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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장
산서성(山西省).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따라서 북악(北岳)인 항산(恒山)과 불교 사대 성지 중 하나인 오태산(五台山) 등이 산악지대를 따라 펼쳐져 있으며,
먼 옛날 춘추전국시대의 진(晉)나라의 수도였던 태원이 있다.
몽고, 거란, 여진 등 중원을 차지하고자 했던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번영과 쇠락을 반복했던 곳, 바로 산서성이다.
조용하던 중원의 북단 산서성이 무림인들로 들끓고 있었다. 성의 북부에 있는 항산, 그곳이 바로 천선비도가 가리키는 천검 담사월의 무덤이 있다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형, 바로 이곳입니다."
악양에서 백산으로부터 천선비도를 샀던 백무천 일행이었다.
천선비도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서 목운자와 목형자를 악양에 남겨두고, 목우자와 목령자를 포함한 네 명은 전력의 경공으로 이곳으로 왔다.
드디어 천검무극류를 찾을 수 있다는 설렘인지 백무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우리를 따르는 자가 많구나."
어떻게 알려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산서성에 들어오기 전부터 많은 수의 무림인들이 은밀하게 자신들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여러 차례 길을 바꾸는 방법도 써 보았으나 추적술에 능한 자가 있는지 꼬리를 잘라내지 못한 채 이곳까지 끌고 오고 말았다.
그렇다고 저 많은 무림인들과 혈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처리하고자 맘을 먹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굳이 그들이 달려들지 않는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이미 소문이 난 것을 비밀로 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림인들 또한 비도가 가리키는 곳이 항산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천무룡이라는 고수와 드잡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오직 추격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백무천이 가리키는 곳. 호수라고 하기에는 좀 작아 보이고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큰 소택의 수면 위로,
하얗게 피어오른 물안개가 십여 장 크기의 폭포를 따라서 허공으로 비상하며 신비로운 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한 소택은 신비로움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일행이 느끼는 또 한가지 공통적인 느낌은 주변의 대기가 뜨겁다는 것이다.
폭포와 물안개, 궁합이 맞을 것도 같은데 지금 이곳의 상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안개라고 생각했던 것이 안개가 아닌 수증기였던 것이다.
온천이라도 솟아 나오고 있는지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는 연못은 손을 델 정도로 뜨거웠고,
초봄이라고는 하지만 중원의 북쪽에 있는 이곳의 차가운 날씨가 뿌연 수증기를 만들어 일행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비동을 찾아가는 길은 이 연못으로부터 시작된다.
연못 속 삼십 장 정도의 깊이에 열다섯 개의 동굴이 뚫려있고, 그 중 일곱 번째 동굴이 비도에 표시되어 있는 길이었다.
비도에 표시되어 있는 수중동굴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 후의 일은 상상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 뚫려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암흑공간이고 공기도 없으니 갇히게 되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사실 비도에 표시되어 있는 동굴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수억의 돈을 투자했고,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천검무극류가 아니겠는가.
"사형, 제가 먼저 들어갔다 와야 되겠습니다."
"조심하거라."
운학자의 우려 섞인 목소리였다. 수면 아래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태양이 있는 밖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끝가지 어둠만 존재하는 물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행 중 사제의 무공이 가장 강하고 상황 대처능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대답과 함께 백무천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열기에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리며 수면 아래로 잠수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들어왔을까, 그의 눈에 일렬로 뚫려있는 수중동굴이 검은 입을 벌리고 나타났다.
'이럴 수가?'
백무천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열다섯 개의 수중동굴, 정확하게 정방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천연동굴이 아닌 인공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란 뜻이다.
이곳은 삼십 장 깊이의 물 속. 어느 누가 이곳까지 와서 수중에 동굴을 만들었단 말인가. 오 백년 정도의 세월 가지고는 지형이 변한다 하더라도 연못이 될 수는 없다.
'그럼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수중의 동굴을 본 백무천의 첫 느낌은 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동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굴이 만들어진 다음에 이곳이 연못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의 생각은 그 정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곱 번째 동굴로 진입하려던 그가 온몸으로 전해오는 열기와 동굴 속에서 나오는 물의 압력으로 인하여 뒤로 밀렸던 것이다.
동굴에서 쏟아지는 물의 압력은 무공 고수인 그를 힘들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거의 칠성 이상의 내공을 사용하고서야 조금씩 전진할 수 있었다.
