣已許之。乞我王降旨!」莊王曰:「宋困憊如此,寡人當取此而歸。」公子側頓首曰:「我軍止有七日之糧,臣已告之矣。」莊王勃然怒曰:「子何為以實情輸敵?」公子側對曰:「區區弱宋,尚有不欺人之臣﹔豈堂堂大楚,而反無之?臣故不敢隱諱。」莊王顏色頓霽曰:「司馬之言是也!」即降旨退軍,屯於三十里之外。申犀見軍令已出,不敢復阻,捶胸大哭。
다음날, 날이 밝자 공자 측은 지난밤에 화원이 한 이야기를 초장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의 목숨이 비수에 거의 끊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화원이 인정을 베풀었고, 송나라 도성 안의 사정을 사실대로 알리면서 군사를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신은 이미 그의 청을 허락했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송나라가 이렇게까지 곤란한 지경이라면 과인은 마땅히 송나라를 취한 뒤에 돌아가겠다.” 했다. 공자 측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의 군량이 7일분 밖에 없다고 신이 이미 알려 버렸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버럭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자하(子何 : 공자 수)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의 실정을 적에게 알려 주었단 말인가?” 했다. 공자 측이 대답하기를, “작고 약한 송나라가 남의 신하에게 속이지 않았는데, 어찌 당당하고 큰 초나라가 도리어 그보다 못하겠습니까? 신은 그래서 감히 숨기지 못했습니다.” 하니, 초장왕의 얼굴에 노여움이 사라지며 말하기를, “사마(司馬)의 말이 맞소!” 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30리 밖으로 퇴군하여 주둔했다. 신서는 군령이 이미 내려져서 감히 다시 간하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했다.
莊王使人安慰之曰:「子勿悲,終當成汝之孝。」楚軍安營已定,華元先到楚軍,致宋公之命,請受盟約。公子側隨華元入城,與宋文公歃血為誓。宋公遣華元送申舟之棺於楚營,即留身為質。莊王班師歸楚,厚葬申舟,舉朝皆往送葬。葬畢,使申犀嗣為大夫。華元在楚,因公子側又結交公子嬰齊,與嬰齊相善。一日,聚會之間,論及時事,公子嬰齊嘆曰:「今晉楚分爭,日尋干戈,天下何時得太平耶?」華元曰:「以愚觀之,晉楚互為雌雄,不相上下,誠得一人合二國之成,各朝其屬,息兵修好,生民免於塗炭,誠為世道之大幸!」
초장왕이 신서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상심하지 말라. 언젠가는 그대의 효심이 이루어질 것이다.” 했다. 초나라 군사가 진영을 이미 세우자, 화원이 먼저 초나라 진영에 도착하여 송문공의 뜻을 전하여 맹약을 맺겠다고 청했다. 공자 측이 화원을 따라 송나라 도성에 들어가서 송문공과 피를 입술에 발라 맹세했다. 송문공은 화원을 시켜 신주(申舟)의 관을 초나라 진영에 보내고, 초나라에 인질로 머물게 했다. 초장왕은 군대를 거두어 초나라에 돌아갔다. 신주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하고, 모든 조정 대신들이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장례가 끝나자 신서에게 대부의 직을 잇게 했다. 화원이 초나라에 있을 때 공자 측으로 인해 공자 영제와도 서로 사귀어 친하게 되었다. 하루는 서로 모여 시국에 관해 논했는데, 공자 영제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다투어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하니, 천하가 언제 태평하겠는가?”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자웅을 겨루어 서로 간에 상하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한 사람이 나서서 두 나라를 화친케 하고, 각기 그 속국의 조현을 받으며 군대를 쉬고 수호를 맺게 하면,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여 진실로 세상을 위한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했다.
