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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초상
다산의 후반생
저자 차벽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유배지였던-다산초당이 있는-강진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그는 다산에 미친 사람으로 읽힌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토기와 달항아리에 심취해 전국을 돌며 사진 찍고, 수집하고 전시회도 열었다. 사진작가면서 역사기행문도 쓰는데 이책이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다산은 모두 잊고 새롭게 공부해 볼 생각을 하게 만든다. 책을 대하는 순간 내가 알고 있던 다산이라는 인물은 껍데기였다는 생각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유배되어 있던 18년 동안에 6백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전무후무한 기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우리 동방에서 이런 학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적이란 말은 맞지 않으며 다산의 피와 땀의 결과였다고 밖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공자가 도道를 실천하기 위해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다산 또한 출사出仕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후반생, 즉 유배지에서의 생활과 이후의 생활은 소외와 고뇌 속에 살았다. 그는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했을 뿐이다.’라고 한 작가의 말이 맞는 듯싶다.
*매천야록梅泉野錄 : 6권7책,필사본.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 즉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부터 황현(黃玹,1855~1910)이 자결할 때까지 한말 위정자의 비리·비행, 외세의 침략, 우리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실려 있다. 1945년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상하이에 망명해 있던 김택영에게 알려져, 김택영이〈한사계〉에 내용 일부를 인용함으로써 알려졌다.
1762년에 나서 1836년에 죽은 다산의 후반생은 1801년 유배된 이후의 삶을 말한다. 그 기간은 인고의 세월로 생활과 저작활동을 살펴본 저자는 “다산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의 원대한 꿈과 이상, 인간 다산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단지 내 눈높이로 내가 볼 수 있는 것만 보았음을 밝혀둔다.”(서문에서)고 했지만, 분명히 또 깊이 다산에 심취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800년 정조가 49세 나이로 죽자 11월 6일 아버지 사도세자 곁에 묻힌 사흘 뒤 사헌부 장령 이안묵(李安默,1756∼?)이 수원유수 서유린(徐有隣)형제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던 시파를 겨냥한 것으로 정조 16년 영남만인소(사도세자를 죽게 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한 상소)를 지지한 인물들을 공격하는 상소라는 점에서 정조 24년간의 치세를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해 겨울 정조와 함께 했던 남인과 노론시파들이 대거 유배되었는데 그 중에는 다산에게 도움을 주던 김교리 형제-김이재는 강진 고금도로, 김이교는 함경도 명천부(明川府)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801년(순조1) 2월 8일 새벽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집으로 급습한 의금부 금리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정조의 왕후 정순왕후와 노론벽파 일당이 국청을 연 목적은 잡혀온 이 둘이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목숨을 뺏는데 있었다.
노론벽파 일색인 재판관 일곱 명 중에는 다산의 해배(解配)를 끝까지 반대했던 영의정 서용보(徐龍輔, 1757∼1824)가 있었으니 다산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초 신유사옥 때 이미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등과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한 뒤였다. 이때 다산은 경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는데 ‘정약용만은 죽여야 한다’고 하던 반대파가 다시기회를 잡은 것은 황사영백서사건*이었다.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홍낙안과 사간원 헌납(獻納-정5품諫官)신구조가 상소를 올려 정약용, 정약전, 이치훈, 이학규, 신여권 등을 다시 심문해야 한다고 했다. 황사영사건의 배후라는 이유였다. 10월 27일 정약용은 장기에서, 강진 신지도로 유배가 있던 약용의 형 정약전은 서울로 끌려온 뒤, 11월 5일 다산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나주 우이도(신안군 흑산면)로 다시 오랏줄에 묶여 유배를 떠나야 했다.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 신자이며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이던 황사영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베이징에 와 있던 주교에게 보내려했던 청원서
다산은 강진에 18년간 유배되어 있었는데 처음 4년간은 동문 밖 매반가 (賣飯家)주막에서 채소밭을 가꾸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냈다. 이 때 주막집 주모와 아들의 도움을 받는다. 흔히 조선시대 세 가지 폐단으로 ‘평양기생’, ‘호서양반’, ‘전라도아전’을 꼽는데 주모 아들은 전라도 아전의 서객(書客-書記)으로 관찰력과 계산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다산의 대표작『목민심서』는 다산이 여러 해 동안 자료를 모아 해배되던 1818년 완성한 책으로 다산은 이 책에서 고을을 맡아 다스릴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자세와 치국안민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목민심서』는 48권 16책으로 부임, 율기, 봉공, 애민 등 총 12편으로,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뉘어 72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 속리(束吏-아전을 단속함)에는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은 스스로의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데 있다. 그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하더라도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다’로 시작하여 ‘아전들의 농간에는 대개 사史가 주모자가 되니, 아전의 농간을 막고자 한다면 그 사가 두려워하게 하고 아전의 농간을 들추어내려면 그 사를 잡아내야 할 것이다’로 끝맺는다.