얼마나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은 항산의 지하이다. 어떻게 지하 속에 이렇게 긴 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인공으로 만들어진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반드시 출구가 존재하리라 믿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먹은 백무천이 힘차게 팔다리를 내저었다.
어느 정도 전진했을까 물살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보다 더욱더 격렬해진 것이다.
같은 뜨겁기의 물이라 할지라도 정지해 있는 물보다 흐르는 물이 훨씬 뜨겁다. 물에서 나온 열기도 지금까지 겪었던 것보다 배 이상 뜨거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몸이다. 내공을 끌어올리면 올릴수록 몸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로서도 처음 겪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견디기 힘든 열기임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는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 금황신공을 운용한 시점부터 생긴 변화였다.
그러나 몸만 시원한 느낌이지 목에서는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오고 있는데도 온 사방을 감싸고 있는 물 한 모금을 마실 수가 없다.
'막다른 곳?'
백무천의 손이 닿은 곳,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물속에서 마지막에 도달한 곳이 밖이 아닌 막다른 곳이었다.
그러나 곧 백무천의 표정이 밝아졌다.
끝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동굴이 꺾여있어서 빛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바로 자신의 오른쪽 저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푸후!"
폐 속 가득 차있던 공기를 뱉어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쿨럭! 유황?"
백무천이 나온 곳, 이곳저곳에서 기포가 발생하며 온천물이 용출 되고 있었다.
그 속에 유황이 포함되어 있는지 연못 위쪽으로는 유황냄새 때문에 거의 숨을 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호흡을 멈추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난 백무천이 자신이 나온 곳을 둘러보았다.
마치 주머니 모양으로 생긴 사방 오십여 장 크기의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얼마나 높은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 위쪽 끝에 있는 창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공간을 통해서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내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공동의 사방으로 나있는 수십 장 크기의 석주들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원래는 검은 색의 동굴이었던 이곳에 회수(灰水)가 스며들어 기둥들의 색을 황금색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창조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석탑 두 개의 꼭대기를 맞붙여서 세워놓은 듯한 수십 개의 기둥들이 온 사방을 가득 메웠고, 그 황금 기둥들 사이사이에 엄청난 수의 동굴들이 뚫려있었다.
저 동굴들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고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동굴에 대한 첫 느낌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저 많은 동굴 중에서 '사득(捨得)'이라고 쓰인 동굴을 찾아야 한다.'
사득, 비도에 표시되어 있는 유일한 글이다. 이리저리 동굴을 둘러보던 백무천이 너무 방대한 동굴 수에 이내 포기를 하고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일행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찾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올 때는 물살을 타기만 하면 되었기에 훨씬 편했다.
"사형! 수중에 들어가면 열다섯 개의 동굴이 있습니다. 모든 동굴에 흔적을 남겨주십시오."
정의를 따르고 수행해야 하는 정파인이라는 것을 잊기라도 했는가.
자신들을 따르는 무림인들을 사지로 인도하기 위해서 수중에 있는 모든 동굴에 들어갔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것이었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있는 탐욕이 천검무극류라는 절대적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고개를 내밀었고, 이제는 표면화되고 있었다.
백무천 일행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고 반 시진 정도 후 일단의 무리들이 그곳에 나타났다. 사진악 일행이었다.
연못에 도착한 사진악 일행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불에 덴 듯 얼굴의 피부가 부풀어올라 벌건 살갗을 드러낸 채 수면 위를 떠다니는 수십 명의 무림인 시체였다.
백무천 일행을 따라서 연못으로 뛰어들었던 무림인들이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고 미로 속을 헤매다 다시 돌아왔으나 결국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저 속은 지옥이었소. 각 동굴 속에 나오지 못한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죽어 있소."
동굴 속에서 살아나온 인물 중의 한 명인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연못가로 기어 나오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를 잠시 쳐다보던 사진악이 고개를 돌렸다.
살아있다고 할 수 없었다. 저 사람도 아마 죽어갈 것이다. 이미 몸 안으로 침투해버린 열기를 다 쏟아내지 못하는 이상 방법이 없다.
"가자!"