嬰齊曰:「此事子能任之乎?」華元曰:「元與晉將欒書相善,向年聘晉時,亦曾言及於此。奈無人從中聯合耳。」明日,嬰齊以華元之言,告於公子側。側曰:「二國尚未厭兵,此事殆未可輕議也。」華元留楚凡六年,至周定王十八年,宋文公鮑卒,子共公固立,華元請歸奔喪,始返宋國。此是後話。卻說,晉景公聞楚人圍宋,經年不解,謂伯宗曰:「宋之城守倦矣。寡人不可失信於宋,當往救之。」正欲發兵,忽報:「潞國有密書送到。」按潞國乃赤狄別種,隗姓,子爵,與黎國為鄰。周平王時,潞君逐黎侯而有其地,於是赤狄益強。
공자 영제가 말하기를, “그 일을 그대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화원이 말하기를, “저와 진(晉)나라 장수 난서는 서로 친합니다. 지난날 제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역시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했다. 다음날 공자 영제가 화원의 말을 공자 측에게 전하니, 공자 측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아직 군사를 거둘 뜻이 없으니, 이 일을 가볍게 거론할 수 없습니다.” 했다. 화원은 초나라에서 6년을 머물다가, 주정왕 18년(기원전 588년)에 송문공 포(鮑)가 죽고 그 아들 송공공(宋共公) 고(固)가 즉위하자, 화원이 국상을 치르려고 귀국을 청해 비로소 송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후일의 일이다. 한편, 진경공(晉景公)은 초나라 군대가 송나라를 포위하고 1년이 지나도록 풀지 않자, 백종에게 말하기를, “송나라가 도성을 지키느라 지쳤을 것이다. 과인이 송나라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마땅히 군사를 보내 구원해야겠다.” 하고, 구원군을 동원하려고 할 때, 갑자기 보고하기를, “노(潞)나라에서 밀서를 보냈다.”라고 했다. 노(潞)나라는 적적(赤狄)의 별종으로 외(隗)성이며 봉호는 자작(子爵)이고 여(黎)나라와 이웃하였다. 주평왕 때 노(潞)나라 군주가 여(黎)나라 군주를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여 이에 적적(赤狄) 노나라가 더욱 강해졌다.
此時潞子名嬰兒,娶晉景公之娣伯姬為夫人。嬰兒微弱,其國相酆舒,專權用事。先時,狐射姑奔在彼國,他是晉國勳臣,識多才廣,酆舒還怕他三分,不敢放恣。自射姑死後,酆舒益無忌憚,欲潞子絕晉之好,誣伯姬以罪,逼其君使縊殺之。又與潞子出獵郊外,醉後君臣打彈為戲,賭彈飛鳥。酆舒放彈,誤傷潞子之目,投弓於地,笑曰:「彈得不准,臣當罰酒一巵!」潞子不堪其虐,力不能制,遂寫密書送晉,求晉起兵來討酆舒之罪。謀臣伯宗進曰:「若戮酆舒,兼並潞地,因及旁國,盡有狄土,則西南之疆益拓,而晉之兵賦益充,此機不可失也。」
그때 노(潞)나라 군주는 이름이 영아(嬰兒)인데, 경공의 여동생 백희(伯姬)를 부인으로 삼았다. 영아가 나약하여 그 나라 재상인 풍서(酆舒)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전에 진(晉)나라 장군 호사고(狐射姑)가 이 나라에 피신해 왔는데, 그는 진나라 공신으로 식견이 넓고 재능이 많아서 풍서가 약간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호사고가 죽은 후에 풍서는 꺼릴 것이 없이, 노(潞)나라 군주와 진나라의 친선관계를 끊기 위해 백희를 무고하여 죄를 씌워서 그 군주로 하여금 그녀를 목매달아 죽이게 하였다. 또한 풍서는 노(潞)나라 군주와 함께 교외로 사냥을 나가서 취한 후에 군주와 신하가 같이 술에 취해 탄환 쏘기 놀이를 하다가 나는 새를 쏴서 맞추는 내기를 하였다. 풍서가 탄환을 쐈으나 잘못하여 노나라 군주의 눈을 상하게 했다. 풍서가 활을 땅바닥에 던지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탄환이 맞지 않았으니 신이 벌주 한 잔을 들겠습니다.” 했다. 노나라 군주가 풍서의 학대를 참을 수 없었으나 힘으로 제어할 수가 없어, 마침내 밀서를 써서 진나라에 보내,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풍서를 토벌해 달라고 했다. 모신 백종이 나와 말하기를, “만일 풍서를 죽이고 노나라 땅을 차지하면 그 이웃인 적(狄)나라도 다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남쪽의 강역을 개척하여 진나라의 군사와 세금을 확충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했다.
