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문화재자료 제143호 (진도군) 명 칭 : 진도읍성(珍島邑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87.01.15 소 재 지 : 전남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69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진도군 관 리 자 : 진도군
진도읍성
정의] 진도의 역사와 진도읍성
[내용] 1350년 그들 해적선단이 남해안에 나타나 노략질을 했으나 몽고의 속국이 되어 군대를 양성할 수 없었던 이 나라는 왕도인 개성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를 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 조정에서는 산 속에 성을 쌓고 산성에 숨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 해 진도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영암 시종(始終)으로 피난을 갔고 군청도 피난지에서 집무했다.
이처럼 무력했던 고려왕실이 왜구의 침략을 받기 시작한 42년만에 왕권을 무장이었던 이성계에게 넘겨주고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왜구의 노략질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1409년(태종 9년) 영암 피난생활 59년만에 진도사람들은 진도 가까운 해남 삼산면 원진 주변으로 옮겨오고 그대신 진도 고을은 해남에 합해 해진군(海珍郡)이 됐다.
해남 피난생활 28년만인 1437년 비로소 진도군의 독립이 허락되고 고군면 고성에 군청의 문을 열었다. 진도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난지 87년만의 일이니 이미 3대가 흘러 진도군에는 영암과 해남사람들이 몰려와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진도에 살고 있는 입도조(入島祖)가 17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이같은 역사 때문이요 진도의 입도조들의 고향이 영암이나 해남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고성은 이미 후백제때 왕건에 점령당한 바 있는 옛 진도군의 고을터로 폐읍의 역사가 있는 땅인데다 진도의 중심이 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새읍터를 정하자는 소리가 높았다.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 철마산 밑 현 읍으로 읍성의 둘레는 3,400자, 높이는 11자에 3문을 두었다. 남문은 층옥으로 꾸며 망해루(望海樓)라 했다. 이때 읍호를 옥주(沃州)라 하고 객관(客館)의 이름을 옥주관이라 했다.
176년께 만든 여지도서는 진도읍성은 옹성이 14개요, 치첩이 58개이며 성안 연못은 깊이가 5자요 둘레가 4,500자라고 적고 있다. 당시 군수는 무관으로 종4품관 이였으며 그 밑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31명, 사령 18명, 지인 15명이 근무했으며 인구는 해남 삼촌면, 영암 시종면을 합해 5,896가구 19,740명이었다. 1860년께 진도군의 인구는 6,330호 23,330명으로 전남에서 6위의 군세였다. 1979년 드디어 진도면이 읍이 됐다. 그러나 450여년의 전통을 지닌 진도읍의 옛 모습은 진도공원 뒷켠과 진도중학 뒤뜰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진도읍성은 조선 전기 진도군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은 성.
[건립경위]
1437년 해진군(海珍郡)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진도군은 3년간 고읍성을 치소로 삼고 있었다. 진도읍성은 1440년(세종 22) 진도고읍성에서 현재의 진도읍으로 진도군의 터전을 옮기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소(읍성)의 입지 조건으로는 바다와 가까운 요해지로서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히 하고 방어하기에 편리하고 쉬운 곳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진도고읍성은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과 가까이 있는 편리함을 제외하면 진도 전 지역을 관할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진도의 중앙부인 현재의 진도읍으로 치소를 옮김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진도군수의 파견은 이로부터 5개월 20여일 후인 1440년 8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진도읍성은 1440년경에는 축성을 시작하여 1446년에는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진도읍성은 진도읍 성내리 해발 15~18m의 평탄 대지와 군강공원(57.5m)의 야산을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 장축의 사다리꼴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지적도에 의한 성벽의 총 복원 길이는 외벽을 기준하면 약 1,589m로서 북벽 465m, 남벽 432m, 동벽 387m, 서벽 305m이다.
체성은 대체로 동벽과 서벽은 직선에 가깝고, 남벽과 북벽은 지형에 따라 약간 곡선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문은 동·서·남문지 등 3개소를 두었고, 이들 성문에는 성곽의 출입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설치하였다.
측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방어 시설의 일종인 치는 지적도상에서 모두 16개가 확인되나 현존하는 것은 5개소뿐이다. 치는 성벽의 길이가 긴 남벽과 북벽에 각각 5개, 성벽이 짧은 동벽에 3개, 서벽에 2개를 설치하였다.
성내의 지형은 동북쪽인 군강공원 정상부가 57.5m로 가장 높고, 성 북쪽 지역은 15~18.3m 정도이며, 성 남쪽 지역이 가장 낮다. 이에 따라 성내의 물이 남쪽 성벽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남벽 중간 부분에는 1개소의 수구를 설치하였다. 성벽의 바깥 면에는 해자를 만들었다. 동벽의 1호 치와 북벽의 2호 치 사이에서 인공 해자가 확인된다. 남벽 2리 지점에 위치한 남천과 읍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북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서벽을 경유, 남천으로 흘러드는 순천내골에서 자연 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장대는 동문 밖 5리 지점에 위치한 동산에 두었다. 따라서 진도읍성은 체성·옹성·치·여장·해자·장대 등을 모두 갖춘 조선 초기의 읍성으로 14~15세기 우리나라 읍성 축조 방법에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일제강점기에 성터가 헐려 길이 되었다. 1987년 1월 15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군강공원 일부와 진도군청 뒤뜰 성벽 일부가 남아 있고, 문화재 지정 후 150m 가량 복원했다
먼저
현재 다음지도를 활용하여 진도읍성의 지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많은 읍성을 쌓지만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읍성은 그리 많지 않다.
첫댓글 그랑께라
본섬얼 내뿔고 떠돌이 생활 87년만에
둘온 설군유공자덜이 폐허 된 옛 고성을 버리고
새로 본섬 중심부에 터 잡은 진도읍성은
실로 감개 무량한 역사적 유적지 겄라라?
핵교서 성대로 넘어댕기고 체육시간에 군강공원까장
담박질 샵하든 때가 그립구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