동굴에 대한 확인도 없이 사진악과 천마군 이십여 명이 연못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뒤를 이어서 거의 반 시진 간격으로 청성, 점창, 종남의 무인들과 화산 무당 등 정파의 무인들,
그리고 나찰검 마효와 흑사파 인물인 염후 표령지 등 마도의 인물들과 많은 수의 절정고수들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무인들이 연못 속으로 사라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통로를 잘못 선택한 무인들이 하나둘씩 떠오를 무렵 또다시 한 인물이 연못가로 날아 내렸다.
흑의 복면인.
'이제 대충 다 들어갔나 보군… 기대했던 것보다 적은 수확이었지만 금신가(金神家)의 후예를 잡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비도가 없었어도 전쟁은 날 수밖에 없었는데….'
누구인가.
말하는 투로 보건대 천선비도의 원주인인 것만은 분명했다. 또한 천선비도가 없었어도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마도 백산 일행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즉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서 천선비도를 퍼뜨렸는데 엉뚱한 자들로 인하여 천선비도가 제 역할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신가의 후예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것을 각오했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려주었어.
냉추렴과 소걸영이 일행으로 있었을 줄이야. 어찌 되었든지 금신가의 무공이 나타났고, 그놈이 죽는다는 것은 커다란 수확이니까.'
조용히 뇌까리던 흑의 복면인이 사라지고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항산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밝히는 불빛 하나,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사인의 인영이 신중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걷고 있었다. 바로 백무천 일행이다.
황금색의 동굴을 지나 이제는 완전한 암흑만이 존재하고 있는 동굴 속.
운학자 손에 있는 야명주(夜明珠)가 아니라면, 어둠이 문제가 되지 않는 무공 고수인 이들의 시야도 확보되지 않을 만큼 암흑천지였다.
"이것이 뭐지요?"
목령자의 목소리였다. 질척거리는 것이 발에 밟혔는지 다리를 흔들어 신발에 묻은 것을 털어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의 후각을 자극하는 이상한 냄새와 함께 바닥에 분비물로 보이는 덩어리가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거의 십여 장 높이쯤 되어 보이는 천장을 쳐다보았으나 여기저기 뚫려있는 무수히 많은 조그마한 구멍으로 보이는 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일행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아무런 징후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팔랑!
오 장(五丈)여 폭의 동굴이 점점 좁아지는 지점까지 왔을 때 최초로 들리는 소리였다.
"허억! 이게 뭐야?"
자신의 등뒤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소리에 고개를 돌린 목우자에게서 경악스런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긴 것은 분명 박쥐였다. 그러나 동굴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박쥐가 아니었다. 몸통의 크기만 해도 일 척(一尺)이 넘는 커다란 박쥐가 목우자의 등뒤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헉! 열화편복?"
목우자의 등뒤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는 박쥐의 정체를 알았는지 운학자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저것들은 용암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한다는 마물인데…."
열화편복.
실제 용암 활동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한다는 동물로, 박쥐의 일종이지만 새끼를 낳지 않고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알을 낳는 장소가 문제였다. 바로 용암이 흐르는 곳 바로 옆에서 알을 낳고 그곳의 열기로 저절로 부화되게 한다고 한다.
용암의 열기에 견디기 위해서인지 피부는 단단해져 도검에도 잘리지 않고,
몸속과 발톱 등에 화열독(火熱毒)이라는 특이한 열독을 함유하고 있어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는 무서운 마물이 열화편복이다.
"숙이세요!"
고함소리와 함께 백무천의 허리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하며 허공을 갈랐다.
챙!
삐익!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듣기 거북한 음향이 동시에 울려 퍼지고 열화편복이 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검이 불침한다는 운학자의 말을 듣고 검강을 운용해서 절단해 버린 것이다.
오도독! 으드득!
뼈가 씹히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일행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어둠 속에서 사는 놈들이라 눈이 없을 터인데 마치 일행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며 잘린 동료의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다시 그 옆으로 대 여섯 마리의 열화편복이 내려서더니 죽어있는 한 마리를 일제히 뜯어먹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동료의 시신을 뜯어먹으면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바닥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날개까지 전부 먹어치운 것이었다.
삐익!
아직 배가 덜 찼는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자기네들끼리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료 편복 한 마리의 날개를 물어뜯어서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뼈가 씹히는 소리가 들리며 목이 부러져 죽어가는 편복 한 마리를 두고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한꺼번에 달려들어 잘라먹고 있었다.
