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54)
여름날
누기 세상을 만들었을까?
누가 백조를, 검은 곰을 만들었을까?
누가 메뚜기를 만들었을까?
이 메뚜기 말이야―
풀숲에서 튀어나온,
내 손에 든 설탕을 먹고 있는,
턱을 위아래가 아니라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커다랗고 복잡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이제 메뚜기는 창백한 팔을 들어 얼굴을 꼼꼼히 닦고 있어.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날아가버려.
난 기도가 정확히 무언지 몰라.
어떻게 주목하고, 어떻게 풀숲에 쓰러지고,
어떻게 풀숲에서 무릎 꿇고,
어떻게 빈둥거리며 축복을 누리고,
어떻게 들판을 거니는지는 알아.
그게 내가 종일 해온 일이지.
말해봐, 내가 달리 무엇을 해야 했을까?
결국 모두가 죽지 않아? 그것도 너무 빨리?
말해봐, 당신은 이 하나의 소중한 야생의 삶을
어떻게 살 작정이지?
- 메리 올리버(1935-2019), 시선집 『기러기』,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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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두가 죽지 않아? 그것도 너무 빨리?” 문장은 어떤 자리에 놓이는가에 따라 때로 그 결이 달라집니다. “라인하르트 욀만의 아버지가 전사한다. 칼 베스트홀처의 아버지가 전사한다.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의 아버지가 전사한다. 마르틴이-장교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친 바로 그날 밤에-자기는 기쁘다고 모두에게 말한다./“모든 건 결국, 너무도 빨리 죽지 않아?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영예롭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최후의 승리로 가는 길에 하나의 포석이 된다면 말이야?””(앤서니 도어 장편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최세희 옮김, 민음사, 2015, 2권100쪽) “모든 건 결국 죽기 마련 아닌가, 그것도 너무나 빨리?”(위 소설, 작가의 ‘감사의 말’ 중에서) 앤서니 도어가 메리 올리버의 시의 한 구절을 빌려 쓴 위 소설의 인용된 내용의 앞부분에는 소설 속에서의 남자 주인공인 베르너의 학교 친구인 프레데리크에 대한 이야기가 꽤 길게 여러 장에 걸쳐 전개됩니다. 1933년에 나치 정부가 창설한 군대식 기숙학교로, 엘리트 청년들에게 나치 이념을 교육한 ‘국립 정치 교육원’에서의 훈련은 무자비할 정도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생도들에게 ‘가장 약한 자’를 지목하게 하여 고립시키고 결국 퇴출시키는 집단 괴롭힘입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드라마 대사에서 남자 주인공은 이 학교에서 퇴출당하는 생도의 비율이 무려 63%였다고 언급하는데, 프레데리크는 여러 번 계속해서 ‘가장 약한 자’로 지목되면서도 자진 퇴학과 의식처럼 행해지는 포로에 대한 학대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면서 버티다가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집니다. 강인한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를 만든다면서 인간을 도구화하고 비인간화하는 행태는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인 소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군대에서의 체벌을 빙자한 이런 비인간적인 훈련을 저는 하이쿠를 이야기의 연결 고리로 삼은 소설에서도 읽었습니다. “그는 행군, 사격, 총검술 외에 ‘빈타’도 배웠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도 고집스럽게 적용하는, 뺨 때리기 기술이 빈타였다. (…) 훈련교관들은 매일 조선인 훈련생들을 서로 마주보게 두 줄로 세워놓고 맞은편 훈련생을 때리게 했다. 그들은 오른손으로는 왼쪽 뺨을, 왼손으로는 오른쪽 뺨을 서로 번갈아가며 때렸다. 빈타가 멈추는 것은 상대의 얼굴이 심하게 부어올랐을 때뿐이었다.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리처더 플래너건 장편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김승욱 옮김, 문학동네, 2018, 398쪽) 소설 속에서의 이 진술, 어떠신가요,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일본 군대에서 자행되었다는 ‘빈타’ ‘뺨 때리기’를 저는 학교에서 겪었습니다. 체벌을 빙자하지만 이건 엄연한 폭력입니다. 공개적인 폭력은 상황을 맞닥뜨리는 모든 이들을 당사자로 만들어 상처를 남깁니다. 이 상처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순환이되 악순환입니다. “결국 모두가 죽지 않아? 그것도 너무 빨리?” 어떤 상황에서든 이 문장은 존재합니다. “모든 건 결국, 너무도 빨리 죽지 않아?” 죽음을 직접 맞닥뜨린 상황에서라면 느낌이 매우 다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결국 죽기 마련 아닌가, 그것도 너무나 빨리?” 원문에도 차이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된 문장만 봐서는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이 문장의 차이는 놓인 자리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고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도 또 달라집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요. 놓인 자리와 말하기의 태도에 따라 같은 말이 한편 생명을 존중하기도, 한편 생명을 경시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어서 모든 생명은 어차피 다 죽지만, 그렇다고 모든 죽음이 다 같은 죽음이라고 할 수 없는 건,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죽음도 달라지기 때문일 겁니다. 어차피 죽는다고요? 그래도, 그래도, 이지요. 그러니, 그러니, 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일단은 죽음보다 삶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죽음의 문장 뒤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해봐, 당신은 이 하나의 소중한 야생의 삶을/어떻게 살 작정이지?” 하는 시인의 삶에 대한 질문을 자꾸 곱씹습니다. (20240710)
첫댓글 메리 올리버 시인을 네 번째 만나는 수요 시 산책이네요. 열행 길벗님들 <여름날> 장마 조심하십시오. 10~12시 <성서인문학> 끝나고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