사史란서기, 즉 서객을 말한다. 창고에 보관된 곡식을 속이고 전세(田稅)를 몰래 빼돌려 산속에 감추고 덤불 속에 숨겨도 그 수량을 아는 자는 오직 사뿐이니, 농간을 막으려면 그 사를 잡아내야 한다고 했다.「이전(吏典)」제1조는 서객이던 동문 매반가 주모 아들의 도움을 받아 쓴 것이다. 어쩌면 다산과 매반가의 인연은 필연적이었는지 모른다.
다산은 유배 온 다음 해인 1802년 초가을 그의 나이 마흔 하나 때부터 아전의 자식들 몇 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매반가 주모가 권해서이기도 했지만, 생계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무료함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동 중에는 심신이 미약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도 있었지만, 당시 열다섯이던 황상黃裳이라는 청년만은 달랐다. 열다섯이면 당시 장가갈 나이인데다 양반자제들과는 달리 아전의 자식들은 기회가 와야 공부할 수 있었고, 다산이 유배오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황상과 다산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천재적 재능을 살펴보자.
“선상님! 저처럼 무딘이도 배울 수 있당가요?
저에게는 세 가지 병폐가 있는디요. 첫 번째는 무디고요(鈍), 두 번째는 막혔고요(滯), 세 번째는 어근버근한 것이어라우(憂)”
이에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잘못이 있는데 너에게는 없다. 첫째는 기억하거나 외우는 것은 민첩하지만 그 폐단에 소흘함이고(병폐), 둘째는 옛 사람들의 학설을 설명하는 일과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는 일. 즉 저술著述은 왕성하지만 그 폐단은 지나침이고(가볍게 날림), 셋째는 깨닫고 해석함은 빠르지만 그 폐단은 허황함이다.(거칠다)
대체로 무디어도 구멍을 뚫으면 구멍은 넓게 커지고, 막혔어도 통하게 하면 그 흐름은 빨라지고, 어근버근해도(답답해도)꾸준히 문지르면 빛은 윤기가 나게 된다. 뚫어라 함은 무엇인가?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함이요. 통하게 하라 함은 무엇인가?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함이요. 꾸준히 문지르라 함은 무엇인가?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한다는 것이다.(三勤) 어떻게 하는 것이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한다는 것인가? 마음에 간직함이 확고해야 한다.(秉心確)”
다산의 이 가르침은 벽촌소년의 평생을 좌우했다. 그는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는 스승의 삼근계(三勤戒)와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하는 병심학(秉心確)을 자신의 문집에 남기면서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한다.
여자가 재색이 뛰어나면 박복하다던가? 다산이 유배되어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살던 표씨의 딸은 젊어서 과부가 되었다. 자식이 없는 것을 보면 시집가자마자 남편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표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박복하게 사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표씨의 딸은 가끔 동문 매반가 고모집에 와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음식도 만들었다. 음식솜씨가 뛰어났다는 소문도 있다.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자연스레 다산의 시중을 들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사람들이 중매했다는 설도 있다)
매반가에서 4년, 절간인 보은산방에서 2년을 보내면서 변함없이 다산의 자잘한 수발을 들어주니 서서히 마음이 기울어진 것일까. 거기에다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착하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까. 다산과 표씨의 딸은 이학래가를 거쳐 다산초당으로 옮기고 생활이 안정되자 함께 살게 된다. 강학과 저술로 바쁜 자신과 많은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표씨는 자신의 딸이 다산을 만나 외손녀 홍임紅任을 낳고 행복해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에 표씨는 다산의 외가인 해남 녹우당(綠雨堂)을 왕래하면서 다산이 부탁한 책을 빌려다주기도 하고 형 약전이 유배되어 있던 우이도(흑산도)까지 왕래하면서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다산이 외가 근처로 유배 온(강진과 해남은 인접해 있다)것은 학문적 보고寶庫 속으로 들어가 실학을 집대성하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다산의 학문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한강 정구(寒岡 鄭逑)-미수 허목(眉叟 許穆)*-성호 이익(星湖 李瀷)-녹암 권철신(鹿庵 權哲身)에게 이어졌으며,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자 다산의 외증조할아버지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가학을 잇는 녹우당에는 많은 서책이 서고에 있었으니 다산의 저술활동에 영향을 준 것이다.
*허목 : 1595(선조 28)∼1682(숙종 8).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 상중에『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고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한 달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창원 천주산 달천계곡에 송덕비가 있다.