"사형, 이때 자리를 옮기죠."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백무천이 조용히 속삭였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존 경쟁의 하나일 뿐인데도 암흑의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훨씬 더 섬뜩하게 보였던 것이다.
또한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그의 생각은 동굴 속을 가르는 한줄기 소성으로 인해서 산산이 부서졌다.
삐-이-익!
순간 이미 죽어버린 동료를 열심히 뜯어먹고 있던 열화편복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백무천 일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장 가득 나타나는 열화편복들, 동굴 천장의 구멍이라 생각했던 틈 사이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열화편복들이 거꾸로 매달리면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뛰어!"
누가 한 소리인지 모르지만 일행은 전방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매달려 있던 열화편복들도 그들을 따르는지 엄청난 바람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림인들이다. 그것도 엄청난 무공을 가지고 있는 고수들이 아닌가! 한갓 미물들이 쫓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열화편복들과 백무천 일행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다시 한번 거북한 음향이 들려오더니 뒤쫓아오던 열화편복들의 날갯짓하는 소리가 일제히 사라졌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 하지만 도검이 불침한다는 동료의 몸을 통째로 뜯어먹는 수천 마리의 열화편복을 당할 수는 없다.
결국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피해서 도망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열화편복들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어둠 속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열심히 발을 놀리고는 있으나 동굴은 생각보다 길었다. 벌써 일각 이상을 달린 것 같은데 끝은 보이지 않았고, 달려가는 통로는 갈수록 좁아졌다.
파닥! 파닥! 파닥!
그들이 한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가고 있던 동굴과 같이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동굴 속에서 엄청난 수의 열화편복들이 일행을 향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바로 앞쪽에서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력복마(大力伏魔)!"
"복마장(伏魔掌)!"
"통천장(通天掌)!"
일행의 입에서 공동파의 절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앞쪽에서 달려들던 열화편복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인간과 마물과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백무천의 연검이 금광을 쏟아내며 앞쪽의 열화편복들을 절단하고, 뒤쪽에서는 운학자와 두 명의 장로가 자신들의 모든 절기를 쏟아내면서 마물들을 격살하며 전진했다.
"컥!"
목우자의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손을 휘두르고 있던 그의 뒷목에 열화편복 한 마리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사제!"
다급한 목소리로 목우자를 부르며 목령자가 신속하게 일장을 쳐냈다.
조그마한 울음소리와 함께 열화편복이 터져나가고 살이 한 움큼이나 떨어져 나간 목우자의 목에서는 폭포 같이 피가 흘러나왔다.
"무변무망(無變無望)!"
백무천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지고 달마검법 제 삼초가 펼쳐지면서 전방의 오장 안에 있던 모든 열화편복들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큭!"
달마검법을 펼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끌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왼쪽 팔에도 한 마리가 앉아서 살을 뜯어내고 있었다.
조금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박쥐 떼의 무서운 공격에 금황신공이라는 최고의 신공을 두고도 운용할 시간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성취로는 마음먹은 순간에 바로 펼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목 장로가 위험해."
운학자의 다급한 외침소리였다. 피가 흐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화열독에 중독되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드러난 피부에서 물집이 생기고 잠시 후 그것들이 터지며 진물이 흘러내렸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조금씩 좁아지던 동굴 폭이 이제는 거의 한사람만이 움직일 수 있는 좁은 통로로 변해버린 것이다. 경공을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중앙에서 운학자가 야명주를 들고 일행의 길을 밝히고 맨 앞에는 백무천이 연검을 휘두르며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지만 백무천의 입에서 단내가 풍기고 있었다.
열화편복에 물린 왼쪽 팔의 살점이 뜯겨 나가고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몸에 이상이 없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백무천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십시오, 사숙! 제가 이곳을 막겠습니다."
"목 사질!"
화열독에 의해서 물러터진 살이 아래로 흘러내려 얼굴의 광대뼈가 드러나 보이는 목우자가 그 자리에 멈춰 서며 일행을 향해서 외쳤다.
같이 가 봐야 짐만 될 뿐이고 자신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행을 위해서 시간을 벌어주려 하고 있었다.
"소사숙,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우리 공동을 버리지 않겠다고."
이제는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버린 얼굴을 한 목우자가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그도 백무천이란 인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사문보다는 야망이 우선하는 사람이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아직 젊은 사람이고 공동이란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기는 너무나 큰 재목이다. 그래서 목숨으로 다짐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질… 약속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동만은 강호 최고의 문파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가십시오."