景公亦怒潞子嬰兒不能庇其妻,乃命荀林父為大將,魏顆副之,出車三百乘伐潞。酆舒率兵拒於曲梁,戰敗奔衛。衛穆公遫方與晉睦,囚酆舒以獻於晉軍。荀林父令縛至絳都,殺之。晉師長驅直入潞城,潞子嬰兒迎於馬首,林父數其誣殺伯姬之罪,並執以歸。託言曰:「黎人思其君久矣。」乃訪黎侯之裔,割五百家,築城以居之,名為復黎,實則滅潞也。嬰兒痛其國亡,自刎而死。潞人哀之,為之立祠。今黎城南十五里,有潞祠山是也。晉景公恐林父未能成功,自率大軍屯於稷山。林父先至稷山獻捷,留副將魏顆,略定赤狄之地。
진경공도 역시 노(潞)나라 군주 영아가 아내를 보호하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즉시 순림보를 대장으로 삼고 위과(魏顆)를 부장으로 삼아 전차 3백 대를 동원하여 노(潞)나라를 쳤다. 풍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곡량(曲梁)에서 맞섰으나 싸움에서 져서 위(衛)나라로 달아났다. 위목공(衛穆公) 속(遫)은 얼마 전에 진(晉)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풍서를 잡아서 진나라 군에 보냈다. 순림보가 풍서를 묶어서 강도(絳都)로 보내어 죽였다. 진나라 군대가 노나라 도성으로 진격해 들어가니, 노나라 군주 영아가 말 머리에 나와 마중했다. 순림보는 노나라 군주가 백희를 무고하여 죽인 죄를 물어 묶어 서 돌아왔다. 그러면서 핑계로 말하기를, “여(黎)나라 백성들이 그 군주를 그리워한 지 오래되었다.” 했다. 이에 여(黎)나라 군주의 후예를 찾아서 노나라의 5백 호를 떼어 봉하고 성을 쌓아 살게 한 다음 여나라를 회복시킨다는 명분으로 노나라를 멸망시켰다. 영아는 그 나라가 망한 것을 원통해하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사당을 지었다. 지금 산서성 여성(黎城) 남쪽 15리에 노사산(潞祠山)이 그것이다. 진경공은 순림보가 성공을 못 할까 걱정하여,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직산에 진을 쳤다. 순림보가 직산에 이르러 승리를 고하고, 부장 위과를 머무르게 하여 적적(赤狄 )의 땅을 점령하게 했다.
還至輔氏之澤,忽見塵頭蔽日,喊殺連天,晉兵不知為誰。前哨飛報:「秦國遣大將杜回起兵來到。」按秦康公薨於周匡王之四年,子共公稻立,因趙穿侵崇起釁,秦兵圍焦無功,遂厚結酆舒,共圖晉國。共公立四年薨,子桓公榮立。此時乃秦桓公之十一年,聞晉伐酆舒,方欲起兵來救﹔又聞晉已殺酆舒,執潞子,遂遣杜回引兵來爭潞地。那杜回是秦國有名的力士,生得牙張銀鑿,眼突金睛,拳似銅鎚,臉如鐵缽,虯鬚卷髮,身長一丈有餘。力舉千鈞,慣使一柄開山大斧,重一百二十斤。本白翟人氏。曾於青眉山,一日拳打五虎,皆剝其皮以歸。
(위과가 적적을 점령하고) 돌아오다가 보씨(輔氏)의 못[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먼지가 크게 일어나서 해를 가리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자, 진(晉)나라 군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전초병이 급히 보고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대장 두회(杜回)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왔다.”라고 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진(秦)나라 강공(康公)이 주광왕(周匡王) 4년에 죽고 그 아들 공공(共公) 도(稻)가 즉위했다. 진(晉)나라 조천(趙穿)이 숭(崇)을 침범하자 진(秦)나라와 틈이 벌어졌고, 진(秦)나라 군사가 초(焦)를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해, 마침내 풍서(酆舒)와 결탁하여 함께 진(晉)나라를 도모하려고 했다. 