다산이 유배 오게 된 경위와 유배지에서 저술활동을 보았는데 그러면 유배 오기 전 다산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1794년 다산의 나이 33세 때 사간司諫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는 등 1년에 3품계나 오를 때도 있었다.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 설계를 맡겼는가 하며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여 화성행차에 시위侍衛해 따르도록 했다. 또한 다산의 글 솜씨에 탄복해 연회 때마다 정조 자신이 지은 시에 답시答詩를 짓게 했으며 밤중에 칠언배율七言排律 100구를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정조는 다산의 시를 칭찬하며 ‘내가 앞으로 약용에게 관각(館閣-홍문관, 예문관을 통틀어 이름)의 일을 맡기려고 먼저 그 뜻을 보인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 찬란한 젊음이었다 싶다.
차에 관한한 다성(茶聖)으로 알려진 초의선사와 다산이라고 차를 호에 쓴 다산의 관계는 어땠을까. 다산초당 근처에는 초당보다 더 오래된 백련사白蓮社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 혜장(惠藏)이란 승려가 있었는데 혜장은 다산을 스승 겸 글벗으로 예우하며 유배의 아픔을 달래주고 말이 통하는 술친구가 되기도 했고, 차를 제공해 주어 다산이 맑은 정신으로 집필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는데 어느 날 초의를 데리고 찾아왔다. 다산이 거처를 초당으로 옮긴지 2년이 지나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였다.
혜장이 말했다. “초의가 선상님께 인사허겄다고 혀서 개우 몸을 추슬러 같이 왔습니다요. 인자 지가 육신의 껍질을 벗으라나 봅니다이.”
“허허, 우리들은 기껏 그 껍질로 만났는데, 껍질을 벗어 버린다면 어쩌라고”
이후 초의는 다산의 제자가 되었고, 1811년 농사일이 한창일 때 혜장의 소식이 다산에게 전해졌다. 혜장이 대둔사 북암에서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무정한 아암(兒庵, 다산이 지어준 혜장의 호-혜장은 법명) 부질없이, 부질없이 해 샀더니 끝내 가고 말았구나!” 다산의 읊조림이 들리는 듯.
빛나던 스님
아침에 피고는 저녁에 시들었네.
훨훨 날던 금시조(金翅鳥)*
앉자말자 날아가 버렸네.
*금시조: 인도전설 속에 나오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새, 아암을 상징함
슬프다 이 분의 아담하고 깨끗함이여
글로는 표현해서 전해줄 길이 없어라.
그대와 함께 연구해 나간다면
오묘한 진리, 깊은 이치도 열어젖힐 수 있었으리.
고요한 밤에 낚싯대를 거두어 들면
달빛만 뱃전에 가득해라.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세월에서 그대 입 다무니
산속 숲마저도 적막하기만 하다오.
그 이름은 나이 먹은 어린애인데
하늘이 수명만은 인색했네.
이름은 중이지만 행실은 유학자니
군자들이 더욱 애달파하네.
-아암장공탑명 중, 아암의 부도는 대둔사에 있다.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이 다산을 만난 건 1809년경. 나이 스물네 살 때로 혜장을 통해서였다. 초의는 다산을 무척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대둔사 선배 도반인 연담유일과 혜장으로부터 비린내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초의는 다산으로부터 맞춤형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 스승에게 드리는 시 한 수를 섰는데, 시는 당시의 시대상과 다산의 학식과 인품, 초의가 다산을 생각하는 것이 들어 있다. 다산도 둘째 아들 학유와 나이가 같은 초의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아꼈다고 한다. 초의 시를 보자.
부자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재물을 주고
어진 이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말(言)을 준다하는데,
지금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저는 마땅히 드릴 것이 없으니,
먼저 공경하게 누추한 마음 펼쳐
은자隱者의 책상 앞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참다운 풍교風敎 멀리 가 버리고
큰 거짓이 이에 일어나니,
마을마다 선비는 가득하지만
천리에 현인賢人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미 마을마다 욕심이 차 있으니
문명이 부족한 나라에 당연한 이치입니다.
저는 이런 시대에 태어나
자질 또한 이러하니 감당 못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도리를 행하려 해도
누구에게 물어볼 인연이 없습니다.
현인과 군자의 방 찾아다녀 보아도
모두 비린내 나는 생선 가게였고,
남쪽에 있는 온갖 성을 다 돌아다녔지만
청산의 봄을 아홉 번이나 헛되이 보냈습니다.
어찌 바닷가라 하겠습니까.
하늘이 맹자 어머니 같은 이웃을 내려 주셨습니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며,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시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이셨습니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하셨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셨습니다.
군자는 때를 만남을 귀히 여기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도道가 커서 원래 용납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서도 오히려 온화하고 평안하셨습니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이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중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혹 수레가 떠날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 두렵니다.