백무천의 얼굴에서 진심을 읽었는지 목우자가 등을 돌렸다.
"목 사질, 다음에 만나세. 그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말이네. 가자 사제!"
처음이었다. 천무맹의 삼공자로, 정천무룡이 된 이후에 처음으로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단 한번도 공동파를 자신이 지켜야 할 사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거쳐가는 디딤돌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백무천의 가슴속에 목우자라는 사질이 조그마한 파문을 만들어 놓았다.
시체조차도 남길 수 없는 이곳에서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고 있었다.
"으아악!"
"사질…!"
저 먼 곳에서 자신들을 위해서 죽어 가는 이의 마지막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명소리는 다른 동굴에 있던 사진악도 듣고 있었다.
십여 명의 부하들이 한꺼번에 지르는 소리가 사진악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육소천, 피해는?"
"열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사진악 일행의 피해는 컸다. 커다란 박쥐가 열화편복인지 모르고 대처했다가 순식간에 일곱 명 정도가 당해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다시 세 명의 대원들이 동굴을 막기 위해서 남았다.
들어올 때 이십 명이 들어왔었는데 박쥐에게 한번 당한 것으로 절반이 줄었다.
그러나 동굴 속의 위험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디를 얼마나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박쥐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예민한 귓가로 마치 바닥을 쓰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화섭자(火攝子)는 몇 개나 남았나?"
"다섯 개 남았습니다."
동굴을 들어오기 전에 일인당 두 개씩 준비했던 화섭자를 박쥐떼와 싸우는 중에 거의 잃고 몇 개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암흑밖에 없는 이곳에서 무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불이다.
"불을 켜라. 앞에 무엇인가 있다."
"허억!"
불이 켜짐과 동시에 사진악 일행이 비명을 토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의 눈앞에 드러나는 광경. 거미였다. 그것도 박쥐와 비슷한 크기의 거미들이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에 새카맣게 붙어서 일행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있는 거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열 명의 부하를 잃었는데 아직도 괴물들의 공격은 끝나질 않았다. 저 거미들 말고도 얼마나 더 많은 괴물들이 존재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진악이 화섭자 하나를 저 깊숙한 곳까지 힘차게 던졌다.
불빛을 따라서 시선을 이동하던 일행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사진악이 내공으로 던진 화섭자가 떨어진 곳에서도 거미의 행렬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잘 들어라. 전원이 무공을 극성으로 전개하여 전방을 향해서 동시에 달린다."
"네! 군주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저 거미가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었고 뒤쪽에는 박쥐들이 길을 막고 있다. 오로지 뚫고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가는 길에 동료가 쓰러져도 그대로 두고 가야한다. 조그마한 멈칫거림이 자신의 목숨마저 가져가기 때문이다.
"준비해라. 가자!"
"패천(覇天) 제 삼공(三功) 무(無)!"
사진악과 천마군의 입에서 일제히 고함소리가 터지며 엄청난 기운이 전방으로 밀려 나갔다.
자신들의 무공을 펼친 직후 사진악을 비롯한 십 명의 천마군이 빛살 같은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누가 쓰러지고 누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지 살필 겨를도 없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거미들을 검으로 쳐내며 오직 앞으로만 전진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는지 거미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더니 앞에서 엄청난 열기가 자신들을 덮쳐왔다. 내공을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면 바로 타버릴 수 있는 그런 무서운 열기였다.
더 이상 거미들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거미의 숲에서 또다시 여섯이 당했다.
이제 남은 일행은 전부 다섯 명. 천마군에서 최고의 고수들만 엄선하여 이십 명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마물들의 공격에 의해서 열여섯이 희생된 것이다.
사진악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설사 돌아가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금껏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 또한 자살행위이질 않는가.
그리고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이곳까지 오면서 희생당했던 부하들의 죽음은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계속 전진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부하들의 희생을 생각해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부하들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천마맹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가자!"
이번에는 부하들의 근황에 대해서 묻지도 않는다. 어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강이었다. 마치 죽이 끓고 있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폭이 오십여 장은 되는 시뻘건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은 용암?"
육소천의 입에서 나온 경악스런 외침이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곳이 아무리 지하 깊은 곳이라 해도 용암이 흐를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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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
즐감
재미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ㅎ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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