진공공(秦共公)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죽고, 그 아들 환공(桓公) 영(榮)이 즉위했다. 진환공 11년에 진(晉)나라가 풍서를 친다는 말을 듣고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려 하다가, 다시 진(晉)나라가 이미 풍서를 죽이고 노(潞)나라 군주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두회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노나라 땅을 다투게 한 것이었다. 두회(杜回)는 진(秦)나라의 유명한 장사였다. 그는 날 때부터 어금니로 은을 뚫었으며 눈은 튀어나와 눈동자가 금빛이었고, 주먹은 구리 망치 같았으며 빰은 쇠 발우 같았고 머리와 수염은 곱슬이었다. 키는 한 길이 넘었다. 힘은 천 균(鈞 ; 1균은 30근)을 들었으며 항상 120근이 나가는 큰 도끼를 사용했다. 원래 백적(白翟) 사람인데, 일찍이 청미산(靑眉山)에서 하루에 호랑이 다섯 마리를 주먹으로 때려잡아 모두 가죽을 벗겨서 가지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秦桓公聞其勇,聘為車右將軍。又以三百人破嵯峨山賊寇萬餘,威名大振,遂為大將。魏顆排開陣勢,等待交鋒。杜回卻不用車馬,手執大斧,領著慣戰殺手三百人,大踏步直沖入陣來。下砍馬足,上劈甲將,分明是天降下神煞一般!晉兵從來未見此兇狠,遮攔不住,大敗一陣。魏顆下令,扎紮營壘,且莫出戰。杜回領著一隊刀斧手,在營外跳躍叫罵,一連三日,魏顆不敢出應。忽報本國有兵來到,其將乃顆弟魏錡也。錡曰:「主公恐赤狄之黨,結連秦國生變,特遣弟來幫助。」魏顆述秦將杜回,如此恁般,勇不可當,正欲遣人請兵。魏錡不信,曰:「彼草寇何能為?來日弟當見陣,管取勝之。」
진환공(秦桓公)이 두회의 용맹함을 듣고 불러서 차우 장군으로 삼았다. 또 두회는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차아산(嵯峨山) 산적 만여 명을 깨트려서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쳤다. 그리하여 대장이 되었다. (진(秦)나라 군사를 확인한) 위과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교전에 대비했다. 두회는 전차에 타지도 않고 큰 도끼를 손에 들고, 역전의 용사 300명을 거느리고 큰 걸음으로 진(晉)나라 진영 쪽으로 돌입해 왔다. 밑으로는 말의 발을 찍고 위로는 무장한 장수들을 찍으니, 분명히 하늘에서 하강한 악귀들 같았다. 진(晉)나라 군사는 여태까지 그런 흉악한 군사를 본적이 없어서, 막지 못하고 한 떼의 군사가 대패했다. 위과는 명령을 내려 진영과 보루를 세우고 출전하지 못하게 했다. 두회가 한 떼의 도부수를 거느리고 진영 밖에서 3일 밤낮을 뛰어오르며 욕설을 했지만, 위과는 감히 싸움에 응하지 못했다. 갑자기 본국에서 군사들이 왔다고 보고했는데, 그 장수가 위과의 동생 위기(魏錡)였다. 위기가 말하기를, “주공께서 적적(赤狄)의 무리가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변을 일으킬까 걱정하여, 특별히 저를 보내어 돕게 했습니다.” 했다. 위과가 진(秦)나라 장수 두회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설명하고, 용력으로 당할 수가 없어 마침 본국에 사람을 보내 원병을 청할 참이었다고 했다. 위기가 믿지 않으며 말하기를, “저 산적 같은 놈이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내일 제가 교전하여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했다.
