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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60.10]
3.1혁명 100주년 특집
“위력威力의 시대가 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도래 하도다”
-의암성사의 생애(9)
편집실
포덕59년(1918) 6월, 성사께서
금강산 경치를 두루 구경하고
시 한수를 남겨 말씀하셨다.
億萬山中金剛秀
억만 산중에 금강이 빼어나고,
十兆人間天士高
십조 인간에 한울선비가 제일 높다.
8월 24일 하오 성사는 직접
두목과 각 군 교구장을 재동 집으로 오게 하여,
“바로 지금은 사람과 한울이 열리다”는
제목으로 설법하셨다.
12월에 성사는 49일 기도식을 행하게 하였다.
이때 서울,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의 9곳으로 대표기도처를 정하고
1곳에 4명씩 보내 기도식을 지도하게 하였다.
기도기간은
포덕 60년(1919)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로,
3.1만세운동을 앞둔 천도교단의 전국적 기도였다.
이 49일 수련은 독립의지를 강화하고
그 신념을 통해 목숨을 걸게 하려는 방안이었음을
의암성사는 재판과정에서 분명히 밝혔다.
문: 천도교는 본년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실행한 일이 있는가.
성사: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그 일을 각 교구에 문서로 배포 전달하였는가,
교구장을 모아서 시달하였는가.
성사: 그것은 교주가 문서로 발표하였다.
문: 그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성사: 그렇다.
천도교단 내에서의 3.1운동의 준비
- 천도구국단, 무오독립시위
천도교단 내에서는
묵일 이종일(1858~1925) 등이 보성사 등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모으고
민중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종일은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출신으로
1873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82년 수신사 박영효를 따라
일본의 개화문명을 접하고
우리도 일본이 발전하였던 방법의 배경을 익혀
즉각 적용시켜야 세계제국 앞에
낙후되지 않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1898년 8월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10년간 사장을 역임하였다.
이 신문은 여성과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애국계몽지 역할을 하였다.
이 무렵 이종일은 대한제국민력회,
대한협회 등을 조직하거나 간여하며
민권수호운동에 주력했다.
이종일은
1898년경부터 의암성사를 만나기 시작하였고,
1905년 12월
부여사람 최학래를 통해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1910년 8월
천도교회월보 창간에 참여하였고
보성사 사장도 역임하였다.
묵암 이종일 생가.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이종일의 생가는 1986년 복원되었고
1990년 12월 충남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생가 가까이에 기념관과 동상이 있다.
8월31일 선생의 환원일에
옥파이종일선생추모사업회는
매년 추모제향을 개최한다.
1911년 이종일은
보성사를 중심으로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전개하고
거족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1912년 7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국민집회의 취지문·건의문·행동강령을
직접 기초하였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이종일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1912년 10월
비밀결사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결성하고,
그 본부를 보성사에 두었다.
본부의 총재는
손병희, 회장 이종일, 부회장 김홍규였고,
권동진, 오세창, 이종훈 등이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장효근·신영구·임예환·박준승 등이 참여하였다.
회원 100여 명을 거느린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수차 강연회를 개최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이종일은 장차 서간도에 설립된
부민단과 같은 독립운동기지건설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조직한 흥사단과 같은
민족운동단체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1914년 8월 31일 이종일은
보성사 내에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비밀결사로
천도구국단을 조직하고,
갑오(1894), 갑진(1904)에 이은
삼갑(三甲)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뒤,
8월 23일 일본이 대독선전포고를 하는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독립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는 의암성사였고,
단장은 이종일, 부단장에 김홍규,
총무는 장효근, 섭외에 신영구,
행동대장에 박영신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보성사 사원들도 깊이 간여하였다.
그 본부는 보성사에 두었고,
회원은 약 50명이었다.
천도구국단은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가 곧 패전하리라 판단하고,
그 경우에 대비하여 시국선언문을 마련해 두었다.
천도구국단은 1916년 2월
국제정세를 의논한 뒤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이종일은 남정철, 이종훈은 이상재,
김홍규는 한규설, 홍병기는 박영효,
신영구는 윤용구, 장효근은 김윤식을 찾아가
대중동원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만이 “천도교 측에서 나선다면
나는 기독교도들을 동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뿐 모두 거절하였다.
