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장 십이연기설 - 환멸문과 팔정도
지난 시간에는 삼세양중인과설이 아함경의 식증장설(識增長說)과 일치하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십이연기의 환멸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이연기는 유전문과 환멸문을 함께 살펴보아야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십이연기의 유전문만이 아니라 환멸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은 사성제라고 하는 불교의 진리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유전문은 고(苦) 성제와 집(集) 성제를 이루고 환멸문은 멸 성제와 도성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전문은 전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중생들이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모습을 밝힌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설은 그 모습을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세양중인과설이 삼세와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여 불교의 무아설에 위배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무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자아와 세계가 허구적으로 조작되고 있는 것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보여주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설은 유전문의 해석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환멸문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삼세양중인과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말한 ‘무아’를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은 이런 생각을 단멸론이라 하여 상주론과 함께 비판합니다.
‘잡아함 961경’에서 부처님은 ‘자아’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외도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듣지 못하고 외도가 돌아가자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아난이 부처님에게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그는 전부터 가져 온 사견을 키웠을 것이다. 내가 만약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그가 어찌 이전의 어리석은 미혹을 다시 키워, 전에는 생각한다고 생각했던 ‘자아’가 이제는 단멸한단 말인가라고 의심하지 않으리오.
전부터 지니고 있던 ‘자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상견이고, 이제부터 갖게 되는 ‘단멸한다’는 생각은 단견이다. 여래는 이변(二邊)을 떠나 중도에서 법을 설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단견이 부처님이 말하는 ‘무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무아’와 ‘참된 자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시설된 것이지 단견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참된 자아’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환멸문이 곧 참된 자아의 삶입니다.
환멸문의 이해를 위해서는 십이연기의 연관과 순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십이연기를 사유하는 방법에는 노사에서 무명까지 거꾸로 사유하는 법과, 무명에서 노사까지 순서대로 사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유를 역관과 순관이라고 합니다. 역관과 순관은 단순히 십이연기의 지분을 앞뒤로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역관을 통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깨달았고 순관을 통해 유전문과 환멸문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고, 순관을 통해 그 진리를 몸소 체험하여 증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십이연기의 역관과 순관이며, 유전문과 환멸문입니다.
따라서 십이연기는 단순한 이해와 대상이 아니라 실천하여 체험해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가 십이연기의 역관과 순관을 알고, 유전문과 환멸문을 알아도 생사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은,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과 같은 사유와 실천을 하지 않으면 십이연기라는 진리도 한낱 공허한 이론에 머물게 될 뿐이지요.
십이연기설은 십이지를 순서대로 외워서 논리적으로 사유하여 알게되는 교리가 아닙니다.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른 것은 십이연기설이 기초하고 있는 실천적 교리를 외면한 채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사변에 의지하여 십이연기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개념에 의한 사유를 통해 인식한 것이 아니라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하여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단순히 무명에서 생사가 연기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차제정이라는 구체적인 수행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멸문은 단순히 무명이 멸하면 생사가 멸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차제정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십이연기의 환멸문이 내포하고 있는 생사 멸진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것은 역관, 순관과 함께 사성제를 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전문의 역관은 고성제를 의미하고 순관은 집성제를 의미하여 환멸문의 순관은 멸성제를 의미하고, 역관은 도성제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늙고 죽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원인을 사유해 갔습니다. 그 결과 무명이라는 괴로움의 뿌리에 도달합니다. 부처님은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유전문의 역관이며 고성제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무명의 상태에서 어떻게 늙고 죽는 괴로움이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무명의 상태에서 삶을 통해 형성된 허망한 생각들이 욕탐에 의해 모여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조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유전문의 순관이며 집성제입니다.
부처님은 늙고 죽는다는 것이 허망한 생각이라면 이 허망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것을 없애야 하는지를 차례로 사유하여 무명을 없애면 더 이상 없앨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환멸문의 역관이며 멸성제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명을 없애니 차례로 십이지가 멸하여 늙어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환멸문의 순관이며 도성제입니다.