至明日,杜回又來挑戰,魏錡忿然欲出,魏顆止之,不聽。當下領著新來甲士,驅車直進,秦兵卻四散奔走,魏錡分車逐之。忽然呼哨一聲,三百個殺手,復合為一,都跟著杜回,大刀闊斧,下砍馬足,上劈甲將。北邊步卒隨車行轉,輅車不便轉折,被他左右前後,覷便就砍,魏錡大敗。虧著魏顆引兵接應,回營去了。是夜,魏顆在營中悶坐,左思右想,沒有良策。坐至三更困倦,朦朧睡去,耳邊似有人言「青草坡」三字,醒來不解其義﹔再睡,仍復如前。乃向魏錡言之。魏錡曰:「輔氏左去十里,有個大坡,名為青草坡,或者秦軍合敗於此地也。弟先引一軍往彼埋伏,兄誘敵軍至此,左右夾攻,可以取勝。」
다음날 두회가 다시 와서 싸움을 걸었다. 위기가 성을 내어 출전하려 하자 위과가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위기는 자기가 새로 데려온 무장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차를 몰아 곧바로 진격했다. 진(秦)나라 군사가 사방으로 흩어지니 위기는 전차들을 나누어 추격했다. 갑자기 한번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300명의 도부수가 하나로 합쳐 모두 두회를 따라 큰 칼과 큰 도끼를 휘두르며 밑으로는 말의 발을 찍고 위로는 무장 장수를 찍었다. 북쪽의 보졸들이 전차를 따랐다가 방향을 바꾸니, 진(晉)나라 전차는 미처 방향을 바꿀 수가 없어 좌우와 전후에서 편할 데를 엿보아 찍으니 위기가 대패했다. 다행히 위과가 병사들을 끌고 와서 구원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위과는 막사에서 앉아서 여러 가지로 궁리했으나 좋은 계책이 없었다. 앉은 채 삼경이 되어 몸이 피곤하여 몽롱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귀에 대고 ‘청초파(靑草坡)’라는 석 자를 말해 줬다. 꿈에서 깨어났으나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잠들었는데 똑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위기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위기가 말하기를, “보씨(輔氏)의 땅에서 십 리를 가면 큰 언덕이 있는데 그 이름이 청초파(靑草坡)입니다. 혹시 그곳에서 진(秦)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무리 군사를 끌고 먼저 가서 매복하고 있겠습니다. 형님은 이곳으로 적군을 유인하십시오. 좌우에서 협공한다면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魏錡自去行埋伏之事。魏顆傳令:「拔寨都起。」揚言:「且回黎城。」杜回果然來追,魏顆略鬥數合,回車就走,漸漸引近青草坡來。一聲砲響,魏錡伏兵俱起。魏顆復身轉來,將杜回團團圍住,兩下夾攻。杜回全不畏懼,輪著一百二十斤的開山大斧,橫劈豎劈,當者輒死,雖然眾殺手頗有損傷,不能取勝。二魏督率眾軍,力戰杜回不退。看看殺至青草坡中間,杜回忽然一步一跌,如油靴踏著層冰,立腳不住,軍中發起喊來。魏顆舉眼看時,遙見一老人,布袍芒履,似莊家之狀,將青草一路挽結,以攀杜回之足。
위기가 매복을 하러 가자, 위과가 명령을 내리기를, “영채를 뽑아 모두 일어나라.” 하고, 공공연히 말하기를, “여성(黎城)으로 돌아간다.” 했다. 두회가 과연 뒤를 추격했다. 위과는 두회를 막아 몇 합을 싸우다가 전차를 돌려 달아났다. 점점 청초파 가까이 왔을 때, 포 소리가 한번 나더니 위기의 복병이 쏟아져 나왔다. 위과도 몸을 돌려 돌아와서 두회의 군사를 단단히 포위하여 양쪽에서 협공했다. 그러나 두회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120근 도끼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맞서는 자를 모두 죽였다. 그러나 두회가 거느린 도부수들이 손상을 입어 이길 수가 없게 되었다. 위씨 형제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두회와 힘써 싸워 물러서지 않았다. 청초파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두회가 갑자기 한 발이 걸려서 넘어졌다. 마치 기름 신발로 빙판을 밟은 듯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군사들의 함성을 질렀다. 위과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한 노인이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농부의 모습인데, 파란 풀들을 계속해서 묶어서 그것이 두회의 발목을 붙들게 했다.