천도구국단은 민중봉기를 위해
보성사의 비밀창고에
장총과 실탄을 구비하여 두었지만,
이상재를 제외한 기독교 측의 참여 거부로
민중봉기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되자,
이종일과 장효근은
천도교도만의 단독봉기를 계획하였다.
1916년 11월 성사를 찾아가
민중봉기에 앞장 설 것을 요청하였으나
확답을 얻지 못하였다.
이후 이종일은
1917년 초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천명하고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5월 15일 의암성사를 찾아가
민중봉기계획을 설명한다.
이때 처음으로 의암성사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성사는 “자금지원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앞장 설 것도 다짐하고,
권동진·최린·오세창·이종훈 등과 타협할 것”을
처음으로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천도구국단은
권동진·최린·오세창·이종훈 등과
연합적인 민중운동을 협의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를 계기로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체코, 유고, 폴란드 등도
잇따라 민족자주를 외치고 나섰다.
당시 일본 내의 쌀소동이 폭동화되고 있었고,
일제는 한국에 있는 쌀을 일본으로 이입하였다.
그로 인해 1917년 4월
1석당 15원대에 불과하던 쌀값이
1918년 30원대, 1919년 2월에는 40원대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1918년 8월 28일 종로소학교의 쌀 판매소에서는
저렴한 쌀을 구하지 못한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불만을 대외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쌀값 추세. 올해 3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기록.
또한 무오(1918)년 독감이라 불렸던 스페인 독감은
인류 역사상 단기간 내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염병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1918년 9월경 첫 발병자가 발견되고
1919년 1월까지 극성을 이루어
740만 명이 감염되었고 그중 14만 명이 죽었다.
이 기간에 각 학교는 휴교하고 관청도 문을 닫았고
사람이 없어
추수하지 못한 논이 절반이 넘었다고 한다.
의암성사를 비롯해
권동진, 이종훈, 오세창, 최린, 이종린 등
천도교 지도부는 1918년 5월 5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3대 원칙(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정하고,
9월 9일 소위 '무오(戊午)시위계획'을 세웠다.
독립선언문 준비가 늦어지고
11월 경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 등 연합국의 승리가 확정되어 시위는 주춤하였다.
3.1독립운동의 전개
1919년 1월에
상해의 신한청년단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만주 갈림에서는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이 중심이 되어
39명의 민족 지도자가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최팔용 등 유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동경에서 2·8독립 선언서를 발표한다.
본격적인 민중봉기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오독립선언서 / 2.8선언학생들
천도교단은 경술년(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의암성사를 중심으로 10년 동안 힘을 기르면서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준비를 하였다.
①교단 안에
민주적인 의사원(議事院) 제도를 새로 두고
지방 대표를 서울에 상주케 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②우이동에 봉황각 수도원을 설립하여
지방대표 약 500명을 뽑아 7차에 걸쳐 수련을 실시,
독립정신을 기르게 하고
이들이 지방에서 독립운동 거사에 주동이 되게 하였다.
③비밀히 독립운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 신축기금의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토록 하였다.
④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특별기도를 봉행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전국 교구에 등사기를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방침을 세웠다.
주목할 것은 천도교중앙대교당의 건립이다.
의암성사는
독립운동의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직감하고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대교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포덕59년(1918) 4월 4일
건축헌금을 교호 당 10원씩 납부하도록 한다.
100만여 원이라는 거금이 모금되었다.
1918년 가을 종로 경운동에 교당건축을 시작하여
1921년 2월 완공하였다.
대교당 건축비 27만여 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성금이 3.1운동과
독립운동 군자금에 사용되었다.
3.1거사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천원,
김규식의 파리 파견 경비 3만 원 등
모두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자금조달은 3.1운동 과정에서
천도교의 빼놓을 수 없는 공로였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정상들이 모여
대독 강화조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접한 성사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을 불러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라는 3대 원칙을 확정한다.
때마침 고종이 사망했고
왜놈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
민심을 더욱 충동했고
안팎으로 절호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민족대표로 참가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교 7인, 감리교 9인),
불교 2인 등으로 구성됐다. 전부 종교인들이었다.
총독부의 무단정치 하에서
웬만한 민족단체는 전부 해산 당했고
그나마 국내에 남은 조직적인 세력은
종교단체뿐이었다.