-초의 ‘탁옹(다산)선생에게 드리다’(1809년)
다산의 친구 중에 이학규*라는 유학자가 있다. 그는 다산보다 6년이나 더 긴 24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유배지 김해에서 서민들의 삶을 살피고 고뇌한 시를 썼는데 재작년인가 김해박물관에서 있은「가야학아카데미」에서 그의 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학규는 말년에 양주 마재 다산의 집으로 두 번이나 다산을 찾아왔다. 이에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가을에 이학규가 찾아왔다. 매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그라 여유 있는 다산에게 신세를 지기 위해 왔는지도 모른다. 생활에 여유가 없으면 즐거움도 갖기 어렵다.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아주 특출한 사람이었을 텐데 이학규는 그렇게까지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흉년에 두 번이나 찾아왔다면 다산에게 따뜻함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차갑게 외면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 줄 이가 그리웠을 것이다.”
*이학규(李學逵,1770∼1835): 유복자로 외가에서 태어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이가환(李家煥)등 성호 이익 가문의 실학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일찍이 남인의 청년학사로 주목을 받았으며, 26세에 발탁되어〈규장전운 奎章全韻〉편찬에 참여했고, 왕명(정조)으로 원자궁에 내릴 책을 교정하여 바쳤으며〈무미구곡도가 武美九曲櫂歌〉를 지어 올리는 등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1801년(순조 1)신유옥사 때 천주교도로 몰려 24년 동안 김해 바닷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824년 아들의 청으로 풀려났으나 영남을 두루 돌다가 충주 근처에서 불우한 생을 마쳤다. 유배기간 중 오직 문필에만 전념했는데, 특히 정약용과 자주 교류하면서 그의 현실주의적 문학세계에 공감했고, 유배지 민중들의 생활양상에 대한 작품을 많이 썼다.
“그대나 나나 내년이면 영감이라 할 것이니
미공(眉公)의 팔십에 비하면 꼭 절반을 산 셈이군.
골짝 찾아 방랑하는 그 신세도 안됐지만
뭐가 괴로워 단속 받게 새장으로 들어가리.
산골에 비가 내려 밭두둑에 넘칠 때
써레질을 하노라면 끌리는 물소리 찰찰하지.
석류꽃이 터지려면 입술이 두툼해지고
생선구이 반찬이면 이 빠져도 걱정 없어.
일부러 취하려고 진창 되게 마시고서
기고만장 토한 기염 무지개가 될 무렵에.
풍진세상 내려다보고 죽은 고목들 다 치워 버리면
방황하는 물건 없이 다 제자리 잡으련만.”
이 시는 다산보다 한 해 뒤에 병과에 합격해 승정원 주서를 시작으로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으로 다산과 같이 승승장구했으나 정조가 죽자 내리막길을 걸어 결국 귀향한 뒤 은둔해 버린 친구이자 외척이던 윤지눌(尹指訥)에게 다산이 나이 서른아홉에 주었던시로 “풍진세상 내려다보고 죽은 고목들 다 치워 버리면 방황하는 물건 없이 다 제자리 잡으련만...”
이라고 하였는데 때를 기다리자는 말인지, 포부를 접고 사는 것도 괜찮다고 위로한 말인지.
2주 동안『다산의 후반생』이책을 읽었다. 다산은 친구가 많았고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부인 홍씨한테 술을 끊어라는 핍박도 더러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홍씨의 부지런함 덕에 그래도 가족과 먹고 살 수 있었던 것 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도 그랬지만 누에를 길러 아이들을 키우고 해배된 뒤에는 온 가족이 달라붙어 인삼을 재배해 그래도 제법 넉넉히 먹고 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강진에서 만난 표씨와 홍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인 홍씨는 다산이 춘천에 다녀오는 사이 이들을 혼자된 약전 형님 집으로 보낸 뒤 형님이 두 모녀를 설득하고 얼러서 강진으로 내려 보냈다. 나중에 다산이 이를 알고 불같이 화를 냈으나 어쩔 수 없었으리라. 다산은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했을 것이나 형수님들이 관여한 일이라 크게 나무라지도 못했을 것이다. 홍씨는 다산의 눈치를 보면서도 열심히 누에를 기르고 다산의 한숨을 하늘에 묻게 했다. 홍임 모녀의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져 갔을 것이다.
1836년 2월 19일 저녁, 다산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촛불이 꺼질 것 같은 기세였다. 홍씨는 사흘 후로 다가온 회혼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빴고 회혼식을 며칠 앞두고 다산이 자신을 떠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60년을 함께한 부인과 잠시 헤어짐이 섭섭했을까. 붓을 들어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시를 하나 썼다. 그리고 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흘러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주군의 은혜겠지.
오늘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눠졌다 다시 합치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 회근시(回巹詩) 1836년 -
*하피첩(霞帔帖): 부인 홍씨가 시집 올 때 가져 왔던 6폭 치마를 강진에 유배된 남편에게 보냈고 치마 2폭에 시를 적어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리개를 만들어 딸에게 주었다고 함
2018.11.2.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