魏顆魏錡雙車碾到,二戟并舉,把杜回搠倒在地,活捉過來。眾殺手見主將被擒,四散逃奔,俱為晉兵追而獲之,三百人逃不得四五十人。魏顆問杜回曰:「汝自逞英雄,何以見擒?」杜回曰:「吾雙足似有物攀住,不能展動,乃天絕我命,非力不及也。」魏顆暗暗稱奇。魏錡曰:「彼既有絕力,留於軍中,恐有他變。」魏顆曰:「吾意正慮及此。」即時將杜回斬首,解往稷山請功。是夜,魏顆始得安睡,夢日間所見老人,前來致揖曰:「將軍知杜回所以獲乎?是老漢結草以禦之,所以顛躓被獲耳。」
위과와 위기의 전차 두 대가 굴러가서 두 개의 창을 함께 들어 두회를 찔러 땅바닥에 쓰러뜨린 다음에 생포했다. 두회의 도부수들은 두회가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다가 모두 진(晉)나라 병사들의 추격에 사로잡히고 4~50명만 도망쳤다. 위과가 두회에게 묻기를, “너는 스스로 영웅이라고 하더니 어찌하여 사로잡혔는가?” 하니, 두회가 말하기를, “내 두 발이 풀에 걸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 목숨을 끊으려 함이니 내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했다. 위과가 속으로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위기가 말하기를, “두회는 힘이 절륜하니 군중에 놔두면 변란이 날까 두렵소.” 하니, 위과도 말하기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고 즉시 두회를 참수하게 하고 직산으로 목을 가져가 공로를 청했다. 그날 밤에 위과가 막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낮에 본 노인이 앞으로 와서 읍하고 말하기를, “장군은 두회가 잡힌 까닭을 아십니까? 그것은 이 늙은이가 풀을 맺어서 발이 걸려 넘어져 잡힌 것입니다.” 했다.
魏顆大驚曰:「素不識叟面,乃蒙相助,何以奉酬?」老人曰:「我乃祖姬之父也。爾用先人之治命,善嫁吾女,老漢九泉之下,感子活女之命,特效微力,助將軍成此軍功。將軍勉之,後當世世榮顯,子孫貴為王侯,無忘吾言。」原來魏顆之父魏犨,有一愛妾,名曰祖姬。犨每出征,必囑魏顆曰:「吾若戰死沙場,汝當為我選擇良配,以嫁此女,勿令失所,吾死亦瞑目矣。」及魏犨病篤之時,又囑顆曰:「此女吾所愛惜,必用以殉吾葬,使吾泉下有伴也。」言訖而卒。魏顆營葬其父,並不用祖姬為殉。魏錡曰:「不記父臨終之囑乎?」
위과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본래 노인과는 모르는 사이인데, 이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까요?”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곧 조희(祖姬)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장군이 옛날 부친이 돌아가실 때 내린 명령을 받들지 않고 내 딸을 잘 개가시켜 주었습니다. 늙은이가 저승에서 딸의 목숨을 살려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특별히 보잘것없는 힘을 써서 장군을 도와 군공을 이루게 했습니다. 장군께서 노력하시면 이후에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자손이 귀하게 되어 왕후(王侯)가 될 것이니,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했다. 원래 위과의 부친인 위주(魏犨)에게는 한 애첩이 있었는데 이름이 조희(祖姬)였다. 위주가 매번 전쟁터에 나갈 때는 위과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만일 전쟁터에서 죽으면, 너는 반드시 좋은 배필을 골라서 이 여자를 개가시켜 주어라. 이 말을 어기지 말아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위주가 병이 위독할 때에 다시 위과에게 말하기를, “이 여자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여인이다. 반드시 나와 함께 순장을 해서 내가 구천에서 짝을 삼도록 해라.” 하고, 말을 마치자 죽었다. 위과는 그 부친을 장사지낼 때 조희를 순장하지 않았다. 위기가 말하기를, “형님은 아버지가 임종 때 하신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했다.