민족대표가 선정되고 3월 1일 오후 1시, 성사는
측근들과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예정대로 독립선언식이 열렸고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위가 시작되자
국상을 치르려 올라온
유림들과 상인, 학생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만세를 불렀다.
독립선언서의 외침은
천도교인들과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아아 신천지가 눈앞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도래 하도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흔쾌한 부활의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가자.”
이 날 평양, 진남포, 선천, 의주, 안주, 원산
그리고 수원, 고양 등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그리고 전국 곳곳으로 파급되었다.
전국 어디든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학생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고 상인, 농민
그리고 기생과 백정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비폭력 평화시위가 기본을 이루었으나
총칼에 맞서 주재소 파괴와 방화,
관공서와 친일파 주택을
습격 파괴 방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외국 동포들에게 전해지자
만주의 서간도와 북간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연해주와 미국, 멕시코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신한민보= *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에서는
손병희 선생을 대통령에, 박영효를 부통령에,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임명한 후
각국 영사관에 통보하였고,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혈전 결의를 선포하였다.
이어서 상해와 한성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결성되어
이 세단체가 통합을 논의하게 된다.
3.1운동이 전개되자 민족지도자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헌법은 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지향해
공화제를 채택했고 3.1정신의 계승을 분명히 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여 왕조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를 선포하였다.
임시정부의 내각과 의정원에 참여한 인사는
좌우익이 골고루 참여해
민족적 역량을 총 결집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그 법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3.1혁명 100주년 기념식
기미년 3.1운동은
의암성사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할 만큼,
“인격, 신앙심, 리더십, 인력동원과 자금지원에서
의암성사는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는
너무도 적절하였다.
의암성사와 천도교는 3.1운동을 기획하고
사람을 엮어내고 자금을 대는 등
3.1운동의 기획·연출자였다.
지하독립신문의 발행
천도교는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영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지하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니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3.1독립운동의 취지와 운동의 전개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암상사와 상의하여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기로 하고
보성학교 교장인 윤익선을 발행인으로 정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
‘천도교회월보’ 발행인 이종린으로 하여금
독립신문의 창간호 원고를 집필토록 하여
보성사에서 발행하도록 했다.
이에 보성사의 김홍규 등은 3월 1일 오전에
독립신문 1만 5천 부를 인쇄하여 당일에 배부하였다.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관훈동 서적조합에서
독립신문 제2호, 제3호, 제4호까지 발행하였으나
역시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조선독립신문의 내용을 보면,
제1호는 주로 민족대표들의 거사에 임하는
순국 결사의 결의를 담고 있다.
제2호는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관련 기사와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였다.
특히 가정부(假政府), 즉 임시정부의
조직계획을 예고하는 기사가 주목을 끈다.
제3호는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상황을 계속 보도하고 있으며,
제4호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던 문서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후 조선독립신문은 장종건의 주도 아래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계속 비밀리에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일본의 대응
일제는 시위 첫날부터
헌병과 경찰, 소방대 뿐만 아니라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나섰습니다.
선천과 진남포에서는 발포가 있었고,
평양에서는 총검과 쇠갈쿠리가 등장하여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맞서
200여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여
7천5백여 명이 학살되고
4만5천여 명의 수감자,
1만5천여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6월까지 끈질기게 만세운동은 이어졌다.
3·1운동은
우리 역사의 방향을 크게 바꾼 일대사건이었다.
민족운동의 주체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분화되었고
새로운 계층(청년, 여성, 소년)·계급(노동자·농민)이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3·1운동은
민족운동 세력과 친일파의
분화가 본격화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일본정부와 총독부 수뇌부, 관료들은
각자 입장에서 하세가와 총독의 실정을 비난하고
퇴진을 당연시했지만 3·1운동으로 물러남으로써
총독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명실 공히
조선인의 “대승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사임을 지연시키고, 이른바 ‘문화정치’로
통치술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무단통치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제는 자치운동 등
정치세력화의 꿈을 갖고 있던 친일파를 획책하여
교활한 식민통치를 지속하였다.
참고한 자료
『의암손병희선생전기』
『천도교약사』
『3.1혁명, 그 진실을 밝힌다』(이현희)
『3.1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정운현)
『의암 손병희 평전』(김삼웅)
「한국사연구회,
3.1운동은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나」
(3.1운동100주년기념학술심포지엄((2018.12.7.)
「근현대사기념관,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주년 심포지엄),(2017.6.1.)