이와같이 사성제는 연기설의 바탕이 되는 실천적 교리입니다. 연기설이라는 이론적 교리는 사성제라는 실천적 교리의 실천을 통해 공허한 이론이 아닌 진리로서 체험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자신의 깨달음을 소위 초전법륜경으로 불리는 ‘잡아함 379경’에서 다섯 비구에게 맨 처음 자신의 깨달음을 술회하면서 과거에 누구에게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성제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이해하여 실천한 결과 안목이 생기고, 알게되고, 지혜가 생겨, 마음이 밝아져 깨달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라는 진리를 사성제의 실천을 통해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십이연기의 환멸문은 사성제의 도성제인 팔정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을 비교해보면 팔정도는 십이연기의 환멸문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무명(無明)은 정견에 의해서 없어집니다. 따라서 무명이 멸함은 정견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견이 생기면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할 것입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정사유, 정어, 정업입니다. 따라서 무명에서 연기한 신.구.의 삼행은 정견에서 비롯된 정행, 즉 정사유. 정어. 정업에 의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식과 명색은 분별심에 의해 새로운 명색이 나타나 식이 증장하는 중생들의 삶의 구조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삶의 구조는 바른 삶을 열심히 실천하는 가운데 사라집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정명과 정정진입니다. 따라서 식과 명색의 멸은 정명과 정정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정념은 사념처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념처는 청정경의 고찰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입처에서 유,생,노사에 이르는 소위 육촉연기의 환멸문입니다.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여실하게 관찰함으로써 육입, 촉, 수, 애, 취, 유를 멸하는 수행법이 사념처인 것입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육입에서 유까지는 정념을 통해서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정도의 정정은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이 사라진 멸진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생노사는 정정의 성취를 통해 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십이연기의 환멸문은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무명이 멸하면 생, 노사가 멸한다고 알고 있어도 정견으로 부지런히 살아가는 팔정도의 실천이 없으면 무명이 멸하지도 않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팔정도의 실천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팔정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명이 무엇이고 정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잡아함 251경과 256경’에서는 무상한 육입처와 오온이 무상(無常)험울 여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잡아함 57경’에서는 오온을 ‘자아’라고 보는 것이 행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입처와 오온이 허망한 망념임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이러한 무명에서 육입처나 오온을 자아로 취착하여 허구적으로 ‘자아’를 조작하는 것이 행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중생은 이렇게 무명에서 자아와 세계의 존재를 허구적으로 조작해 놓고, 그 존재를 통해 과거,현재, 미래라는 시간도 존재화 시켜서 생사의 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팔정도의 정견은 이렇게 존재화된 것들의 실상이 무명에 뒤덮여 살아가는 삶을 통해 연기하는 허망한 망념임을 여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정견에 의해서 본다면 존재와 시간은 연기한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것을 공이라고 했습니다.
연기법을 아는 정견에서 보면, 전시간에 언급했듯이 모든 존재는 연기한 것이므로 공이고 존재가 공이기 때문에 존재로 인해 생긴 시간도 공입니다. 팔정도는 공의 세계에서 무아로 살아가는 진실된 삶의 모습이며 이것이 환멸문입니다. 용수보살은 ‘중론’ 관시품에서 이와 같은 공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시간 속에(若過去時中)
미래와 현재가 들어 있지 않다면(無未來現在)
미래와 현재의 시간이( 未來現在時)
어떻게 과거를 원인으로 한다고 할 수 있으리.(云何因過去)
과거의 시간이 원인이 아니라면,(不因過去時)
미래의 시간은 있을 수 없고(則無未來時)
현재의 시간도 있을 수 없으므로(亦無現在時)
그러므로 미래와 현재라는 두 시간은 있을 수 없다.(是故無二時)
시간은 머물 수 없고(時住不可得)
시간은 갈 수도 없다(時去亦*得)
시간은 있다고 할 수 없다면(時若不可得)
어떻게 시간의 모습(과거. 현재. 미래)을 이야기 할 수 있으리(云何說時相)
존재로 인해서 시간은 존재하나니(因物故有時)
존재를 떠나서 어떻게 시간이 존재할 수 있으리.(離物何有時)
존재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데(物尙無所有)
하물며 시간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리(何況當有時)
존재도 시간도 분별되지 않는 공의 세계에서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무분별의 진실된 삶이 실현되는 무아의 삶, 이것이 바로 환멸문입니다.
첫댓글 ()()()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