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55> 제2편 제8장 선후본말 ①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실행론」 제2편 교리편의 제8장은 ‘선후본말’에 관한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이다. 이 장은 모두 6개 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 절이 많지는 않으나, 대종사께서 선후본말론을 교리편에서 교설하신 연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답변할 수 있겠지만, 이원진리의 연장선상에서 선후본말론을 말씀하셨다는 한 마디로 답변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원진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선후본말의 이치를 체득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7장 ‘이원진리’를 이어서 제8장 ‘선후본말’을 교설하고 계신 것이다.
제43회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선후본말론은 유교의 사서 중의 하나인 「대학」에서 경(經)으로 설해지고, 전(傳)으로 해설되고 있다. 선후본말론은 성인 공자께서도 설하신 것으로 성인의 가르침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43회에서 밝혔듯이 유교와 현교의 선후본말론은 일원주의로서 설해진 것이다. 이에 비해 밀교와 대종사의 선후본말론은 이원주의로서 설해진 점이 다르다. 말하자면 이원진리(이원주의)의 구현을 위한 교리적 강설이 대종사의 선후본말론이다.
제1절 ‘불법은 체요, 세간법은 그림자라’가 전형적인 대종사의 이원주의 선후본말론이다. 체인 불법의 그림자가 세간법이라 함은 제43회에서 피력하였듯이, 체와 그림자가 차원을 달리하여 있고 체가 그림자를 심본색말(心本色末)처럼 일원통솔하는 일원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체에서 현현(顯現)한 것이 그림자이므로 체와 그림자가 일체의 차원에서 색심불이(色心不二)처럼 이원상대하는 이원주의로 보는 것이다. 본과 말이 차원을 달리하여 있다고 보면 일원주의이고, 본과 말이 일체의 차원에서 전환되어 불이로 있다고 보면 이원주의이다.
그러니 불법에서 세간법이 나온 것이라고 보고 불이일체(不二一體)의 이원주의로 이해하는 것이다. “마음은 곧 부처요, 부처는 곧 마음이므로, 불법은 마음의 법이다. 불법은 체요, 세간법은 그림자가 되어서 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곧고, 체가 굽으면 그림자도 굽는다(실행론 2-8-1)”는 말씀에서 본-말 불이일체의 이원주의를 명료히 밝히셨다. ‘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곧고, 체가 굽으면 그림자도 굽는다’는 정언(定言)에 함축되어 있다. 이를 우리 인생으로 연결지어 이렇게 이어서 설하셨다.
“내가 과거에 지었던 모든 악업은 다 어리석어 탐하고 성냄으로 말미암아 뜻과 입과 몸으로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죄를 짓던 그 마음을 없애고 현재에 죄를 짓는 그 마음을 없애고 미래에 죄를 지을 그 마음을 끊어 없애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업도 따라서 소멸되고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멸할 때는 죄도 함께 멸한다(실행론 2-8-1).”
마음이 체요, 죄업은 그림자인 까닭에 마음을 멸하면 죄도 함께 멸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멸한다’고 함은 죄를 짓는 그 마음을 맑힘, 삼독심의 정화를 말한다. 한편 ‘어리석어 탐하고 성냄으로 말미암아 뜻과 입과 몸으로 지었던’에서 삼독에서 삼업을 짓게 되고, 삼독은 어리석음이 근본이 되어 탐하고 성냄을 일으킨다고 보셨다. 삼독의 이러한 인연은 타당하나, 역순으로 탐하고 성내어 어리석게 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떠한 순서든 삼독으로 말미암아 삼업을 짓게 된다. 대종사께서는 삼업의 순서도 ‘신구의’가 아닌 ‘의구신’으로 보고 계신데, 이는 마음[意]의 선행성, 의업의 선행성을 고려하신 것이라 하겠다.
제2절 ‘선후본말’은 간명한 법설이나 삶의 지남이 되는 가르침으로 손색이 없다. “농사짓는 사람이 농장보다 집을 크게 지으면 망하게 되니, 이것은 본말을 세우지 못한 까닭이다. 아들딸을 생각함에도 마찬가지이니, 출가한 딸을 너무 생각함도 그와 같다. 본(本)으로써 말(末)을 바룬다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바루는 것이니, 마음을 고쳐 눈 귀 코 혀 몸을 바르게 하며, 하나로써 열을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실행론 2-8-2)”라 설하시어, 본말을 세우는 법을 분명히 하셨다. 본이 본질가치이고 말은 부수가치이다. 농장은 농부에게 본질가치이고 농장에 딸린 집은 부수가치이다. 또한 안이 본이고 밖은 말이다. 안에서 밖으로 반영되게 본말을 세우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현상은 마음의 표현인 까닭에서이다.
이어서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로 바루는 것이며, 며느리로부터 시어머니로 가는 길은 난행(難行)이다. 그러므로 육바라밀의 길로 가는 것이 정도이며 가르침의 중심이 된다(실행론 2-8-2)”라 설하시어, 본말론이 선후론으로 이어짐을 보여 주신다. 시어머니가 발라지는 것이 우선이며, 며느리가 발라지는 것은 차후가 된다고 하셨다. 이로 미루어보면 손위가 손아래보다 먼저 바루어져야 하며, 상사가 부하보다 먼저 바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법설의 마무리를 육바라밀로 하신 것은 먼저 바루는 데에 있어서 육바라밀을 정도로 삼으라는 가르침이다. 먼저 발라지고자 하면 육바라밀을 등대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