魏顆曰:「父平日吩咐必嫁此女,臨終乃昏亂之言。孝子從治命,不從亂命。」葬事畢,遂擇士人而嫁之。有此陰德,所以老人有結草之報。魏顆夢覺,述於魏錡曰:「吾當時曲體親心,不殺此女,不意女父銜恩地下如此。」魏錡嘆息不已。髯仙有詩云:「結草何人亢杜回?夢中明說報恩來。勸人廣積陰功事,理順心安福自該。」秦國敗兵,回到雍州,知杜回戰死,君臣喪氣。晉景公嘉魏顆之功,封以令狐之地,復鑄大鐘,以紀其事,備載年月。後人因晉景公所鑄,因名曰「景鐘」。晉景公復遣士會領兵攻滅赤狄餘種,共滅三國:曰甲氏,曰留吁,及留吁之屬國曰鐸辰。自是赤狄之土,盡歸於晉。
위과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평일에는 조희를 반드시 개가시키라고 분부하시고, 임종하실 때는 정신이 어두워서 어지러운 말씀을 하셨다. 효자는 맑은 정신을 가졌을 때의 유언을 따라야지, 정신이 어지러운 임종시에 하신 유언을 따르면 안 된다.” 했다. 장례가 끝나자 위과는 마침내 좋은 선비를 골라서 조희를 개가시켰다. 이러한 음덕을 쌓았기 때문에 노인이 풀을 맺어서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위과가 꿈에서 깨어나서 위기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시 부친을 정성을 다해 곁에서 모시면서 평소에 하신 말씀대로 조희를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켰을 뿐인데 뜻밖에 그녀의 부친이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지하에서 이렇게 은혜를 갚았다.” 했다. 위기가 탄식해 마지않았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누가 결초하여 두회를 잡게 했는가? 꿈속의 노인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음덕을 널리 쌓으라고 권하노라! 순리에 맞춰 마음을 편안히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했다. 진(秦)나라 군사가 싸움에 패하여 옹주로 돌아가니, 두회가 전사했음을 알고 군주와 신하의 사기가 꺾였다. 진경공(晉景公)은 위과의 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영호(令狐)의 땅에 봉하고,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그 위에다 날짜와 공적을 기록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종을 진경공이 주조했다고 하여 이름을 경종(景鐘)이라고 했다. 진경공은 다시 사회에게 군사를 주어 적적(赤狄)의 남은 종족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때 함께 멸망한 세 나라는 갑씨(甲氏), 유우(留吁), 그리고 유우(留吁)의 속국(屬國)인 탁진(鐸辰)이었다. 이로부터 적적(赤狄)의 땅은 모두 진(晉)나라에 귀속되었다.
時晉國歲飢,盜賊蜂起,荀林父訪國中之能察盜者,得一人,乃郤氏之族,名雍。此人善於億逆,嘗遊市井間,忽指一人為盜,使人拘而審之,果真盜也。林父問:「何以知之?」郤雍曰:「吾察其眉睫之間,見市中之物有貪色,見市中之人有愧色,聞吾之至,而有懼色,是以知之。」郤雍每日獲盜數十人,市井悚懼,而盜賊愈多。大夫羊舌職謂林父曰:「元帥任郤雍以獲盜也。盜未盡獲,而郤雍之死期至矣。」林父驚問:「何故?」
그 후 진(晉)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들끓었다. 순림보가 나라 안에서 도적을 잘 잡는 사람을 찾다가 한 사람을 얻었다. 극씨(郤氏) 종족 사람인데, 이름을 옹(雍)이라 했다. 이 사람은 예측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거리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한 사람을 가리키며 도적이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 잡아다가 심문해 보니 과연 진짜 도적이었다. 순림보가 묻기를, “어떻게 도적인 줄 압니까?” 하니, 극옹이 말하기를, “제가 그 사람의 미간을 살펴보니 시중의 물건을 욕심내는 기색이 역력했고 거리의 사람들을 보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 수 있었습니다.” 했다. 극옹(郤雍)은 매일 돌아다니며 도적 수십 인을 잡았다. 시가지의 도적들이 두려워했으나 도적은 오히려 더욱 많아졌다. 대부 양설직(羊舌職)이 순림보에게 말하기를, “원수께서 극옹에게 도적을 잡게 했는데 도적들이 아직도 다 잡히지 않아 극옹이 죽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했다. 순림보가 놀라서 묻기를, “무슨 까닭입니까?” 했다.
不知羊舌職說出甚話來,且看下回分解。
양설직의 말은 무슨 이야기에서 왔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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